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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8일
[1947년] 대만 ‘2ㆍ28사건’ 발생
← 1992년 2월 28일, 대만 야당 민진당 주최로 대북시의 한 공원에서 대규모 양민학살사건인 `2.28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집회가 열렸다.
1947년 2월 28일 중국 대륙에서 대만으로 건너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 본토인의 시위를 무력 진압, 수만명의 희생자를 낳은 사건이 발생했다. 통상 ‘2.28참안’ 또는 ‘2ㆍ28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중국 근대사에서 동족간의 학살이라는 최대의 비극으로 기록돼 있다.
사건은 지난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은 대만을 중국에 반환했고, 이에따라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진의를 대만의 행정대표 겸 경비사령관으로 현지에 파견했다. 당시 일본은 항복선언 이후 대만통치에서 사실상 손을 떼 대만은 행정 및 치안 공백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터져나온 것이 ‘2ㆍ28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은 정부의 단속반이 밀수담배를 적발하는 과정에서 촉발됐다. 이날 수도 대북의 태평정 구역에서 밀수 담배를 팔던 한 대만인 노파가 단속반과의 실랑이끝에 부상을 입었다. 그 과정에서 한 행인이 누군가의 총에 맞아 숨졌고, 총을 쏜 범인은 인근 파출소에서 보호를 받고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분개한 수천명의 대북 시민들은 다음날 대만 전매청을 포위, 살인자 처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민들은 공매국을 파괴했고 이어 소요는 전국으로 번졌다.
당시 사건을 주도한 임헌당 등 대만 지식인들은 그해 3월 2일 ‘2ㆍ28사건’ 처리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금지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등을 촉구했다. 진의는 중국의 국민당군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어 3월 9일 대만 북부 기륭에 진주한 국민당 21사단은 1주일 만에 소요를 진압했다. 2.28사건 처리위의 주요 간부들은 대부분 체포돼 상당수는 처형됐으나, 사망자 수는 아직도 확실치 않다. 최소 1천명에서 최고 10만명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28사건이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으로, 38년 만에 계엄령이 해제되고 대만에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였다. /조선
[1967년] 20세기 미국 잡지계의 대부 헨리 루스 사망
← 미국의 ‘타임’ ‘라이프’ ‘포춘’ 誌 등의 발행인이었던 헨리 루스.
미국의 ‘타임’ ‘라이프’ ‘포춘’ 誌 등을 비롯, 수많은 잡지를 창간한 세계적인 잡지왕 헨리 루스가 1967년 2월 28일 향년 68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20세기 미국 신문ㆍ잡지계의 가장 유력한 인물이자 가장 언론적인 존재였다. 1898년 중국 산둥성에서 장로교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4세가 되던 해 미국으로 건너온다.
그러던 1923년 잡지왕으로서의 행운이 그에게 찾아왔다. 대학시절 그의 클라스메이트였던 브리턴 헤이든과 함께 당시 미국의 주요 신문ㆍ잡지들이 해외뉴스를 거의 외면하고 있는 것에 착안, 세계 뉴스를 분야별로 요약해 보도하고 논평하는 형식의 뉴스잡지인 ‘타임(Time)’을 발행한 것이다. ‘타임’지는 창간 5년 만에 흑자를 내며 기존 미국 사회의 신문ㆍ잡지계에 파장을 몰고 왔다. 잡지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아 1930년엔 미국의 격주간 종합 경제지 ‘포춘(Fortune)’을, 1936년엔 사진중심의 미국의 대표적인 주간그래프지 ‘라이프(Life)’를 발행했다.
