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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江陵 記行 別曲”
(강릉 기행 별곡)
1996. 06. 23
국내 근무중
강릉을 떠나면서
金 나그네 가
wekz/ hdec
스코틀랜드로 가면서
kokim@hdec.co.kr
大關嶺 頂上 대관령 정상
여보게!
여기가 해발 832m, 신갈 기점에서 영동고속도로 180km 지점이고, 강릉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지. 동해고속도로 접속도 까지 하산 하는 데는 20 여km 남았지. 서울의 강남터미널에서 강릉터미널 까지는 평균 3시간 30여분 이 소요 되지. 멀리 중앙의 바다 앞에 보이는 것이 강릉 비행장 이고, 좌측에 멀리 보이는 것이 “경포위락지구” 이지. 길게 해안 따라 나 있는 백사장 때문에 동네 마다 덕을 톡톡히 보면서 여름과 고기잡이철을 보내고 있지.
여기 우측에 나있는 등산로가 되어버린 대관령 옛길은 九折羊腸(구절양장) 구불구불 옛날의 애환을 짐작케 하지. 고속도로 옆 山의 景致 때문에 도시의 객들은 너무나 좋아서 감탄 하는 편이고, 특히 가을철의 채색된 자태와 나무 잎사귀 부딪는 소리와 조류/새의 울음소리는 감회가 넘쳐서 교차 하는 국보급 만상 이지만, 늘 언제나 바쁘다는 습성을 가진 우리는 자연에 무례 한 채 마냥 오르내리지.
아마 이 대관령 아스팔트 포장길은 60년대 중반쯤 한 것 같고, 그전에는 비포장 길 20km마저 1차선 외길이어서 군용 및 수동식 전화기로 저 밑과 위에서 “올라오세요! 기다리세요!” 하면서 일방통행 신호로 청운의 꿈과 함께 대관령을 넘었다지. 그마저 홍수나 궂은 날씨나 눈이 올 때는 에는 힘이 들었다는 것이 강릉 시민들의 옛 이야기이지.
그러나 지금은 오름 2차선 부분 공사도 하고 있으련만, 이것도 모자라서 99년 2월 준공을 목표로 4차선(원주-강릉) 공사 중이지. 우천 과 눈보라시의 초행길에는 운전 미숙으로 인한 교통사고는 꼬리를 물기에 rack car 는 24시간 대기하고 있는 아름답고 험한 길이지. 소인도 여기 바로 밑 커브길에서 아침 7시에 살어름 언 아스팔트 길을 내려 가다가 살살 미끄러져서 논산에서 중학교 수학 남자선생님과 임신부 부인이 탄 차량과 속수무책으로 부딪치는 사고도 경험했지.
그래도 가끔 나는 “아! 내해(我)는 현재 위치는 진정 神仙 이어라!” 하고 묵상 하곤 하지. 자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이곳 정상에서부터 14km 내려간 지점 에서 좌측으로 보현사와 명주군 왕릉으로 가는 비포장 길이 있으니 들러 보고 가지.
寶賢寺 (보현사)
안내판 표지를 보고도 오고가며 그냥 지나치곤 했었는데 자동차로 올라오기에는 너무 힘이 드는 비포장 길이지만, 고즈넉한 곳이라 도량으로서는 좋은 장소 같아 보이네 그려!
대웅전, 보현각, 삼성각, 영산전등의 현판이 보이는군.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2년(914년)에 중건한 절이라는 데 전설을 간직한 채 너무나 많은 세월을 뒤로 하고 있군. 여보게, 저 아래 길옆에 서있는 것들이 무언지 아나? 저 잔디밭 위에 항아리 같이 서있는 돌들 말이야. 그냥 조금은 아네만! 사리탑 같은데... 전에 본적이 있기에. 그래, 맞아! 그런데 탑 형태는 갖추지 않아서 그냥 부도(浮屠)라 부른 다네. 주인이 누구인지 더러는 僧名(스님이름) 이 씌어 있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이름 모를, 주인 모를 돌들이지. 그런데 저기 저 큰 비석 은 낭원대사 부도비라 하여 보물 191호로 지정 보호 하는데 비신碑身의 내용은 이 보현사를 창건한 속명 김개청(신라시대 914년)이라는 낭원국사의 96세 입적 시까지의 일대기를 적은 거래요.
명주군왕 릉 (溟州郡王 陵)
이곳에서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서 4 km 더 내려가다 우측으로 5km 더 내려 가면 명주군왕릉이 있는데 명주군溟州郡 이라는 행정지명은 1000년을 이어온 꽤 오래된 이름 이지. 유일하다네 군명 천년유지. 그러나 곧 없어 지겠지. 옛날 선덕여왕이 죽자 친족으로서 왕으로 추대되려다 되지 못하고, 강릉으로 와서 명주군왕 이 되었다는 강릉 김 씨의 시조인 김주원(태종 무열 왕 5 세손)의 묘이고 매월당 金時習(조선 세종 성종 1435~1493)이 후손이라는 거여.
그런데 여보게! 세상 구조가 빈자리가 있는 것 같은데 빈자리가 없는 것 같거든. 누구나 다 목회자 이고 모두 다 구도자 이면 이 세상 구조를 누가 다 이끌고 가지? 해서 어떤 이는 “이 뭐꼬?” 때문에 구도자의 길을 걷는다지만, 해답이 있을까?
요즘(1990-94) 매스컴을 많이 타던 석용산 스님의 얘기 중에 이런 게 나오지. 입산수도 하던 중 저자거리에 나왔는데 거리의 여인이 웃으며 하는 말이 “도와 달라는 거야” 도와주는 길(매춘)은 수도중인 몸뎅이 뿐이고 땡전도 없는데.. 기가 막힐 노릇. 해서 “내 큰스님이 되면 찾아 오리다! 놓아 주시오!” 하고 는 번민을 했다는 거야! “저 가녀린 여인 하나 도와주지 못하는 처신이 무슨 구도의 길을….?”
普施(보시)
얼마 전 동료 직원과 함께 속초 설악산 신흥사엘 들렀었거든. 어느 보살이 말씀하시더군 “연등 佛事불사 한번 하시죠.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보시 하신다 생각 하시고 불전佛錢 조금 내시고, 주소 가족 성명 나이 쓰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보살님 보시가 무슨 의미에요? 잘 모르긴 해도 남을 돕는 거래요. 예! 제가 잘못 아는지는 몰라도 보시란 1차적으로 나의 소유 중 아까운 것을 버리는 일이며 그것의 쓰여짐이 남을 돕게 되던, 잘못 쓰이게 되든, 그것은 나와는 상관없는 2차적 이라는 생각이기에 의견을 피력 합니다. 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成佛 하세요!” 하는 소리를 뒤로 하고 절간에 와서 주제 파악 못하고 헛소리 한다고 부처님이 혼낼까 봐 발걸음이 빨라졌든 경우가 있었지.
사실 비우는 마음의 표본은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 등을 미련 없이 팍팍 다른 나라에 건네주는 것처럼 욕심 없이 살아야 되는 것 같지 않나? 그런데 한편으로는 누구든 무엇을 더 얻으려 집단행동을 하기도 하지. 매스컴에 나온 것을 보면... 절간과 예배당에서 각목과 인력을 동반해서 무엇을 더 얻으려 하지! “무소유가 소유이고 소유가 무소유” 라는 설법說法은 아직 도시 이해가 되지 않지만, 나도 오늘도 더 갖으려고 노력 하고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필요 없는 것은 버리려고 노력 하고 있거든.
이보게! 너무 어려운 얘기이니 우리 한발 빼자 구. 그런데 자네 하는 일, 건설업에 사람 모자라지. 옛 성현들 모셔 다 직책 직종 을 드리면 건설업이 잘될까? 예수의 사랑으로, 석가의 자비로, 공부자의 어진 마음으로…… 관리하면 공사가 잘될까?
아! 여보게! 답은 하나여! 솔잎은 송충이의 밥이여!
