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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는 마에다 도시이에의 장남 도시나가(前田利長)가 주모자로 지목된 이에야스 암살 계획이 존재하는 것을 알고, 용의자로서 5부교이었던 아사노 나가마사와 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 히지가타 가쓰히사(土方雄久)에게 칩거(蟄居)를 명령했다. 그리고 마에다 도시나가에 대해 모반 혐의를 씌우고 정벌 계획을 세운다. 이에 도시나가는 친모인 호슈인(芳春院)을 인질로 내놓으면서 복종 의사를 표명했고, 가까스로 마에다 가문의 지위는 보전되었다.
1600년(게이초 5년)에 이르자, 이에야스는 우에스기 가문의 옛 가신 후지다 노부요시(藤田信吉)의 출분(出奔)[5]을 계기로 아이즈(会津)의 우에스기 가게카쓰에 대해 군비 증강을 비난하며 교토로 올라와 해명하라고 경고하였다. 가게카쓰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続)는 이에야스의 경고를 무시하였고, 결국 이에야스를 총대장으로 하여 도요토미 측 다이묘가 다수 참가한 도요토미 군은 우에스기 정벌을 개시하였다.
실각한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타니 요시쓰구, 5부교의 한 명이었던 마시다 나가모리(増田長盛), 모리 씨의 사신승려이며, 이요노쿠니의 다이묘였던 안고쿠지 에케이 등과 모의하여 다이로 모리 데루모토를 옹립하여 서군을 조직하고 여러 다이묘의 처자식을 인질로 삼아 거병하였다. 인질 중에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아내였던 호소카와 가라샤는 이시다 측의 인질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가신의 창에 스스로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야스는 후시미 성에 남겨둔 신하 도리이 모토타다(鳥居元忠)의 보고를 시모쓰케노쿠니(下野国) 오야마(小山)에 이르러 접하고는 즉시 행군을 중지하고 따르던 다이묘들에게 이후의 동향을 물었다. 우에스기 토벌은 중지되어 사나다 마사유키와 다마루 다다마사등의 다이묘는 이에야스 곁을 떠났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이에야스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군을 되돌려 서쪽으로 향하였다.
한편 이에야스의 우에스기 정벌은 이시다 미쓰나리를 거병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책략이라는 견해도 있다. 기나이에서 모습을 감추면 미쓰나리를 유인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설을 따른다면, 도리이 모토타다는 이에야스 측이 미쓰나리를 공격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죽음을 맞이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다.
7월 1일 우키다 히데이에가 도요쿠니 신사에서 전대미문의 성대한 출정식을 치르고, 이 장소에 기타노 만도코로(北政所)는 측근 히가시도노노 쓰보네(東殿局)[6]를 대신 참석하게 했다. 7월 11일 미쓰나리는 동군에 가담할 예정이던 친구 오타니 요시쓰구에게 ‘이에야스 타도’를 밝히고 신의 진영에 끌어들였다.
이 점 때문에 히데이에가 먼저 궐기하고, 미쓰나리는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거병을 결정했다는 측이 최근의 연구에서 매우 유력시되었다. 유력한 미쓰나리파 무장인 사나다 마사유키가 미쓰나리의 협력 요청에 대해 “어째서 사전에 알려주지 않았는가!”라고 적은 편지가 전해지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끌려서 궐기했기에 전투 준비가 졸속적으로 이루어졌고, 사타케 요시노부, 쓰가루 다메노부(津軽為信) 등 미쓰나리와 친밀한 무장들이 서군에 참가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요시노부는 아버지 요시시게의 반대에 부딪혀 중립을 지키지 못하였고, 다메노부는 히데요시에게 영지를 인정받았을 때 미쓰나리가 많은 도움을 받은 큰 빚이 있었지만 주위 모두가 동군 측에 있다 보니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이에야스 측에 섰다. 대신 다메노부는 전투 후 미쓰나리의 아들 시게나리와 사에요시를 보호했다. 또 고다이인의 양녀가 된 미쓰나리의 3녀 다쓰히메(辰姫)는 후에 다메노부의 아들이자 2대 번주였던 쓰가루 노부히라(津軽信牧)에게 시집가서 훗날 3대 번주가 되는 맏아들 쓰가루 노부요시(津軽信義)를 낳았다.
