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면서
한국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 제주도이다. 제주도는 푸른 바다, 맑은 공기, 아름다운 자연과 인심 좋은 제주도민들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운 환상의 섬이다. 제주도는 또한 바람, 돌, 여자가 많아서 삼다도라 불리기도 하고 대문, 거지, 도둑이 없어 삼무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늘 기획탐방의 주인공은 바로 제주도 출신 한글서예가 한곬 현병찬선생이다. 오랜만에 안부전화를 드렸더니 반갑게도 개인전을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전시는 “현병찬삼무필묵전”이라는 명칭으로 2009년 10월 29일부터 11월 4일까지 일주일간 종로 인사동에 위치한 백악미술관에서 개최되었다. 전시된 서예작품 역시 삼무 제주도를 주제로 한, 제주민요, 제주속담, 제주어 시 등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도록에 수록된 작품은 총 200 여점이었는데 전시공간의 제한으로 50십 여점만 전시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시장은 축하하러온 귀빈들과 친인척, 제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특히 전시오픈식 커트를 해야 할 귀빈이 너무 많아 가위가 부족하고 설 자리가 비좁을 정도였다. 귀빈들 중에는 국회원원 현경대, 한국서학회 이곤회장, 한국미술협회 조종숙 부이사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박종국회장, 삼중스님 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회각계 유명인사들이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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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병찬-書藝人生
1940년생으로 올해로 고희를 맞은 현병찬선생은 1957년 제주사범학교 재학시절에 소암 현중화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서예를 공부하였으니 그의 서예인생만 하여도 52년이나 된다. 1980년에 해정 박태준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서예를 계속 배웠고 나중에는 한글전통서예의 매력이 푹 빠졌는데 특히 일중 김충현선생의 서예교본을 바탕으로 한글서예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결과 1992년에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 출품하여 서예부분 대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그 뒤로 원곡서예상도 수상하고 문교부장관 표창장도 받았다. 국전 대상 수상 이후 고향 제주도를 알리기 위하여 제주말씨의 다양한 표현과 발굴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서울과의 거리가 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중앙 무대의 수준 높은 전시를 유치하여 제주 서예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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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병찬선생은 자신의 발전뿐만 아니라 제자를 육성하는데도 큰 공헌을 하였다. 1987년 청소년복지회관에서 서예지도를 시작, 한묵회를 결성하여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한묵회전 등 수많은 전시회를 주관하였다. 특히 1995년부터는 제주도서예가협회 회장을 맡아 한중서예교류전을 여러 차례 주관하였으며 사단법인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을 설립하여 “한글서예사랑대전”을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현병찬선생은 서예가이기 전에 교원이다. 그는 1960년부터 44년간 초등학교 교사, 교감, 장학사, 교장을 지내다가 2003년에 정년퇴직하였다.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전국학생서예실기대회 지도자상, 전국교육연구대회 서예교육논문 푸른기장상(우수상), 사랑의 사도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3년에는 황조근정훈장을 수여받았다.
3. 현병찬-其人
현병찬선생과 나의 인연은 15년 전인 199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에 한국서학회 이곤회장 일행이 한국의 우수한 한글서예작품 60여점을 가지고 중국으로 와서 “94아름다운 한글서예 중한연합전”을 개최하였다. 그때 나는 23세 어린 나이에 중국 측 작가로 출품하여 처음으로 전통한글서예를 접하게 되었고 그 매력에 푹 빠졌다. 18세에 서예를 시작하여 5년간 공부하였지만 주로 한자와 북한의 청봉체를 배웠다. 한글서예 교본 등 서예자료가 부족하다보니 중국의 동포서예가들은 궁체와 판본체 등 전통한글서체는 중한연합전(94) 전에는 본적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국서학회 측에서 나눠주는 전시회 도록의 작가 약력을 보고 개인적으로 훌륭하다고 느껴지는 작품을 출품한 작가 30명에게 한글서예를 배우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행운스럽게도 꽃뜰 이미경, 산돌 조용선, 죽헌 정문장, 예광 장성연, 경후 김단희 등 15명의 서예가한테서 답장과 함께 중국에서는 구하기 힘든 한글서예자료들을 보내왔다. 그 중에는 한곬 현변찬선생도 있었다. 나는 그분들과 꾸준히 서신왕래를 하면서 서예를 배워가고 친분도 쌓았다.
