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왼편 / 한백양
집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다
오랫동안 빌라를 떠나지 못한
가족들이 한 번씩 크게 싸우곤 한다
너는 왜 그래, 나는 그래, 오가는
말의 흔들림이 현관에 쌓일 때마다
나는 불면증을 지형적인 질병으로
그 가족들을 왼손처럼 서투른 것으로
그러나 아직은 희망은 있다
집의 왼편에 있는 모든 빌라가
늙은 새처럼 자지배배 떠들면서도
일제히 내 왼쪽 빌라의 편이 되는
어떤 날과 어떤 밤이 많다는 것
내 편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아직 잠들어 있을 내 편을 생각한다
같은 무게의 불면증을 짊어진 그가
내 가족이고 가끔 소고기를 사준다면
나는 그가 보여준 노력의 편이 되겠지
그러나 왼편에는 오래된 빌라가 있고
오른편에는 오래된 미래가 있으므로
나는 한 번씩 그렇지, 하면서 끄덕인다
부서진 화분에 테이프를 발라두었다고
다시 한 번 싸우는 사람들로부터
따뜻하고 뭉그러진 바람이 밀려든다
밥을 종종 주었던 길고양이가 가끔
빌라에서 밥을 얻어먹는 건 다행이다
고양이도 알고 있는 것이다
제 편이 되어줄 사람들은 싸운 후에도
편이 되어주는 걸 멈추지 않는다
▲전남 여수시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벽 / 추성은
죽은 새
그 옆에 떨어진 것이 깃털인 줄 알고 잡아본다
알고 보면 컵이지
깨진 컵
이런 일은 종종 있다
새를 파는 이들은 새의 발목을 묶어둔다
날지 않으면 새라고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은 모른척
새를 산다고, 연인은 말한다
나는 그냥 대답하는 대신 옥수수를 알알로 떼어내서
길에 던져두었다
새가 옥수수를 쪼아 먹는다
몽골이나 오스만 위구르족 어디에서는 시체를 절벽애
던져둔다고 한다
바람으로 영원으로 깃털로
돌아가라고
애완 새는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 천장
차라리 그런 것에 가깝다
카페에서는 모르는 나라의 음악이 나오고 있다 언뜻
한국어와 비슷한 것 같지만 아마 표기는 튀르크어와
가까운 음악이고
아마 컵 아니면 격자 창문과 백자 청진기 천장이라는
제목일 것이고
새장으로 돌아가라고...
아마 그런 의미겠지
연인은 나 죽으면 새 모이로 던져주라고 한다
나는 알이 다 벗겨진 옥수수를 손으로 쥔다
쥐다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컵은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
노래도 아니고
격자 창문과 백지 청진기도 아니고
진화한 새라는 것
위구르족의 시체라는 사실도
새의 진화는 컵의 형태와 비슷할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사람이 잡기 쉬운 모습이 되겠지
손잡이도 달리고 언제든 팔 수 있고 쥘 수도 있게
새는 토마토도 아니고 돌도 아니기 때문에 조용히
죽어갈 것이다
카페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건 어디서 들어본 노래 같고 나는 창가에 기대서 바깥을 본다
곧 창문에 새가 부딪칠 것이다
깨질 것이다
▲1999년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여기 있다 / 명재범
접시와 접시 사이에 있다
식사와 잔반 사이에 있다
뒤꿈치와 바닥 사이에도 있는
나는 투명인간이다
앞치마와 고무장갑이 허공에서 움직이고
접시가 차곡차곡 쌓인다
물기를 털고 앞치마를 벗어두면 나는 사라진다
앞치마만 의자에 기대앉는다
나는 팔도 다리도 사라지고 빗방울처럼 볼록해진다
