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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신애 7월호 권두문 "코로나 19를 겪으며 독립신앙을 생각하다"를 읽고….
지나왔던 세월 또 현재를 살아가는 저의 영육간의 삶과 더불어 미래를 한 번 조명해보게 되었습니다. 부족하지만 회원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서 글을 올립니다.
우주만물의 興亡盛衰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코로나 바이러스를 허락하셨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져 가는 지금의 세상. 바이블 빌리브(Bible Believe)의 삶을 지향하지 않고 背敎와 背道를 일삼고 있는 한국 교회. 나아가 세계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와 진노로, 하나님 앞에 더욱더 두렵고 떨림으로 겸비하라는 사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
인공지능이 문명을 선도하고있는 디지털 최첨단 시대에 저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불어닥친 전대 미문의 우환(武漢) 코로나바이러스 19(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하나로)로 인해 유토피아를 건설할 것 같았던 현대 문명은 맥을 추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이 역사 앞에 현대문명은, 바벨탑을 쌓아 올렸던 그 백성들이 언어의 혼잡과 더불어 일순간에 흩어짐과 같은 상황이 연출됨에 그동안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왔던 세계 문명의 질서가 재편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느낌마져 받게 됩니다. 어느 목사의 세 딸이 미국에서 각각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는데 그동안 매년 두 차례씩 미국에 있는 딸 네집을 방문하여 오다가 이제는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어 컴퓨터 화상으로나마 얼굴을 마주 대하며 손주들과 딸 사위 이렇게 안부를 나누고 있다는데 아마 카페지기님께서도 미국에 살고 있는 자제분과 그렇게 안부를 나누고 계시리라 봅니다.
한 20여년 간(韓國을 기준) 세계 곳곳을 패스포드 하나로 여행을 다니며 지구는 하나다라고 외쳤습니다. 비지니스와 가진자들의 골프여행 정도가 고작이었던것이 해외여행 자유화가 발효되는 시점부터 마치 봇물 터지듯 썰물과 같이 해외로 여행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저의 고정 관념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외여행이라 함은 문명(文化)탐사, 고적탐사, 유적탐사, 자연관광 등 그 무엇인가 하나라도 깨닫고 배울수 있는 정신적 풍요와 영혼을 살찌우기 위한 자양분의 섭취. 마음 한 켠에 소중히 간직하고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여행. 이것이 여행의 진정한 의미요 참 맛이 아닌가 싶은데…?. 어쩌다 '노새노새'가 되어 국내에서 노는 것도 모자라 해외에 나가서까지 즐기며 먹고 마시는 맛집투어, 먹방투어, 명품투어등 이상한 여행으로 변모되어 살아생전 해외여행 한 번 갔다 오지 않으면 천추에 한을 남길 것 같은 심정으로 최근까지 다녔던 것입니다. 엄청난 외화를 쓰가면서 말이죠. 더군다나 해외여행으로의 물고를 트게 된 저가항공의 출현으로 가까운 동북·동남아시는 물론 남태평양의 사이판 괌까지도 다 훑고 다녔던게 대다수 우리 국민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계모임은 물론 가족모임(還甲,進甲)까지도 해외에서 치루는 그야말로 삶의 유토피아를 만끽하였던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14년간 이용했던 기사식당에 칠순의 여 사장님도 1년에 꼭 네 차례 정도는 중국이나 동남아 등지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 갔다온다는데 장가계, 앙코르와트 등 유명한 곳을 다니며 맛있는 것도 먹고 쇼핑도 하고왔다면서 찍은 스마트폰 영상과 사진을 저에게 항상 자랑하곤 하였습니다. 세상이 너무 즐겁고 살기 좋답니다.(인류역사를 볼때 번성하면 부패하고 부패하면 패망하였습니다. 단적으로 유대 역사를 봐도 그렇지요) 이와같은 삶이 작년 연말까지 이어져 왔는데 올해초 중국에서 유입된 바이러스 하나로 완전히 정지가 되어버렸습니다. 여행이 차단되고 (국제수화물 조차 공급 부조화 현상이 발생) 국경이 봉쇄. 지구는 하나다 지구촌이다라고 떠들던 것이 이제는 서로를 외면하고 꺼려하는 쇄국의 시대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만나면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과 하나님이 만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한것 같은데?. 지금까지는 8:2의 비율로 서로 대면을 하며 살아온 컨텍트 시대였다면 코로나로 이 비율이 역전되면서 이제는 언택트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시대가 개막이 되고 어느 샌가 '가지 않는 것, 만나지 않는 것, 모이지 않는것, 함께 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공산국가에서나 들어봄직한 각자도생. 전 국민의 자가격리 사실상의 유폐. 나홀로의 생활이 점차 자리잡아 가면서 사람들의 성향도 두 가지로 분류가 되어 견디는 자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는 자는 도태 될 것이다란 말까지 회자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코로나 사태로 자신을 심사하고 차분하게 대처하는 사람은 살아남을 것이지만 불나방처럼 사태분별을 하지 못하고 이태원 클럽이나 홍대 술집등을 드나들듯 살아가는 사람은 생존하기가 어렵다는 말일텐데,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켜온 인간의 그 성숙함이 다시한 번 더 발휘될 때가 지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 수원에도 어느듯 확진가 100명을 훌쩍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청청지역이라 자랑했던 이곳 권선구 서수원 관할에서도 엊그제 한 명의 확진자가 발생하였는데 급기야 오늘은 우리 아파트에서도 확진자가 발생. 관할 보건소 방역팀이 출동 긴급 방역을 실시하는 등 법석을 떨었습니다. 이제 수원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다 장악을 한 것 같습니다. 이동 수단과 다리의 역활이 되어주는 승용차가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원래 저는 잘 돌아 다니지를 않고 삽니다. 택시 운전을 하는 동안 수백만 키로를 누비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에 치이고 도로에 치여서 그렇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최근 이 코로나가 온 천지에 창궐을 하고 있는데도 거의 반년 넘게 매일 약 처방과 주사를 맞기 위해 병원만은 다녀야했습니다. 비대면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불가피한 상황으로 그저 믿음으로 來院을 했습니다.
