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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산 교수의 기조발제 중
김낙철 등 부안동학
부안동학이 동학혁명 연구에서 빗겨가게 된 연유는 호남 지역에서 일어난 동학과는 다소 다른 노선을 견지하며 활동 을 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그러나 부안 지역의 동학교도들은 동학혁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고, 또 중요하게 활동을 했다.
부안 동학을 이끌던 중심적인 인물들은 김낙철, 김낙봉, 그리고 이들의 종형제 등 이었다. 이들 부안의 동학 지도자들이 지녔던 성향과 부안 동학의 특성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따라서 이들 부안 동학 지도자들에 관한 고찰이 우선되어야 한다.
삼형제 중에서 장남인 김낙철과 차남인 김낙봉이 먼저 동 학에 입도를 하였고, 막내인 김낙주, 그리고 종제인 김낙정, 김낙용 등이 이어서 동학 에 입도를 한 온 가족이 동학교도가 된 집안이다.
부자이며 양반인 김낙철 형제가 모두 동학에 입도를 한 것은 많은 의미를 지닌다. 부자이며 양반이지만, 당시 시대적인 상황, 다시 말해서 일컬는바 지배계층이 보였던 횡포와 부조리를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비록 양반이고 부자이지만, 이들은 부조화와 불균형의 세상을 혁신시키고자 일어난 동학을 매우 의미 있는 집단으로 받아들였고, 이에 동조를 했던 것이다.
따라서 김낙철 형제의 동학 입도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성향이었다기보다는 보다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었다고 평가가 된다. 따라서 투쟁을 통한 변혁이 아닌 신앙적인 방법을 통해 상생과 조화를 추구하므로 이룩하는 새로운 삶으로의 변혁을 이들 김낙철 형제들은 추구를 하였다.
다음과 같은 김낙철 의 술회는 이들이 지닌 신앙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잘 드러내 준다.
"계사년 3월에 대선생님 신원을 하러 동생 낙봉이 김영조와 교도 몇 백 명과 함께 서 울에 갔으나 대선생님의 억울함을 풀어드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때 나는 도내의 도도집(都道執)을 맡아 있었다.
이때부터 각 도와 각 읍에서 지목이 크게 일어나 붙잡힌 자와 죽음을 당한 자가 이루 셀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지목을 두려워하지 않고 중문을 열어 선약(仙藥)으로 병을 구제하는 일을 하며 3-4년 동안 별 탈 없이 포교를 하였다."/金洛詰 歴史
이 일화는 동학의 영부(靈符)에 관한 것으로, 언뜻 듣기에는 비이성적인 미신과도 같 이 생각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러함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신앙은 비롯된다.
이성적인 것만을 가지고 따지는 곳에는 신앙이 자리할 틈이 없다. 즉 이 일화는 얼마만큼이나 김낙철이 동학이라는 신앙에 심취를 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 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김낙철 등의 부안 동학 지도자들이 다만 종교적 수행만을 일삼고, 현실의 문제는 도외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문제에 있어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투쟁적이기보다는 상생과 조화라는 평 화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점이 다른 점이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입장을 고수하므로, 김낙철은 무력으로 부안관아를 점령하지 않고 군수와 유생들의 요청을 받아 도소(都所)를 설치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은 급진적인 사회변혁보다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점진적인 변혁을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혁명 기간 내내 부안에서는 관과 유생, 그리고 동학의 관민상화(官民相 和) 내지 민중자치(民衆自治)가 가능했었다.