신복사 터 /굴산사 터 /학산
거의 다 내려오면서 시내로 진입하면 오른쪽으로 나있는 關東大學敎길 옆에는 신라시대 범일 국사(단오제 때 모시는 신)가 창건했다는 신복사 터라 해서 삼층석탑과 석불좌상이 있는데, 넓은 절은 없어져서 터를 발굴 중이지. 지금으로부터 가는 굴산사 터, 이것 역시 범일 국사가 창건 했다 하는데, 터의 규모만 크지 남아 있는 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부도 밭과 당간 지주와 석조 비로자나불과 죽어서 대관령 서낭신이 되었다는 범일 국사 얘기야. 그래서 강릉 단오제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고 범일 국사를 사랑했던 정씨 라는 여인은 죽어서 여(女)서낭신이 되어 단오제에 같이 모셔 진다는 거여.
그런데, 이곳 행정 구역이 강릉시 구정면 인데 근자에는 이곳에 풍수지리가 또는 역학을 공부 하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현 서울 시장이신 조순 씨의 생가 터와 주위의 풍수지리를 연구 하고 다녔다는 거야. 대통령이 되려는 장소, 학이 마을을 품고 있는 멋있는 명당이래서.
어때? 이사 와서 자식 농사 한 번 더 지어 보지 않으련?. 글쎄? 지금은 본인 세대만 잘 살면 제일 이라고 주장하는 무자식 상팔자의 젊은 외침과는 상반되니 연구 좀 해봄세..
幢竿支柱 (당간지주)
아까 언급 한바 있는 당간 지주는 큰스님 재실 유무와 사찰 표시를 위한 깃발을 달아 두던 장대를 세워두는 돌기둥을 말하지. 일주문과는 다르지. 강릉에 있는 것이 크다 하여 소문이 나 있다지. 높이가 5.4m 정도이고 여기 학산리의 굴산사 터 당간 지주와 동부시장 옆 용천호텔에 있는 대창리 당간지주와 강릉여고 옆 옥천초등학교 뒤 수문리 당간지주는 강릉의 보배인데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시민들은 모두 무관심이니! 훼손이나 안 되었으면…
江陵 鄕校(강릉 향교)
이곳이 대한민국의 인물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가 공부 했다는 강릉시 교동의 명륜고등학교 라네. 저것이 강릉향교 인데 운동장을 같이 공유 하지. 아시다 시피 향교는 서당출신 유생들이 공부하는 다음 코스인데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면 진사나 생원이 되고 다음의 서울의 성균관(대학과정)을 졸업 후 문과에 응시 고급관리에 오를 수 있는 거래요. 지금 이곳 에는 명륜당(강당), 동재/서재(기숙사) 및 공자(孔夫子)와 성현/제자 등을 모시고 제사 지내는 문묘인 대성전도 있고 은행나무가 자랑거리라네. 다른 지방과는 달리 전쟁 중/난리 중에도 원형이 잘 보존 된 곳이라고 하는데 밑에서 보니 특히 초석이 높고 그 위에 목주기둥를 올려놓아서 보존 상태가 아주 좋은 것 같군.
학교에 들어와 보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 서울에서 유학하던 시절 고교가 있던 종로1가의 종로국민학교 옆 네거리에는 서울예식장이 있었지. 토요일 오후에는 악동들 몇 명이 모여서 예식장 불청객이 되어 의자를 차지하고 나면 그 시절에는 답례품이 있었지. 그 중에서 하이타이 라는 세탁제는 종로국민학교 담장 안으로 집어 던지고 귀한 비단보자기는 지나가는 아주머니들 몫이고 찹쌀떡이나 케익은 우리들의 절대적인 歡迎的 답례품 이었었지. 지나간 그리운 시절이여!
이곳 강릉에는 교육도시를 대표 하는 양 주야로 학생들이 학교에서 살고 있지. 대한민국 전체가 지나친 교육열에 빠진 것 같아요. 그래도 상대적 문맹자가 중.고등 학교에 많다는데. 내 공군 복무시절에 글씨 잘 모르고도 뽑혀온 미 공군 장병들이 있어서 같이 근무할 때 “그놈들 참 무식하다” 했었는데... 이제 그런 것을 수입하는 단계 인 것 같아. 한국의 초중고 문맹 내지는 학습진도가 낮아지고 있다니 그렇게 안 되었으면… !
강릉고등학교는 초당동에 자리 잡고 있는데 강고는 95년도 초에 한국일보 주최 학력경시 대회 결과 전국우수고교로 되었었지. 서울의 우수대학도 꽤 들어가는 학교이고 강릉여고, 강일여고 또한 그런 정도래요. 그리고 이곳 강릉 에는 과거의 전력을 말해주듯이 모든 관직과 상업계 등 큰 위치를 강릉상고와 강릉농고 출신들이 선점 하고 있었지. 최각규 경제 부총리도 강릉 상고 출신이시라고 하지. 강릉상고와 강릉농고의 축구경기를 통한 선의의 전통경쟁은 가히 볼만한 것이었지. 삼군 사관생도/연.고대 응원전을 방불케 하는 인상적인 행사 였으니까.
客舍 問 / 七事 堂 객사문 칠사당
이곳은 고려 조 태조시절 세웠다는 임영관(출장 중의 나그네숙소)인데 문(나무)만 남아있고, 저것은 칠사당 이라 해서 조선시대 관공서로써 호적, 농사, 병무, 교육, 세금, 재판, 풍속 등 일곱 가지 정사를 베풀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래요. 그 옆의 현재 건물은 강릉시 시청사인데 좁은 것 같아요. 옛날 명주군청 건물을 제2청사로 쓰긴 하지만.
江陵 端午祭 “International Folk Festival
연어가 올라온다는 강릉 남대천은 몇 군데 이름을 더(속초) 갖고 있지. 그 중에서 이곳 강릉 시내를 흐르는 개천 옆에는 음력 5월 5일 을 전후해서 향토 축제인 단오제 가 치루 어 지는데, 천년이 넘는 역사와 전통을 지녔다고 그러더군. 절차는 복잡한데 대충 얘기 하면, 대관령을 지키는 역사 속의 인물 국사 서낭신(굴산사를 창건한 범일 국사)과 여 서낭신(범일 국사에게 시집가려던 역사 속의 인물 짝사랑 정씨 소녀)을 모셔와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이지. 음력 5월1일부터 단오굿, 관노가면극, 그네뛰기, 씨름, 민요 및 시조, 경창, 농악, 공연, 궁도, 투호 같은 행사뿐만이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오는 수만명 구경꾼과 상인들의 규모도 대단 하지. 그 중에서도 엿장수 각설이의 매력이 일품이었던 것 같아.
이제 지자제(지방 자치제)하의 강릉시 에서는 단오제를 국제적 “International Folk Festival”로 변천 시키려 신분 상승차 Unesco에 등재를 꿰 하고 있으나 참신한 기획력으로 별다른 아이템이 추가 되어 준비해야 할 것 같아... 관광 연계등과 함께.
그리고 한국의 건설업계에서는 큰 명절(설.추석)에는 체불 노임이 없도록 노력을 하거든, 그런데 강릉에서는 단오절도 마찬가지로 선금도 주고 휴가도 줘야 하고 업무도 중지해야 할 정도로 비중이 큰 행사라네. 그런데 이것보다 한 달 정도 먼저 진행 되는 것이 경포 벚꽃 축제 이지. 경포 네거리와 경포대 사이에 심어진 만발한 벚꽃을 구경하기 위함 인데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일본국화라고 비난을 받지만 꽃밭에서는 그래도 후손들은 즐겁게 지낼 수가 있거든 빙고(bingo) 게임도 즐기면서…
SEOUL ROUND
옛날 6.70년대에 책가방 들고 종로길을 걸을 때 길바닥을 수차례 반복해서 파헤치고 지하에서 복합 공사를 할 때 현장의 근로자, 감독자, 책임자 들을 내려다보면서 후일에는 저런 JOB 은 안 갖겠다고 생각 했었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건설업무 종사자의 일원이 되어 진가(?)를 발휘하고 있으니…! 나는 가끔 강릉의 건설업무 종사자들과 담소 중 우루과이 라운드를 아십니까? 하면 대충 압니다! 하지. 대화 중 또 서울 라운드를 아시느냐?고 물으면, 그게 뭐드래요? 하고 동문서답의 대화를 나누곤 했지. 예! 강릉 멋쟁이들이 8시 9시에부터 여유롭게 근무 시작 할 때 대관령의 뚫린 틈으로 서울의 업체와 근로자들이 와서 7시부터 작업 하며 능률을 올리려서 강릉돈 벌어 가는 거래요!. 그래요? 9시부터 일해도 밥 세끼는 들어오는데..! 그렇다 이 시간 만큼은 서울 라운드와 우루과이 라운드는 나쁜 건가 보다. 그게 없어도 사는데..
