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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징(成晩徵) 묘표(墓表) - 권상하(權尙夏)
사부(師傅) 성군(成君) 만징(晚徵) 묘표
지난 신미년(辛未年, 1691, 숙종 17)에 달경(達卿, 성만징의 자(字)임)이 황강(黃江)으로 나를 찾아왔는데, 그 모습은 청수하고 식견은 탁월함을 보고 풍진 세상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그 후로 수십 년간을 우정은 막역(莫逆)하였으며, 그 학문이 날로 새로워지고 덕은 날로 높아만 감을 기뻐하였고 우리 도학이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을 항상 다행으로 여겼다.
그런데 신묘년(辛卯年, 1711, 숙종 37) 정월 15일에 역질(疫疾)로 세상을 떠나니, 나는 애통하여 몸의 반쪽을 잃은 듯하였다. 지금 그의 아들 성이홍(成爾鴻)이 울면서 나에게 묘명(墓銘)을 청하니, 내가 어떻게 차마 명(銘)을 할 것이며 또 어떻게 차마 명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달경의 성은 성씨(成氏)요 이름은 만징(晩徵)이며 추담(秋潭)은 그 호이다. 숭정(崇禎) 후(後) 기해년(己亥年, 1659, 현종 즉위년) 11월 7일에 상주(尙州)의 흥암리(興巖里)에서 태어났다. 겨우 말을 배울 때에 벌써 책을 읽었고 이빨을 갈 때쯤에는 글귀를 토하면 사람들을 놀랍게 하곤 하였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집상(執喪)을 어른처럼 의젓하게 하였다. 16세에 백씨인 성헌징(成獻徵)한테서 ≪대학(大學)≫을 배우는데 조용히 앉아서 마음을 함양하면서 마치 어떠한 묵시(默示)의 깨달음을 감지한 듯 절귀(絶句) 한 수를 읊기를,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나니, 누가 이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일만 개체는 하나의 이치로 통한다 하겠네.[無上亦無下 無始亦無終 若人問此物 萬殊一源通]”라 하니, 백씨가 기뻐하며 이르기를, “대충 체(體, 본체)와 용(用, 작용)을 알았구나.” 하였다.
백씨가 일찍이 기문둔갑법(奇門遁甲法)을 풀었는데, 달경이 한번 보고 통하자 백씨가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여기에 관심을 가졌었으나 이미 후회를 하고 있다. 혹 외방(外方, 학문 이외의 잡술)으로 빠질까 걱정이니 극히 조심해라.” 하니, 달경이 즉시 중지하였다. 18세 때에 백씨를 잃고는 더욱 분발하여 학성도(學聖圖)를 만들고 또 글 수백 마디를 지어 자경(自警)하였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에는 화양동(華陽洞)으로 우암 선생(尤菴先生)을 찾아뵈었고 병인년(丙寅年, 1686, 숙종 12)에는 부모의 명령으로 향시(鄕試)에 나가 합격하고 이듬해 봄에는 복시(覆試)를 보려고 서울로 가는 길에서 술사(術士)를 만났는데, 술사가 ‘중정을 지키는 마음과 신의로운 풍도는 연하 속에 노니는 종적이요 설월 같은 흉금이라[中正之心 信義之風 煙霞蹤跡 雪月襟期]’라는 16자를 써 주고 성명도 밝히지 않고 가버렸다.
무진년(戊辰年, 1688, 숙종 14)에는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여 애훼(哀毁)함이 거의 보전하지 못할 정도였고, 상례 절차는 화양동에 물어서 예를 따라 그르침이 없게 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96, 숙종 22)에 정시한(丁時翰) 등이 우암을 헐뜯으므로 달경이 도내의 다사(多士)들을 인솔하고 통렬하게 변명하였는데, 크고 작은 문장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계미년(癸未年, 1703, 숙종 29)에는 천거로 내시 교관(內侍敎官)에 보임되고 또 왕자 사부(王子師傅)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갑신년(甲申年, 1704, 숙종 30)에 만동묘(萬東廟)의 황사(皇祀)에 참여하였는데, 영남 사람들이 타당치도 않은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하여 비난이 빗발치듯 하였다.