7월 12일 사와야마 성(佐和山城)에서 미쓰나리는 요시쓰구, 마시다 나가모리, 안고쿠지 에케이와 비밀 회동을 모리 데루모토을 서군 총대장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아이치가와(愛知川)에서 동군에 참가 예정이던 여러 장수를 저지하기 위해 관소(関所)[7]를 설치했기에, 조소카베 모리치카, 나베시마 가쓰시게(鍋島勝茂) 등이 움직일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 서군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7일 결국 미쓰나리는 거병을 선언하고 다음날 이에야스의 가신인 도리이 모토타다가 지키던 후시미 성에 진격했다. 항복 권고를 거절한 모토타다는 7월 19일부터 시작된 공성전에서 우키다 히데이에, 시마즈 요시히로 등의 맹공에 맞서 분전하였으나 결국 8월 1일 성을 잃고 말았다(후시미 성 전투). 그 후 단고노쿠니(丹後国)의 다나베 성(田辺城), 이세노쿠니(伊勢国)의 아노쓰 성(安濃津城), 마쓰자카 성(松坂城) 등을 공략해 8월 안에 모두 함락시켰다. 미쓰나리 자신은 미노 방면을 견제하기 위해 8월 10일 사와야마 성에서 서군의 거점인 오가키 성(大垣城)으로 들어갔다.
한편 동군은 에도에서 머물던 이에야스을 제외하고 도카이도(東海道)를 따라 서쪽으로 진군했다. 후쿠시마 마사노리, 이케다 데루마사가 선봉에 선 동군은 8월 22일 고우다(河田)[8]에서 기소가와(木曽川)를 건너 고메노무라(米野村) 부근에서 서군과 격돌, 이를 격파하고 진군을 계속해 다음날 오다 히데노부가 성주로 있던 기후 성을 함락했다. 이에야스는 에도에서 여러 무장에게 편지를 보내었다. 도도 다카토라, 구로다 나가마사 등을 사자로 삼아 도요토미 측 다이묘의 저항을 막고, 서군을 내부로부터 무너뜨리려 하였다. 기후 성이 함락되었음을 안 이에야스는 중대한 결심으로 약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사카 방면을 목표로 진군했다.
이에야스의 3남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약 3만 8천의 병력을 이끌고 나카센도(中山道)를 따라 전진했으나, 도중에 사나다 마사유키가 지키던 우에다 성을 공략했다가 발목을 잡혀 세키가하라 전투에는 참전하지 못했다. 이에야스는 결전 전날인 9월 14일, 아카사카(赤坂)의 오카야마(岡山)에 본진을 세웠다. 미쓰나리는 가신인 시마 기요오키(島清興)의 진언에 따라 아카사카 부근을 흐르던 구이세가와(杭瀬川)에 병사를 내보내 동군의 일 부을 유인해 이들을 격파했다(구이세가와 전투).
9월 14일 밤, 이시다 미쓰나리는 아카사카를 빠져나와 나카센도를 따라 서쪽으로 가려는 이에야스의 모습을 보고 세키가하라로 진격했다.
9월 15일 동서 양군은 세키가하라에 집결했다. 동군 104,000명, 서군 82,000명, 도합 18만이 넘는 병력이 좁은 세키가하라의 분지에 집결했다고 한다.[9]
메이지 시대 군사고문으로 일본을 찾았던 독일의 클레멘스 메켈 소령은 세키가하라에서의 양군의 포진을 접하고 서군의 승리를 장담했다고 한다. 그만큼 서군 측은 미쓰나리가 있던 사사오 산(笹尾山), 우키타 히데이에가 있던 덴만 산(天満山), 고바야카와 히데아키(小早川秀秋)가 있던 마쓰오 산(松尾山), 그리고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가 포진한 난구 산(南宮山)을 연결하는 전선으로 동군을 감싸 안은 학익진(鶴翼の陣)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형적 이점을 차지하고 있었다. 반면 동군은 골짜기에 갇혀 꼼짝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서군은 승리를 자신했다.
세키가하라는 이른 아침부터 깊은 안개가 생겨 근처 아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이에야스로부터 선봉의 약속을 받은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곧바로 개전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짙은 안개 속에 양군은 2시간 정도 대치가 계속되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힐 때쯤 후쿠시마 부대의 옆을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소부대와 이이 나오마사가 박차고 나갔다. 이에야스로부터 선봉을 맡고 있었던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급히 그들을 저지하고 이유를 묻자, “정찰”이라고 말하면서 후쿠시마 부대 전방으로 나아갔다. 다다요시의 소부대는 돌연 서군의 주력인 우키타 부대를 향해 발포하고, 여기서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막이 열리었다.