빗방울이 교회 첨탑을 지나는 순간 십자가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쪼그라든다 오늘 당신의 잔고가 두둑해 보인다면 그 사이에 내가 있었다는 것, 착각이다 착각이 나를 지운다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거리의 색을 바꿔놓을 때까지 사람들은 비가 오는지도 모른다 사무실 창문 밖 거리는 푸르고 흰 얼굴의 사람들은 푸르름과 잘 어울린다 불을 끄면 사라질지도 모르면서
오늘 유난히 창밖이 투명한 것 같아
커다란 고층빌딩 유리창에 맺혀 있다가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있었다
나는 도마였고 지게차였고 택배상자였다
투명해서 무엇이든 될 수 있지만 무엇이 없다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밖으로 내몰린 투명인간들이
어디에나 있다 사람들은 분주히 주변을 지나친다
나를 통과하다 넘어져 뒤를 돌아보곤 다시 일어서는 사람도 있었다
너무 투명해서 당신의 눈빛을 되돌려줄 수 없지만
덜컥 적시며 쏟아지는 것이 있다
간판과 자동차와 책상과 당신의 어깨까지
모든 것을 적실만큼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1978년 출생
■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take / 김유수
쓰레기를 줍는다
나는 쓰레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를 쓰레기라 불렀다
쓰레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추운 거리를 그것이 배회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 속은 차갑다
지나가는 그것의 입술은 아름다웠다
지나가는 그것의 코트가 차갑다
쓰레기와의 동일시는 어떻게 줍는 것일까
너는 왜 나처럼 쓰레기를 줍지 않을까
어떤 부부가 예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직장인이 따분한 쓰레기를 주워 간다
어떤 시인이 터무니없는 쓰레기를 주워 간다
그러한 쓰레기의 용도는 내가 입을 수 없는 옷이었다
지나가는 그것이 코를 틀어막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눈을 질끈 감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이 옷을 건네주고 간다
지나가는 그것을 코트로 덮어버렸다
지나가는 그것이 무덤, 이라고 말한다
지나가는 그것이 나의 자리를 탐내고 있다
나는 자리나 잡자고
이 거리의 쏟아짐을 목격하는 자가 아니다
이 거리의 행려는 더더욱 아니었다
행려는 서울역 앞에서 담배꽁초를 줍고 있다
담배꽁초에 나의 시간을 투영하고 있다
그것이 서울역으로 타들어 가고 있었다
서울역의 시계가 서울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1998년 경기 안성 출생
▲양업고등학교 졸업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펜치가 필요한 시점 / 김해인
짜장면과 짬봉 앞에서 고민하는
나를 절단해 줘요
불가마에 단련된 최초의 연장이 되느냐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나오는 레디메이드 툴이 되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선택 후의 방향은 어디인지 알 수 없어요
차라리 한 끼 굶을 일을
어느 시궁창에 빠질지 모를 일입니다
오른쪽 손과 왼쪽 손이 친척이라고 생각하나요
나를 꾹 눌러서 이쪽저쪽으로 갈라줘요
이쪽으로 가면 강의 상류 끝에 서 있는 물푸레나무를 만나고 싶죠
저쪽으로 가면 바다의 시작,
흰 치마를 펼쳐서라도 항해하는 게 로망인 걸요
밸런스게임은 사양할게요
이쪽으로 가면 파란 대문이 열려 있고
저쪽으로 가면 녹슨 대문이 부서져 있다거나
이쪽으로 가면 왕이 되고
저쪽으로 가면 거지가 된다는 동화 같은 거 믿으라고요?
