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興宣 大院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의 난초그림을 108점이나 담은 국내 최대 규모의 묵란화첩(墨蘭畵帖)이 발견됐다.
1일 이원기(李元基·69· 전 월간 문화재 발행인, 백선문화사 대표)씨는 최근 베이징(北京)에서 무역업을 하는 한 사업가가 반입한 이 화첩을 구입했다고 밝혔다.
한 사람의 단일 난첩으로 이같은 큰 규모는 국내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석파도인유란도(石坡道人幽蘭圖)’ 라는 금박 제목이 박힌 이 화첩은 가로 세로 30 x 70㎝, 두께 3㎝ , 전체 10권으로, 중국에서 신해혁명 후 교육총장(장관급)을 지냈던 장서가 푸쩡샹(傅增湘 ·1872~1949)이 간직해 오면서 지금의 형태로 표구한 것으로 밝혀졌다. 석파는 대원군의 호이다.
이를 감정한 문화재위원 허영환(許英桓) 성신여대교수는 “이렇게 많은 난을 한꺼번에 그려 모아놓은 책은 본 적이 없다” 면서 “유일무이한 묵난도의 결정판이자 국보급 문화재” 라고 평가했다.
유승국(柳承國)박사(학술원회원 ·전 정신문화연구원장)는 “대원군의 작품중 이렇게 우수한 작품은 본 적이 없다”면서 “ 한국 근세미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국가적, 민족적 차원에서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보물 ”이라고 평가했다.
또 “대원군이 생애 말기 계획적으로 그린 난초 그림으로 중국인(푸쩡샹)의 발문이 그림의 우수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국가적 보물로 지정할 것인지 전문가들이 모여 공론화할 만하다”고 밝혔다.
화첩은 반으로 나뉘어져 오른쪽에는 대원군의 난초 그림과 이를 그리게 된 연유를 설명한 대원군의 친필 화제(畵題), 왼쪽에는 푸쩡샹이 이를 감상한 후 느낌을 적은 글이 기록돼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했던 금가루를 바른 황색, 분홍색, 청색 냉금지(冷金紙)에 다양한 화제를 곁들여 그린 난초그림은 선명한 붉은 색 낙관과 함께 바람이 불면 하늘거릴듯 유연하면서도 힘차게 표현돼있다.
또 ‘壬辰 重陽節 石坡老人(임진 중양절 석파노인)’ 이라고 밝혀, 대원군이 임오군란때 청의 톈진(天津)에 압송됐다 돌아온 후, 운현궁에 칩거하며 임진년(1891년) 한햇동안 울분을 달래며 그린 그림인 것을 알 수 있다.
대원군의 난초그림이 어떤 경위로 중국에까지 흘러가게 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푸쩡샹은 중국 베이징의 골동품거리인 류리창(琉璃廠)에서 대원군의 난초그림첩을 구입했으며, 흥선 대원군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고 다시 표구해 가보로 전하게 됐다고 묵난화첩에서 밝히고 있다.
/송영주기자 yjsong@hk.co.kr
오후19:08분에 수정된 기사
國寶지정 공론화해야
물간화첩 각계반응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의 난초그림이 108점이나 담긴 국내 최대 규모의 묵란화첩(墨蘭畵帖)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학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2일 이를 소장하고 있는 이원기(李元基 전 월간 문화재 발행인, 백선문화사 대표)씨 사무실로는 각계 인사가 몰려 이 진귀한 화첩을 감상했다. 유승국박사(학술원회원 ·전 정신문화연구원장)는 "대원군의 작품중 이렇게 우수한 작품은 본 적이 없다"면서 "한국 근세미술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화첩이므로 국가적ㆍ민족적 차원에서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보물" 이라고 평가했다.
또 "대원군이 생애 말기 계획적으로 그린 난초 그림으로, 중국인 소장가(푸쩡샹ㆍ 傅增湘)의 발문이 그림의 우수성을 입증해주고 있다. 국보로 지정되도록 전문가들이 모여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고 밝혔다.
정충락(서예평론가 ·전 대한민국 서예대전 심사위원장 )씨는 "국보적 가치가 있는 물건이며 의문을 가질 여지가 없는 진품이다" 고 확신하면서 "108점이나 되는 난초그림을 통해 난초가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은 다한 것 같다.
대원군의 전형적인 만년작" 이라고 평가했다. "형태는 흉내낼수 있을지몰라도 신채(神彩ㆍ신과 같은 뛰어난 풍채)는 절대로 흉내낼 수 없다"며 진품임을 강조했다.
또 "이 난초그림을 그릴 당시 대원군은 정치적으로는 실각한 상태였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냉금지(冷金紙)에 난초그림을 2~3일에 한 점 그렸다는 것은 풍족한 상태였음을 말하는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는 화제(畵題)가 외롭고 쓸쓸한 심정을 절절하게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원군은 심리적으로 꽤 안정된 상태였던 것 같다" 고 분석했다.
대원군은 화제에서 "부드러운 붓으로 견고한 돌을 뚫고 쪼개는 모습을 경쾌한 모습으로 그려낸다. 난초그림이 정형이 없이 둥글고 모난 모습으로 분방하게 그려진 것은 나의 마음을 붓속에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홍선표 이화여대교수(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는 "이런 게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면서 "동양3국 그림 중 이렇게 거대한 난첩은 본 적이 없다.
극히 귀중한 문화재자료로 조선말기 회화를 대표할 수 있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작품이다" 고 말했다.
최경환 서울여대 명예교수(화가·이중섭상 심사위원장 역임)는 "대원군이 난초 그림은 원래 유명하지만, 이렇게 집대성한 난초 그림은 본 적이 없다. 국보임에 틀림없다.
소장했던 푸쩡샹이 문화 혁명때 교육총장 직에서 파면당하면서 소장도서도 일부 불살라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 대원군의 묵란화첩만은 다행히 화를 피하고 60~70여년만에 한국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은 기연이라고 생각한다" 고 말했다.
그는 "서양화를 그리지만 동양미술의 정신과 향기가 온몸에 스민다. 과연 우리 조상은 자랑스러운 조상이었다. 서권기(書卷氣ㆍ책의 기운)와 문자의 향이 흘러 넘친다. 국보 중에서도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국보다"고 말했다.
정명호 박사(전 문화재전문위원)는 "108점이라는 숫자가 불교의 백팔번뇌를 이르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의 유명한 장서가인 푸쩡샹으로부터 평가를 얻었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동안 우리 작품 가운데 이렇게 국제적으로 극찬을 받은 작품은 없다"고 말했다.
* 기사는 왜 수정되었나?
* 문화재위원이 정상적인 회의를 통하지 않고 함부로
언론사에 말할 수 있는가?
* 홍선표교수는 기자와 만난적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 소장자가 정상적인 경로(국보 지정요구)를 통하지
않고 언론플레이로 일관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 문화재청은 공론화라는 미명아래 자행되는 언론의
부추기성 기사에 또 끌려갈것인가?
* 설사 국보급 문화재라 하더라도 지정에는 순서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