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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그리스군 참전용사 '그레고리 크로노포우로스'
사람들은 세월이 간다고 한다. 진실은, 세월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간다. 그는 이제 92세의 할아버지가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6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지난 4월 21일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한국전쟁 사진전' 개막식이 있었다. 그곳에 한국전쟁 그리스군 참전용사인 '그레고리 크로노포우로스'(Gregory Chronopoulos)가 참석했다.
한국전쟁 사진 전시회
시드니한국문화원에서 ‘리멤버: 6·25 참전용사들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Remember: Australian and Greek veterans in the Korean war)라는 주제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호주군과 그리스군의 모습을 담은 사진 전시회가(4월 21일-6월 9일) 열렸다. 전시된 49점의 사진과 각종 자료를 통하여 '참전용사의 희생정신'과 '전쟁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호주에 3대대가 있다. 보병이지만 유일하게 '공수마크'를 달고 있는 부대이다. 호주 3대대는 일명 '가평대대'라고도 한다. 한국전쟁 당시 가평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매년 3대대는 '가평전투의 날'을 기념하여 사열식을 갖는다. 2010년 4월 24일 부대장의 초청을 받아 사열식에 참석하였다. 그는 사열사에서 한국전에 '21개국'이 참전했다고 했다. 식사 시간에 그에게 물었다. "저는 16개국이 참전한 것으로 배웠는데, 21개 국가라고 하셨는데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네, 16개국은 전투병을 파병했고, 5개 국가는 의료를 지원했습니다. 그래서 21개 국가입니다."
이날 개막식에는 윤상수 총영사, Stavros Kyrimis 주시드니그리스총영사, Daren Mitchell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 관리위원회 사무국장, 황백선 한국전쟁 참전 유공자회 고문, Olwyn Green 한국전쟁 미망인을 비롯하여 세 나라의 참전용사와 관객 등 110여 명이 참석하여 자리를 빛냈다. 이날 그리스군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그레고리씨는 인사말 중에 아리랑을 불러 많은 이들의 박수를 받았다. 그는 한국이 생각나면 오래 전에 구입한 '아리랑' 레코드 판을 들으며 따라 불렀다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뉴질랜드 참전용사들은 뉴질랜드 민요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에게 '연가'(戀歌)로 알려진 노래이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2014년 뉴질랜드 로토루아(Rotorua)에서 호주와 뉴질랜드 Chaplains 세미나가 열렸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한 사관이 '연가'를 부르니, 다른 사관들이 따라 불렀다. "아니, 캠프파이어 때 부르던 그 노래가 아닌가!" 나는 그때 '연가'의 고향이 로토루아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은 '마오리'이다. 원곡은 마오리 말로 '포카레카레 아나(Pokarekare ana)이다. 로토루아의 큰 호수에는 '포카레카레 아나'와 관련된 아름다운 전설이 깃들어 있다. '호수 내 섬에 살고 있는 청년과 육지에 살고 있는 추장의 딸이 서로 사랑을 했다. 두 부족은 오랜 반목으로 결코 결혼할 수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밤마다 청년은 자신의 마음을 피리에 담아 '포카리카레 아나'를 연주하고, 목숨을 걸고 호주 반대편에 있는 추장의 딸을 만났다. 결국 두 부족은 어쩔 수 없이 화해하고 결혼을 승락했다고 한다.
그레고리 크로노포우로스'(Gregory Chronopoulos)를 아시나요?
5월 19일 11시,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인 그레고리씨 집을 찾았다. 벨을 누르니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젊은 여자가 청소하고 있었다. 1주일에 2번씩 오는 가사 도우미이다. 그는 거실 밖 베란다로 우리를 인도했다. 그곳에 인터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마당은 다양한 꽃과 나무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카메라를 의식할 나이가 지나서 그런지 추리닝을 입고 있었다. 촬영을 위해 옷을 바꿔 입어 달라고 부탁했다. 참전용사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어서, 자료를 남기기 위해 촬영까지 하기로 했다. 그레고리씨는 티셔츠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1955년에 호주로 이민 와서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다. 나이를 물어 보았다. "얼마 정도 될 것 같냐"고 되 질문을 한다. "한국전에 참전한 것을 생각하면 80은 넘었겠지요" 그는 웃으면서 "91살 이네"라고 한다. 1926년 생이니 우리 나이로는 92세이다. 그는 92세 노인 같지 않게 정정했다. 더구나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인터뷰를 하면서도 담배를 피울 정도로 골초인데도 말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지금도 매주 그리스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있다. 상상해 보았는가, 92세의 할아버지가 컴퓨터로 쓴 원고를 이메일로 신문사에 보낸다는 것을!
얼마 동안 참전했나요?
"1950년 가을부터 1951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 8개월 간 참전했습니다. 당시 그리스 군대는 미군에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해 겨울은 너무 추웠습니다. 모든 것이 파괴된 상태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은 아름답고 정이 많은 나라입니다. '홍난표'란 아이를 기억합니다. 그는 부대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우리를 도와주었고, 우리도 그를 도왔습니다. 우리는 그를 Nick이라고 불렀습니다."
홍난표가 부대의 소속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어렸습니다. 공식적으로 소속된 것이 아니라, 배가 고파서 우리 부대를 찾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러모로 우리 부대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지속된 것이지요."
전쟁 때 계급은?