차라리 사지선다형으로 바꿔주세요
검은 셔츠와 흰 셔츠 중 뭐가 필요하냐고요
지금은 펜치가 필요한 시점이에요
▲1961년 부산 출생
▲계명대학교 사학과 졸업
■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해변에서 / 박유빈
눈이 간지러워서
해변으로 갔다
화창한 날씨
눈부신 바다
환한
사람들
수평선만큼 기복 없는 해변의 감정
너무 밝다
해변을 산책하던 나는
반짝이는 모래알 사이에서 보았다
그것은 눈알
실금 없이 깨끗한 눈알
바다에서 떠밀려온 유리병도 아니었고
피서객이 흘리고 간 유리구슬도 아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움찔거리는 그것은
오점 없이 깨끗한 눈알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제 화창하지 않다
내가 만든 그늘서 눈알은
부릅뜨기 좋은 상태
그러나 내 뒤로 사람들이 지나갈 때
눈알은 움찔거렸다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을까
해초처럼 누워서 왔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유언일지도 모르고
그때 배운 것 같다
사랑하지 않고도 빠져 죽는 마음
떠오른다
어떤 이의 어리숙한 얼굴
꼭 죽을 것만 같았던 사람
아니 그것은 죽은 것
혹은 벗어놓은 것
떠밀려온 것
유유자적
흘러온 것
눈알은 하나뿐이어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누구를 위한 눈물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걱정될 뿐이다
메마를 것 같다
언젠가
미끈한 눈웃음 짓던
사람을 사랑한 고래가 그랬듯이
모래사장을 맨발로 걷다 보면
무언가 밟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세상에 막 내던져진
작은 눈빛
오늘은
어느 때보다 화창한 날
어디에도 흐린 곳 하나 없다
너무 밝다
최선을 다해
기지개 켜는
눈알의 의지
▲20008년 경남 양산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재학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알비노 / 최형만
빛을 본 적 없는 이들의 텅 빈 거리는, 마른 종이 같다 해질녘 길에서 엎드린 사람은 하얀 얼굴로 꿈을 꾼다지 바람이 숨죽여 우는 것처럼 엎질러진 노을의 흔한 표정도 없이 저녁도 하얗게 지는 거라지 빛의 소란을 평정하는 백색의 밤 통증으로 휘어진 길목마다 몽롱한 회색빛 언어가 따라왔다 불면은 몸의 바깥이어서 색을 찾아가는 혈류에 잠기면 먹구름도 무지개를 그릴 텐데 뜨겁게 타오른 바람이 굴절되고 있다한 떼의 컬러가 증발할 때마다 멘델이 나누는 우열의 방식은 멜라닌 색소로 흘러드는 새하얀 비명들 그늘로 가는 누군가를 보면 투명한 홍채로 걸어간 순례처럼 바짝 끌어당긴 어둠을 안고 있다 붉어지는 방향으로 몸을 트는 동안진짜 꿈을 꾸고 싶은 사람들 작은 온기에도 날마다 타고 있다
*유색 동물에서 날 때부터 피부나 머리카락, 눈 따위의 멜라닌 색소가 없거나 모자라는 것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젠가 / 홍다미
우리는 즐거움을 쌓기 시작했죠
딱딱한 어깨를 내어주며 무너지지 않게 한 계단 한 계단 다짐을
쌓았죠 대나무가 마디를 쌓듯 빌딩이 올라가고 집값이 올라도
내일 모레 글피 그글피를
오지 않는 내일을 오늘처럼 지금처럼
바람 무게를 견디려면 마스크
쓴 계절도 빙하 녹는 북극도 쌓아야 하는데
밤하늘의 별빛을 빼내고 있었죠
쌓기만 하는 뉴스는
싫증나고요
거꾸로 가는 놀이를 해볼까요
쌓아놓은 블록을 하나씩 빼내는 놀이
장남 감을 빼버리면 아이는 자라서 부모 눈물을 쏙 빼버리고
최저임금을 빼내면 알바는 끼니를 빼먹죠 잠을 빼내면 택배
기사는 안전이란 블록을 빼내고 말테죠
언젠가 도심 백화점도 한강 다리도 이 놀이를 즐기다 쏟아졌고
모닝 키스도 굿나잇 인사도 기념일도 블록으로 빼내면 연애도
와장창 무너지겠죠
한순간 한 방이면 끝나는 게임
손끝의 감각을 믿기로 해요
쌓아 올린 우리가 와르르 무너질까 봐
우린 서로의 빈틈을 살짝 비껴가는 중이죠
▲강원도 삼척 출생
▲강원대 교육대학원 심리학 전공
■경남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머그잔 / 박태인
물이 되려는 순간이 있어요 얼굴을 뭉개고
입술 꾹 다물고
자꾸 그러면 안 돼
차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여요 나는