전봉준이 손화중과 연대하여 4월 3일 동학군 4천여 명을 이끌고 부안으로 들어와서 는 군수 이철화를 처형하고자 했다. 이때 김낙철이 나서서 손화중을 달래서 부안군수 이철화는 화를 모면하였다는 일화는 부안의 동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이철화가 비록 동학군과는 대척관계에 있는 당시 부안의 관아를 맡아 있는 군수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살생에 동학의 본래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을 분명히 했고, 또 이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한 김낙철은 손화중에게 부안을 자신에게 맡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김낙철, 김낙봉 형제가 나주 관아에 잡혀 있을 때, 김낙철 등이 베풀었던 선행으로 인하여 이들 모두가 무사히 풀려난 일화는 이들이 어떠한 생각과 정신으로 동학을 신 앙하였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제주도가 계사년(1893년)과 갑오년(1894년) 이태 동안 큰 흉년을 만나 경내의 몇 만 명 목숨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러 어곽(魚藿, 해산물) 등의 물건을 배에 싣고 전 라도 각 군 포구에 와서 곡식을 살 때에 다른 포구에서는 탁란군(濁乱軍)에게 실은 물 건을 모두 빼앗겼는데, 유독 부안의 각 포구에선 탁란군에게 혹시라도 빼앗긴 것이 있 으면 김 아무개가 바로 사람을 보내 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홉의 쌀도 잃어버리지 않아 제주 경내의 인민이 부안군의 조맥(粗麥)으로 모두 목숨을 보전하였습니다.
이것은 김 아무개 형제의 덕분이 아닙니까? 만약 김낙철 낙봉 형제를 죽이실 터이면 소인 들을 죽이고 김 아무개 형제의 목숨을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동학혁명 당시 김낙철 형제가 보여주었던 이러한 일화는 김낙철을 비롯한 부안의 동학이 어떠하였는가를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김낙철 등의 형제, 종형제들이 동학혁명에 직접적으로 참여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김낙철 형제는 전봉준, 손화중 등과 함께 고부로 진출을 하여 황토현 전투에 참가를 하였고, 해월이 9월 18일 총기포령을 내리자 김낙철은 김석윤, 신명언, 강봉희, 신윤덕, 이준서, 신규석 등 동학지도자들과 함께 부안에서 기포를 하였다.
그러나 김낙철 등은 호남과 호서 지역의 동학군이 연합전선을 형성하는 논산으로는 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부안에 남아서 집 강소를 설치하고 패정개혁을 단행하는 등 현실 개혁에 앞장을 섰었다.
김낙철 형제로 대표할 수 있는 부안의 동학이 이와 같이 상생과 조화의 정신에 의하여 펼쳐졌던 데에는 해월의 가르침과 중요한 맥락을 맺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김낙철, 김낙봉 형제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해월을 찾아가 동학에 입도를 하였다. 입도 이후 해월이 거처를 하고 있는 공주(公州) 보평(洑平)으로 여러 번 찾아뵈며 가르침을 받았다. 해월의 말씀 중에서 이들 형제를 가장 감명 깊게 한 것은
"천심(天心)을 잃지 않고 식도(食道)를 미리 갖추고 기(氣)를 바르게 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또한 한 울로서 먹는다."
라는 가르침이었다.
'천심(天心)을 잃지 않는다.' 는 것은 동학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인 '시천주(侍天主)'의 실천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셨다는 시천주를 깊이 자각하므로,
한울님의 마음을 회복하여 한울님 삶을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식도(食道)를 미리 갖추라.' 는 말은 항상 밥을 먹을 때 천지부모(한울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식고 (食告)를 드리는 것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한울로서 먹는다.(食以天)' 는 말씀은 해월의 중요한 법설인 '이천식천(以 天食天)' 곧 '한울님이 한울님을 먹는다.' 는 가르침의 말씀이다.
모든 존재가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를 근간으로 하여, 모든 만유는 한울님 모신 존재로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고, 서로의 기화작용(氣化作用)을 통해 살아가며, 또한 종족을 퍼뜨린다는 것이다.
즉 지금까지 인류를 지배해온, 먹히고 먹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을 해월은 그 인식을 달리하여, '이천식천(以天食天)' 이라는 '공생과 상생(相生)' 즉 '균형과 조화' 로서 설파하였다.
이와 같은 해월의 가르침은 '일마다 한울님' 이라는 사사천(事事天), 그리고 '물건마다 한울님' 이라는 물물천(物物天)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그 실천적인 면에서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사상, 나아가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근거가 되 는 대인접물(待人接物)로 펼쳐진다.
해월의 가르침인 사인여천의 근거가 되고, 또 대인접물, 삼경 등의 중요한 정신이 되 는 '섬김' 은 시천주가 지닌 한울님 마음과 기운을 회복하고, 또 이를 변치 않는 '모심' 의 사회적 실천이 된다.
