소갈병
-윤재철
이제는 고흐가 싫다
한때는 그리도 사랑했는데
이제는 노랗게 불타는
해바라기가 싫다
비틀린 채 타오르는
측백나무도 싫고
그놈의 붉은 수염이 싫다
불이 쌓여 생긴 병일까
갈수록 목마름은 더해가고
물을 찾고
물을 들이키며
이제는 고흐가 싫다
그놈의 붉은 수염이 싫다
평생을 자신에게 성실했던 자여
"이제는 고흐가 싫다"고 합니다. 왜 싫다고 합니까? 목이 말라서 물이 자꾸 먹히는 병(소갈병消渴病)으로 하여 싫다고 합니다. 그 병의 원인은 스스로 "불이 쌓여 생긴 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그리로 나아갔기에 고흐를 좋아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제도화된 화단의 길을 거부하고, 거부하다가 그에 대한 관심도 사라져, 오직 자기에게 충실한 창조행위를 통해 '화염 없는 전쟁'을 치르다가 죽어간 그 삶에 대한 사랑이 끌렸기에 좋아했던 것입니다. "노랗게 불타는 해바라기"와 "비틀린 채 타오르는 측백나무" 그리고 "붉은 수염"이 그 화염 없는 전쟁의 기호입니다. 그 기호 앞에 서면 제도적인 힘으로 짓누르는 모든 것을 향해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자기 마음 속에 불을 지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로 하여 화가 쌓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갈수록 목마름은 더해가고/ 물을 찾고/ 물을 들이키며/ 이제는 고흐가 싫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시인이 자기 삶에 대해 반성문을 쓰며 한쪽으로 너무 치우치면 반드시 화(禍)가 생긴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살아보니까 그도 좋긴 하지만 소갈병이 생기더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진짜로 싫어진 것은 고흐의 기호로 불을 지르던 자기의 상태입니다. 그것들은 기호에 불과한 것들입니다. 고흐가 정녕 사랑한 것은 그 기호들이 아니라 자신에게 성실함입니다. 그 성실한 창조적 삶이 "노랗게 불타는 해바라기"와 "비틀린 채 타오르는 측백나무" 그리고 "붉은 수염"을 창조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지껏 나는 그 기호들에 붙들려 있었던 것입니다. 정녕 내가 붙들려 있어야 할 것은 그 기호를 생산해내는 자기에게 성실한 창조적 삶이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고흐를 "싫다"고 말하면서 "평생을 자신에게 성실했던 자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고흐의 기호로 불을 지르던 상태에서 나에게 성실한 창조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그리고 내가 가야할 "평생을 자신에게 성실"한 삶입니다. 그때 비로소 화가 쌓이지 않는 끝없는 탈주선(脫走線)을 그리며 창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삶이 그 자체로 창조라는 탈주선(脫走船)이 될 때만 '자신에게 가장 성실한 삶'이겠지요. 이제부터 저나 나나 자신에게 성실한 '삶에 대한 사랑'의 길만 있을 뿐입니다.
-글/오철수
하록에서 마니산 쪽을 봤던가요.
낮술에 쩔어 있긴 했지만
"저 산이 왜 지금 저기에 있는지, 지금 내 앞에 와 있는지 알 것도 같아"라고 중얼거렸던 형의 말이 오랫동안 제 마음을 떠나지 않았지요.
벌써 그 일도 7,8년 전 일인 것 같네요.
시집 사진을 보니 많이 말랐습니다.
소갈병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정말인가 봅니다.
뭔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건강하십시오.
-철수
첫댓글 성실함만이 자기를 넘어설수 있는 창조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라는거겠죠.평생을 자신에게 성실했던 자여!
자극이 옵니다. 최고의 환희는 내 길을 가는 것이라는 말씀이신거죠. 고흐도 시인님도 선생님도 모두 한 길을 가신 분들이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