이에 달경이 나서서 변설(辨說)하기를, ‘남헌(南軒, 송(宋)의 학자 장식(張栻)의 호)이 우제(虞帝, 순(舜)의 이칭)를 제사지내고 초(楚)나라 백성이 소왕[昭王, 초소왕(楚昭王)]을 제사지낸 일’로써 변증을 하되 말이 극히 명백하니, 홀연히 깨우치는 자가 자못 많았다.
기축년(己丑年, 1709, 숙종 35)에 문경(聞慶)의 쌍룡동(雙龍洞)에 새로 터를 잡아 옮겨 살려고 하면서 기호(畿湖)의 사우(士友)들과 계를 맺고 예의(禮義), 충신(忠信), 주궁(賙窮, 곤궁한 이를 도움), 휼상(恤喪, 상사(喪事)에 서로 도움) 등 조항을 대충 석담 향약(石潭鄕約)에서 본따서 만들었으나 일이 미처 성사되지 못하였다.
경인년(庚寅年, 1710, 숙종 36)에 아들을 황강으로 보내서 주자(朱子)가 주고받은 글을 간절히 부탁하였다. 그때에 그 종제(從弟)가 염병을 앓아 차마 멀리 떠나지 못하다가 상(喪)을 마치고 비로소 내원암(內院庵)으로 들어갔으나 마침내 면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수(壽)는 53세이다. 병중에 부솔(副率)을 제수한다는 명이 있었으나 미처 사면소(辭免疏)를 올리지도 못하였다. 5월 20일에 그 고을 서쪽 어산(於山) 오향원(午向原)에 장사지냈다.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고려의 태자 중윤(太子中允) 휘(諱) 인보(仁輔)가 시조이다. 이로부터 관작으로 이어져 왔는데, 휘 사달(士達)이란 분은 대제학으로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휘 세평(世平)이 관찰사인데 이분이 달경에게는 5대조가 된다.
고조 휘 남(灠)은 좌랑으로 증 참판이요 호는 청죽(聽竹)이니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있었고, 증조 휘 여백(汝栢)은 선교랑(宣敎郞)이며, 조부 휘 진승(震昇)은 일찍 소과(小科)에 올랐으나 정축년(丁丑年, 1637, 인조 15) 이후로는 들어앉아 절의를 지켰고, 고(考) 휘 호영(虎英)은 사우간(士友間)에서 추중(推重)을 받았으며 비(妣)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통덕랑 이동야(李東野)의 따님인데, 옥산(玉山)과 창석(蒼石)은 그 내외 조상의 호이다.
달경은 남양 홍씨(南陽洪氏) 통덕랑 홍진대(洪震大)의 따님을 취(娶)하여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바로 명(銘)을 청한 사람이고 딸은 사인(士人) 한덕전(韓德全)에게 출가하였다. 달경은 화평(和平)하고 정직하여 천성이 도(道)에 가까웠다. 성인(聖人)의 학문에 전력하여 조예와 실천에 자득(自得)한 묘체(妙諦)가 많았다.
일찍이 이르기를, “성인(聖人)은 동(動)과 정(靜)의 양덕(兩德)을 갖추고도 반드시 정으로 주안점을 삼았는데, 학자들이 주정(主靜) 한 가지를 버린 것은 이는 급선무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정자(程子)가 이른바 ‘정(靜)한 뒤에라야 만물이 자연히 봄 기운을 간직하게 된다’는 말은 음미할 만한 대목이다.” 하였다.