江陵 驛 -거리의 풍경
여보게, 이게 강릉역 역사인데 조금은 초라하지. 이제는 고속버스 형편이 나아지고 항공편도 용이해져서 젊은 관광객의 이용을 제외 하고는 별 인기가 없는 것 같아 태백선 타면 강릉에서 멀리 영월 제천으로 돌아서 청량리역으로 가고 오기에, 철도는 이곳에서 끊겨 있지. 옛날에 6.25전 38선 이북이었던 속초양양에 있던 동해선 구간의 철도를 북한에서 철거해서 없어 졌다고 했는데 일제시대 처럼 이북으로 동해선이 다시 이어져야 할 텐데....
그런데, 여보게 지금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강릉역 앞 도로변에는 지금도 서성이는 거리의 여자들을 가끔 볼 수가 있지. 저런 역사적 연.맥은 동.서 고금을 통해서 계속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 미워 할 수 도 없지만 박수를 보내며 격려 해 줄 수 도 없는 현실 속의 인간상들 이지. 먼 허공만 응시할 수 밖에.... 인류역사상 최고 오래된 역사를 가진 상거래 직업이라는 거지.
해서, 가끔은 나는 조물주에게 의사 타진을 해본다네. 전지전능하신 님이시여! 이 세상에 善 과 惡을 주시고서 선악의 실행과 폐해 현상을 보시고 즐기시며 사후에 심판하시기보다 선악 중에서 사전에 악을 빼버리시고 또 폐독을 빼시고서 아름다운 善의 세상만 유지하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행여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진행 시키는 중이라서 아니 되신 다면, 이 세상에 성인들을 좀 더 보내시어, 생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찾아서 이해하고 행할 수 있도록 함이 옳지 않겠느냐고? 전지전능 하신 님이시여! 라고 항의를 해본다네...
仙女들?
현장근무를 하다 보면 자의든 타의든 술 한 잔을 들기도 하고, 또는 두잔 을 걸치기도 하고, 더러는 세잔 속의 3차 위치에 있기도 하지. 우리가 바쁜 일정 속의 workaholic 에 젖어 있을 때 밤으로의 alcoholic 에 젖어 사는 여인들도 있지.
옛날 절대 job 이 없어서 동생과 가족들을 떠맡아야 했기에 택했든 술집아가씨들과는 달리 참을성 없이 simple life 를 추구하기 위해 알코올에 익숙해져 있는 아가씨들도 있지. 때로는 철새들을 보는 것 같기도 하지. 걸머진 부채에 둔감 해져 있고 공주병에 걸려 한쪽 다리를 걸친 채 service 업종의 pro의식 pro행동도 없이 신세대/민주화를 표방하고 있어 운영이 어렵다는 룸싸롱 업주들의 이야기 이고 보면...
전대錢臺를 가슴에 숨겨 둘러메고 서울소개소에 들러서 보증된/가불된 미인(?)들을 모셔오는 업주들의 애환도 들을수 있지.
그런데 의문이 하나 있다네! 이 여인들이 인생행로를 다 마치고 나서 요단강/황천의 갈림길에 있을 때 이들은 어디로 가게 될까? 어디로 보내어 질까? 위로? 아래로? 고용창출과 기쁨장소를 제공했기에 paradise극락/천당으로 갈까? 아님 잘못된 성욕해소 를 위한 장소/몸 제공죄로 hell지옥에서 기다릴까?
여보게 걱정 끊어! 그것은 임자/조물주의 마음대로 일 껴!
업業報, 윤회輪廻, the cycle of reincarnation
그런데 정확한 통계는 아니더라도 이 선녀들의 숨은 사연들을 쓸데없이 개인적으로 심층면접 monitor/조사를 했었지. 그 중 몇 가지 사연 중 한편을 노출 해보지. 대개 이들은 가정사의 불편한 점이 많았었는데 그 중에서도 1대(엄마)와 2대(딸)가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기구한 업보의 순환 같은 것을 볼 수 도 있었지. 그리고 더러는 찢어진 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여인도 있었고, 더러는 토정비결四柱八字대로 라는 이유를 단 채 파묻힌 여인도 있었지. 아! 그런데 놀랠 일은 요즘의 마담이라는 직책의 연령이 무척 낮아져서 20-24살의 마담이더라고... 신물과 퇴물을 거느리고 하청/룸사롱 영업을 하도록 분업화 되어 있다는 것이지. 아무도 누구도 이곳으로 밀어 넣은 사람도 없는데 모두들 자기 두발로 입단/근무 한다는 사실이야.
그런데 예전에는 생각하지도 동정심을 주지도 않았던 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생활 구조 일면을 이해 할 수 있었던 것이지. 즉 그들은 영업 후에 한숨 자고 깨면 사우나에서 미장원에서 의상실에서 정성을 드리고 출근을 하지. 내님/partner 은 누구일까? 마음 조리다가 간택이 되어 근무를 마치고 나면 서운 했든 일 또는 서운하게 했던 일, 개체들을 안주 삼아 뒤풀이 속풀이 한다고 한잔 하지. 또 도토리 키재기 하면서 자기들 끼리 감정을 푼다고 또 한잔 하지. 그러다가 뭐이 엉켜서 뒤엉켜 육탄전도 불사 하다가 네신세 내신세 하면서 훌쩍 거리지. 해서 세월은 가지만, 진리는 노력 없는 공짜는 어디에도 없었고 게으른 자와 성실 한 프로 가 아닌 자는 여기서도 도태 되고 있다네.
즉 그 빈자리 그 공간 에도 인간은 숨을 쉬고 있었고, 그리고 또 채워져야 할 빈자리는 세월 따라 또 남아 있었네. 비약적 이지만 60년대나 70년대에 술집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여인들은 이제는 자기 둥지를 틀고서 지금은 성큼 자라 버린 가정을 바라보면서 힘든 과거의 역사를 혼자만의 가슴에 안은 채 오늘을 지내고 있을 테니까! 심신의 청결 有,無는 어디에 기준을 두는 것일까? 아마 마음에 있어야 하기에 모른체 해주는 것이 아는체 하는 것보다 나은 보약 일지도 모르지. 몇 년 후면 이곳의 언니들도 또 하나의 자기가족 둥지를 틀기 위해 우리의 세상품으로 돌아 올 테니까. 아무도 모르는 천사의 위장 날개를 달고서 말이야.
업業報 이란? “누군가somebody가 지나온 흔적의 쌓임” 이라고 그리고
윤회輪廻 부활復活 이란? “가을. 겨울이 다시 돌아 옴 이지... 언제나 빈 시공時空으로“
라고 소인은 감히 정의定義 하는데, 누군가가 소인을 혼낼 것 같네 그려...
젊은 message 초당두부와 간수
여보게, 이곳은 경포의 바닷물을 직접 간수로 사용하여 만든다는 초당동 순두부 집인데 미리 주문해야 아침에 서울로 가져 갈 수 있을 정도로 성황 이지. 그러나 어려서 집에서 먹든 진한 맛은 없으나 미식가들의 호기심을 채우고 있지.
여보게, 개그맨 전유성의 책 제목 대로 “조금만 비겁 하면 재미있는 삶”이 있으련만 괴리(怪理)의 同感 속에서 세상은 돌아가고 순리(順理)의 同感은 모난 돌이 되어 위험한 시절에 서 있음이 가끔은 가슴 아프다네 ! 더러의 인간들은 숨겨두면 좋은 이야기가 있으나 참을성 없이 모두를 노출 시켜 화를 돋우고 돌부리를 차면 자기 발부리 아픈 줄 모르고 행여 알지라도 한 번 더 차서 스스로를 넘어뜨리려 하지.