2003년 제 인생에 있어 처음으로 겪었던 큰 고통 이후 또 한 번의 감뇌하기 어려운 혹독한 고통을 작년 初에 겪게 되었습니다. 14년간의 택시운전을 마감하고 수령한 퇴직금과 조금 모아두었던 금액을【거짓의 靈에게 저의 魂과 肉이(voice phishing과 곁들여)도둑을 맞은 겁니다 - 잠 4:23의 말씀을 망각하였습니다】다 날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충격으로인해 공황상태에 빠진 저의 심신은 극도로 쇄약해졌고 걸음조차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택시 운전을 접은 결정적 원인은 …〈그렇지 않아도 나이가 더 들기전에 택시 운전을 접고 작가로서 글만 쓰면서 인생을 마감하려고 마음을 먹었던 것인데 여의치 않은 형편 탓에 한해 두해 자꾸 연기가 되면서 결국 14년의 세월을 도로에서 살고 말았습니다〉
… 30여년간 해오던 운전중 14년간 택시운전을 하면서 장애상 팔로만 모든 운전 기능(핸드콘터롤러 기능)을 처리하며 지팡이를 짚고 걸어 다니다보니 그렇게 튼튼했던 팔 어깨의 연골(關節)이 다 닳아 팔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고 나서야 운전을 그만 두게 된 것입니다. 진즉에 택시 운전을 관두었어야 했는데 시기를 너무 놓쳐버린 것입니다. 그와 함께 택시 운전을 관 둘 무렵부터 조금씩 증세를 보이던 불면증(晝·夜間 운행업무로 부교감신경에 이상이 발생)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 밤마다 잠못 이루는 지옥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에게게 단잠을 준다고 하나님께서 말씀 하셨건만 오히려 저는 밤이 두려웠습니다. 얼마전 손 선생님이 치질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질환의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기다가 오랜세월 앉아서 운전만 해오던 관계로 前立腺에 무리를 준 것과 더불어 사별과 이혼으로 혼자 살아가는 남성들에게 심심찮게 발병되는 비뇨기과 질환이 발생. 불면증과 더불어 일상의 삶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습니다. 한약도 먹고 침도 맞고 하였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는 가운데 해를 넘겼습니다. 원래 심혈관 중재시술을 받은 심장내과에 두 달에 한 번은 약을 처방 받기 위해 외출을 합니다만 해가 바뀌어 코로나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가운데서도 불면증치료와 비뇨기과 치료를 위해 바이러스를 헤집고 정신의학과와 비뇨기과를 안방 드날들 듯 來院을 하여왔습니다. 벌써 이 행위도 반 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수면도 조금씩 취하게 되고 비뇨기과의 질환도 다소 회복이 되어져일상이 다시금 재게. 예전과 같이 씩씩하게 걷지는 못하나 팔에 무리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수변로 산책을 하며 유산소 운동이나마 조금씩 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나이가 들면 발생되는 현상이지만 그렇게 좋았던 저의 시력. 어릴 때 부터 안경을 쓰고 다녔던 딸 아이에게 맨날 시력장애인이라고 놀렸던 저였습니다. 그렇게 좋았던 저의 시력, 칠십객이 되기까지는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시력을 보유하고 살았었는데 이번의 충격으로 노안과 함께 백내장이 겹쳐 결국엔 안경을 쓰지 않고는 독서나 집필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차량의 연식이 오래되면 수리를 해 가며 사용해야 하듯 인간의 몸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아뭏던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아울러 평소 회원들의 영육의 강건을 위해 중보기도해 주시는 여러분들의 기도 덕이라 믿기에 이 지면을 빌어 감사 드립니다.
망가져 버린 육신을 살펴 보며 이제 저도 서서히 천국 갈 준비를 해야 될 때가 되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왔던 그 긴 세월.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며 살아왔던가? 주님이 주신 건강, 물질, 기회 이 모든 것 그저 나에게 은혜로 주시고 청지기 노릇 잘 감당하라고 하셨는데 주님의 영광을 위해 善用하지 못하고 육신의 삶을 위해서만 살아왔던것을 생각하면 할 수록 한스럽고 죄스럽고 그저 눈물만 납니다. 주님을 위해 산 것 없는 나 자신 과연 주님 앞에 섰을 때 무슨 할 말이 있을까? 默言?…. 20대의 건강. 아니 청춘의 건강만이라도 다시 허락해주신다면 남은 인생 하나님의 의의 兵器로 쓰여지고 싶은데…!