이 공격에 대해 우키타 부대는 즉시 응사했고, 세키가하라는 순식간에 격전의 장소로 변했다. 후쿠시마 부대 6,000명과 우키타 부대 17,000명은 치고받으면서 양쪽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고, 구로다 나가마사 부대 5,400명, 호소카와 다다오키 부대 5,100명 등은 일제히 미쓰나리를 향해 공격에 나섰다. 미쓰나리 부대도 휘하의 시마 기요오키와 가모 사토이에(蒲生郷舎)의 분전으로 공격해온 적을 격퇴했다.
미쓰나리는 전투를 시작한 후 2시간을 경과할 때쯤 아직 참전하지 않은 무장들에게 전투에 참여할 것을 촉구하는 노로시(狼煙; 말하자면 봉화)를 올렸다. 거기에 시마즈 부대에 응원 요청의 사자를 보냈다. 서군의 총병력 중 전투를 벌이던 병력은 겨우 35,000명에 불과했기에 전투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옮길 수 있었다. 여기서 마쓰오 산(松尾山)의 고바야카와 부대와 난구 산의 모리 부대가 동군의 측면과 배후를 공격한다면 서군의 승리는 확정적이 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마즈는 응원 요청을 거부했다. 또한 모리 히데모토는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에게 길이 막혀 참전할 수 없었다. 깃카와 히로이에는 모리 가문 소유의 영지를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이에야스 측과 내통하고 있었다.
정오가 지나자, 이에야스는 배반을 약속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부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 초조해한 끝에 마쓰오 산를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선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과 안코쿠지 에케이의 친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인격과 이시다 미쓰나리의 성격상의 결함 등을 저울질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의 독촉을 받고 뜻을 결정하여 마쓰오 산을 내려갔다. 결국 히데아키는 선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와 안코쿠지 에케이의 친분을 무시해버리고 만다.
고바야카와 부대는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 우익을 공격하였다. 요시쓰구는 히데아키의 배반을 예측하여 온존하게 남아 있던 500명의 직속부대로 맞서 싸워 15,600명의 고바야카와 군을 300미터 정도 후퇴시켰다. 이때 고바야카와 군 무장인 마쓰노 시게모토(松野重元)는 “방패 속의 반역은 무사로써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한 부대를 이끌고 방관했다. 이것이 고바야카와군의 후퇴의 원인이었다. 그런데 도도 다카토라 등의 모반책에 따라 그때까지 관망하던 와키자카 야스하루, 오가와 스게타다, 아카자 나오야스, 구쓰키 모토쓰나 등의 서군 여러 부대도 고바야가와 군에 호응하여 동군으로 돌아섰다. 사실 동군으로 돌아서기 이전 이미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이시다 미쓰나리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예측하지 않았던 4부대의 배신으로 전황은 순식간에 변하게 되었다. 서군은 유리한 학익진을 형성하였고 동군을 골짜기에 가둬놓았지만, 학익의 날개 부분에 해당하던 상당수의 무장이 배신하거나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하게 되어 전투는 서군 내에서의 내분과 동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전황이 역전되었고, 종국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서군의 자멸 속에서 시마즈 요시히로 부대는 일제히 사격을 퍼붓고는 곧장 이에야스 본진을 통과하면서 철수하는 이른바 “전진철수”[10]을 개시했다. 이 행동에 후쿠시마 부대는 그대로 그들을 보내주었으나, 이들을 쫓았던 부대 중 이이 나오마사와 마쓰다이라 다다요시는 저격을 당해 부상을 입었고, 혼다 다다카쓰는 타던 말이 총에 맞아 낙마했다. 시마즈 부대는 시마즈 도요히사(島津豊久)와 아다 모리아쓰(阿多盛惇)[11]의 희생으로 약 80기 전후의 소수만이 살아남아 철수에 성공했다. 모리아쓰는 요시히로가 히데요시에게 선물 받았던 진바오리(陣羽織)[12]를 몸에 걸치고, 요시히로 대신 “효고두[13], 무운이 다하여 여기서 최후를 맞이하겠다.”라고 말하면서 할복했다고 전해진다. 다른 서군 부대는 괴멸하여 패주했다.