특히, ‘라이프’지는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호기를 놓지지 않고 그 빛을 발했다. 커다란 지면과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는 시사뉴스, 높은 질의 사진인쇄 그리고 새로운 의식을 바탕을 한 포토스토리로 시각정보에 굶주려있던 미국 대중의 마음을 사로 잡으며 이후 포토저널리즘의 범위를 확장시키는데 기여했다. 이외에도 그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Sports Illustrated)’와 주부용의 ‘하우스 앤드 홈(House & Home)’ 등을 발행했고, 그가 만든 잡지는 거의가 실패없이 오늘날 정상을 달리고 있다. /조선
[1960년] 2·28대구학생시위사건 발생
← 노모와 함께 선 장면(오른쪽)
1960년 2월 28일 경상북도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에 항의하는 시위사건이 일어났다.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골적인 선거부정을 획책한 자유당 정권은 민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대구 선거유세를 방해하기 위해 일요일인 이날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도구로 이용당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시위를 결의했다. 경북고등학교 학생의 결의문 낭독과 시내 가두행진이 이어졌으며 다른 학교 학생들의 합류로 시위가 확대되면서 경찰과 크게 충돌했다. 이 사건에 이어 3·15부정선거에 대한 반대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고, 결국 민주주의 혁명인 4.19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브리태니커
[1922년] 이집트, 영국으로부터 독립
1922년 2월 28일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이집트가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이집트는 BC 7세기에 아시리아 침략과 BC 30∼AD 395년에 로마의 점령을 겪은 이후 맘루크 왕조가 지속되면서 아랍화가 완성되었다. 1517년에는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어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의 지배를 받는 속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1798년에 프랑스 군대가 침략해 이집트를 유럽의 정치무대로 끌어들였다. 이후 무하마드 알리가 오스만을 명목상의 종주국으로 하는 왕조를 일으켰으나 지나친 팽창주의 정책으로 인해 이집트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졌다. 1882년 내란으로 영국의 지배를 받게 된 이집트는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가 1922년 입헌군주국으로 독립했다./브리태니커
[1533년] 프랑스의 사상가·문필가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출생
← 몽테뉴, 작자 미상의 프랑스 화가가 그린 초상화(16세기), 프랑스 샹티이에 있는 Musee Conde 소장
1533년 2월 28일 태어남 / 1592년 9월 13일 죽음
“독서는 정확한 판단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지, 단순히 기억을 개선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 미셀 드 몽테뉴
몽테뉴는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문필가이다. 몽테뉴 성의 귀족가문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라틴어에 능통했고 철학과 고전 공부에 열중했다. 이후 툴루즈대학교에서 법률을 전공했다. 1568년 6월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몽테뉴의 영주가 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집필활동을 시작했다. 16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광신적인 종교전쟁 중이었지만 몽테뉴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견지했다. 인간 중심의 도덕을 제창한 그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 위해 에세(essai)라는 문학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에세를 통해 자신의 견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탐구했다. 그의 <수상록 Essais>은 인간 정신에 대한 회의주의적 성찰과 라틴 문학에 대한 해박한 교양을 반영하고 있다./브리태니커
[1922년] 김석출 동해안 별신굿 최고의 무당 출생
1922. 2. 28 경북 영일 ~ 2005. 7. 25 부산
동해안의 별신굿 최고의 무당.
일명 경남(京南)이라고도 한다. 굿뿐만 아니라 염불에도 능하며 호적·장구·꽹과리 등의 연주는 따라갈 사람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할아버지 천득(千得)이 춤과 노래를 좋아하여 이옥분이라는 무녀(巫女)를 첩으로 얻으면서부터 무가(巫家)를 이루어 현재 70여 명이 세습무로서 무업에 종사하고 있다. 친족들이 부산·울진·강릉·주문진 등지에 살면서, 부산으로부터 강원도 거진까지 동해안을 따라 별신굿·오구굿 등의 굿을 했다. 2005년 7월 25일 오후 11시, 부산 기장병원에서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1904년] 이규환(李圭煥) <임자없는 나룻배>(1932)를 감독한 한국의 영화감독·작가 출생
← 이규환이 감독한 <임자 없는 나룻배>(1932)의 한 장면
일본 신코키네마에 들어가 연출수업을 받았다. 1932년 귀국하여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로 데뷔했다. 한 시골 농촌에 철도공사가 시작되면서 펼쳐지는 농민들의 피폐한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초창기 한국영화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이후 1976년 은퇴작품으로 만든 〈남사당〉까지 총 23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37년에 만들어진 〈나그네〉는 또 하나의 문제작으로 일본 신코키네마와 이규환의 성봉영화원과의 합작으로 촬영되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사실주의의 대가(大家)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후 〈새출발〉(1939)·〈돌쇠〉(1941) 등을 연출한 이후 그는 총독부가 조선의 모든 영화사를 없애고 일본의 국책영화사인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만들자 영화계를 떠났다. 8·15해방이 될 때까지 노동자로 생활했던 그는 1947년 영화계에 다시 돌아와 〈민족의 새벽〉·〈돌아온 어머니〉 등의 민족주의적 영화를 발표했다. 이후 한국영화의 부흥기인 1955년에 〈춘향전〉을 발표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춘향전〉은 최초의 35㎜ 영화로서 해방 이후 대중영화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제5회 서울시문화상을 받았고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다./브리태니커
[1886년] 교육자·국학연구자 안확(安廓) 출생
일제강점기에 국학만이 아니라 정치사·문학사·국어학·미술 등의 여러 분야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호는 자산(自山)·팔대수(八大搜), 필명은 운문생(雲門生).
