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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하23;11-17. 생명과 바꾼 것을 어떻게? 2024. 6. 9.
삼하 23장의 시작은 다윗의 마지막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결산을 한다고나 할까요? 여러분, 귀중했던 외모와 재산과 힘과 능력, 이런 것은 세월 앞에 다 변합니다. 세월 따라 기준과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항상 마지막 까지 하나님을 앞 세워야 하고 끝까지 주신 은혜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람은 힘이 있으면 과시하고 싶고 능력이 있으면 자랑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쉽지만은 않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을 앞장세우지 않으면 성과를 내고도 마지막을 놓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앞장세우지 않으면 사람의 본성이 나오고 감정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세월 따라 기준과 기치관이 변해도 처음 가졌던 그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앞장 세웠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인생 마지막에 3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무엇을 말할까요?
1. 인생의 결론을 이야기 합니다. 4절에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여러분, 동녘 하늘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면 참 장엄합니다. 지난주일 늘 빛 교회 단기 선교 팀과 도쿄, 미야쯔 아마노 하시닷떼, 기노사끼를 돌아 히메지와 오사카를 3박 4일간 주의 복음을 들고 가는 곳마다 일본어와 한국어로 찬양을 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이면 어떻습니까? 바다가 눈앞에 드러난 정경이었습니다. 너무나 훤하고 시원해 보이는 그래서 잠시 묵상을 하고 눈을 들어 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일출을 보았습니다. 해돋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무엇일까요?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무엇일까요? 마음을 비우고 日出을 바라보는 마음, 다짐과 결심과 소원이 거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일출을 보면 힘이 있어 보이고 광명이 비치고 일순간에 어두움이 걷힙니다. 다윗은 이런 돋는 해 아침빛을 노래합니다. 구름 없는 아침은 또 어때요? 늘 흐려있는 하늘만 보다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보면 영혼이 탁 트이는 것 같은 시원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새로운 아침이 됐는데도 근심과 걱정과 고민과 두려움의 구름으로 가득한 아침을 맞이하는 것과 구름이 없는 아침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또 다윗은 비 내린 땅에 움이 돋아나도록 하는 햇살과 같은 존재라고 합니다. 새로움과 생기와 힘을 주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 없나요? 많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왜 있는지를 모른 채 자리다툼에 여념이 없습니다. 여러분, 논어에 不患無位 患所以立(불환무위 환소이입)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뜻은 자리를 잃을까봐 걱정하지 말고, 어떻게 그 자리에 제대로 설 것인가를 걱정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자리에대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자기의 부족함을 잘 알지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실 것이라고 믿으면 이 믿음이 삶을 든든하게 하고 집을 아름답게 하고, 성을 건축하게 되지 않습니까? 다윗은 견고한 소망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견고한 소망을 갖습니까?
5절에 다윗의 견고한 소망의 이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참으로 견고한 소망입니다. 확신에 차있습니다. 신념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든 소원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보다 한 걸음 앞에서 이끌어 가십니다. 광야 40년을 잘 알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모세를 원망할 때 모세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이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민11;23에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소망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결정하신 일은 하나님이 감당하십니다. 그 약속 앞에 눈을 똑바로 뜨고 기다리고 기대하는 사람에게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완성품을 맡기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약속해주셨어요. 하지만 그 땅을 다 비워놓고 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와 기쁨과 즐거움을 약속하셨어요. 하지만 완성품이 아니라 씨앗입니다. 그 씨앗을 땅에 심고, 거름을 주고, 물을 주고, 정성껏 돌보지 않으면 가을이 되어도 빈손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좋고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곤고함과 함께 주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비록 곤고하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의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몸이 흔들리고 땅이 흔들리는 것 같은 불안감이 있지만 하나님에게 소망을 둔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5절에 내 집이, 내 인생과 내 삶의 집이, 내 이스라엘의 나라가 이렇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증거를 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결론은 주님께 달려 있습니다. 내 인생의 해석은 주님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해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처럼 마지막이 되었어도 이런 결론으로 답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자신을 보고, 시대를 보는 관점입니다. 