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를 본문으로 선택하면서 과연 내가 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설교 한편 나올까?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 수렁에 아주 빠져 버리지는 않았는데 상반신만 겨우 빠져나온 느낌입니다.
우리는 욥기를 고난의 책으로 알지만 사실 욥기는 은혜의 책입니다. 성경의 주류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삭,야곱,요셉의 이야기가 주류입니다.
그런데 욥기의 연대는 출애굽기보다 앞선 창세기 족장시대입니다. 욥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통 유대인이 아닙니다. 욥도 우스땅에 살았고, 그 친구들도 이방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욥의 믿음과 견줄만한 믿음의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욥과 논쟁하는 친구들 데만 사람 엘리바스, 수아 사람 빌닷, 나아마 사람 소발과 마지막에 등장하는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가진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들의 출생을 알수 있는 단서는 발닷이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가 낳은 수아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출생과 지역은 주류가 아니었지만 그들의 신앙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가끔 우리는 자신이 가장 잘 믿고 헌신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욥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합의 시대에도 바알에 무릎 꿇지 않은 7천명의 순결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준비하신 것처럼, 우리의 믿음과 헌신을 자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욥기입니다. 주님앞에 더 겸손한 신앙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열정과 헌신으로 주님을 섬겨도 겸손하지 않으면 유익이 없습니다. 겸손은 신앙의 왕관입니다. 특별히 열정으로 헌신하는 분들은 욥기를 통해 더 낮아지고 겸손하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원합니다.
고난: 목적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고난이 견디기 힘든 이유는 목적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그 순간 목적을 향해 가던 우리의 삶은 중지됩니다. 건강으로 인해, 재정적인 손실로 인해, 관계의 파괴로 인해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는 고통을 견디느라 목적지를 잃어버립니다. 영국의 수학자이며 작가인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라는 필명으로 1865년에 발표한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길을 잃고 헤맬때 갈림길 앞에 멈춰 섰습니다. 그때 나무 위에서 말하는 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 '체셔 캣'(Cheshire Cat)을 발견합니다. ‘앨리스’가 '체셔 캣'에게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려줘"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체셔 캣'이 말합니다.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 지에 달렸지" 그러자‘앨리스“가 "어디든 상관없어" 라고 말합니다. '체셔 캣'은‘엘리스’에게 웃으며 말합니다. “목적지를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 없어.”고난속에서 우리는 고난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목적지를 향해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시간과 공간의 멈춤을 경험합니다.
계절마다 이동하는 철새들도 무작정 앞에선 새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남쪽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배든, 비행기든지 방향을 잡고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서 움직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목적을 향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맙니다.
욥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동방의 의인이었고, 많은 자녀들을 두었으며, 많은 하인들과 짐승들 재산을 가졌고, 명성을 가졌습니다.
아마 무엇 하나 아쉬을 것이 없던 그의 삶의 목적은 현상유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귀로만 하나님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신앙적인 사람 같았으나 그의 속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욥에게 닥친 고난은 그의 삶을 완전히 파괴했습니다. 욥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뭘하시려는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고난을 주셨는지 도대체 알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견디는 것이 너무 힘들고 아팠습니다. 소중한 자녀들을 다 잃고, 재산도 다 잃고, 명예도 잃고, 건강도 잃고, 아내도 떠났습니다. 소중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친구들은 찾아와 위로하는 대신 “숨기고 있는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욥이 무고함을 주장하지만 이 친구들은 믿어주지 않습니다.
그는 고립되었고 버림받았습니다. 그런데 고난 당하는 욥에게서 고난을 견뎌내는 중요한 열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난에 처했을 때 욥의 열쇠를 찾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목적으로 가는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귀로만 하나님을 들었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믿음 위에 섰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주신 분이 가져가셨으니 원망하고 불평하고 분노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욥의 믿음이었습니다. 줄 때는 언제고 왜 가져가냐고? 할만합니다. 울부짖고 항의하고 하나님이 보이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주신 분이 가져가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입술로 범죄하지 않습니다. 정말 귀한 믿음이고 본받아야 할 믿음입니다. 제가 영동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중에 천문기도원 원장님이 오셔서 기도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요지는 “고집이 너무 세서 하나님이 꺽어 놓았으니 감사하라”그때는 해열제와 항생제를 달고 살면서 호흡도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축복이니 감사하라”는 말을 듣는데 어찌나 화가 나는지 황당했습니다. 당장이라도 “이런 미친 사람을 봤나?”싶었습니다. 쌍 욕을 하겠더라구요. 그런데 그 순간 이 고난의 목적을 알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축복하고 감사하라”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후에는 알게 되었고, 그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목적을 알때까지 우리도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다만 한가지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만 기대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욥은 세상이 줄수 있는 도움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23:8-9절“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사방이 다 막히고 하나님도 보이지 않는 상황속에서 욥은 깨닫게 됩니다. 하늘로 향한 길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원망과 불평과 분노와 저주를 쏟아놓은 대신 하늘의 도움을 기대합니다.