남을 미워하려면 나의 속부터 상해야 한다!는 것을 자각 못한 채 말이야. 남이 어려울 때 조금은 감싸주고 덮어주는 미덕이 필요 한데 벗겨서 초라하게 만들고 좌.우 편을 만들어 놓고서 저울질을 하지. 자기의 저울이 부서진 줄 도 모른 채 말이야. 부서진 자기의 저울로 말이야.
말이 많을 때는 말을 삼가!라 시던 8순 노모님의 말씀은 나에게 가장 멋진 훈(訓)이었으며 언행일치 또한 나에게 많은 훈련 과정을 주셨었네. 도움주는 순두부의 간수 처럼 말이야.
矛盾 과 定理 正理(모순과 정리)
여보게, 집에 있는 식구들이 자네가 무슨 일 하는지 얼마나 알지? 글쎄? 회사 이름 하고 밖에서 외국에서 근무하는 날들이 많아 서운 한 가장으로, 혹은 돈 버는 기계정도로 알겠지. 더러는 무능 유능 의 대상으로 부족한 가장과 남편으로 또는 어버이에 대한 불효함이 많음을 안고 있는 사람 정도로 말이야! 그래? 그런데 엉뚱한 이야기지만, 인간 개인은 말이야 주어진 그릇에 따라 능력적 취사선택을 해야 한다지. 조물주는 한 사람에게 많은 것을 주시지 않았기에 말이야.
젊음을 지내면서 느끼는 것은 인생의 정현파cycle은 피라밋 같은 삼각모형을 좇아가고 있는 것 같아. 모든 조건 환경이 넓게 주어졌던 초년시절, 꿈도 많았었기에 두려움도 없었고 배우는 것에 재미도 있었고 밤을 새워 일할 분위기도 있었고 자랑을 받아줄 윗분들도 계셨었지. 그런데 이제는 안다는 것에 부끄러워해야 하고 독선적 능력에 주의를 해야 하고 더 용기와 희망 있는 자들과 대화를 해야 하고 더러는 모자라는 기백/젊음 들을 조율 하며 이끌어 가야 하는 중간 리더 과정에 있는 것 같아. 피라밋 2/3 선상에 오른 현실에서 꼭지 점을 굳게 응시 하면서 말이야.
그런데 한 가지는 우산 밑에서 하늘을 볼 수 없듯이 정의라는 것은 시대적, 역사적,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서 궤를 달리 한다고 생각 되어 지지. 모순과 정리는 항상 그 자리에 같이 서 있으니까. 내일 을 또 기다리면서 순리대로...
家族 -중앙시장 지하
대한민국의 재래시장이 이렇듯이 이곳에도 몸만 오면 식(食)이 해결 되는 곳, 강릉 중앙시장의 지하시장 이지. 문어, 오징어, 꼴뚜기, 쑥덕, 순대, 수제비, 자반, 생선, 횟감, 과일, 약밥 모두 다 모인 재미있는 풍경이야. 사람이 살 수 있는 정겨움이 있고 서민과 부자의 유통이 성립되고, 작은 희망들이 살아 있는 곳이지. 이런데는 개발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개인적 생각이야. 빈대시장, 벼룩시장에서도 현대와 고전의 막이 같이 오르듯이 말이야.
식구들과 서울 남대문 시장을 찾아가 볼 때도 마찬 가지지만 말이야. “골라! 골라!” 는 오늘도 내일 도 계속 되어야 하지. 경제보존지역으로 지정 되어서 영원히.
그런데 시장에서 콩나물 값을 흥정 하는 주부도, 백화점에서 고가품을 흥정 하는 사모님도 모두 stress 를 안고 있다는 거야. 중년 나이에 허무 하다는 여인, 부와 높은 위치에 이르렀다고 여겨지는 여인들도 무언가 빈 가슴에 위안을 받고 싶어 한다지. 더러는 마루 닦으며 시려 버린 무릎만큼 이나 까져 버린 마음의 응어리들과 새로이 등장 하는 자녀들과의 모자라는 대화와 고부간의 어려움과 더러는 함께 살지 못하는 별거의 외로움 에서 오는 거시기들로 해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거야.
미국 의학회에도 재작년(94년)에 등록 되었다는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Korean Hwabyung (火病)의 소유자들이 주부인데 가부장적 분위기와 주위의 환경 때문에 노출 되지 않고 있고 또 치유 에도 힘이 든다는 거야. 우울증의 범람이 올거야! 한국사회에 아마..
牽牛 와 織女 그리고…(견우와 직녀)
여보게, 과거의 어떤 바램憧憬 들이 내가 안고 있는 현실 일 때, 그것은 아주 좋은 위치가 아니겠나? 그런데 현실과 동경의 gap은 항시 풀어야 할 숙제들로 채워지고 있지. 그 문제가 안고 있는 해답이 있건, 풀 수 없는 것이었던 것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이야. 무슨 얘기야? 어려운데 쉬이 얘기해! 그래? 과거에 우리는 대개 비행기를 타는 것이 憧憬 이었었지. 또 까맣다 까맣다 나라이든 어디이든 가서 근무해보는 것과 하얗다 하얗다 나라의 인간의 코를 만져 보고 져 함이 우선 이었었지. 幸의 길로 들어섰었는지는 몰라도,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故鄕 과 故國 이라는 쎈치멘탈한 단어들을 안고서 외국근무를 했었지.
여보게! 과거에 우리는 해외 근무 시 1년 혹은 6개월 마다 휴가차 귀국 하여 견우와 직녀 처럼 만날 때마다 얼마나 서먹 서먹 했었는지 모를 거야. 영화 에서 처럼 “Daring I Love You, I missed you !” 하면서 기쁨의 포옹 자세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던 선녀와 나무꾼이 되어 저녁의 이부자리 에서나 손을 잡을 때까지는 멋쩍기도 한 남들 이라 구!.
물론 가끔은 떨어져 살기에 서로의 빈자리를 이해 할 수 있어서 좋다 하지만, 헤어짐, 기다림, 그리움, 가정이 안전걱정 이런 것들은 무엇인가가 대신 해 줄 수가 없거든. 이른 아침 녘 칠흑 속에서도 나와너와 가족과 회사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차의 액세레이터를 힘차게 밟아야 하지. 쓸쓸히 숙소로 돌아올 때면 서울의 나의 식구들에게 미안함과 감사함을 무언으로 전해야 하기도 하지.
그리고 때로는 이방인의 위치 일 때 한국 종로 거리 위에 서 있다면 위안이 되었었을 텐데... 노랑머리, 흰머리, 검은 얼굴들과 마주 하고 선진국의 마천루 밑에서 거리 보도 위를 걸을 때 뒤통수에 와 닿는 혼자라는 느낌은 가끔 우리를 힘들게도 했었지. 내가 같이 해야 할 시간과 구성원은 바다건너 내 나라에 있는데... 하는 생각들 이었었지. 그게 한잔 위스키술로 달래어 질 일이 아니었을 때 Home Sick 이 아닌 Solitary man 의 위치 였었다네. 혹 Girl Friend 라도 있었을 지라도 그것은 전부가 해소 될 수 없었던 세월 이었었지. 물론 나그네들의 힘든 여정에는 국내에 있는 주부여인들의 고통스런 사연들이 더 많았었겠지! 해서 귀국 후 그 동안 주인 이 없어 스러져가던 가정 문화 복구에 많은 배가 노력을 했었지.
견우와 직녀들의 후속 편중 이야기 몇 개만 소개 하도록 하지.
하나는 어느 날 공항에서 조용히 택시를 타고 와서 집 앞에서 짐을 내리는데 예쁜 유치원생이 내 앞으로 오더니 “안녕 하세요?” 하고 인사 하더라 구! 히야! 그사이 커서 인사 하는 것도 배웠구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딸아이는 총총 자기집(내집)으로 들어가 버렸지. 그 후 나는 이 딸아이와 어깨동무 하고 세대를 이야기 하며 우리들의 date 무대를 쏘다니며 통하기 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 했었지.