"저는 보병 소위(Reserved Lieutenant)였습니다. 제 휘하에는 30명의 부대원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에는 병역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복무기간은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릅니다. 이차대전이 끝나고 그리스에 내전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리스와 상황이 비슷한 한국을 돕기 위해 참전을 결심했습니다. 저에게는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들이 있습니다. 부산에 갔을 때 여군이 지프차를 태워준 일도 있습니다. 힘들었지만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 내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이차대전에 끝나고 공산주의자들은 그리스를 공산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조직은 방대했습니다. 정부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죠. 정말 끔찍하고 무서운 전쟁이었습니다. 내부 전쟁이기에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분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었던 시절이었습니다. 1947년 말에는 공산주의자들이 그리스 북쪽 산악지대에 임시정부를 세웠고, 그리스 정부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1949년 이후에는 미국의 지원으로 그리스 군이 산악지대의 공산주의자들을 소탕하였습니다. 이후 많은 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이웃나라 알바니아로 도망쳤습니다."
호주에 그리스 참전용사 모임이 있습니까?
"그리스만의 독자적인 모임은 따로 없습니다. 그리스 참전용사는 '호주 재향군인회'(RSL) 소속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도 호주 재향군인회 회원입니다." 그는 벽에 걸려 있는 재향군인회 패를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호주 재향군인회 멤버임을 증명하는 패가 걸려 있었다. 2009년 8월 21일에 수여 되었고, 'Greek Sub-Branch'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전쟁 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나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가보고 싶었지만 젊을 때는 일 하느라 바빠서 못 갔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발전상을 볼 때마다 보람을 느낍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개인적으로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한국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한국이 발전하는 것을 보면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현재 정치적 문제가 복잡하지만, 잘 해결될 줄로 생각합니다. 모두 힘 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홍남표를 안다면 안부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파안대소)
다음 세대에게 남기고 싶은 말씀은?
"현대문명은 인간성을 말살해 가고 있습니다. 세계화란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의 산물입니다. 가진 자는 없는 자들에게 "너희는 걱정하지 말고 일만해, 내가 나머지 모든 것을 책임져 줄게"라고 합니다. 세계는 물질로 인한 인간소외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음 세대는 정신 차리고 인간성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있나요?
"이 나이에 무슨 미래가 있겠습니까? 미래에 대하여 이야기할 것은 없지만, 나는 현재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글도 쓰고, 책을 읽고, 신문도 보고 매주 토요일이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와서 커피도 마십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다 즐겁습니다. 인생은 오늘을 의미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히파티아(Hypatia)를 아시나요?
그레고리씨는 2015년 '히파티아 상'(Hypatia Award)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히파티아'란 이름이 조금은 생소하지만 서양에서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녀는 철학자이며 수학자이고 천문학자이기도 하다. 그녀의 애제자였던 '시네시우스'(Synesius)는 그녀를 가리켜 ‘플라톤의 머리와 아프로디테의 몸’을 지녔다고 묘사했다.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서 그리스 54명의 철학자 중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성이기도 하다. 그녀의 삶은 몇 년 전에 상영되었던 '아고라'(Agora)란 영화를 통하여 새롭게 조명되었다.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신프라톤주의'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해 모든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나는 진리와 결혼했다"라고 선언하고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기독교 국가였던 로마에서 그녀의 '신플라톤주의'는 '이교학문'이란 낙인이 찍혔다. 그녀는 극단적인 기독교인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녀가 출생한 해는 정확하게 알 수 없고, AD 415년 3월 8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죽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지중해의 진주'라고 불릴 정도로 종교와 학문이 발달된 도시였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과 고대 칠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파로스 등대'도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기에 '셉투어진트 성경'도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역되었다. 392년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자동적으로 로마가 지배하던 알렉산드리아도 기독교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유대교 세력 또한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히파티아는 두 종교의 분쟁 사이에서 유대교 오레스테와 맺은 우정과 신뢰로 종교적 희생양이 되었다. 그녀의 죽음은 너무나 비참해서 후대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녀의 '삶과 죽음'을 기념하여, 그리스에서는 특별한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히파티아 상'을 수여한다. 그레고리씨의 거실에 '히파티아 상패'가 놓여있다. "어떻게 이 상을 받게 되었습니까?" 그는 미소를 지으면서 "아마 내가 미남이라서 받은 것이 아닐까요!" 자기가 말하고도 미안했는지 크게 웃었다. "제가 쓴 3권의 책과 매주 쓰는 글들이 인정받은 것 같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리스 신문에 매주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3권의 책을 보여 주었다. 두 권의 수필과 한 권의 시집이다.
그는 서랍에서 사진첩을 꺼냈다. 한국전쟁 때 찍은 빛바랜 사진들을 한장, 두장 꺼내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삼팔선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다. 푯말에 '여기가 북위 38도선. 1st F.A.OBSN.BN 조사'라고 쓰여 있다. FA.OBSN.BN은 미군 부대 이름이다. 부활절 때 야외 십자가 앞에서 찍은 사진도 있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겨울옷을 입고 있다. 부산 유엔군 묘지에서 찍은 사진도 있고,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도 있다. 다른 사진들은 모두 경직된 모습으로 찍었는데, 유독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만큼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다. 인터뷰 내내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과 인상을 가지고 있다는 그의 말을, 한복을 입고 환하게 웃는 사진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젊을 때, 그는 멋진 콧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부대마크가 팔뚝에 달린 군복을 입고, 헬로 모자를 쓰고, 조용히 뭔가를 응시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백발의 노인'이 사진 속의 '그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누가 '세월은 유수와 같다'고 했는가! 흐르는 세월을 누가 막을 수가 있겠는가! 그를 보고 있노라니 우탁의 백발가가 떠올랐다. "한 손에 가시 쥐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백발은 막대로 치려했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가사 도우미는 언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너무, 감사합니다. 당신 같은 분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거동이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문 앞까지 나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