(센고쿠 시대의 일부) | |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도 (에도 시대) |
세키가하라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전국 각지에서도 동군, 서군을 각각 지지하던 다이묘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었다.
우에스기 정벌에 관해선 호리 히데하루(堀秀治)의 참언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었으나, 근년에 들어 히데하루가 서군 측에 가담하려는 의사를 표시한 편지 등이 발견되었다. 이에야스는 미쓰나리 거병으로 인해 회군할 때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를 주력으로 남기고, 우에스기 영지와 맞닿아 있던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와 그 주변의 히데하루, 다테 마사무네에게 가게카쓰의 감시를 명령받았다.
이때 바다가 욕심나던 모가미 요시아키는 이것을 호기로 보고 우에스기 영지에 대해 마사무네와 모의하여 침공하려고 기도했으나 이를 알아챈 우에스기가의 중신 나오에 가네쓰구(直江兼続)로부터 선제 공격을 받았다. 9월 9일 요네자와 성(米沢城) 방면에서 모가미 영지을 압박해 들어간 나오에 가네쓰구 군은 수일 만에 모가미 요시아키의 거성 야마가타 성(山形城)을 고립시켰다.
다테 마사무네는 동군에 가담하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전투에 승리한 후에는 마사무네의 옛 영지 7군(郡)을 더해 100만 석의 영지를 내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다테 군은 우에스기 영지인 시로이시 성(白石城)을 공격해 점령했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빠른 침공에 놀라 마사무네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다테 가문 내에서는 “우에스기 군과 모가미 군을 서로 싸우게 한 뒤 피로해진 우에스기 군을 공격하면 쉽게 물리칠 수 있고, 그 다음엔 야마가타도 힘들이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다.”라고 중신 가타쿠라 가게쓰나가 진언하였으나, 모가미가 괴멸은 우에스기 가게카쓰의 위협을 그대로 받게 되는 것이었기에(일설에는 야마가타 성에 살던 모친을 마사무네가 걱정했다는 말도 있다) 루스 마사카게(留守政景)을 총대장 대리로 내세워 9월 17일 원군을 보냈다. 마사무네의 원군이 가세하고, 가네쓰구 군이 사케노베 히데쓰나(鮭延秀綱)의 용맹에 눌려 시무라 미쓰야스(志村光安)가 소수 병력으로 수비하던 하세도 성(長谷堂城)을 공략하지 못하자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나, 9월 29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소식이 양군 진영에 전해지자, 흐름은 일거에 모가미 군에게 기울었다.
가네쓰구는 즉시 철수를 명령했고, 자신은 후군을 맡아 철수는 개시했다. 한편 요시아키는 곧바로 추격을 명령하고 직접 맹공에 나섰다. 이 추격전은 대혼전이 벌어져, 요시아키는 투구에 총탄을 맞을 정도로 크게 고전하였으나, 모가미 요시야스 등의 군세가 달려와 어려움을 벗어났다. 가네쓰구 군은 10월 4일 요네자와 성으로 귀환했다. 이 전투를 하세도 성 전투라고 부른다.
마에다 도시나가는 우에스기가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7월 26일 가네자와(金沢)를 출발해 8월에 야마구치 무네나가(山口宗永)가 지키던 다이쇼지 성(大聖寺城)을 포위하고 3일 만에 함락시키고 아오키 가즈노리(青木一矩)의 기타노쇼 성(北ノ庄城)을 포위했다. 그러나 “오타니 요시쓰구의 대군이 후방에서 다가온다.”라는 헛소문(요시쓰구 자신이 흘려보냈다는 얘기가 있다)을 듣고 놀라서 급히 가네자와로 회군하였다.
도시나가는 도중 군대를 둘로 나눠 니와 나가시게(丹羽長重)가 지키던 고마쓰 성(小松城)에 별동대를 보냈다. 8월 9일 나가시게는 농성군을 이끌고 별동대를 기습해 별동대를 격파하고 뒤이어 도시나가의 본대도 기습을 가해 도시나가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교착상태에 빠진 나가시게는 서로 화친을 맺고, 고마쓰 성을 다음날 도시나가에게 넘겨주었다. 겨우 가네자와에 돌아온 도시나가는 급히 군을 재정비하고 9월 12일에 다시 가네자와를 출발했으나, 결국 세키가하라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때 다이쇼지 성 공격에 참가했던 동생 마에다 도시마사는 거성인 나나오 성(七尾城)에서 농성하며 움직이지 않고, 동군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도시마사는 계속 서군에 참가할 것을 주장했기에 결과적으로 전투 후 영지를 몰수당하는 불행한 일을 당한다.