따라서 이 만유에의 '섬김' 에는 오늘 우리 현대 속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의 문제' 가 담겨져 있다.
'사사천(事事天)' '물물천(物物天)' 을 강조하였으며, '경천(敬天), 경인(敬 人), 경물(敬物)' 의 삼경(三敬) 등이 지닌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 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나아가 사물, 또는 신에까지 이르고 있다.
즉 신이나 사람만을 공경해야 한다는 기존의 많은 가르침과는 다르게 이 우주에 편만(遍滿)되어 있는 만유(萬有) 역시 이와 똑같이 공경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해월의 가르침이다.
이러한 해월의 가르침은 곧 신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신 중심의 사상이나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인간 중심의 사상에 일대 변혁을 촉구하는, 즉 '우주공동체'로서 그 인식을 바꾸어 나가는 사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우주는 한 생명' 이므로 어느 하나가 그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중심이며 동시에 모두가 부분이기도 하는, 중심과 부분으로 나뉘는 이분법적 사유를 뛰어넘는 곳에 해월의 사유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인간 중심, 혹은 신 중심이라는 지배와 억압을 근간으로 하는 위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이들 모두를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인 '한 생명' 으로 인식하고, 이들을 유기적인 관계 위에서 '서로 균형을 이루고 조화를 이루어' 진정한 공동체로서의 삶을 이룩해야 한다는, 의식의 대전환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해월로부터 받은 김낙철 등의 부안 동학 지도자들은 상생과 조화의 공동체적인 삶을 이루는 곳에 동학의 진정한 뜻이 있음을 깊이 절감하고, 이를 동 학혁명 당시에도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살생을 금하였는가 하면, 동학의 관민상화(官民相和)를 부안 지역에서 이루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곡물을 사러온 제주도민들에게 곡물 하나도 빼앗지 못하게 하므로, 흉년이 든 제주도민들에게 살길을 열어준 일화는 상생과 공생이라는 동학 정신의 발로라고 하겠다.
또한 동학혁명의 실패와 함께 해월이 관의 지목으로 쫓김을 당하고 있다는 긴박함 속에서도 해월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는 했던 것이다.
해월이 상주(尚州) 지역에 숨어 있을 때, 김학종이라는 동학도인과 함께 찾아뵙고는 '은밀히 숨어 수도하라.' 는 가르침을 받고 오기도 하였다.
또한 동생 낙봉과 함께 자주 찾아가 뵙고, 동학의 중요한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몇 권씩 필사를 하여 오기도 하였다.
이렇듯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부안 동학지도자들이 해월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사실은 다만 김낙철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의 아우 김낙봉에게도 또한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해월이 원주 전거론에 숨어 지내던 1897년에도 김낙봉 등은 찾아뵙고는 「동경대전」 중에 있 는 「논학문」 의 구절이나, 「팔절」 의 구절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고는 했었다.
김낙철 등의 부안 동학지도자들은 해월의 지도를 철저히 실천하려고 노력을 하므로 투쟁만이 우선이 아니라는 정신을 실천하고자 했었다. 김낙철 등의 부안의 동학지도자들이 온건하며 평화적인 노선을 걷게 된 데에는 해월의 가르침을 보다 구체적으로 종교적인 면에서 실천하는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전찬일 (영화평론가, 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중앙대학교 글로벌예술대학 겸임교수) 발제 일부~
왜 '동학농민혁명' 아닌 '동학혁명' 인가?
'동학란/난'부터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그리고 '동학혁명'에 이르기까지 동학을 에워싼 용어 문제는 혁명 발발 127년여가 흐른 지금까지도, 이견이 분분하다.