소학교를 마친 후 1900년대에 서북지방의 교육활동에 참가했다. 1910년 마산으로 내려가 창신학교 교사로 근무한 뒤 1914년경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정치학과에서 공부했다. 1916년 다시 마산으로 돌아와 독립운동 비밀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의 마산지부장을 맡으면서 3·1운동에 관여했다. 서울로 돌아와 1921년 〈아성〉, 1922년 〈신천지〉 편집일을 했다. 1928년부터 4년 동안 전통음악인 아악을 정리하는 데 힘썼고, 이를 바탕으로 국어학·국문학에 관한 새로운 책을 펴냈다. 1930년대 들어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약 7년 동안 만주·하와이 등을 유랑했다. 1938~40년에 몇 편의 글을 썼으나 이후에는 거의 붓을 들지 않았으며, 8·15해방이 되자 친구들과 정당을 만들어 정치이념을 펴보려 했으나 1946년 실행하기도 전에 죽었다.
그의 국학연구는 민족사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이는 "아(我)에게 자각이 있으면 비아(非我)도 아화(我化)하고 아에게 자각이 없으면 아도 비아화한다"로 요약될 수 있다. 초기에는 국어학과 국사학에 관해 연구했는데, 국어학에 있어서는 특히 국어의 본질에 관심을 갖고 다른 언어와 비교하거나 계통과 역사를 연구했다. 조선민족의 심적 현상 변천과 발달을 연구한 〈조선문학사 朝鮮文學史〉(1922)에서는 환인-환웅-단군의 3신사상인 종(倧)사상을 민족의 고유사상으로 보고 이 사상이 우리 민족사를 어떻게 발전시켜왔는지를 밝혔다. 그외 아악을 바탕으로 전통시가를 정리한 〈시조시학 時調詩學〉(1940)을 펴냈고, 국사학 분야에서의 연구업적은 1923년에 펴낸 〈조선문명사 朝鮮文明史〉로 대표된다. 이 책은 지은이 스스로 정치사라고 이름붙이고, 한국역사에는 민주정치제도의 전통이 잠재되어 있는데 그것은 곧 자치제이며, 민족의 장래는 자치제의 전통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서로는 〈조선문법〉(1917)·〈조선문학사〉·〈조선문명사〉 등이 있고, 그밖에 국학과 관련된 〈조선의 미술〉·〈조선의 음악〉 등 1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브리태니커
[1882년] 정용대(鄭用大) 한말의 의병장 출생
1882(고종 19). 2. 28 경기 적성~1910.
할아버지는 의병 인태(寅泰)이며, 아버지는 두환(斗煥)이다. 1907년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위하여 고향에서 의병을 일으켜 창의좌군장(倡義左軍將)이라 칭하고, 적성(積城)·양주(楊州)·풍덕(豊德)·김포(金浦)·통진(通津) 등지에서 수백 명의 의병을 이끌었다. 1908년 2월 27일 양주군 석적면(石積面)에서, 3월 2일에는 회암면(檜巖面)에서 일본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했다. 이후 김포·적성 등지에서 군자금 및 군량미를 조달하고 무기를 입수하며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했으나, 1909년 10월 28일 경기도 일대의 의병 소탕전을 전개한 일본 토벌대에 체포되었다. 경성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순국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820년] 영국의 삽화가·풍자화가 테니얼 출생
← 테니얼의 시사풍자 만화 〈파일럿의 하선〉(1890) :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에 의해 해임된 것을 풍자했다
1820. 2. 28 런던~1941. 2. 25 런던.