요즘 저는 킹제임스 성경 원문과 더불어 일본어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각 교단마다 또 개 교회와 개인마다 각자 취사 선택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여기엔 개역개정 성경, 개역한글, 공동번역, 새 번역, 현대인의 성경등 주로 NIV, KJV, NASB 번역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누락 또는 오역된 구절들이 다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개역 한글판 한영 관주 성경을 일예로 들면 마태복음 17장 21의 구절은 아예(없음)으로 표기가 되어 있고 영어도 마찬가지로 삭제가 되어있습니다. 아울러 마가복음 9장 29절 같은 경우에는 단순히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표기가 되어 있는데. 그런데 발간된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미국 개신교인들이 많이 읽고 있다고 하는 1,611년 버전의 킹제임스 성경에는 앞서 언급한 마태복음 17장 21절의 구절이 누락없이 기재가 되어있고 또 마가복음 9장 29절에도 단순히 기도가 아닌 '기도와 금식'이라고 분명히 표기가 되어 있는 등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음을 알고 이것을 읽고 있습니다.(성경 번역 관련자의 말에 의하면 러시아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등 다른 나라의 성경들은 누락이나 변괘됨이 없는데 유독 한국성서공회에서 번역된 우리나라 성경만이 이렇다라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성경을 보다 더 깊이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적 영감과 각성적 영감이 절대 필요하지만 더불어 히브리어, 헬라어의 원어 탐구 또한 세삼 중요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제가 일본어 성경 읽기에 천착하게 된 것은 일본어에 대한 이해도 이해이지만 저의 꿈인 일본 장애인들에 대한 복음전파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나이에…?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났을때가 75세.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나이가 80세. 그렇게 본다면^^
저에게는 두 가지 꿈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작가가 되는 꿈이었고 또 하나는 장애인들에게 집필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인생을 전·후반으로 나누어 볼 때 1975년도 부터 품었던 소설가의 꿈은 27년이 흐른 2002년도에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인생 전반기에 이루어진 꿈이었다면 남은 인생 후반기에 이루어야 될 꿈 하나가 일본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꿈에 대해 이런 말을 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꿈을 바라보면 젊은이이고, 현실을 바라보면 늙은이입니다. 신념을 가지면 젊은이이고, 의심을 가지면 늙은이입니다. 앞을 바라보면 젊은이이고, 뒤를 돌아보면 늙은이입니다. 희망을 품으면 젊은이이고, 절망을 품으면 늙은이입니다. 자신감을 가지면 젊은이이고, 두려움을 가지면 늙은이입니다』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기를 꿈이 없는 인생은 이미 인생 묘비에 "終結"아라고 새겨 놓고 사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일본인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 하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지금으로 부터 23년전인 1997년 혼다태양(Honda Sun Co.Ltd - ホソダ太陽)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난 후였습니다. 그러나 삶에 몰입하여 살다보니 먹었던 마음이 자연히 희석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늘 저의 마음속에는 부담아닌 부담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에 거룩한 부담이라고 해야되겠지요. 그러다가 2015년 오이타현(大分県) 벳부시(別府市)에 제가 근무했었던 "태양의 집"을 다시금 찾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딸 아이와 함께 한 여행겸 견학이었는데 감회가 정말 새로웠습니다. 유후인(由布院)과 구마모토(熊本).아소산(阿蘇山)등 큐수(九州)일대 외주업체가 산재해 있는 곳 까지 둘러보고 와서 "스나꾸에서 만난 사람"을 집필하는 가운데 23년 전에 가졌던 그 마음, 비로서 주님께서 확정시켜 주셨던겁니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일본에 대한 하나의 정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일본 장애인기업과 고용에 대해 간단히 언급 드리겠습니다.
일명 "태양의 집(太陽の家)"이라고 일컫는 이곳은 일본의 3개 지역(1997년도 기준이니까 지금은 더 늘어났을 수도 있겠습니다)에 설립 되어 운영되고 있는 장애인 그룹의 공동 기업입니다. 혼슈(本州)지역에 나고야(名古屋), 교토(京都) 그리고 큐슈(九州)지역에 오이타(大分)이렇게 세 군데에 "태양의 집"이라는 그룹이 있는데 그 안에 유수의 기업들이 입점을 하여 장애인(비장애인들도 일정부분 고용하여 비율을 맞춤)을 고용 운영을 하고 있지요. 나고야에는 토요타가 주축. 교토에는 오므론. 그리고 오이타에는 혼다가 주축이되어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오이타 벳부(別府)의 "태양의 집"에는 당시 제가 근무했던 혼다태양(ホソダ太陽) 外 子會社인 혼다R&D태양(ホソダR & D太陽). 오므론 태양(OMRON-オムロン太陽). 소니 태양(SONY/Taiyo太陽). 미쓰비시 상사태양(三菱商事太陽). 덴소 태양(DENSO テンン―太陽). 후지쯔 태양(FUJTTSO 富土通エフサヌ太陽) 등 7개 업체가 입점하여 장애인들을 고용 운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죠몬시대(縄文時代)를 기점으로 야오이(弥生時代),야마도(大和時代),아스카(飛鳥時代),나라(奈良時代), 헤이안시대(平安時代)를 거쳐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문을 열고도 그 이후 로도 무로마치(室町)와 에도(江戶). 메이지(明治)에 이르기까지 실로 만만찮은 긴 역사를 일본은 가지고 있습니다. 