논자의 관점·입장에 따라 크고 작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당장 이번 부안에서 의 동학 관련 학술대회도 '농민'이라는 단서 내지 제약(?)을 혁명 앞에 내걸고 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의 말마따나, 조선이란 사회가 농업 사회이기 때문에, 농업 사회에서 사회구조는 농업 사회인데 소수의 양반 지배층이 지배하고 있는 그런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그 사회를 해체시키기 위해 동학 농민들이 주축이 돼 일어난 혁명적 사건이기 때문에 농민으로 국한한 걸 테고, 그저 동학혁명이라고 하면, 동학의 종교적 측면이 과도하게 강조되는 것일 터라(이하 크리튜버 전찬일TV '전찬일
이덕일의 종횡무진: 영화와 역사를 탐하다' 참고·인용)
동학혁명 아닌 동학농민혁명을 내걸은 것일 테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합리적 설명이다.
하지만 '부분적'으로다.
농민은 오늘날로 치면 시민일진대, 그 수가 얼마였든 그 계층에 포함되지 않는 노비 등 당시 조선 사회의 가장 밑바탕 계층 사람들이나,
추측건대 당시의 지식인층, 즉 양반층에서도 더러는 혁명에 함께 했을 게고,
끝내 그들을 배제하고 싶지는 않아서다.
논란의 재야 역사학자 였던 (고)이이화도 「파랑새는 산을 넘고」 (김영사, 2008) 「김개남 봉건사회의 심장 을 꿰뚫은 불꽃 같은 삶」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주에서 농민군이 퇴각할 적에 그는 전봉준, 손화중과 길을 달리했다. 그는 전라좌도 곧 지리산 언저리로 진출했다. 그 의 지휘권 아래에 든 지역은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 장수, 무주 등지였다. 그가 남원에 웅거하고 호령할 적엔 천민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노비, 백정, 승려, 장인, 재인을 중심으로 한 천민부대였다. 그들은 온갖 차별의 굴레를 벗기 위해, 아니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해 한번 활개를 친 것이리라."(네이버 지식백과 간접 인용)
필자에게는 따라서 동학농민혁명 아닌 동학혁명이다.
소파 방정환 영화
위에서 <동학, 수운 최제우> 의 박영철 감독이 '신작' 을 추진 중이라고 했다. 소파 방정환(1899~1931)을 축으로 펼쳐지는 인물전기영화 <어린이(소파 방정환의 生)>(가 제)가 그것이다.
감독의 기획·연출의 변에서 이렇게 말한다.
"난 연출 데뷔작인 <동학, 수운 최제우>를 만들고 나서 소파의 진보적인 일대기를 그리고 싶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구한말 해월 최시형의 물타아(勿打兒) 사상에 영향을 받아 어린이 운동을 제창하고 실천한국의 위대한 어린이 운동가이다.그러니 '국운 쇠퇴 혼란'이라는 역사적 공간 속에서 그가 처해 있는 암울한 현실성은 처음부터 배제할 수는 없었다.아니, 오히려 선한 민중속에 무위이화(無爲而化)하려는 그의 담 대한 외침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그가 남긴 장대한 유아 교육 사상은 세계 어린이를 위한 영원한 광제창생(廣濟蒼生)인 것처럼···.
영화 [어린이](가제)는 현실적이면서 감동적일 수 있는 한국적인 인물전기영화이다. 전형적인 요소를 반영하고,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독특한 미장센과 음악 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이 영화를 통해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의 관객들이 소파를 바라보는 시야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고, 시공을 초월하는 어린이를 향한 소파의 어린이 인권 사상을 한번쯤 인간적인 감성으로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다."
영화의 예상 제작비는 5천만 원 전후다.
소재 및 주제의 거대함에 비하면, 초라하다 못해 처참한 극저예산이다.
익히 알고 있지만, 감독의 전언에 따르면 그러나 그 예산조차 투자받기 힘들단다. 바야흐로 한류가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이 시대에 말이다.
작금의 한류 신드롬은 혹시 허상이요 신기루 아닐까. 세상사는 으레 명암이 있기 마련이라고, 그렇게 비관적으로 바라보진 않으련다.
그럼에도 이 말만은 강변하고 싶다.
종교든 사상이든 판단컨대 동학을 이 나라에, 나아가 세계에 알리는데 이만한 기획과 조우하기란 쉽지 않을 성싶다고.
그래 나는 이 기획에 이름도 올리는 등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참이다. 그런 협력·행동-실천 이것이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등 동학 선조들의 핵심적 가르침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