두 번째 이야기는 직원이 휴가 중 부인과 소파에 앉아서 이야기 하는데, 야구 방망이가 보이는 순간 머리에서 불이 번쩍 하더라는 거야. 웬 아저씨가 자기엄마 하고 정답게 얘기해? 아! 너는 누구를 위한 body guard 였길래….!
세 번째 이야기는 다른 직원이 아들한테 점잖게(?) 얘기 했다는 거야. 야! 임마! 냉장고 문을 자주 열면 안 좋아! 하고 말하자 쳐다보던 아들놈 왈 “아저씨! 그러면 안 먹으면 될 거 아니에요! 괜 히 남의 것 가지고 그래!.” 꽝 문은 닫히고 아빠의 생각도 닫히고.
그런데 말이야, 여보게 바쁘게 고생하시는 분들은 헤어질 시간도 없고, 이혼할 새도 없고 사치스러운 생각을 할 겨를 도 없고, 받을 위자료의 욕심도 없기에 늘 신혼 인양 only money! Money for future 하면서 사랑하면서 열심히 들 살고 있지. 잘못되는 가정파괴도 있다지.
대개는 어려웠던 여건들을 cover 할 수 있는 문화적 경제적 위치가 되면 사람들은 자제력과 의지력을 시험 당하지. 가족에 무엇을 남겨야 하고 가족을 어떻게 안아야 하는지? 생각도 없이 그냥 각자의 피치 못할 사연적 이유만을 안고서 말이야. 가끔 그들은 진지하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 혼인유지와 이혼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화두를 모른채..
嗚竹軒 (오죽헌)
강릉의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율곡이 태어난 곳이며 뒤뜰에 검은색 신우 대나무가 자생 하는 까닭에 후에 상속 받은 율곡의 이종 사촌 아우 권처균의 아호를 오죽헌이라 부른 데서부터 유래된 것이라 하데. 대개의 강릉 시민 들은 오죽현 이라고 부르는데 그 사연은 모르겠네. 지금 보다시피 정성스레 유물 등을 보관 관람 시키고 있지. 그리고 태몽을 꾸었다는 몽룡실과 벼루와 격몽요결 이라는 책과 율곡전서 등이 유물이지.
신사임당(조선조 연산군10년 1504-1551)은 시 글씨 그림 등 예술적 재능도 뛰어나고 예와 경을 숭상 하고 실행 하는 아내로써의 부덕과 삼남 사녀의 어머니로써 자녀교육 또한 명철 하고 자애로웠고 부모에게 효행을 다한 자식으로서, 또는 시대적 개척 여성으로서 본받을 만한 인물이라 여겨지지. 주문진읍 교항리 에는 사임당 교육원이 있지. 그리고 이이(율곡-조선 조 중종 1536-1584) 大峴 先生의 율곡이라는 호는 아버님의 고향 파주군 율곡리의 지명을 따서 받은 것이고, 너무나 많이 알려진 업적 사상 등은 지금도 학자들이 연구 하고 있지.
재미있다고 할 수 있는 얘기는 출생하기 전날밤 신사임당의 꿈에 큰 검은 용이 침실로 날아들었고, 세상을 떠나기 전날밤 부인의 꿈에 큰 검은 용이 침실 에서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여. 또 특이한 것은 과거 시험에 아홉번 장원 급제 했었다는 이야기는 가히 기네스북 등록 감이라고 할 수 있지. 또 그의 부모에 대한 효도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의 귀감이지. 이런 것들을 듣고 살다 보면 부모에 대하는 불경이 커져만 가는 것 같아 좌불안석이지! 그런데 부모는 모든 자식들을 가슴에 담을 수 있지만, 부모는 모든 자식들의 가슴에 담기어 지지 않는 것 같애! 또 한편으로는 효자는 부모가 만드는 일면도 있지 서로 간에 모범과 관용이 필요 하고 효행의 필요와 실행은 사회적 인적 및 문화 구조의 어려움이 공존 하고 있어 불효 하게 된다고 핑계를 대고 싶네 그려.
國道
여기가 7번 국도와 동해고속도로 종점 이 만나는 오죽헌 IC(인터체인지) 이네. 혹? 국도 1번은 어디서 어디인지 아나? 서울 에서 부산 목포 인천 ! 땡! 목포역에서 의주역 까지를 말하지(2호-목포-부산, 3호-남해-철원(초산), 4호-군산-경주, 5호-마산-중강진). 아시다 시피 고속도든 국도든 지방도든 홀수는 남에서 북, 짝수는 동에서 서를 가로 지를 때 붙여지는 번호래요! 해서 영동고속 도로는 4번 동해고속도로는 5번이지. 경험에 의하면 동서를 가로 지르는 여행은 되도록 해를 피해서 운전 하든지 아니면 채 양 있는 모자를 쓰고서 햇빛을 조절 하며 대관령을 넘으면 당황스러운 운전을 피하게 되지.
고속도로위의 메기
그런데 강릉에서 고속도로로 대관령 고갯길을 넘어 서울로 올라 오다보면 가파른 대관령 고갯길에 두 줄기로 아스팔트에 물이 떨어져 있고 추운겨울에는 얼어 있어서 운전하기에 불편 하고 사고도 유발 되지. 길도 구불 구불한데 진부 정도 까지... 그래서 가끔 이런 현상을 줄이기 위해서 고속도로 경찰 순찰차 아저씨가 단속을 하는데 별무 소득이 없다지! 아마 서로간에 눈감아 주기가 있다 하더군,,, 상황은 이러하다네! 동해바다에서 잡혀 경매되어 서울로 지방으로 팔려 가는 바다물고기들은 목숨이 붙어 있는 활어인데 오징어등 이놈들이 4시간 정도 산소가 없으면 돌아가신다는 거지. 해서 고속도로에서 죽기 살기로 고속 운전을 하면서 가다 보니 차의 어족탱크의 물이 기울러져서 아스팔트위에 흘러서 생기는 현상 이라는 거야,,, 그리고 그안의 물고기의 운동을 유발하기 위해서 메기를 넣는다지.... 생존하려 몸부림 치면 저절로 운동 하는 활어가 되니...
鏡浦 地區 (경포지구)
이곳 경포호 주위에는 선교장, 해운정, 경포대, 방해정 및 해수욕장 이런 순서로 둘러쌓여 있지. 송강 정철 시비와 신사임당 동상이 있지. 새로이 짓고 있는 커다란 디스코텍 이 명물이 될 것 같군. 또 동해 관광호텔 옆에 위치한 will café 는 대학 가요제 출신 윤금천 이라는 아저씨가 운영 하는데 토요일 저녁의 “젖 가락 장단 시간”이 일품이지. 자! 이제 천천히 입구에서부터 발걸음을 디뎌볼까? 이 선교장은 조선조 효령대군 11대손인 이 내번 이라는 사람이 새집을 지었고 후손들이 증축을 하면서 살았고 지금도 후손이 살면서 운영 하고 있는 건평 300여평의 안채, 사랑채, 행랑, 별당 들로 어우러진 무지하게 큰집이지. 활래정 과 연못도 있어 세상의 여유를 다 가지고 있는 듯하지. 그리고 용비어천가, 고려사 같은 귀중본 및 많은 고서적 및 고서화를 간직 하고 있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집이지.
작년에도 없던 공방과 참 쇠(놋그릇의 진짜 쇠) 만드는 집이 근래 생겼지. 주위에는 노비들의 집을 본떠서 만든 신축 초당 두부 집이 늘어나고 있지. 그런데 선교장이란 경포호 에서 배가 직접 드나들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여 옆에 있는 여행온 부산 총각들의 짐작대로 종교의 선교宣敎의 뜻이 아니고 선교船橋. 그리고 이곳 경포대가 위치한 이 꼭대기는 사람들이 잘 들르지를 않거든 바닷가와 디스코장만 찾아 낭만을 만들고 가지. 갖가지 사연을 각색 한 채 말이야. 우리가 올라 왔듯이 이곳 경포대 위에서 경포호를 조용히 바라보면 문외한이라도 시 한 수 절로 읊을 수 있을 것 같은 운치 있는 정자 인 것 같은데, 운치 없이 달려만 가는 감성이 좀 그러 하네 그려.