단고 다나베 성에는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斎)가 아들 다다오키가 출진한 뒤 병사 500명과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이곳을 서군 측에 가담한 후쿠치야마 성(福知山城) 성주 오노키 시게카쓰(小野木重勝)를 총대장으로 한 고이데 히데마사(小出秀政), 요시마사(吉政) 부자, 아카마쓰 히로히데(赤松広秀) 등이 15,000여 병력을 이끌고 와서 다나베 성을 포위했다. 양쪽의 전투가 벌어졌으나, 서군 측 여러 무장 중에는 유사이에게 와카(和歌)의 배웠던 다니 모리토모(谷衛友)란 자도 있어, 격렬한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전황은 서서히 유사이에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유사이는 비전의 “古今伝授”의 증서를 제자인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친왕(八条宮 智仁親王)에게 의탁하기로 결심하고, 증서 일체를 하치조노미야에 헌상했다. 이 일이 하치조미야에서 고요제이 천황(後陽成天皇)의 귀에 들어가자 유사이의 상실을 두려워한 고요제이 천왕은 마에다 겐이를 통해 서군 측에 성을 넘겨주라는 칙명을 보냈다. 그러나 서군 측에는 그런 의사는 없었고, 또한 유사이도 성을 넘겨주는 것을 거절했다. 9월 12일쯤에 이르러 고요제이 천황은 나카노인 미치카쓰(中院通勝), 가라스마루 미쓰히로(烏丸光広), 산조니시 사네키(三条西実枝)등 세 명을 칙사로서 다나베 성으로 보내 유사이에게 화의에 응하도록 설득해 9월 18일 오노키에게 성을 넘겨주고 퇴거했다.
그러나 유사이 퇴거 직후, 시게카쓰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패배 소식을 전해 듣자, 시게카쓰는 후쿠치야마 성으로 돌아갔으나, 순식간에 승리의 여세를 몰아 달려온 타다오키와 배반한 다니 등의 군대에 포위당해 시게카쓰는 목숨을 탄원했으나 11월 18일 자결하고 말았다.
이요(伊予)에서도 동군에 가담한 가토 요시아키라(加藤嘉明)의 마쓰마에 성(松前城)을 모리 군이 공격을 가했다. 무라카미 다케요시(村上武吉), 무라카미 모토요시(村上元吉) 등 이요에 인연을 가지고 있던 모리 가신들은 옛 영지 회복을 목표로 히라오카 나오후사(平岡直房), 소네 타카후사(曽根高房) 등이 미쓰하마(三津浜)에 상륙해 진지를 구축했다. 마쓰마에 성에 항복을 요구했다가 가토가의 수비대장인 쓰구다 가쓰나리(佃十成)의 야습을 받고, 무라카미 모토요시, 소네 타카후사가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모리 측이 불리함이 계속돼 세키가하라의 서군 측 패배를 접하고 모리 군은 후퇴했다.
규슈에서는 구로다 조스이, 가토 기요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등이 본국에 머물고 있었고, 기요마사와 나오시게는 당초 중립을 지켰기에 적극적으로 움직인 사람은 동군에 가담한 조스이뿐이었다. 조스이는 나카츠 성(中津城)에 모아둔 금과 병량을 아끼지 않고 풀어서 이것을 미끼로 모은 낭인을 중심으로 약 3,500여 명의 군대를 만들었다.
한편 서군 측에서는 동서 대결의 상황을 지켜보지 않고 데루모토의 지원을 받아 분고(豊後) 탈환을 노리던 오토모 요시무네(大友義統)가 있었다. 9월 9일 요시무네는 추방된 이래 오랜만에 분고의 땅을 밟고, 오토모 옛 신하들을 모아 이시오키하라(石垣原)[14]에서 조스이 군과 대치했다. 9월 13일 양군이 격돌하여 격전을 벌여 요시무네 군의 용장이 전사하는 등 패색이 짙자 9월 15일 요시무네는 출가하여 모리 타베에(母里太兵衛)의 진지에 출두하여 조스이 군에 항복했다. 조스이 군에 가담하기 위해 구마모토 성을 나온 기요마사는 조스이 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돌려 서군 측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토를 침공했다.