작가겸 강연가인 스토미 오마샨은 <닥터 지저스>에서 말합니다. “고난이 피해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견디면 고난이 주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유익을 얻습니다. 나는 두 아이들을 출산하면서 극심한 고통을 겪었지만 아들과 딸을 얻었습니다. 출산의 고통은 생명의 유익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 고난을 감수할 용기가 생겼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꺾고, 우리가 오직 주님만 바라볼 때까지 기다립니다. 우리가 아무 희망이 없다고 절망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전적으로 그분만 바라보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모든 은혜와 선물이 하늘로부터 온다고 고백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고난의 목적입니다.”하나님은 욥의 인생의 목적이 부요한 삶을 누리는 현상유지가 아니라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손으로 하나님을 만지는 영적인 신앙인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고난은 잘못된 인생의 목적을 수정하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이 설교가 고난 중에 있는 분들에게 위로가 되기 바랍니다. 세상의 모든 길은 막혔지만 눈을 들어 하늘로 향한 길을 바라보십시오. 그 위에 계신 전능하신 주님이 고난 가운데 우리의 목적지를 발견하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고난: 순금의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난에 대한 가장 흔한 해석은 고난을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광야를 지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광야 40년동안 이스라엘은 훈련과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40년만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백성들의 불순물들과 가나안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걸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을 거역했던 사람들이 다 죽은 다음, 새로운 세대와 함께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불순물을 제거한 순금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순금은 30년이 지나자 빛을 잃었습니다. 겉은 도금 되었으나 그들의 속은 검은 쇠덩어리였던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새 문화의 창조자가 되지 못하고 가나안의 문화에 적응했습니다. 믿음의 가치관으로 살지 못했ㄷ기 때문에 탐욕과 불순물들이 그들 안에 쌓였습니다. 우리안의 죄성과 탐욕은 기회만 오면 고개를 처들고, 우리를 옛 사람으로 돌려 놓습니다.
저는 신대원을 자퇴했었습니다. 아무도 불의 앞에 나서서 말하지 않는데 실망하고 분노했습니다. 교통사고로 버스 밑에서 죽은줄 알았던 혈기가 여전히 살아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순물을 제거하는데 40년도 부족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단련이란 말은 모든 불순물을 빼낸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불순물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 불순물이 우리안에 남아있는 한 동행하지 않습니다. 에녹을 묵상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목사인 나도 주님과 동행하지 못한 채 동행하기를 원할 뿐입니다. 에녹은 365년을 이 세상에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walk with God. 하나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집사람하고 호수공원을 걷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손을 잡고 걷습니다. 체온이 전해지고, 얼굴을 바라보게 되고 대화하게 됩니다. 동행은 하나님을 손끝으로 체온을 느끼듯 주님을 느끼는 것입니다. 주의 얼굴을 보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목적지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목적지로 우리를 이끌어가십니다. 그래서 욥은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고 고백합니다. 아멘!
우리의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고난을 즐겨 사용하신다고 오해하지 마십시오. 고난은 하나님의 마지막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호수공원을 걸으며 바람속에서, 속살을 드러내는 목련에서, 민들레 꽃에서, 죽은 것 같은 나무에서 새썩이 돋는 것을 보며 그 분을 느끼고 대화하고 그분의 손을 잡고 이끄시는대로 그분의 목적지를 향해 동행해야 합니다. 고난이 있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나는 너를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힘드십니까? 고난중에 있습니까? “그래도 당신에게 주님과 동행의 가능성이 있기에 고난이 있습니다.”그래서 고난도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빚으시는 사람> 맥스 루케도의 책입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루위에서 녹아내려 형체를 잃은 미완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맥스도 그 과정을 겪었는데 영혼의 슬럼프, 혹은 기근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 짙은 안개처럼 의문이 가득한 골짜기와 절망의 저지대로 휩쓸려 간다. 동기는 사라지고 소망은 너 멀리 있고 여전히 책임감은 짓누른다. 정열? 문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열심? 그런 것이 있을 리 없다. 연단의 시간은 죽음이나 이별, 파산, 회의와 함께 찾아온다. 전등 스위치가 내려지고 방 안에는 온통 어둠뿐이다. 여러분은 모루 위에 있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그는 연단을 피하지 말고 체험하라고 말합니다. 연단이 갖는 유익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 전체를 지켜보시는데 고난속에 있을 때도 보십니다. 도구는 제 모양을 갖추고 있을 때만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날이 무딘 도끼나 휘어진 나사돌리개는 손질이 필요하듯이,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모루 위에 올려놓으신다면 감사하라. 당신이 아직은 고쳐서 쓸 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일 테니까.”
못쓰는 도구는 버리지만 고쳐 써야 할 도구는 불에 담그고 망치로 두들겨 사용합니다. 모루위에 놓인 우리를 내리치는 도구는 다양하지만 목적은 하나입니다. 고장난 부분을 고쳐 당신을 통해 일하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고난중에 있습니까? 인생의 목적을 새롭게 하시고, 여전히 당신을 친구로 삼아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주의 은혜가 있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