대륙의 불교와 유교문화를 함께 공유(일본은 佛敎가 월등히 강하며 이것을 근저로 사무라이 문화와 함께 神道라는 일본인들만의 종교로 고착시켜 이어져 내려온 역사)하여 왔지만 일본인들만의 고유문화로 승화 발전 정착시켰고 列島가 지닐 수 있는 장점탓에 서구 해양 문명을 일찌기 받아들여〔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년 6월 23일 ~ 1582년 6월 21일) 시절에 이미 아프리카 남동부 지역의 흑인들이 카톨릭을 중심으로한 신부들 그리고 네덜란드 상인과 더불어 교토에 들어와 살았으니까요〕한 때는 대일제국이라는 망령에 사로잡혀 수 많은 이웃 나라에 행악을 저지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시아에서 제일 가는 선진 문명국가로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며 번영을 향해 나아가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 나라 일본에서 장애인들과 함께 먹고 일하며 사는 동안에 느낀바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대부분 하나같이 외로움과 정신적 고독속에 살아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독신이 만연되어 있는 일본. 비장애인도 결혼을 안하고 사는 판에 장애인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오타쿠의 기질들이 있어서 그런가…? 아뭏던 공허함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는 그네들을 보면서…. 종교에 대해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대부분이 無敎(그러나 그 들의 삶과 정신에는 신사를 모시는 신도가 내재하고 있었습니다).예수에 대해서 아느냐? 일본인들은 기독교를 "키리키스탄"이라고 하죠? 알지만 교회를 가본 적도 없고 모른다고 했습니다. 일본의 3대 영웅인 "오다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알고 있는냐고 물었을때 그들은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메이지유신의 선봉장이었던 "사카모토 료마"는 아느냐고 물었더니 아는 사람도 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통계 자료에 근거한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종교인으로 우치무라간조(內村鑑三)와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内原忠雄)두 분을 드는데 유감스럽게도 그 두 분에 대해서는 많은 장애인들 그 누구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임직원이 아닌 평사원들 위주로 물어본 것이었습니다. 물론 임직원중에는 아는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저는 그기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는 일본 보다 수 많은 개신교도들이 있지만 빛과 생명되신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못한 탓에 오히려 먹사, 개독교라고 욕을 먹고 사는 나라에서 존경하는 종교인을 뽑으라면 아마 통계조차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오래전 작고하신 김수환 추기경? 성철 스님? 글쎄요. 그러나 일본에는 동양의 사도바울이라 일컫는 위대한 믿음의 선각자 內村선생께서 나오질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그 누구 하나 그 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단 한 분도…. 물론 자기의 삶과 관련이 없는 것이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제서야 저는 그네들의 고독하고 공허한 삶이 어디에서 기인 된 것인가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신사를 중요시하고 신도만을 집착. 복음이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그들 장애인의 마음과 삶은 공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그런 삶을 바라보며 살자니 저의 마음 한 구석에서 깊은 연민이 솟구치기 시작하더군요. 그네들이 전혀 타국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내 동족이요 내 형제 내 자매라 여겨졌습니다.(지금 젊은 세대가 나의 이 글을 읽으면 극우 친일파라고 매도 할찌도 모르겠군요) 왜냐?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인종과 국적 그 모든 것을 초월한 같은 형제요, 천국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제 인생의 꿈을 이렇게 밝히다 보니 세삼 43년 전의 기억이 떠오르는군요. 강단에서 설교를 하시던 부친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자(학창시절의 절정이었던 大邱 경북고등학교 재학무렵 - 부친께서는 더이상 강단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은퇴 2년을 남기고 50여년 남짓한 목회를 마감 소천하셨습니다)저의 꿈은 좌절되었고 배움을 마감한채 2년간 유리방황을 하였습니다. 2년간의 방황을 마친 저는 다시 교회로 돌아왔고 주어진 몫의 십자가를 짊어진채 열심을 다하였습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면서 시작한것이 구두닦이 였습니다. 신문팔이, 껌팔이, 김밥장사. 서울로 올라와서 시내 이곳 저곳을 전전 보세 모자공장, 가방공장. 또 세검정에서의 신문배달, 대구로 다시 내려와 안경가공 공장, 포장마차등을 거치며 밑바닦의 삶을 전전하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아내와 함께 벼이삭을 주워 양식으로 먹기도 하였고 산과 들을 누비며 쑥을 뜯어 소위 갱죽이라는것도 끓여 먹고 살았습니다. 딸 아이를 놓고는 먹을것이 부족하여 직장에 다니는 저만 점심 도시락을 사주고 아내는 이웃 성결교회에서 불우이웃에게 나누어주던 라면 세 상자로 삼시 끼니를 이어갔습니다. 이러다보니 아이가 빨아대는 젖은 항상 멀건 죽 같은 영양가없는 모유였고 결국 아내는 영양부실로 쓰러지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모유를 먹고 자란 딸 아이 그래도 건강하게 자란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이렇게 모진 고난 속에 살았지만 저는 행복했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셨고 꿈과 희망을 안고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서산에서 처음으로 분식집을 하였고 천안에서 출판 인쇄. 수원으로 온 뒤 친구가 운영하는 전자업체에 한 5년간 일을 하면서 그 친구의 소개로 삼성전자 1차 밴드업체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근무를 하던 중 일본으로 건너가 근무를 하면서 발전된 서구 문명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떠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근무를 마치고 온 저의 인생관과 가치관 또한 새롭게 형성되었습니다. 자랑을 하나 한다면 귀국후 구두닦이에서 시작하였던 저의 인생이 과장, 차장까지, 그야말로 짚신장사, 바늘장사에서부터 시작하여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토요토미 히데요시와 같은 삶을 감히 살게되었던 겁니다. 광야에 버려진 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가 있었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그저 감사! 감사! 할뿐입니다 》