여러분,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터전이 흔들리는 시대입니다. 많은 것이 공유되지만 항상 상대성 빈곤을 느낍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흔들리고 있지 않나요?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신뢰의 터전이 무너졌습니다. 사람들이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지 방황을 합니다. 집단 이기주의가 도처에 분출합니다. 정부와 정치권은 조정 기능을 거의 상실했습니다. 도덕적인 해이가 심각합니다. 점점 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시대일수록 서로를 살리는 相生의 길을 모색해야 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을 세우려는 근본적인 정신을 내려놓지 말아야 하는데 자기 소견과 입장을 관철하려고 합니다. 음성을 높이고,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이런 사태를 미리 예측한 것일까요? 시11;3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꼬! 탄식을 하는데 지금이 그런 시대입니다. 터가 무너졌습니다. 삶이 무너졌습니다. 집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려워질 때마다 사람들은 이런 난감한 상황을 타개할만한 사람들을 그리워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변했고, 난마처럼 얽혀있는 세상일에 모두가 만족할 해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렇다고 꿈조차 버릴 수가 없습니다. 다윗과 같은 사람이 기다려지는 시대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마지막 말입니다. 이스라엘을 세계 속에 각인 시키고 세계 속에 우뚝 세워놓고 이제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갈 때가 된 것을 알고 있는 다윗은 이제 후손들을 위하여 입을 엽니다. 흐르는 세월 앞에 다윗은 마지막 말을 합니다. 무엇이라고 합니까? 먼저 자기의 삶을 간단하게 요약을 합니다.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라고 자신에 대하여 평가를 합니다. 자신을 향하여 본 시각이고, 자신에 대한 평가입니다. 다윗은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위대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삶을 뒤돌아보면서 자랑스럽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경외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떤 경외심 입니까? 지나온 날을 돌이켜 보면서 오늘의 시대가 모두 하나님 은혜라고 합니다. 자신을 높이 올리운 사람이라고 자칭합니다. 올리웠다는 수동동사에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리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왕이 되고 이스라엘을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업을 할 수 있던 것과 직장을 다닐 수 있는 것과 사회에서 감당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기름 부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부심과 자긍심이 있습니까? 다윗은 자기 삶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자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삶에 힘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산문적인 현실에 살면서도 감성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 얼마나 멋집니까? 노래 잘하는 자는 시인입니다. 시인은 영혼의 민감한 촉수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현실의 미세한 부분에 눈길을 줍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땅에 살고 있으면서도 하늘의 소리에 민감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미하고 산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하나님을 노래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몇 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높임을 받고,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자기 스스로 높일 수가 없습니다. 높여 주어야 높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다윗을 공의와 경외함으로 다스린 사람으로 평가를 합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여러분, 이 어려운 시대에 사람의 평가가 중요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는 더욱 중요 합니다. 3절에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라고 합니다. 다윗에게 내린 평가입니다. 사람을 공의로 다스린다는 말은 구부러진 척도를 가지고 세상을 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 하여 두둔하고, 마음에 안 든다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사람이라고 해서 잘못을 덮어주고,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잘못을 뒤집어씌우지 않았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편들고 가난하다고 하여 업신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쁘다고 해서 봐주고, 못 살게 한다고 함부로 대하지 않아요. 사람이나 어떤 일을 대할 때 마음대로 척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험담하고 저주하는 사람들까지 품었습니다. 원수 앞에서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이야기하고 도리어 장군들을 꾸짖었는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보통사람이 못 합니다. 그러면 누가 공의로 다스릴 수 있나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임을 압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능력의 부족을 절감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믿음과 헌신입니다. 세상은 능력 있는 이들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것이 아니라, 많이 섬기려는 이들 때문에 아름다워 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높임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다윗은 더욱 공의와 경외함으로 백성들을 섬겼습니다.
