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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양주시의 역사[歷史]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기도 양주시의 역사.
개설
양주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이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다. 더욱이 양주 지역의 남쪽과 북쪽을 흐르고 있는 한강과 임진강은 수로에 근거한 교통의 편리함, 풍부한 수자원, 광활한 평야라는 지리적 장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옛날부터 이를 둘러싼 군사적 쟁탈전이 빈번하였다. 이러한 한강과 임진강을 접하면서 넓은 평야와 나지막한 산지로 둘러싸인 양주 지역은 지리적 이점 때문에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인식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경기도 양주시의 역사를 삼국 시대, 고려 시대, 조선 시대, 근대, 현대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 시대
삼국 시대 고구려·백제·신라 가운데 양주 지역 일대를 제일 처음으로 확보한 국가는 백제였다. 일찍이 백제 최초의 도읍지였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양주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백제 개루왕(蓋婁王) 5년인 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고, 제21대 개로왕(蓋鹵王) 15년인 469년 10월에 북한산성에 병사를 주둔시켰다’고 하고 있다. 이는 마한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실시되는 5세기 중반 이전까지 양주 지역을 자기 세력권 아래에 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이곳은 백제에 이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현재의 양주시 일대를 매성(買城)[혹은 매성(買省)이라고도 씀] 혹은 마홀(馬忽)로, 은현면과 동두천시 일대를 내을매(內乙買) 혹은 내이미(內爾米)라고 불렀으며, 남면 일대는 칠중성(七重城), 남양주 일대는 골의노현(骨衣奴縣)이라 불렀다. 양주 지역을 점령한 고구려는 한강을 경계로 백제와 대치하는 제일선인 양주 지역에 각종 군사 시설을 만들면서 이곳의 이름을 매성(買城)이라고 불렀다. 원래 ‘매성’이란 고구려말로 ‘맷골’ 혹은 ‘물골’로서 수성(水城)을 의미한다. 그런데 매성군은 매초성(買肖城)과 통하며, 신라가 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던 매초성이 바로 지금의 양주 지역이었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현재까지도 매초성이 어딘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연천의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 부근 혹은 대전리산성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에는 당시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매초성에 주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호로고루성이나 대전리산성 등 조그만 성에 20만 대군이 주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매초성은 대단히 규모가 큰 성일 수밖에 없고, 그런 성은 경기 북부에서 불곡산과 천보산, 그리고 지금의 칠봉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양주시 회천동·양주동 일대 밖에는 없다. 따라서 현재의 양주시 지역은 삼국 시대 매초성이 있었던 곳으로 예전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89년이 지난 757년(경덕왕 16)에는 매성을 내소현(來蘇縣)으로, 내을매를 사천현(沙川縣)으로, 골의노현을 황양(荒壤) 혹은 풍양(豊壤)으로 바꿔 불렀다. 현재 양주시 유양동과 어둔동, 백석읍 오산리에 걸쳐 있는 양주 대모산성(大母山城)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편과 신라와 통일 신라의 유물들, 그리고 천보산과 불곡산·도락산 일대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군사용 보루 유적을 포함한 관방 유적들은 양주 지역이 아주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였음을 입증해 준다.