〈펀치 Punch〉지에 실린 작품들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1865)·〈거울 속의 앨리스 Through the Looking-Glass〉(1872)를 위해 그린 삽화로 특히 유명하다. 테니얼은 왕립 아카데미 부설학교에 다녔으며, 1836년 처음으로 영국 미술가협회 전람회에 출품했다. 1845년 새로 지은 웨스트민스터 궁의 벽면 장식을 위한 디자인 경연대회에 488㎝ 크기의 시사풍자 만화로 응모해 100파운드를 받았으며, 상원의 2층 대기실(또는 '시인들의 방')에 프레스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1850년 〈펀치〉의 초청으로 리처드 도일의 뒤를 잇는 풍자만화가가 되어 존 리치와 함께 일했으며 여기에서 거의 평생 동안 일했다. 그는 중대한 주간 정치 삽화를 점차 완전히 떠맡았다. 〈펀치〉에 실린 그의 삽화에서 테니얼은 정치적인 시사풍자 만화에 새로운 차원을 더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시사풍자만화는 비스마르크의 사임을 주제로 한 듯한 〈파일럿의 하산 Dropping the Pilot〉(1890)일 것이다. 테니얼은 1893년 경(卿)의 칭호를 받았으며, 1901년 〈펀치〉에서 은퇴했다. 그는 많은 책에 삽화를 그렸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거울 속의 앨리스〉를 위해 그린 삽화는 대단히 섬세하고 재치가 있으며 루이스 캐럴의 글에 매우 잘 어울린다. 이 삽화로 그는 국제적인 명성과 계속적인 인기를 얻었다./브리태니커
[2005년] 한국화가 장우성(張遇聖) 사망
← 자화상(1999)
1912. 6. 22 경기 여주 ~ 2005. 2. 28 서울
해방 뒤 한국화 화단의 기틀을 만든 원로 작가 월전 장우성씨가 2005년 2월 28일 오후 3시40분께 서울 팔판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 호 월전(月田). 경기도 여주 출생. 1933년 육교한어학교(六橋漢語學校)를 졸업하고 1937년 선전(鮮展)에 입선한 후, 1941∼1943년 연속 특선하여 주목받기 시작했다. 1946∼1961년 서울 미술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1963년 미국 워싱턴에 동양예술학교를 설립, 1964년에는 미국 국무성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69년 한국미술가협회 부이사장, 1970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에 취임하고 그해 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또 그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이 되고, 1971년부터 홍익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1950년 동화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1975년 국회의사당의 벽화 〈백두산 천지〉와 이순신·윤봉길·유관순 등의 영정을 제작했다. 김은호의 영향으로 담채의 사실적인 인물화와 문인화적인 정신세계를 고결한 선으로 표현한 인물화를 많이 남겼다.
[2000년] 휴대폰 가입자 2,500만명 기록
국내 이동전화 이용자가 2500만명을 넘어서 국민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이동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정보통신부는 2000년 2월 28일 이동전화 신규가입자가 1월보다 118만 3천명 증가한 2542만8천명으로 집계됐다"고 3월 14일 발표했다. 전체 인구의 절반이상(53%)이 이동전화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이동전화 가입자는 1999년 9월 일반전화(시내전화)를 처음으로 앞지른 데 이어 5개월 만에 300만명 이상의 격차를 벌렸다. 이동전화 가입자는 5월말 2732만명까지 증가했으나 6월부터 시작된 이동전화 단말기 보조금 폐지로 6월말에는 100만명 이상이 감소한 2619만명으로 집계됐다. /조선
[1992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安斗熙) 백범 묘소 참배
백범 김구선생의 암살범인 안두희씨 3. 1절을 앞둔 1992년 2월 28일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내 김구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안씨는 묘소앞 대리석제단에 30여분간 엎드려 오열했으며 참배를 마친 뒤에도 10여분 동안 묘소앞 잔디밭에 누워 흐느꼈다. 안씨는 "전국민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한다"며 "그러나 범행 당시 배후는 없었으며 우발적인 범행이었다"고 부인했다.
참배를 마친 안씨는 "지금까지 네차례 자살을 하려고 했지만 하지 못하고 오늘이야말로 내 제삿날이라는 심정으로 참배했다"고 말했다. 안씨가 김구선생 묘소를 참배한 것은 1949년 김구선생 암살이후 세번째다.