'80년으로 접어들 무렵 맹인으로 사역을 감당한 안요한 목사의 "낮은데로 임하소서"의 영화를 보고 저도 사역을 하리라 결심을 한채 신학교를 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당시 경상남북도에 있던 신학교에는 장애인을 받아주는 곳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신학교도 상당수였습니다. 설령 받아 준다고 하더라도 목사 안수는 주지 않는다는 조건이 전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신학을 가려고 했던 저에게 제동이 걸린 것입니다. 그 무렵 外叔이셨던 박노훈 선생님을 제 인생에 처음 대면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字 윤字 동字"의 함자를 지니신 외조부께서 여럿 자녀를 두셨는데 저의 繼母가 장녀셨고 그 바로 아래 장남이 바로 박노훈 선생님이셨습니다. 원래 침례교에서 출발했던 것이 저의 외가였는데 박노훈 선생님께서 무교회로 전향하신후 외조부와 계모 형제 대부분은 새일파(시한부 종말 이단)에 심취하여 그곳에서 신앙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박노훈 선생님의 가정과는 신앙노선이 완전히 양극화 되어 있었습니다. 박노훈 선생님 가정이 무교회로 전향을 먼저 하셨던건지 아니면 외조부와 다른 형제들이 새일종파로 먼저 간 것인지의 순서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항상 계모가 저에게 말씀 하시기를 네 외삼촌의 인품과 도덕 학식 만큼은 박팽년의 후손답게 정말 휼륭한데 어쩌다가 무슨 무교횐가 이상한데 빠져 주일날 교회도 안 가고 어디 YMCA엔 가에 모여 예배한다고 하니 정말 안타깝다. 라고 곧 잘 말씀 하셨는데 그런 분을 제가 처음 만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박노훈 선생님을 만난 저는 비로서 우치무라 간조 선생님의 무교회신앙을 접하게 되었고 새로운 신앙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친의 가르침과 더불어 고신파라는 테두리안에서 자양분을 섭취하며 자라왔고 소아마비를 고치려고 전국을 누비며 수많은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어오며 굳어진 뼈대속에 한순간 무교회신앙으로의 동화는 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나이가 어린탓도 있었지만…. 아뭏던 그 뒤로 박노훈 선생님의 주선으로 노평구 선생님이 발간한 "성서연구"誌 와 "복음엽서"를 매월 받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알고 신학만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마음의 갈급함은 식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극동방송(당시 아세아방송)을 통해 목사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굳이 주류를 언급한다면 신사참배를 반대한 주기철 목사. 그 이후 이성봉 목사 부류의 제자 목사였습니다. 그 목사의 천국관 신론의 강의를 듣고 내가 찾던 진리가 이것이로구나 하며 화답을 하고 서 너달 통신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그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던 충남 서산으로 아내와 함께 아예 이사를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본토를 떠난 심정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그 분과 함께 예배와 신앙을 함께 하며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려 12년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성서연구'와 '복음엽서'의 구독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물론 중간 중간 중단된 적도 있었지만 저 나름대로 무교회의 독립신앙 씨앗을 키워왔던 것 같습니다.(임종직전 박노훈 선생님이 입원하고 계셨던 대구 동산병원에 문병을 갔을 때 저희 내외의 '독립신앙'을 한 번더 역설하셨고 그 분이 저에게 주려고 남겨주신 유언과 같은 편지 두 통은 지금까지도 간직을 하며 가끔씩 읽고 있습니다) 아뭏던 서산에서 천안으로 천안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하면서도 그 목사와의 신앙생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 목사도 이 때 당시 용산구 보광동으로 예배 처소를 옮긴 후였습니다. 매주 전철을 타고 보광동으로 가족이 다 함께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교인이라고 해 봐야 겨우 열 명 남짓 이었습니다. 화정(지금의 高陽), 부평, 개봉, 소하동 그리고 수원의 저희 가족등이 전부였지요. 그러나 전국을 망라하여 신학을 통신으로 공부하는 성도는 다수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결국 사소한 문제 하나로 그 목사와의 인연은 12년을 끝으로 의절되고 말았습니다. 12년이라는 긴 세월. 그 목사의 신앙의 노선과 신조에 마치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인바 되듯 본토를 떠나 육신과 정신의 토양이었던 경상북도를 떠나 낯설고 물설은 중부지방 그리고 수도권으로 진입을 하면서 신앙도 신앙이려니와 산전수전 모든 것을 함께 해온 그 무수한 시간들. 칼로 무우 자르듯 一刀에 절연을 그 목사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진리를 강조하였던 목사의 참된 인격이 겨우 이것이었나? 그 당시 아내 보다 아마 제가 더 큰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저는 더이상 교회출석은 하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그리고 제발로 종로 YMCA 지란방을 찾아가 노평구 선생님이 인도하는 성서모임에 참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노훈 선생님 그리고 유원상 선생님을 통하여 알게된 무교회. 성서연구誌와 복음엽서를 통해 꾸준히 담아온 독립신앙으로의 첫 발걸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91년 初였습니다. 여기서 노평구 선생님. 유희세 선생님. 