고려 시대
후삼국 시대까지 아직 ‘양주’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양주’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 초기부터인데, 이것도 오늘날의 양주시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과 한강으로 둘러싸인 지역, 즉 오늘날의 서울 사대문(四大門) 안쪽 일대를 가리키던 이름이었다. 양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음 등장한다. 413년(신라 실성왕 12)에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평양주는 지금의 양주(楊州)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즉 고려 시대의 양주는 삼국 시대에 평양주로 불렸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평양주는 당시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에서 남평양주(南平壤州)를 가리킨다. 고려 시대의 양주는 삼국 시대에는 북한산 일대에 조성된 행정 구역이라 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한강 이북에 있다 하여 한양군(漢陽郡)으로 불렸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장자 신검의 반란에 직면한 후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했을 때, 왕건은 개경에서 후한 예로 맞이하고 양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가 기록된 고려 인종 때의 인식에 근거하여 양주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삼국 시대가 지나고 고려 왕조가 개창되면서 비로소 ‘양주’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755년(경덕왕 14)에 북한산주를 한양군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다시 양주로 고쳤다고 하였다. 고려 초기란 태조 왕건의 집권기를 가리킨다. 즉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행정 구역을 재편성하면서, 한양군을 양주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양주는 발전을 거듭하여 983년(성종 2)에는 지방의 12개 주요 거점 도시를 의미하는 12목(牧)의 하나로 편성되었고, 1067년(문종 21)에는 남경(南京)을 설치하여 인접 군민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숙종 때에는 수도를 개경에서 남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즉 1096년(숙종 원년)에 신하 김위제(金謂禔)가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수도로 정할만 하다고 하면서 수도를 남경으로 옮길 것을 강력히 건의한 것이다. 이때 천문 담당 관리인 문상(文象)이 김위제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양주에 새로운 궁궐을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1010년(현종 1)에는 물밀듯 쳐들어오는 40만의 거란병을 피해 왕이 개경을 버리고 멀리 나주까지 몽진할 때, 양주에 며칠간 머문 일도 있다. 당시 남진하던 거란군이 장단에 이르렀을 때 이곳의 서북단 천험의 요새지 감악산에 군대의 정기(旌旗)와 군마가 있는 것 같이 보여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퇴각하게 한 사실을 기록한 완문(完文)[관에서 개인에게 발급하는 문서]이 감악산 사당(祠堂)에 전해온다. 1012년 양주의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로 개편되었으며, 1018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고 견주(見州)·사천현(沙川縣)[지금의 동두천시, 양주시 회천동·은현면 일원)·풍양현(豊壤縣)[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진접읍 일원]이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1099년(숙종 4) 가을숙종은 직접 양주에 가서 궁궐 터를 정하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主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남경 건설 공사를 감독케 하였다. 공사는 5년 만에 끝났고, 숙종은 현장을 직접 확인하였다. 1308년(충렬왕 34)에는 이곳의 이름을 한양부(漢陽府)로 고쳤다. 이후 양주라는 이름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이 지역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려 시대 전 시기에 걸쳐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닌 현재의 서울 중심지를 가리키는 명칭이었고, 현재의 양주시 지역 일대는 견주로 불리고 있었다.
조선 시대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2년 새롭게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다. 이성계는 고승 무학대사(無學大師)와 함께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수도를 물색하였다. 그 결과, 이성계는 고려 후기까지 ‘양주’로 불리던 한강 북부의 한양부가 정치·경제·군사적 측면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수도로 선정하였다. 한편, 새로운 수도가 한양부에 설치되자, 한양부 가운데 수도에 편제되지 않은 지역은 옛 양주를 계승하는 지역이라 하여 그대로 ‘양주’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양주의 중심지도 오늘날의 양주시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4년[1395] 6월 6일조를 보면, 한양부를 고쳐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기존의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 즉 오늘날의 양주시 고읍동 일대로 옮기고 행정 구역명을 양주군(楊州郡)으로 고쳤다고 전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인 사실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실려 있다. 즉 1394년(태조 3)에는 도읍을 한양부에 정하였으며, 기존의 한양부 치소(治所)를 일단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현재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구의동 일대]에 옮기면서 관직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 새로운 수도의 건설과 함께 양주군으로 강등되었던 양주 지역은 1395년에 양주부(楊州府)로 승격하였고, 1397년에는 치소를 견주 지역, 즉 오늘날의 양주시 고읍동 일대로 이전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로, 다시 1466년(세조 12)에는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이는 양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는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된 배경이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한편 1403년(태종 3) 11월 19일조의 기록을 보면, 양주부를 양원(楊原)이란 이름으로 고칠 것을 건의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실행되지는 못했다.