3. 다윗의 위대함입니다. 다윗은 하나님만 생각하고 하나님만 높인 것이 아닙니다. 함께 고통을 받고, 함께 고생을 하고, 함께했던 모든 사람을 높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높이고 그리고 난 이후에 모든 영광을 자기와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합니다. 배반했던 사람들도 칭찬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전의 받은 은혜와 받은 배려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 때문에 성공한 사실만 기억합니다. 배려하지 않으면 금방 뒤 돌아서 헐뜯고 끌어 내립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와 함께 했던 모든 용사를 기록 합니다. 그것도 마지막에서입니다. 할 말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할 말이 바로 함께 했던 사람들을 높여주고 모든 영광을 그들에게 돌립니다. 여러분, 참 사랑이 무엇일까요? 8-17절 사이에 헌신한 세 용사가 나옵니다. 다윗 왕정에서 최고서열의 군대장관은 요압과 아마사입니다, 일반장군 중에 최고의 첫째 3인은 본문 앞 8-12절에 나오는 요셉 밧세벳, 엘르아살, 그리고 삼마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30인의 군장들이 있었는데 그 군장들 중에 대표가 둘째 3인인데, 그들은 요압의 동생인 아비새,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군장입니다(18-23절). 본문에는 그 둘째 3인이 다윗을 위해 헌신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들의 헌신과 충성을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이 무엇일까요?
3-1. 깊이 잘 듣고 마음에 새기는 것 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다윗이 참 철이 없습니다. 자신의 군대가 산성에 있고, 블레셋 군대가 베들레헴 성에 있어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는데 그때 말합니다. 아!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고 싶다. 누가 나로 저 물을 마시게 할까? 베들레헴의 우물물은 다윗이 어렸을 때 자주 마시던 우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시에 어렸을 때의 향수에 젖어서 리더가 그렇게 마음이 약해지면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런 말은 부하들의 가십거리가 될 만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세 용사들은 요새 주군이 이상해졌어! 라고 가십 거리로 삼지 않고, 오히려 그 말을 마음속 깊이 새겼습니다. 여러분, 말을 깊이 잘 듣는 것이 사랑의 기초입니다. 가끔 예배 후에 어떤 분은 말합니다. 목사님!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어찌되나요? 마음에 담아 둔 분에게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말씀을 잘 전하는 것만큼 말씀을 잘 듣는 것도 훌륭합니다. 말씀을 잘 들으면 부탁하기도 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격과 신앙이 성숙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는 것도 이유가 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왜 교회를 사랑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깊이 잘 듣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높은 줄 알면 성경은 침묵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그때부터 침묵하던 성경은 말합니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들려지고,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집니다. 그때부터 축복의 역사는 놀랍게 시작됩니다. 깊이 잘 들어야 이해력이 커집니다. 이해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고 오해는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오늘날 공동체가 왜 힘들어집니까? 대개 오해 때문입니다. 목사는 기본적으로 교인들에 대하여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항상 고생만 시켜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데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 라고 하면서 자신을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 말로 자세히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사람이 어떻게 마음까지 알아줍니까? 성숙한 사람은 No 라는 말보다는 Yes 라는 말을 할 구실을 많이 찾습니다. 믿음 안에서 예스라는 말을 하면서 사람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처지를 이해해주고, 들어주고, 양보하면서 보다 큰 것을 얻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다윗의 용사들이 이렇게 합니다. 얼마나 그리우면? 얼마나 힘이 들면? 얼마나 괴로우면 상대방에 대하여 듣는 것이 사랑의 시작일까요? 이렇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조용히 행동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한 손이 하는 것 한 손이 모르게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듣기만 잘하는 것은 사랑의 시작입니다. 시작을 했으면 계속해야 되잖아요? 그 것이 조용히 행동하는 것입니다. 세 용사는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먹고 싶다는 다윗의 말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고 조용히 물을 구하러 갔습니다. 그들은 있던 아둘람 굴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 50리 정도 됩니다. 왕복 100리 길을 오직 물을 구하려고 적진으로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어리석을 정도로 사랑을 했고 논리를 초월해 충성을 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전쟁터입니다. 어느 날, 이사야가 존경했던 웃시야 왕이 죽자 상심한 마음으로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때 어두운 현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그때 이사야가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그 고백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셨을까요? 가끔 보면 어떤 분은 어려운 일을 앞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그것을 맡겠습니다. 그런 분들 보면 너무 기쁘고 마음에 흥분과 감동이 생깁니다. 조용한 헌신은 영혼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청량제입니다. 왜 그때 세 용사가 다윗에게 물을 구하러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다윗이 그 우물물을 먹고 싶어도 갔다 오라고 하겠습니까? 그들은 조용히 행동을 했습니다. 조용히 행동할 때 더욱 감격이 됩니다. 어떤 일을 하겠다고 말했다가 못하면 무책임한 사람이 되지만 세 용사처럼 말을 안 해도 사람의 마음을 읽고 어느새 원하는 일을 해버리면 감동이 배가됩니다. 말을 잘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칭찬하는 말과 분위기를 밝게 하는 말을 많이 해주고, 꿈과 비전을 격려하고 믿음을 선포하십시오.