물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떨어지고 싶어요
창틀에 놓여있던 모과의 쪼그라든 목소리가 살금살금 걷는 듯한 아침
어김없이 당신의 그림자는 식탁에 앉아 있어요
뜨거운 것으로 입을 불리면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될 것 같은 생각을 해요, 조금 더 따뜻한
우리는 언제쯤 깨질 것 같나요? 이런 말은 슬프니까
숨을 멈추고 속을 들여다보면 싱크홀 같거나 시계의 입구 같거나 울고 있는 이모티콘 같아요 두 손에 매달려 쓸데없이 계속 자라는 손톱처럼 똑똑 자르면 될 것 같은 시간을 말아 쥐고 있는 기분
나는 내 손을 스스로 잘라 버릴지도 몰라요
언젠가
바깥이 나를 꺼내다 마는 것처럼 어둠으로 찬장 문을 닫아버리거나
빛으로 나가지도 못 하게 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요
햇살이 손바닥을 통과해 더 깊이 가라앉는 동안
내 손은 가끔 바깥에서 들어와요
집을 통째로 들어 물처럼 몸이 출렁일 수 있도록
흔들어 보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런 날이면 매일 보고 만지는 머그잔이 어째 좀 수상해요
나는 또 물로 그린 그림이 되죠
오늘은 당신의 그림자를 좀 젖혀봐도 될 것 같아요
■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운주사 천불천탑 / 김준경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그 누구도 떠밀지 않았다
저마다 한손에 정을, 다른 손에 망치를 들고 찾아왔다
운주계곡 조용한 골짜기를 따라 돌을 쪼는 소리가 이어진다
하나의 고통을 담아 한 번의 망치질, 하나의 괴로움을 담아 쌓은 한층
사바세계로부터 깎여나간 마음 부여잡고 눈앞의 돌을 깎아 나간다
참아낼 수 없는 아픔을 돌 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눈이 나오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돌 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귀가 나오고
벗어날 수 없는 원망을 돌 위에 올려 깎아서 내버리면 입이 나온다
고해의 파도 속에서 멈추지 않고 들리는 돌 쪼는 소리
고통이 모여 돌을 가루로 만들고 괴로움이 쌓여 탑을 이룰 무렵,
돌 속에서 웅크려 있던 부처님이 들꽃같이 환하게 피어난다
풀내음을 품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 앞의 민초를 맞이한다
투박하고 하찮아 보이지만 그렇기에 누구보다 가까운 그 모습
그 거친 어깨 끌어안고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울고 싶다
고해의 파도에 깎여나간 마음 쥐어짜내 입술 깨물고 울고 싶다
마음의 부스러기가 섞여 나온 눈물을 부처님께서 가사자락으로 닦아주면
지나간 괴로움을 땅에 내려놓고 다가올 염원을 부처님께 올린다
염원이 모여 천개의 석탑이 되었고, 천분의 석불이 되었다
천 가지 괴로움과 천 가지 염원으로 세워진 민초들의 작은 불국토
같은 모양 없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저마다의 위치에 서서 정토세계를 꿈꾼다
■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상현달을 정독해 주세요 / 박동주(박현숙)
햅쌀을 대야에 가득 담아요
차고 푸른 물을 넘치도록 부으면
햅쌀은 물에서 부족한 잠을 채워요
쌀눈까지 하얗게 불었을 때
당신을 향한 마음이 몸을 풀어요
상현달처럼 떠오르는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속삭여 주세요
도톰한 떡살에 소를 넣어요
당신을 향한 비문은 골라내고
꽃물결 이는 구절만 버무려 소를 만들어요
당신 생각으로 먹먹해지는 마음이
색색의 반달로 차오르도록
한밤중이 되었을 때
서쪽 하늘을 골똘히 보아주세요
반죽을 작게 떼어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가을볕이 등을 쓰다듬듯 잔잔히 궁글려요
이야기를 담은 소를 가운데 넣어
가을 한나절을 빚은 색색의 상현달들
떡살에 별자리가 뜨기도 해요
비껴간 당신을 향해
밤하늘 높이 상현달을 띄워요
이야기가 스며든 여러 빛깔의 편지지
하얀 송편에는 첫 마음을 써요
어떤 송편에는 첫 눈이 내리고
첫 발자국 첫 속삭임이 들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