백범 김구선생 암살범인 안두희씨는 1996년 10월 23일 밤 피살당해 사망했다. /조선
[1991년] 이라크 항복으로 걸프전 종결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야기된 걸프전이 1991년 2월 28일 이라크의 사실상 완전 항복으로 막을 내렸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이날 대이라크 전투행위를 중단한다고 선언한 데 이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도 이날 이라크군에 전쟁을 중지토록 명령함으로써 걸프전이 사실상 종결됐다.
부시 대통령의 정전 선언 후 걸프전 전 전선에서 총성이 완전히 멈춰 걸프전은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2백9일, 전쟁돌입 43일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 전쟁에서 다국적군은 이라크에 대해 10만여 회의 공중폭격을 실시해 이라크군 42개 사단가운데 41개 사단을 무력화시켰다. 전쟁 중 이라크가 15만명의 사망자를 낸 데 반해 다국적군은 125명의 사망자만 내 대조를 이뤘다.
전문가들은 이라크의 패인을 제공권 확보 실패와 전자전 장비의 미흡을 들었다. 미국은 전쟁 중 그동안 실전에 배치하지 못한 하이테크 병기를 마음껏 사용해 전쟁 결과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조선
[1969년] KAL 민영화
정부는 대한항공공사(KAL)를 10년분할 상환조건으로 14억5천3백만원에 한진상사에 정식 불하했다. KAL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던 산업은행은 전격적으로 KAL의 정부주식 1백45만3천주(전체의 96.3%)를 수의계약으로 한진상사에 매각, 2월 28일 신문회관에서 주주총회를 열고 정식운영권을 넘겼다. KAL 주주총회에서 장성환 사장 등 전임원의 사표를 수리하고 새 이사진을 선출했는데 사장과 부사장은 대한항공공사법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키로 돼있어 이날 선정하지는 않았으나 회장에는 한진재벌의 총수 조중훈씨가, 사장엔 전명섭씨가, 부사장에는 한진상무 조중건씨가 내정되어 있었다. 한진은 KAL 운영확장을 위해 4발제트 여객기 2대와 DC-9 1대 등 신형여객기를 도입, 본격적인 항공사업에 착수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조선
[1935년] 듀퐁사 ‘폴리머 66(나일론)’ 개발
1935년 2월 28일 듀퐁사에서 W.H캐러더스가 ‘폴리머 66(나일론)’을 발명했다. 나일론은 합성고분자 폴리아미드의 총칭으로 아미드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는 사슬모양의 고분자이다.
1926년 독일 화학자 H.슈타우딩거의 연구에 자극받아 듀퐁사에서 나일론 연구를 시작했다. 듀퐁사는 1931년 폴리에스테르의 섬유화에 성공했고, 1935년 나일론을 발명했다. 1938년에는 뉴욕세계박람회장에서 그동안의 나일론 연구를 발표하면서, 나일론 스타킹의 판매로 세계최초의 합성섬유가 탄생하게 된 것이었다.
나일론은 합성섬유 중 최대의 생산액을 보였다. 초창기, 나일론은 양말로 많이 사용되어 인기를 누렸고 그 후 안감, 속옷, 불라우스 등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또 타이어코드, 산업용, 플라스틱 분야에서도 많이 이용되어지고 있다. 나일론, 폴리에스테르, 아크릴은 3대 합성섬유이다. /조선
[1914년] 찰리 채플린 영화에 데뷔
← 〈방랑자〉에서의 채플린
영국의 희극배우, 영화감독 채플린(Chaplin, Charlie, 1889~1977)은 뮤직홀 연예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를 따라 5세 때 첫 무대에 섰다. 가난과 어머니의 정신발작, 고아원 등 불우한 환경을 거쳐 10세에 극단에 들어갔다. 점차 천부의 재능을 인정받아 17세 무렵 당시 영국 최고의 인기 희극극단 프레드카노극단 단원이 되었다. 댄스·노래·어릿광대·몸짓흉내·무언극 등 희극배우로서의 재질을 키우기 위한 수업을 하게 된 것이 바로 이 시절이었다. 1912년 카노극단이 미국 순회공연을 할 때 영화제작자 M.세넷은 그를 할리우드로 초청하였으며, 채플린은 여기서 큰 행운을 얻었다. 