또 천안 산업기술대학에 재직하고 계시던 임세영 선생님을 등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략 6개월 정도 참석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딸 아이는 저와 함께 하지 못하고 동네에 있던 합동측 개척교회에 출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6개월간 성서모임에 참여를 하면서 한가지 어려움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헬라어, 히브리어 원어 위주로 강의를 하는데 교회생활을 통해 목사의 설교만을 듣는데 익숙해있던 저로서는 솔직히 소화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유원상 선생님께 고민을 말씀드렸더니 오류동 모임을 언급하시고 저의 성향에 맞을 거라며 이진구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류동 모임에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91년도 가을 무렵부터 오류동 모임에 참여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를 처음 맞아주셨던 이진구 선생님과 子婦 되시는 왕정숙님, 백충현 선생님 내외분, 배명수 선생님 내외분들의 모습이 29년이 지난 지금도 제 눈에 선합니다. 그렇게 하여 저는 오류동 모임에 매주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인상 깊었던 것은 각자 주님 안에서 살았던 한주간의 삶을 나누는 감화회였는데 얼마나 은혜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매주 그렇게 다니면서 시편 23편♪'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의 특송(사진이 있습니다)도 불렀고 김교신 선생님과 쌍두마차였던 송두용 선생님이 계시는 김포공원묘지(지금은 대전현충원에 계시지만)를 방문한 사실도 일기장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또 손문일(단아 아빠)君이 (아마 중학생때 같은데) 바이올린 독주로 찬양을 들려주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이렇게 3년을 오류동 모임에 참여하면서 무교회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소울 리버티(Soul liberty - 靈魂의 自由)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런 영혼의 상태와는 달리 가정의 신앙은 어딘지 모르게 삐걱거리고 있었습니다. 신앙이 단일화 되지 못한 것이지요. 당시 아내가 분식집을 하고 있었는데 출석을 하고 있던 교회 강도사가 가끔 들리더니(尋訪) 나중에는 저를 만나러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평일에는 저를 볼 수 없으니까 주일날 오류모임의 참석을 필하고 와서 쉬는 시간 때를 맞추어 저희 집을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李 집사(아내의 姓)님과 함께 저희 교회 저녁 예배라도 참석을 하시라는 등 가족이 함께 신앙생활을 해야 가정이 평안해진다. 자라는 딸 아이를 위해서도 부부가 함께 교회를 다녀야 자녀의 신앙이 안정적으로 자란다는 등 저를 회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종의 공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한 두번도 아니고 정말 귀찮고 짜증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 공작은 멈추질 않고 삼개월이나 지속되어졌는데 나중엔 강도사의 부인까지 합세를 하였습니다. "가정의 평화! 가정의 평화!" 그 논리에 저는 그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제가 가졌던 갈등과 괴로움에 대해서는 배명수 선생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여 소리소문없이 오류동 모임에 마감을 고하고 다시금 일반 교회로 회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더이상은 교회생활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 때 저의 신앙은 이미 자유함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평생 산간오지 교회로만 임지를 맡아 목회를 하여왔던 부친의 영향은 저에게 지대하였습니다. 체질상 큰 교회는 저의 생리에 맡지 않았으므로 몇 명 모이지 않는 작은 교회, 가족 같은 분위기의 작은 교회에만 집착을 하게 되었고 저희 가족도 그것을 매우 흡족해하였습니다. 섬김과 봉사를 마음껏 할 수 있음에 나름 주님께 헌신한다는 교만과 착각에 빠졌음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2002년도 저희 가족이 출석하였던 개척 교회에 느닷없는 건축 바람이 불었습니다. 빗물이 새고 바닦에 물이 올라오는 등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 칙칙한 지하 3층의 낡은 교회를 벗어나 지상에 번듯한 교회를 새로 지어 부흥을 이루어 보겠다는 젊은 목사의 열정이 대단했습니다. 살아생전 저의 부친이 그랬습니다. 해마다 벼 추수가 끝나면 지붕에 썩은 짚을 걷어내고 새 짚으로 덮어야 했던 초가지붕의 교회를 새 벽돌로 짖는게 꿈이었습니다. 오지마을의 교회에 무슨 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으므로 노회나 총회 여기저기 다니며 조금씩 헌금을 기부 받아 모운 다음 교회당 지을 부지를 구입하고 그런 다음 또 세멘과 모래를 구입하여 시간이 날 때 마다 교인들과 함께 벽돌을 손수 찍어 말리고 말려 몇 년에 걸쳐 교회를 지었습니다. 헌당식 예배땐 감격에 겨워 교인들과 함께 우시던 부친의 모습이 아련합니다. 부친의 이런 목회의 여정을 보고 자란 저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건축하는데 어떻게 하던 나름의 보탬을 주어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았습니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저는 어렵게 장만하여 살고있던 고급 빌라를 담보로 건축헌금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 교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헌금도 하고 대출을 받아 6개월만에 목사가 원하는 교회의 건축을 초 스피드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가 김대중 정부 말엽 카드대란 발발 시점이었습니다.
오랜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저는 조그만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경험 부족으로 운영이 부실하였고 부실한 운영은 결국 자금 압박으로인해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건축에 담보로 제공하였던 빌라의 설정이 예정대로 풀렸다면 어떻게해서라도 이래저래 손을 쓰 볼 수 있었을 터인데 정부의 시책에 따라 담보 제공했던 설정이 좀 처럼 풀리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 두 달, 석 달 연기가 되어가는 동안에 밀려오는 자금 압박은 결국 부도로 이어지게 되었고 가정 해체로 끝을 맺었습니다. 저의 교회 생활은 이랗게 참담한 결과를 맞고 말았습니다. 그런 결과를 안은채 저는 혼자 후배 집에 얹혀 살면서 또 달방 여관생활을 전전하며 살아남기위해 평생 꿈에도 생각 못했던 택시 운전대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교회출석을 중단하지 못하였습니다. 왜였을까요?