사람이 혹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는 육씨(陸氏, 송(宋)의 학자 육상산(陸象山)을 지칭한 말)의 덕성(德性)만을 존상(尊尙)하는 것과 가깝지 않겠습니까?” 하면, 달경이 웃으면서 답하기를, “이는 수레에 두 바퀴가 있고 새에 두 날개가 달린 것과 같다. 어떻게 하나를 버리고 능히 다니고 능히 날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속학(俗學)들은 다만 문학(問學)만 일삼고 본원(本源)의 공부에는 미진함이 많기 때문에 나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하였다. 학도를 가르치되 반드시 뜻을 세움을 위선으로 하고 방심(放心)을 거둬들임을 요체로 하였기 때문에 비록 초학자라 할지라도 모두 나름대로 수확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평소에는 말을 아끼었으나 만일 시비를 논하거나 사람의 사정(邪正)을 말할 때에는 맺고 끊는 맛이 있어 감히 범하지 못할 바가 있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우암이 윤휴(尹鑴)를 물리친 것은 그 공이 맹자(孟子)가 이단(異端)을 물리친 것만 못하지 않다.” 하였다. 또 정치의 득실(得失)과 군정(軍政)의 변통 등에 대해서도 강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으나 남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집에 있어서는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했으며, 제사에는 성경(誠敬)을 다하고 매일 새벽이면 사당에 참배하였으며, 우애도 지극하여 형수를 섬기기를 어머니 섬기듯 하고 어린 조카를 사랑하기를 자기 자식처럼 하였으며, 이 마음을 미루어 족척(族戚)에게까지 미쳐 각기 환심을 샀다.
종제(從弟)가 찢어지게 가난하여 갈 곳이 없게 되자 전답을 나누어 주고 집도 쪼개 주면서도 아끼는 기색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고 본인이 졸(卒)하자 관원이나 야인(野人)들까지 마치 친척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저술한 바로는 가언 범록(嘉言泛錄)ㆍ회심록(會心錄)과 시문(詩文) 약간 권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아! 달경의 가언 선행(善行)을 몇 자 되는 묘표에 다 기록할 수는 없다. 대개 그 품성은 명수(明粹)하였고 또 배우기를 좋아하여 부지런한 노력은 늙어서 더욱 독실하였으므로, 향당(鄕黨)에서는 그 인(仁)에 감복하고 사우(士友)들은 그를 더욱 흠모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앞으로 나간다면 그 결과는 헤아릴 수 없었을 터이나 하늘이 그 나이를 빼앗아 포부를 펴지 못하였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달경은 내가 나이가 조금 많다 하여 나를 대우하기를 무척 공손히 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벗으로 사귈 것을 그는 사양하면서 스승을 삼겠다니 부끄럽기만 하네.[讓抗慙丁]’라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세도(世道)는 날로 비하(卑下)하고 사문(斯文)은 더욱 외로워지므로 노경(老境)의 심기를 오직 달경에게 의지하려 했는데, 이제는 다 틀린 일이다. 뉘라서 나의 슬픔을 알랴? 다만 다행한 것은 그 아들이 가학(家學)을 잘 계승하여 때로는 정묘(精妙)하다는 평판이 들려 전형(典型)이 아직 남아 있으니, 이는 족히 나의 늙은 심회를 위로해 줄 만한 동시에 또한 그 집안을 이룰 사람이 있음을 기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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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朝人物考續六 / 蔭仕
成晩徵 墓表[權尙夏]
往在辛未歲, 達卿訪余於黃江之上, 觀其氣貌淸臞, 見識超邁, 旣知非塵世間人。 伊後數十年, 交誼莫逆, 喜其學日益新, 德日益進, 常幸此道不落莫矣。 辛卯上元, 以疹疫不起, 余誠痛傷, 如失半身。 今其孤爾鴻泣請墓銘, 余何忍銘, 亦何忍不銘?