드러내지 않고 이렇게 사랑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3. 생명을 대신 한 것과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결국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으로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 와서 다윗에게 드렸습니다. 그때 그 우물물은 물이 아니라 피이었습니다. 가장 소중한 자신들의 피를 드렸습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드리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이 줄 수는 있지만 주는 것이 없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진실한 관계는 드림과 나눔을 통해서 형성이 됩니다. 소중한 일에 몸과 마음을 드리면 영혼이 살아나고, 건강도 살아나고, 공동체의 사기도 살아납니다. 거목이 쓰러지면 그 쓰러진 거목이 거름이 되어 작은 나무들이 더 많이 생기듯 부흥하려면 자신을 거름처럼 드려야 합니다. 취하는 삶은 영혼을 갈증 나게 하지만 바치는 삶은 영혼을 풍성하게 합니다. 취하는 삶은 눈물이 나오게 하지만 바치는 삶은 노래가 나옵니다. 얻음은 행복이지만 드림은 더욱 큰 행복입니다. 시성 타고르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바람이 불어 배 안의 등불이 꺼지니 뱃전에 달빛이 차더라! 많이 나누고 드리면 하나님은 더욱 크고 소중한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드릴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여러분, 결론은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거룩한 인생입니다. 세 명의 용사가 가져다 준 우물물을 받고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 그 엄청난 헌신을 보고 다윗은 이기적인 감성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육신적인 욕망을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원했던 소중한 물을 전혀 마시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부어드렸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하나님! 이 물은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갔던 사람들의 피 입니다. 저는 도저히 마실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점이 다윗의 위대한 부분입니다. 서로를 이해합니다. 그는 회개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부하들이 얼마나 감동하겠습니까? 부하들은 목숨을 각오한 은밀한 헌신으로 다윗을 감동시켰고, 다윗은 자신의 육신적인 욕망을 과감히 버림으로서 부하들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때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결국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더욱 비전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결국 나라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헌신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덕목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과 세 용사는 모두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하였더라. 그들이 위대한 일을 했다는 암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런 위대한 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큰 영향력을 전달하는 찬란한 꿈과 비전을 품고, 계속 기도하면 적절한 때에 설움은 설렘으로 변화가 됩니다. 그런데 설움을 설렘으로 변화시키려면 내가 지고 가야 할 짐을 기꺼이 져야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비전에 필요한 것을 상세히 얘기하지 않아도 그 필요를 기도 중에 깨닫고, 알아차리고, 그 필요를 채우시는 사람에게 반드시 찬란한 내일이 약속됩니다. 아프레 쓸라(Apres cela). 인생은 어디서 와서 무엇을 위해 살며 어디로 가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은 모든 인간이 갖는 질문입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큰 돌 비석이 하나 있고 그 비문에는 아프레쓸라(Apres cela)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하여 적혀 있습니다. 아프레 쓸라는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세 용사처럼 필요에 대하여 예민하게 반응하고 이해하여 소리 없이 헌신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래서 신앙은 한 차원 높아지고, 잃었던 활력은 다시 찾고, 영혼도 새로워지는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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