鏡浦臺賦(경포대부)
그리고 이정자 위에 걸려 있는 이것은 율곡 선생이 10세 때 지었다는 글, 경포대부(하늘은 유유하여 더욱 멀고, 달은 교교하여 빛을 더하더라)인데 판액(版額)된 것이지. 그리고 구전 되어오는 경포팔경(해돋이, 낙조, 달맞이, 고기잡이배의 야경, 노송에 들어앉은 강문동, 초당 마을의 저녁연기 등등) 중 지금도 철석이 는 파도소리와 오징어잡이 배의 먼 불빛과 노송의 풍치는 옛날을 이어주는 것 같더군. 그리고 말이야 거울처럼 맑다 해서 붙여진 이름 경포호 주위에는 정자가 12채나 있었고 둘레가 12 km 이었었는데 지금은 토사량이 밀려 쌓여진 것도 원인 이지만 60년대 일부 매립공사로 둘레가 4 km로 줄어든 현재의 모양이지. 아직도 청둥오리는 여유를 부리고 있고 갈대는 흔들리고 있지. 산책하는 가족들과 자가용 데이트 족과 벤치 위의 연인들을 위해서…
그리고 저 경포호 가운데 있는 저 누각은 鳥岩조암 이라는 정자 인데 철새가 놀다 간다 하여 조선조 숙종때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현판이 걸려 있대요. 옛날에는 잉어와 때복 이라는 민물조개가 경포호의 산물이었고, 지금은 맑지는 않지만 낚시꾼을 볼 수가 있지. 옛날 풍류 속에 읊었던 1밤하늘의 달, 2바다에 비친 달, 3경포호수에 비친달, 4술잔속의달 그리고 5그대 눈동자속의 달도 여전 하다 할 수 있겠지. 그리고 경포백사장은 옛날보다 모래가 줄었다고 아우성이지만 주변의 난립 환경이 더 큰 문제인 듯도 하지! 지척이 천리라고 바삐 지내다 보니 해수욕장 철에는 발을 디뎌보지도 못하고 지내지.
밤하늘 의 멜로디 Fantastic midnight on Gangreung beach
작년 겨울날 어느 자정녁에 취한 술을 빙자해서 서리 내려 서걱서걱 얼어있는 경포 백사장을 몇몇 팬들과 아우성 속에 fantastic midnight beach 를 연출 했었지. 준법을 지키고 살아온 나이에 허용이 안 되는 반항적인 요소 인지는 몰라도 몇 여인들의 소프라노도 곁들여서 추위도 잊은 채, 노래 백여 곡은 불러 제꼈을 거야. 허물어지고 싶었던 시간 위에 서서 말이야. 이 백사장에는 어깨동무한 젊은 couple들로 만원이지. 행복해 하는 얼굴들을 바라보면 조바심이 나지. 참을성 없이 개인을 길러온 여력에 더 빨리 헤어지게 되고 냄비같이 쉬 뜨거워지는 요소를 지닌 세대들 뚝배기처럼 오래 지속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지. 그들의 행복이 사회의 행복이니까. 그리고 매스 미디어의 통계처럼 20%의 이혼율 범주에 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
행복한 쉰 세대 와 젊은 신세대
동해관광호텔은 더러는 개. 보수 증축도 했지만 옛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았지. 박정희 전대통령이 머물던 방에는 지금도 옛 의자 탁자 등이 그대로 활용되어지고 있더군. 역사적인 건물이지. 서울등 도심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은 동해의 일출을 보려 파도를 보려 창가에 매달리고 갈매기 소리에 넋을 잃고 칵테일 한잔에 세상을 들여 다 보고 있지. 그런데 이 호텔의 진미식은 “우거지국밥” 이 정말 진미지. 다음에 들러서 시식 하자 구. 요즘 의 젊은 신세대couple 들은 셋방을 살지라도 흡족한 개성 속에 오늘을 표방하려 하는데 기초와 기본 manner가 상대적으로 결여된 채 진행 되는 것 같으나 밝은 미래가 있다고 생각 되어지네. 가끔은 생각 하건데 신세대의 문제는 발달된 현실 속에서 살기에 쉰 세대의 과거역사를 대안 없이 지금의 hamburger 의 잦대로 측정 비교 하여 보리밥 세대를 매도 하려 하거든.
또 서로의 문명과 환경의 gap을 잔소리와 부도덕과 무질서로 서로 대변 하려 하니까 말이야. 아마 그것은 우리가 햄버거와 피자의 얘기를 경청 하지 못한 잘못 일런 지도 모르지. 고대 이집트의 상현문자 해독대로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의 의미를 전수 하면서 오늘을 이해해야 할 텐데 말이야. 사실은 생활 과정으로 비교한다면 오늘의 기성세대는 참으로 행복 한 것 같지.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세대를 위로 하고 가난한 세월도 겪었고 어려움 속에서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었고, 더불어 문화적인 혜택도 많이 받고 있는 멋있는 쉰 세대이지. 그러나 반대로 환경의 문제도 문제지만 다 갖은 것 같으나 덜 가진것 같은 상대적 허탈 문화를 안고 사는 신세대는 걱정이야! 너무나 바쁜 생활을 할 것만 같은 신세대의 번개같이 뒤바뀌는 문화 속에서 어떻게 마음의 중심을 잡고서 허탈감을 갖지 않고 극복 할런지? 여보게! 세상 고민 혼자 하나 그냥 한 잔 하세! 만물의 태어남은 다 제 밥그릇을 달고 태어났다는 뜻이 아니겠나!
O ZONE (O3) 오존 그리고 경희한의원
여보게, 자고 있나? 아니 깨어 있네! 그런데 왜 그러나? 아니 술 좀 깨었나. 해서! 음 별로 안 마셔서 그런지 상쾌해! 간밤에 자네는 꽤 마시던데. 그런데 누가 그러던데 산림 속의 오존보다 해안 속의 오존이 조금 더 좋대 지. 그래서 그런지 이곳 강릉 에서는 많은 술을 마셔도 빨리 깨는 듯 상쾌한 심신을 가질 수 있기에 공기의 여력을 실로 느끼고 있지. 그런데 지금이 새벽 4시인데 별별 소리가 다 들리는군. 동트는 송림 속의 새들은 무척 즐거운 가봐. 찌찌 째째 재깔 재깔 호이 호이 딱뚜드득 완전한 합창이 군. 그리고 옛날 이 송림에서는 송진 냄새가 멀리 10여리 까지 진동을 했었다 는데 이제는 겨우 송홧가루 날리는 정도지.
못 먹는 술 디리 붙다 보면 위라는 기관은 피로하지, 한의원 신세를 주기적으로 졌었지.
AUDIO 박물관(유성기)
여기에서 조금만 더 내려가면 송정리 라는 곳에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audio 박물관 이 있지. 골목 가에 있어서 조금은 찾는데 명쾌한 기분을 주지는 않지만 말야. 입장료를 내고 나면 한 사람이고 두 사람이고 아주 정성스럽게 안내를 해주는데 에디슨의 일대 발명품을 다 가지고 있는 듯 하지. 특히 audio 의 옛날 초기의 발명품은 거의 다 구입해 왔고 남미의 어딘가에 있는 초기의 유성기를 사려고 몇 번씩 방문하기도 하면서 취득 하려 노력 중이라는 안내양의 설명도 있었지. 어려서 우리가 듣던 “숲속의 대장간”도 옛날의 유성기로도 들을 수 있었지. 어마어마한 시각적인 감상 이외에도 옛날 SP와 LP 레코드 판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채로웠지. 한 사람의 집념과 노력이 너무나 훌륭한 것을 남기고 있다고 생각 되어 졌었지.