한편, 양주는 조선 중기에 들어 한때 존폐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1504년(연산군 10)에 경기 북부 지역에 강무장(講武場), 즉 국왕의 무예 연마를 위한 공식 수렵장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금표(禁標)를 설치하였다. 당시 양주 지역의 대부분이 금표 지역 안으로 편입되었다. 연산군은 이어 양주목의 백성들을 인접 지역으로 이주시키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양주목이라는 행정 구역을 소멸시켰다. 그러나 1506년(중종 원년)에 양주는 양주목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그리고 치소는 오늘날의 양주시 유양동의 불곡산 부근에 새로 조성하였다. 이때부터 유양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양주 시대가 열렸으며, 기존의 양주시 고읍동 지역은 일개 마을로 전락하였다. 동헌과 더불어 향교와 사직단, 그리고 각종 건물들이 이때 조성되었다. 양주 지역에 있는 게너미고개[해유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원수 신각(申恪)과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 함경도병마절도사 이혼(李渾) 등이 육지 전투에서는 최초로 전승을 거둔 전첩지이다. 한편 현종 때에는 남편을 죽인 애상(愛相)이란 여자가 자복하고 처형됨으로써 목(牧)에서 강등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대로 능침(陵寢)이 있는 고을이라 하여 강등시키지 않고, 양주목사를 파직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였다. 이것은 조선 왕조에서 양주를 얼마나 중요한 지역으로 취급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명확한 자료이다. 한편 18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에서는 양주목을 ‘지금 학성(鶴城)이라고 칭한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전후의 어느 문헌에서도 보이지 않는 독특한 이름이어서 주목된다. 양주목의 면 단위 행정 구역명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에서 처음 확인된다. 그리고 양주목의 리 단위 행정 구역명은 18세기 후반의 문헌인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서 처음 발견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조선 중기 대표적인 청백리였던 백인걸(白仁傑), 명종 대 의적으로 활약한 임꺽정, 현종 대 소론 세력을 대표하는 학자였던 서필원(徐必遠), 순조 대 방랑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김병연(金炳淵)[일명 김삿갓] 등이 있다.
근대
19세기 말에 들어 조선의 지방 행정 구역은 크게 변화되었다. 즉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따라 지방 제도 개정 사항이 전국에 반포되었다. 당시 양주목은 경기 소속의 3등군(三等郡)인 양주군으로 변경되었다. 1922년 군청사가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 의정부리[지금의 의정부시]로 이전됨에 따라 시둔면은 1938년에 양주면으로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한말 의병장으로 활약한 윤인순(尹仁淳)·정용대(鄭用大), 그리고 삼균주의 사상을 제창한 조소앙(趙素昻)의 묘가 양주시 남면 황방리에 있다. 양주시 광적면 가납리에 있는 가래비 3·1운동기념비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항일 운동의 표상이다. 교육자로는 민족 항일기인 1926년 브나로드 운동으로 농촌 계몽 운동을 전개했으며, 광복 후 추계학원[현 중앙여자중학교·중앙여자고등학교]을 설립한 임봉순(任鳳淳)과 1906년 엄비(嚴妃)의 후원을 얻어 명신학교(明新學校)와 숙명학교(淑明學校)를 설립한 이정숙(李貞淑)이 있다.
현대
해방 이후 양주 지역은 대부분의 지역이 시로 독립되어 분리되고, 현재와 같은 지역만 남게 된다. 남양주시, 구리시, 의정부시, 동두천시 등이 양주 지역에서 분리 독립된 지역이다. 그러한 역사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46년 파주군 남면이 양주군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 이담면(伊淡面)이 동두천읍으로 승격되었고, 의정부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다. 노해면(蘆海面)과 구리면 5개 리가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다. 1973년 2월 14일에 동두천읍 광암출장소가 설치되었고, 7월 1일에는 포천군의 탑동리가 동두천읍에 편입되었으며, 구리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79년 4월 30일에 동두천읍 생연·보산·소요출장소와 구리읍 갈매·수택출장소가 설치되었고, 미금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4월 1일에 양주군 관할 구역 중 구리읍·미금읍·별내면·진접면·진건면·수동면·화도면·와부면이 분리되어 남양주군이 신설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 동두천읍이 시로 승격, 분리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은현면 상패리가 동두천시로 편입되었다. 1985년 10월 1일 회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7년 1월 1일에 광탄면 기산리 일부가 백석면에 편입되었다. 2000년 9월 25일 군청사를 의정부에서 현 남방동으로 이전하였고, 그해 10월 1일 주내면이 양주읍으로 승격하여 2개 읍, 5개 면이 되었다가, 다시 2001년 10월 1일 백석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3개 읍, 4개 면으로 되었다. 2003년 10월 19일 양주군이 도합 복합시인 양주시로 승격하여 1개 읍, 4개 면, 6개 행정동으로 구성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양주시에서 일어난 현대의 사건으로는 2002년 6월 13일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에서 미군 장갑차에 의해 압사 사고를 당한 신효순·심미선 양 사건이 대표적이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양주군지』(양주문화원, 1992)
『양주군의 역사와 문화유적』(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양주군, 1998)
『양주 땅이름의 역사』(양주군·양주문화원, 2001)
김병륜, 『매초성전투-나당전쟁 최후의 결전』(국방홍보원, 2006)
이도남, 「조선시대 양주지방사 연구」(건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4)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2022-05-13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