택시 운전을 하는 가운데서도 잠실본동으로 5년간 교회출석을 더 하였습니다. 안수집사라는 직함을 가진채 매주 대표기도를 해야했으므로 야간운전때는 야간 운전을 마치고 잠을 자지 않은채로 주간운전때는 입금을 물어넣어가면서까지 서울로 교회 출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2009년 관상동맥이 막히는 죽음의 선을 넘게 되면서부터 50여년 동안 지속해왔던 출석을 통한 교회생활을 드디어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중환자실 그리고 병실에서 회복을 하는 동안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그때 전도한 이 민족의 리더와 함께 지금까지 11년째 2人 예배를 드리며 가나안 성도의 삶. 무교회의 예배의 삶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저는 원래 교회에서 말하는 전도의 은사 그런 것은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전도왕이라는 것은 애당초 저와는 상관이 없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아내와 딸 아이 그리고 이 민족의 리더가 전도대상의 전부이자 열매였습니다. 각자의 신앙의 노선은 다르지만 아이 엄마는 재혼을 하고서도, 또 딸 아이도 자기대로 열심히 지금 교회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50대 초쯤 이었을까요? 딸 아이에게 농담삼아 "아빠 혼자 살기 너무 힘들구나. 재혼하게 믿음 좋은 노 처녀나 혼자사는 여자라도 하나 소개시켜봐라"고 했더니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딸 네미 시집가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개비여. 정말 아빤 이기주의자야. 자기밖에 몰라. 능력있어? 능력있으면 아빠가 구해 살어. 나 한테 얘기하지 말고. 그 많은 교회 중 어디 한 군데라도 정착을 해서 좀 다녀야 사람을 만날거 아니야. 꼭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빠의 인생을 위해서라도 다니라고. 맨날 집안에서만 틀여박혀 아저씨랑 예배본다고만 하니 아저씨도 참 불쌍한 것 같애…. 그냥 혼자 살어. 무슨 재혼이니 그런 이상한 소리. 생각지 말고, 제발 나 힘들게 하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자식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 자식이 아닌 마치 타인처럼 느껴졌습니다. 저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도 자기 자식만큼은 어쩌질 못했다는데 자식을 잘 못 키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한평생 신앙의 뿌리가 없는 아내와 교회 반사들에게만 아이의 인격과 신앙을 의탁한채 저는 가족 부양을 위한 돈 벌이와 저 자신의 신앙 영역안에서만 머물러 왔던 것입니다. 또한 부모의 이혼이 딸 아이에게 가져다준 상처와 가치관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준 것 또한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간적 사고와 가치의 형성은 물론 초대교회처럼 가정에서 드려지는 예배는 예배로 인정을 하기 힘들어 하는 복음이 아닌 율법적 종교인. 만인제사장의 의미와 영적제사장에 대한 이해도 없는 딸 아이로 성장되어 버린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가장 큰 효도는 부모님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오늘날의 사고와 가치로 볼 때 이것 또한 고리타분한 저의 고정관념인지는 모르겠습니다)허나 제 어머니는 재혼해서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반해 독수공방 홀로 늙어가는 아버지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 딸 아이의 생각이요, 삶임을…. 저 보다는 엄마의 지대한 영향 가운데 자라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무형의 정신적 존재와 혼인을 하여 살아가는 제가 인생 두 번째의 꿈인 "일본에 가서 살면서 일본 장애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죽으리라" 이런 소리를 딸 아이에게 했다간 아마 미쳤다고 극언을 쏟아낼찌도 모르겠군요. 사십을 코 앞에 둔 딸 아이. 다니는 교회 청년부에서 짝을 만나 결혼을 약속하고 지금 연애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딸 아이 엄마는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결혼관점인 물질을 먼저 놓고 저울질 하겠지만 하나님 제일주의의 신조인 저는 참된 믿음과 신앙이 우선임으로 그 점을 볼 수 밖에 없는데…. 부족한 저의 신앙관에 비추어 볼 때 사귀는 남자의 신앙관(성경관.국가관등 여러가지 면)에 문제가 많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신앙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귀하게 보기로 했습니다. 그 전에 앞서 본인들이 서로 좋아하고 가정을 이룬다는데 아비된 제가 무어라 더 말을하겠습니까. 자식은 키울때가 자식이지 출가 하면 남인것을…. 이것이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룰찌라'고 말씀 하신 하나님의 분부요. 독립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개인적으로 2년 넘게 블로그를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저의 주 종목인 소설외에 信仰의 斷想과 隨筆등 총 백 여편의 글을 올려놓고 또 틈틈히 글을 올리며 관리하고 있습니다. 고정적으로 조회는 이루어지고 있으나 과연 얼마나 많은 분들이 저의 글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행복한 구원의 길로 인도함을 이루고 있는지 저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문서선교 차원이며 나중에 일본어로도 관리를 해 볼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11년간 함께 해왔고 지금도 함께 예배를 이어가고 있는 이 민족의 리더는 저의 삶과 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의 마지막 꿈이 실현 될 수 있도록 기도로 응원을 해주고 있으며 나름의 지혜와 팁도 주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기도만 할 뿐입니다. 저의 힘으로서는 불가능한 꿈 그야말로 미친 꿈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쫓아갔을 때 복음 전파가 성공을 이룬 것 처럼 한 낱 어리석은 꿈에 불과하다 할찌라도 성령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실 때는 꿈을 이루어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며 재림의 主로 오시는 그 분의 길을 예비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세상 상식으로는 납득 할 수도 없고 볼 수 없는 참으로 특수한 환경속에서 저는 태어나고 자라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척도 형제도 혈육도 한 점 없는 그야말로 천애고아라 하겠습니다. 적어도 부친과 계모가 돌아가신 이후 스물살이 될 때부터 지금까지 광야에서 오직 하나님과 더불어 그 분의 은혜로만 살아왔다고 말씀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부턴가 한 번은 전국무교회 집회에 이 민족의 리더와 한 번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이진구. 백충현 선생님이 살아계셨을 땝니다. 풀무학원의 교장으로 있는 박완 선생. 박노훈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은 장남으로 굳이 친 인척의 신분을 따지자면 저의 외종이 되겠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한 번도 만난적이 없습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대면한다는 것. 더군다나 사석도 아니고 집회원들의 속에서 소개를 해야 한다는 것. 또 소개를 받는 다는 것. 그렇다고 전혀 낯 모르는 이방인처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참석만 했다가 온다는 것 등이 제가 부딪치기엔 너무나 힘이 들것 같았습니다. 저의 외숙되셨던 박노훈 선생님도 저의 인생에 딱 두 번 밖에 뵌 일이 없다라고 한다면 대충 저의 집안 흐름에 대해 감 잡으실 것입니다.