達卿, 姓成氏, 名晩徵, 秋潭其號也。 以崇禎後己亥復月七日, 生于尙州興巖里。 學語知讀書, 甫齔吐辭驚人。 九歲失恃, 執喪如成人。 十六, 從伯氏獻徵受《大學》, 靜坐涵養, 若有契悟。 賦一絶曰: “無上亦無下, 無始亦無終。 若人問此物, 萬殊一源通。” 伯氏喜曰: “粗見體用也。” 伯氏嘗演奇門遁甲法, 達卿一見便通。 伯氏曰: “吾曾留意於此, 已覺悔恨, 深恐外馳, 切宜戒之。” 達卿卽止之。 十八, 喪伯氏, 益自奮發, 作學聖圖, 且爲文累百言以自警。
庚申, 拜尤菴先生於華陽洞。 丙寅, 以親命赴鄕解得捷。 明春, 赴省圍, 路遇術士, 術士贈“中正之心, 信義之風, 煙霞蹤迹, 雪月襟期”十六字, 不言其名而去。 戊辰, 丁外艱。 哀毁幾不全。 送終之節, 稟于華陽, 率禮罔愆。 丙子, 丁時翰等誣詆尤菴, 達卿率道內多士痛卞之, 大小文字皆出其手, 士論韙之。
癸未, 薦補內侍敎官, 又拜王子師傅, 皆不就。 甲申, 參萬東廟皇祀, 嶺人以爲非其鬼而祭之, 譏議紛然。 達卿立說以卞, 以南軒之祭虞帝、楚民之祭昭王爲證, 辭極明白, 頗有渙然開悟者。 己丑, 將卜居于聞慶雙龍洞, 遂與湖洛士友結契, 以禮義、忠信、賙窮、恤喪等條, 略倣石潭鄕約, 而事未及就。 庚寅, 送子黃江, 以朱子送受之書, 眷眷囑付。 時從弟患拘忌疾, 不忍遠去, 治喪訖, 始入內院庵, 竟不得免, 壽五十三。 病中聞有副率除命, 而未及遣辭狀。 以五月廿日, 葬于州西於山午向之原。
昌寧之成, 以高麗太子中允仁輔爲上祖。 自是簪組相承, 有曰士達, 大提學, 諡文孝。 入我朝有曰世平, 觀察使, 是於達卿爲五代祖也。 高祖諱灠, 佐郞、贈參判, 號聽竹, 以學行名。 曾祖諱汝栢, 宣敎郞。 祖諱震昇, 早登司馬, 丁丑後, 杜門守貞。 考諱虎英, 見重于士友間。 妣德水李氏, 通德郞東野之女, 玉山、蒼石是其內外先也。 達卿娶南陽洪氏, 其考通德郞震大也。 生一男, 卽乞銘者; 女適士人韓德全。
達卿和平正直, 天性近道。 早歲專心聖學, 精詣實踐, 多有自得之妙。 嘗曰: “聖人全動靜之德, 而必以靜爲主。 學者捨主靜一着, 是不識急先務也。”
又曰: “程子所謂‘靜後萬物, 自然有春意’者, 方覺有味。” 人或曰: “如此則無乃近於陸氏之專務尊德性乎?” 達卿笑曰: “如車兩輪, 如鳥兩翼, 寧有捨一而能行能飛者乎? 然俗學徒事道問學, 多欠本原工夫。 故吾言如此耳。” 敎學者, 必以立志爲先, 收放心爲要, 以故雖蒙學, 皆獲其益。
平居出言簡重, 而若論事是非、人淑慝, 截然有不可犯者。 嘗曰: “尤翁之闢尹鑴功, 不在孟子下也。” 至於治法之得失、兵政之變通, 未嘗不講究, 而亦未嘗對人言也。 若其居家, 則事親盡其孝, 居喪盡其哀, 祭祀極其誠敬, 每日晨謁家廟。 友愛篤至, 事丘嫂如母, 愛孤姪如子, 推以及於族黨, 各得歡心。 從弟窮甚, 無所於歸, 分田割宅, 無難色, 人皆歎服。
及其沒也, 官居野處, 如喪親戚。 所著述者, 有《嘉言汎錄》、《會心錄》、詩文若干卷藏于家。 嗚呼! 達卿之嘉言善行, 非數尺之表所可殫記。 蓋其稟質明粹, 又能好學, 孜孜用工, 老而益篤, 以至鄕黨服其仁, 士友欽其德。 由此以往, 其至難量, 而天閼其年, 未展抱負, 豈非命也? 達卿以我有一日之長, 遇我甚恭, 眞所謂讓抗慙丁。
顧惟世道日下, 斯文益孤, 歲晩心期, 惟達卿是仗, 今焉已矣。 孰知我悲? 惟幸胤子善繼家學, 時聞精妙之論, 典刑猶存, 此足以慰我老懷, 而亦喜堂構之有其人也。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