그 당시의 미국 영화는 발전단계에 있었고, 세넷은 희극영화 제작의 명수인 동시에 미국 영화의 개척자였으므로 채플린의 재능을 대성시켜 주는 어버이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14년 그의 첫 영화가 개봉되었고, 그후 키스턴·에사네·뮤추얼 등의 회사에서 1917년까지 수십 편의 단편영화를 자기가 각본·감독·주연을 겸하면서 제작하였다. 이 작품 속에서 콧수염, 실크 해트, 모닝 코트, 지팡이 등을 이용한 거지 신사의 분장과 연기로 그의 독특한 개성을 창조하여 이 이미지로 세계적인 인기인이 되었다. 눈물과 웃음, 유머와 페이소스가 당시 그의 희극에 대한 대명사였으나, 《어깨 총 Shoulder Arms》(1918) 무렵부터 그가 장년에 접어든 인간적 성장의 자취가 작품에 투영되어 사회적 풍자와 비판이 곁들여지게 되어 《가짜 목사 The False Priest》(1923) 《황금광 시대 Gold Rush》(1925) 등의 걸작이 나오게 되었다. 또한 《파리의 여성 A Woman of Paris》(1923)은 그가 감독만 한 비련(悲戀)의 운명 드라마로 뛰어난 심리묘사를 보여주었다
그밖에
2006년 형제 대학총장 국내 3번째 탄생
2006년 현역 ROTC 3부자, 육군서 첫 탄생
2006년 충북대 총장에 임동철씨
2006년 9·11 억울한 옥살이 첫 배상
2006년 전남 여수 등 7곳 지역특구 지정
2006년 모든 특1급 호텔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 허용
2001년 북한 역사학자 박시형 사망
1997년 이란, 지진으로 3천여명 사망자 발생
1996년 제6회 용평국제스키대회 개막
1994년 이스라엘-PLO 대립
1994년 수학능력시험 년 1회 실시, 95학년도 대학입시제도 개선안 발표
1993년 프로야구 선수 양준혁, 사상 첫 억대타자 1억1천2백만원에 삼성 입단
1988년 제15회 동계올림픽 폐막(캐나다 캘커리)
1987년 평화의 댐 착공
1986년 스웨덴 올로프 팔메 수상 암살
1981년 영산강 하구둑 완공
1980년 콜 서독수상, 동서독회담 제의
1979년 정부, 신생국 세인트루시아와 외교관계수립을 발표
1979년 영화감독 하길종 사망 -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
1976년 문교부, 교수재임명 첫 실시
1976년 시외버스 춘천호에 추락 32명 익사
1974년 영국 보수당 총선 패배
1973년 고교 평준화 조치
1973년 국내 최장 정암터널 관통
1963년 인도의 초대 대통령 프라사드 사망
1953년 발칸삼국동맹 조인
1953년 양정모 레슬링으로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한국의 체육인 출생
1950년 군인복무령 공포
1948년 김구,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
1938년 발칸협상,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합병 승인
1930년 노신영 한국의 행정관료·외교관·정치가 출생
1930년 쿠퍼 바딘·슈리퍼와 함께 초전도성에 관한 BCS 이론을 개발한 공로로 197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물리학자 출생
1928년 장개석,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취임
1925년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사망
1916년 미국의 소설가 헨리 제임스 사망
1915년 메더워 버닛 경과 함께 후천성 면역내성에 관한 연구로 1960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동물학자 출생
1915년 모스틀 희극 연기로 유명한 미국의 배우·가수·화가 출생
1910년 미넬리 1940~50년대 뮤지컬 영화에 새로운 도시 감각과 활력을 불어넣었던 미국의 영화감독 출생
1909년 스펜더 1930년대 좌파의 '새로운 저술'을 표현한 시로 명성을 얻은 영국의 시인·비평가 출생
1906년 황성신문 복간
1907년 캐니프 미국의 만화가 출생
1901년 미국 화학자 폴링 출생
1901년 마롄량 중국의 근대 경극(京劇) 배우 출생
1900년 윤상원 한국의 축산학자 출생
1900년 영국 노동당의 전신인 노동자대표위원회 설립
1897년 인천 전보국 설치
1896년 헨치 미국의 의사 출생
1894년 헤크트 미국의 소설가·극작가·영화대본작가 출생
1893년 푸도프킨 등장인물의 내적 동기와 감정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려고 했던 소련의 영화감독·영화이론가 출생