좀더 부연드리자면 부친이 처음 상처를 하신후, 황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셨던 저희 친 어머니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시댁으로부터 어린 딸을 데리고 쫓겨나 혼자 사시다가 저희 부친의 후처로 들어오셔서 저를 놓으셨습니다. 그렇게 볼때 저는 서자입니다. 제가 여덟 살 때 누님이 시집을 가시고 아홉살 때 친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신 다음 부친께서 맞아들인 세 번째 아내가 저를 키워주셨는데 그 분이 저의 계모(자녀가 없으신 상태로 들어와 저를 양육하셨음). 즉 박노훈 선생님의 누님이셨던 겁니다. 이런 세월의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채 성장하고 살면서 저에게는 친척도 형제도 혈육도 인생을 함께 나눌 수 친구도, 아내도 그 무엇 하나도 남아 있지를 않고 다 흩어져버렸습니다. 저를 둘러싼 인생사는 마치 영화의 장면 하나가 잠시 화면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듯 그렇게 시절을 따라 잠깐씩 등장 되었다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제가 태어난 그 순간 부터 저 인생의 프로그램은 그렇게 구성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배다른 이복의 형님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같은 배를 빌려 태어난 누님 조차 이산이었고 디아스포라가 되었습니다. 서로의 생사를 잊고 살아가는 특수한 형제지간, 혈육. 집안이 저의 집안이었습니다. '80년 중반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보면서 많이 울기도했고 또 해마다 맞이하는 명절 때면 부모와 형제들이 모여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방송 화면으로 지켜보면서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마치 먼 이국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적어도 이런 삶을 살아온 저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그 다지 큰 의미가 없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일본에서 짧게나마 생활했던 제가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른 곳이었지만 그곳에 필이 꽂혀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 함께 살고 싶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인생후반에 접어든 시점. 하나 있는 딸 자식 출가하면 정말 그 어느 곳에 가서 산다 할찌리도 주님과 함께 사는 삶이기에 아무런 부담도 거리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크로노스가 아닌 카이로스의 영원한 삶. 그 삶을 보장받게 된 믿음과 신앙의 근원은 한국으로부터 비롯 되었기에 대한민국은 분명 저의 뿌리이자 모국으로 결코 지울 수도 외면 할 수도 없는 나라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보다 존경했던 저의 부친으로부터 비록 서자로 태어났지만 영원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 받았고 단막극 한 장면의 시간처럼 비록 짦은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속에서 박노훈 선생님으로부터 무교회신앙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많은 분들로부터의 영적인 감화와 깨달음을 통해 오늘날 홀로 제가 서서 있게 된것…. 이것을 밑거름 삼아 마지막 꿈을 꾸게 되었다는 것.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딸 아이가 저 보고 일본이 종교라고 저에게 곧 잘 말을 하는데 아사히. 후지 TV등은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 시청을 할 수가 없어. 주로 NHK를 인터넷으로 시청하며 또 일본 유투브 동영상을 여럿 구독하면서 믿음의 댓글을 종종 올리곤 합니다.
권두문을 읽으면서…. 제 영혼에 묻혀있던 긴 세월들이 샘 쏫듯 솟아남으로 말미암아 무슨 자서전도 아니면서 긴 글을 토해 내었습니다. 이 장황스런 얘기를 황금같은 시간을 내어 읽어 주신 카페지기님을 비롯한 회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또 시간을 빼앗은 점 아울러 사과를 드립니다.
권두문을 읽고 안타까왔던것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오류의 예배 모임이 무기한 중단 됨과 더불어 60여 년간 맥을 이어왔던 전국 무교회 집회가 중단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매년 冬·夏節期 때 마다 열리는 무교회 전국 집회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은 없지만 그 때 마다 은혜로운 집회가 되도록 기도해왔는데 정말로 마음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기회를 통하여 각자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인격적 관계가 더욱더 친밀히 형성되어지는 독립 신앙 생활이 풍성히 이루어지기를 바라옵고 하루빨리 이 재난이 안정이 되어지고 또 이 나라가 자유 민주국가로서 굳건히 서가는,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은혜가 있어지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태양의 집(太陽の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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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 글 쓰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청송님의 인생 여정과 진지한 성찰에 절로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이렇게 고된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필력과 그에 대한 열정을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청송님 인생에 튼튼한 동아줄 하나는 분명히 챙겨주신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의 전도활동도 꿈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몸이 쇠하여 가는 것은 정한 이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더더더 용기를 주셔서 일본도 가시고, 글도 쓰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따님을 통해서 가정의 따스함도 맛볼 수 있기를 하나님께 청원하고 싶네요.(따님이 결혼하게 되면 사위가 생기고, 아기도 태어나 마음이 따스해질 테니까요. 그런 날이 오기를...)
대단하십니다 고난의 삶을 살게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수는 없지만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신게 아닌가 합니다 전국집회 시작하게 되면 꼬옥 오셨으면 합니다 보고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