허균과 허난설헌
강릉을 두루 돌다 보니 느끼는 것은 현재의 강릉 사람들은 옛사람들 못 지 않게 기념비를 만들고 이정표 세우는 정신이 다른 지방보다 앞서있고 익숙해져 있는듯해요.
저기 흙길 위에 세워진 저 시비는 이곳 출생 이며 동네 이름을 딴 호 교산 허균(1569-1618)을 기념하기 위한 시비인데 웅장하군! 그런데 요즘 어린이들은 슈퍼마리오가 더 재미있기에 홍길동전의 재미를 모를 거라 생각되네.
그리고 작년(1995년) TV기획 프로그램에서 허균의 누나(초희)에 대해서 방영 하던데, 두 남매의 역사 또한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책에 있었던 시한 수 떠올리면 “빈방 타는 가슴에 안 오시는 임뿐일세!” 라는 시인데 아주 멋있고 애련한 표현을 한 時 같지 않나? 허난설헌의 아주 어려웠을 때를 표현한 시라는 거야! 많은 文集, 詩集 등은 중국에도 잘 알려졌었는데, 후에 동생 허균이 일찍 죽은 누이(29세)를 대신해서 모아 편집 했던 것이래요. 그리고 요즘도 간간이 미발표 된 허난설헌의 작품들이 발굴되어 발표되고 있다지.
문화의 거리 大學路
“강릉대학로에는 어이하여 대학이 보이지 않느냐”는 것이 다른 내 친구의 joke 이었지. 국산이든 외산이든 유명메이커의 상표가 모두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곳이지. 단일 매장 국내 최고의 매상고도 올린다는 기이한 경제 유통 구조를 안고 있는 강릉 상권 이지. 강릉 유지분들의 얘기로는 특정 상표매장이 갖고 있는 상표의 옷은 누가 공짜로 줘도 입을 수 없다는 거여! 왜냐구? 한집건너 한 사람 모두가 선.후배 지인 등으로 되어있어 누구가게 옷을 입고 다니면 오해가 생긴다는 실정이더군!
하여간 이렇다 할 생산 시설 없이 소비 유통이 이루어지는 강릉은 좀 분석 해 볼만한 것 같애. 역사적이고 문화적이라는 도시이지만 대관령이라는 험준한 지형 때문에 옛날에는 물자 조달이 어려웠을 때에 벌었던 자금 여력에 오늘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른 다는 유지도 있지만. 1천년의 흐름인데 쉬이 변하겠어? 이곳의 강릉 유지들께서는 골프 매니어와 고급 승용차를 소지한 경우가 상대적 인구수들 보다 많다고 들 하지. 중.소도시가 그러하듯 학연의 의리 앞에 지연의 끈적함에 윤활 스러움이 돋보이나 외지인들이 들어와서 발을 내딛고 홀로서기에는 힘든 면도 있는 듯 하지. 그리고 영화 극장에는 서울에서 유학 온 친구들과 데이트couple들로 휴일에는 만원이지. 젊음의 거리 대학로에 들어서면 생기가 넘쳐 밝은 장래를 보는 것 같지.
어느 역술가의 주장대로 오경명성의 별빛이 아니드라도 또는 어느 단학 도인의 장래 발전 될 대한민국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희망 있고 빛나는 날들이 되겠지만, 기초가 모자란 開途國의 과도기적 성장 속에서의 부산물인 아픔도 따를 것이라 생각되어지네. 선진이라는 단어와 안정적 미래라는 단어는 무엇이든 다른 것과 함께 동반 상승 될 때 붙여질 수 있는 요원의 단어이지. 급조가 아닌 책임과 권한을 함께한 노력의 세월을 딛고서 생성되는 단어 말이야
추억을 더듬는 과거 지향적 인 것은 음(陰)이고 현재와 미래를 논 하고 그리는 것은 양(陽)이라고 생각되어지지. 음양의 조화가 평형을 이룰 때 최대의 보수적 평안이 오겠지! 밝은 거리는 내일을 향해 밝게 펼쳐지리라 여겨지네.
關東別曲 (관동별곡)
이곳으로 가면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로 가는 진부에서 만날 수 있는 진고개 이지. 길을 아는 사람들은 대관령을 넘지 않고 이리로 해서 서울로 갈 수 있는 곳이며 고개 넘기 전 중턱 쯤 해서 왼쪽으로 가면 전설 속의 소금강 풍경이 우리를 반기지. 첩첩산중 속의 정말 일품의 휴식처라고 생각되어지지. 특히 강릉 과 명주군은 3월 까지 눈이 내려 당혹 하게 하지만 전국에서 물 가뭄 걱정 없는 곳이기도 하지. 그런데 입구에 있는 이곳은 온천 시추공의 성공으로 온천 개발 직전에 있으나 항시 뭐가 이루어지려면 운과 때와 주변 여건 과 자기의 절대 의지가 필요한 것 같아.
옛날 교과서에 의하면 고려시대 문인 안축이 쓴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 강원도존무사로 있을 때에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내용을 담아 관동와주關東瓦注이 있다지. 그리고 다시 조선 조 선조 때의 문인/관료 이었던 송강 정철(1536-1593)이 45세 되던 해에 강원도 관찰사 (원주에 도청을 둔 도지사로 감사 업무수행)로 근무 하던 중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등 팔경을 두루 거치면서 남긴 기행시가 관동별곡關東別曲이며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남긴 분인데 또한 소금강과 경포의 절경에도 취했던 흔적이 있다지. 그 중 유명하여 여러 사람들이 예를 드는 관동별곡의 시작 한귀 절은 이러 하데요. “강호에 병이 깊어 죽림에 누웠다가 관동 삼백리에 방면을 맛디시니 어 와 성은이야 가디륵 망극하다”. 아마 경치에 눌려 흥이 나서 읊었다는 느낌의 덩더꿍 시라는 평이지.
그리고 이것은 김동명 시비인데 이곳 사천면 출신(1901-1968)으로 시인이자 정치인이었고 “파초와 내 마음(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배 저어가요)” 등의 시가 그의 작품이래요.
참고로 조선조의 지방의 행정 경우 관찰사, 도호부사, 목사, 군수, 현감, 현령 인데, 관찰사가 무엇인지? 지금의 도지사 격이라 하는데 다른점은 국군통수권을 일부 갖고 있었다는 것이 지금과 다름이라하지 소인의 연구로는.
강릉시장님 과 눈치우기
여기 유지들 말씀으로는 전에 시장을 평할 때 가장 유능하 시장은 눈잘치는 시장이 성공한 일등 시장이라는 거야 ! 그게 무슨 소리여? 하하 눈이 사람 키만큼 오거나 보통 허리 춤까지내릴 때가 많았다더 군 기상대에 알아봐야 하지만 그런데 시민들 명주군민들이 아우성이겠지 그런데 이때 세상 사람들과 친분이 많아야 눈 치우는 것을 도와 준다는 거야 특히 군부대 국군 장병과 장비의 도움은 친분 즉 발이 얼마나 넓냐에 따라서 .....
정주영 회장님 (Who A Man Of Insight - 통찰의 거인)
그리고 이것은 영동지방 주민들의 숙원사업 이던 아산재단 강릉병원 신축건물이지. 아시다시피 아산재단은 강릉이나 여타 소도시에도 의원과 병원을 갖고 있지. 그런데 강릉 경우 옛날 의 문제는 중한 위급 환자 발생 시 문제 인 거야. 원주로 환자 이송을 해야 하는데 해발 800고지라는 기압조건은 응급환자에게 더 큰 위험을 초래 하곤 했던 거야. 그래서 영동지방에 종합병원을 원했던 것인데 이번에 지어지게 된 것이야. 개인적으로 어떤 계기가 되어 아산재단 산하 무의촌 지역에 설립된 병원을 방문해서 노후 된 시설을 조사 하느라 각 병원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지. 그런데 감탄 되어지는 것은 모든 위치가 정말 환자가 입원만해도 나을 수 있는 정도의 조용하고 아름다운 논밭 속 동산 호수 속에 묻혀있지.