1882년 바스콘셀로스 멕시코의 교육자·정치가·수필가·철학자 출생
1882년 퍼라르 아름다운 외모, 극적인 역량, 친근한 음색으로 유명한 미국의 소프라노 가수 출생
1877년 조라크 단순하고 구상적인 주제를 사용한 미국의 전통주의 조각가 출생
1877년 브뢰이 유럽과 아프리카 선사시대 동굴벽화의 권위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고고학자 출생
1875년 영국 발명가 거니 사망
1876년 카펜터 미국의 작곡가로 관현악에 재즈 리듬을 사용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 출생
1873년 사이먼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나치 독일에 대해 유화정책을 편 대표적인 영국의 정치가
1866년 이바노프 러시아의 철학자, 고전학자, 상징주의 운동을 이끈 시인 출생
1865년 시먼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을 옹호한 최초의 영국 시인·비평가·문인 출생
1865년 그렌펠 평생 캐나다 래브라도 지역민을 위해 봉사한 영국의 의료 선교사 출생
1860년 버거 미국 사회당을 창설한 인물 출생
1860년 키트리지 당대에 셰익스피어, 초서, 토머스 맬러리 연구의 최고 권위자였던 미국의 문학자·교사 출생 1859년 카조리 당대의 가장 뛰어난 수학사 연구가 중 한 사람인 스위스 태생 미국의 교육가·수학자 출생
1857년 루아지 로마 가톨릭 교회 내 모더니즘의 창시자로 평가받는 프랑스의 성서학자·언어학자·종교철학자 출생
1849년 메링 독일의 의사·생리학자·약학자·실험병리학자 출생
1841년 뮌 로마 가톨릭 신앙을 사회개혁의 수단으로 주창한 프랑스의 그리스도교 사회주의 지도자 출생
1833년 슐리펜 제1차 세계대전 참전한 독일군 장교 출생
1833년 독일 사상가 힐티 출생
1829년 구스만 블랑코 베네수엘라 대통령이자 당대의 전형적인 라틴아메리카 군사독재자 출생
1824년 블롱댕 수면으로부터 48m 높이에 설치된 335m 길이의 줄을 타고 나이애가라 폭포를 건너는 데 성공해 부와 명성을 얻은 줄타기 곡예사, 공중 곡예사 출생
1823년 르낭 프랑스 비판철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프랑스의 철학자·역사가·종교학자 출생
1820년 라셸 17년 동안 '코메디 프랑세즈'를 풍미한 프랑스의 고전비극 여배우 출생
1814년 프레미 플루오르 화합물에 관한 연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화학자 출생
1812년 아우어바흐 주로 시골 생활에 대해 쓴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는 독일의 소설가 출생
1799년 될링거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반포한 교황 무류성 교리에 반대한 독일의 사학자·로마 가톨릭 신학자 출생
1797년 라이언 여성 고등교육 분야의 미국인 개척자로 마운트 홀리오크 여자 신학교를 설립하여 초대학장을 지낸 마운트 홀리오크 칼리지의 선구자 출생
1788년 뱀퍼드 노동자계급의 현실에 대한 연민을 보여주는 몇 편의 시를 써서 널리 사랑받은 영국의 급진적 개혁가 출생
1783년 로세티 단테 작품에 대한 심오한 해석과 재능많은 자녀들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시인·혁명가·학자 출생
1750년 포토츠키 폴란드의 정치가, 리투아니아의 대원수 출생
1743년 아위 결정학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프랑스의 광물학자 출생
1712년 몽칼름 7년전쟁 때 캐나다 주둔 프랑스군 총사령관을 지낸 프랑스의 장군 출생
1690년 알렉세이 러시아의 차르 표트르 대제의 아들 출생
1683년 레오뮈르 18세기초 프랑스의 과학자·곤충학자 출생
1675년 드릴 1쌍의 지구의(地球儀)와 천구의(天球儀), 대륙지도 등 프랑스 지도학의 개혁을 이끈 지도제작자 출생
1616년 영국 시인 터너 사망
1478년 동문선 130권 편찬(성종9년)
1186년 바하 앗 딘 주하이르 카이로의 아이유브 왕조 때 활약했던 아랍의 시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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