조스이 군은 이후에도 북규슈 여러 성을 함락하고, 세키가하라에서 귀환한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가 지키던 야나가와 성(柳川城)을 기요마사, 나오시게와 더불어 포위하여 무네시게를 항복시켰다. 조스이 연합군은 마지막으로 시마즈가 공격을 계획하고, 유키나가의 영지에 남아있던 수비대장이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요시히사는 이에 응하여 군대를 파견하는 등 규슈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으나, 시마즈 공격 직전 이에야스로부터 전투 중지 명령이 내려와 시마즈 공격은 중지되었다.
사타케 요시노부는 아버지 사타케 요시시게(佐竹義重)의 “동군에 가담해야 한다.”라는 의견과 자신과 미쓰나리의 친교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어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했다. 휘하의 다가야 시게쓰네(多賀谷重経)와 작인 세력 야마가와 도모노부(山川朝信), 소마 요시타네(相馬義胤)는 가게카쓰와 손을 잡고 있었다.
세키가하라에서 진출하여 북상하던 모리 군은 도중에 있던 아노쓰 성 등 이세의 여러 성을 공격했다. 아노쓰 성의 도미다 노부타카(富田信高)는 항복하여 출가하고, 마쓰사카 성의 후루다 시게카쓰는 화친을 맺어 시간을 끌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투에서 승리 후 서군 측 다이묘의 처벌 및 동군 측 다이묘의 포상을 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사쓰마 번(薩摩藩)의 시마즈 가문과 조슈 번(長州藩)의 모리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에 대한 원한이 그대로 남아 250년 후 막부 말기에 이르러 막부 타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일컬어진다.
동군의 여러 다이묘는 대폭 증감이 있었다.
다만 여기서 보더라도 도요토미 측과 인연이 있던 다이묘에 대해서 이에야스는 영토를 늘려주는 대신 서쪽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서군의 대장 격이던 이시다 미쓰나리와 그밖에 장수들이 오가키 성에 머물지 않고 세키가하라로 전진한 것은 “오가키 성을 무시한 채, 사와야마 성을 함락한 뒤 오사카로 나가겠다.”라는 소문 때문이라고 한다. 이 소문은 이에야스가 퍼트렸으며, 이 소문에 미쓰나리가 걸렸다는 설이 보편적이지만, 의문점이 많다.
혹시라도 이에야스가 위의 말처럼 거짓 정보를 흘렸다고 본다면 부대의 통솔이 가장 취약한 행군 중 적의 습격을 받는다는 말이 된다. 이에야스가 유리한 상황에서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또 미쓰나리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오사카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출진을 여러 번 요구했었다. 이것은 결속력이 부족한 서군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이에야스가 오사카로 향한다면 미쓰나리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오사카 부근에서 이에야스의 배후를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부근 하천의 범람으로 여러 번 수해를 입었던 오가키 성을 이에야스가 수공으로 공격하면 서군의 수뇌와 세키가하라 부근에 포진한 모리, 고바야카와 등과의 연락이 끊어지는 일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 설은 세키가하라, 마쓰오 산에 설치된 축성 공사가 새로운 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로 이루어졌음을 전제로 미쓰나리의 전략을 아래와 같이 추정할 수 있다.
결국 이 전략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되더라도 서군은 동군을 협공할 수 있다.
그러나 세키가하라 서쪽의 마쓰오 산-사사오 산 라인의 중요한 곳인 마쓰오 산 성채에는 거취가 불분명한 고바야카와 군이 서군의 조반(城番)[16]을 절반이나 몰아낸 형태로 주둔한 일, 또 오가키 성이 수공에 취약하기 때문에 수공을 당한다면 이미 성이 공격당하여 4번에서와 같이 오타니, 모리 군이 배후를 칠 수 없어, 이 전략은 깨지고 만다. 그 때문에 미쓰나리는 세키가하라에 잠행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는 것이 이 설의 요지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진술로 일본의 사항을 알려주고 있다.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온 하동(河東)의 교생(校生) 강사준(姜士俊)과 여진덕(余進德) 등의 초사(招辭)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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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 桂離宮 庭園
첫댓글 좋은자료 시간날때 보아야겠네요.
음악이 한꺼번에 시작하네요.
html에서 autostart=1 (또는 true)를 0 (또는 false)로 바꾸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