1976년 그 당시에는 헬기를 이용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리 좋은 장소들을 물색하여 착공 지시를 내리셨었는지 감탄할만 하더라고. 물론 그 어려운 시절에 무료 의료 사업을 하시겠다는 혜안도 혜안이려니와. 정주영 명예회장님의 개인적 통찰력은 으뜸으로 쳐도 과함이 없는 것 같지. 특히 정읍, 보령, 보성, 영덕 그리고 지금 존.폐 문제가 생긴 홍천 그리고 이 강릉병원 등 말이야 모두 좋은 위치야. 그리고 이 강릉 병원의 주소지는 강릉시 사천면 방동리 이거든 주문진과 강릉시내 사이인데 1000여 병상을 구비하고 있고 최첨단 기재들이 들여와지고 있지. 또 서울 중앙병원의 의료진이 순환 근무 할 수 있는 백그라운드를 갖추게 되겠지. 그리고 10층 이상에서부터 동쪽을 바라보면 2km전방에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정말로 牧歌的인 풍경이지.
因緣(인연-因은 나이고 緣은 상대방이다)
이글을 쓰는 소인, 필자는 두어 차례 다른 직원들과 회의 후 정주영 명예회장님과 강릉에서 식사를 함께 하는 영광적인 시간을 같이 했었지. 막국수의 정갈한 맛을 풍미 하셨고 탁주의 풍미를 같이 하셨었지. 거구에 거식가 이시더군. 14대 대통령 선거(1992년)출마 후 낙선 (김영삼41% 김대중33% 정주영16%) 후유증으로 김영삼 정부의 압력(?)속에 정주영 명예회장님 께서는 조금 노로 해 보이셨으나 사원들의 사랑은 여전 하셨었지. 같이 동행 하는 비서겸 사진 기자는 언제든 세월의 표식을 사진에 남기셨었고....
사실은 필자인 소인과 소인의 처와의 결혼에 중매쟁이로서 깊이 관여 되신 분인 정주영 회장님이셨지. 인연이었지...
꾹 저구탕 - 관찰사 - 연곡면의 고인돌?
그리고 외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식사 때의 고민은 메뉴 선택 하는 며느리의 심정 보다 더하지. 어디로 가서 무엇을 먹을까 하고 똑같은 고민 말이야. 강릉 의 메밀국수는 많은 갑부를 만들어낸 음식 같고 강릉 시내 택시부광장 옆의 아구찜 또한 일품이지. 또 하나 연곡면에서 주로 시식 할 수 있는 “꾹 저구탕”의 유래는 이러하다네.
송강 정철 관찰사가 찾아옴에 설렁탕을 준비 못해서 갑자기 민물 고기탕을 준비 했는바, 이것이 무엇이냐? 고 물으시매.. 이름은 모르나 저 저구새가 꾹 집어먹는 물고기의 탕입니다. 했는데 “그러면 오늘부터 이것을 꾹 저구탕으로 부르자” 라고 joke 한데서 부터 붙여진 이름이 이래요. 실은 나도 무슨 어떤 고기인지 몰라서 보고 져 하니 주인 이 물고기를 냉장고에서 꺼내 보여 주는데 송사리 같고 중간 멸치 크기만 하데..
그런데 소인이 잘못 관찰한 것인지 학계에서 모르는 것인지 연곡의 꾹저국탕을 먹으러 가다 보면 개울가에 고인돌 모양의 세워지고 그 위에 덮힌 거대한 돌들이 많거든.. 분명 고인돌들인데 보고 자료나 관광안내 자료가 없는 것을 보면.... ??
못잊어! 강릉이여! 솔바람부는 언덕...
여보게, 실은 말이야, 몇 년(1994년) 전 강릉근무 가능여부 의사 타진을 받았을 때 망설였었지. 강원도라 천리 먼 길로 여겨지고 1차선 혹은 2차선 좁은 길 때문에 구불구불 운전솜씨 발휘해야 하는 것도 부담이 되었었지. 새로운 부임지에 대한 호기심은 늘 상 우리에게 있지만,낯선 인물들과의 의례적 상면도 조금은 싫었고, 강릉은 마음에서 멀더라고. 그런데 지금 돌아가는 심정이 어떠한지 아나? 모르겠네! 흔히들 울고 왔다 울고 간다 하더니! 그래 맞아! 지내다 보니 정이 들었나 봐. 특히 몇몇 훌륭하고 인정 어리고 위트 넘치는 강릉의 선배 지인들과의 대화와 어울림을 뒤로하는 것이 더욱 서운한 요소 이지.
작년 겨울 1995년 말에는 회사의 30여명 강릉 부임 직원 가족들과 협력 업체 그리고 우리의 몇몇 강릉 유지 지인들의 모든 가족들과 함께하는 멋있는 그들이 생애의 처음 이라 부르던 “경포의 밤”을 기획해서 강릉 현대 호텔을 빌려서 좋은 밤을 연출했었지. 해맑은 자녀들의 시간 그리고 떨어져 사는 헤어짐 속의 생활을 영유 하는 우리의 직원 어부인 들에 대한 예의의 시간에는, 사나이 남편들의 충성어린 시간 들을 포함해서 각종 진기한 event 로 뒤엎었지. 근사한 장미꽃 증정세례도 풍선세례도 곁들여서 말이야.
호텔 Event 행사 후 떠날 줄 모르는 채 헤어지지 못해서 다시 madam 은 madam 끼리 어린이는 어린이끼리 아자씨들은 아자씨들 끼리 다시 아파트 숙소에서 뭉치고 모여서 밤샘이 되었던 날도 있었지.
소인의 특기가 event 기획이지. 아시가시피, 1990년도 옛날에 KBS에 사랑의 삼각끈이라는 프로그램 내용을 기획하고 출연도 했었지. 마포구 무연고 할머님들로 1대와 우리대학원생들 세대2대와 남산의 고아원생과 동네 부모 없는 어린이들이 3대三代로하여 결연가족을 만들어서 행사를 마치는 것도 기획 하여 상금 상품도 몇천만원 어치 받은 성공case였었지.. 아다시피...
용평스키장
그리고 또한 이 고개 넘어 의 용평 스키장 또한 가족들의 추억 거리 이었지. 초보가 silver course 와 gold course를 넘을 수 있었던 도약의 스키장 이었으니까. 개발이라는 단어보다 아름답도록 정비만 잘 되었으면 하는 강릉. 열두 달 이라도 붙들고 들어 누워 싶은 강릉이기에…. 발길이 안 떨어지는군….
강릉 이별에..
강릉을 떠너자니 발길이 안 떨어지는군…. 우리 대관령 이라는 노래하나 만들어서 불러 볼까? 아님 곡은 다음에 붙이고 “강릉별곡” 작시부터 할까? 아님, 대구사람 손시향 가수의 “이별의종착역” 이나 부를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외로운길 나그네길... ~ ~ 안개 짙은새벽 나만 홀로 떠나간다. 이별의 종착역~~
어려운 얘기야, 다음에 하기로 하고, 대신 신사임 당이 대관령을 떠나서 읊었다는 시중 어머님 그리워(思親-사친)라는 시로 대신 할까!
신사임당 의 사친시(思親詩)
산이 겹친 내 고향은 천리건마는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떼 모래 위에 흩어졌다 모이고
고깃배들 모래위를 오고 가누나.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
색동옷 입고 어머니 앞에 앉아 바느질 할꼬
千里家山萬疊峰 천리가산만첩봉
歸心長在夢魂中 귀심장재몽혼중
寒松亭畔孤輪月 한송정반고윤월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전일진풍
沙上白鷗恒聚散 사상백구항취산
海門漁艇任西東 해문어정임서동
何時重踏臨瀛路 하시중답임영로
更着斑衣膝下縫 갱착반의슬하봉
Good luck! Bye! GangReung!
첫댓글 노가다 햐시면서 뭔글이 이렇게 훌륭한고...
읽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성함 함자를 댓글과 함게 맞이 합니다
그리고 두서없을것 같은 긴글을 장독 하셨음은 눈도 건강 하시고
또 지내력도 건강 하신것 같습니다
올해도 복 많이 지으시고 복 많이 안으세여
김 선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