1996년 1월 내 나이 25세에 중국에서는 최초가 되는 한글서예단체인 사단법인 연길시조선글서예가협회를 설립하였다. 설립과 함께 회원전을 개최한 후 <정음상 중국조선글서예콩쿠르>를 개최하여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큰 성과를 이루었다. 그 후 현병찬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중국에서의 한글서예 보급을 위해 한중한글서예교류전을 개최하고 싶은데 교류할 단체를 소개”해 줄 수 있겠냐고 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저도 이번에 제주도서예가협회 회장으로 당선되었으니 교류전을 추진해 봅시다”라는 답장이 왔다. 그렇게 되어 1996년 10월 한글날을 맞이하여 한글서예교류전을 개최하게 되었으며 나는 중국대표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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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인연이 계속되어 나는 제주도에서 유학까지 하게 되었으며 10여년이 지난 지금에는 박사학위까지 받았는데 모두가 현병찬선생의 은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병찬선생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특히 호칭이나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다. 내가 한국을 처음 방문하였을 때가 25세 때이니 한국에서는 서예가 축에 속하지도 못 할 새내기이다. 한국의 서예가들은 대부분 50은 훨씬 넘긴 분들이어서 서예가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백발의 노인이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30대 서예가들이 국전 대상을 수상하는 등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서예가협회장이라고 하니 모두들 나이가 지긋이 들었을 것이라 생각했을 텐데 애송이를 보고 일부 할아버지 서예가들은 “내가 서예를 공부한 나이가 너보다 많다”며 아기 취급에 반말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현병찬선생은 달랐다. 회장신분으로 한국을 찾은 시각부터 “서회장”이라고 부르더니, 대학 교수로 취직하자 “서교수”, 박사학위를 취득하니 “서박사”라고 부르며 늘 존대해 주었다. 그 영향으로 현병찬선생의 제자나 후학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존칭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서예학박사학위 청구논문이 통과되자 제일먼저 현병찬선생께 알려드렸더니 당신의 일처럼 기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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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곬 현병찬 삼무필묵전 축사에서 삼중스님은 “현병찬선생은 생명이 있는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주는 참스승이다. 나는 부처님 다음으로 현병찬선생을 존경한다”고 말하였다. 사연인 즉 재소자와 군인들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수년 째 삼중스님에게 무상으로 서예작품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국전 대상을 수상하여 그 가치가 수 백 만원에 달하는 작품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니 산 부처님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닌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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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병찬-其書
1992년에 국전 대상을 수상하여 한글서예의 대표적 작가로 인정받은 한곬 현병찬선생의 궁체는 수려하면서도 중후하여 외유내강의 한민족의 특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다. 궁체가 조선시대 궁중에서 시작되어 실용적인 서사목적으로 사용되었고, 광복 이후 그 맥을 이어 한문서예와 더불어 서단의 한 부분으로 존속하면서 60여년을 갈고 다듬어 졌다면, 현병찬 선생의 52년 서예인생은 그 과정의 계속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서예를 대표하는 궁체는 현병찬선생의 대표적인 서체며 현병찬선생은 한국의 대표적인 한글서예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완벽한 모습의 궁체가 나타날 수 있을 가 할 정도로 정교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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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골선생의 판본체는 많은 변화과정을 거쳤다. 1990년대에는 “o"을 육각형으로 쓰는 등 강직한 형태를 나타내던 서체가 2000년대 초에는 획의 물결을 강조하여 율동이 넘치는 형태로 바뀌더니, 현재는 점차 각을 죽이고 부드러운 여성, 인자한 어머니의 모습처럼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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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희망으로 다가오는 제주 바다의 파도와 제주 사람들의 인품, 친근한 제주말씨를 하나로 엮어 파도체라고 이름 지은 선생의 판본체변형은 묵직하면서도 날렵하고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생동감 넘치는 생명의 제주도 파도의 형상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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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한곬선생은 전통서체인 궁체와 판본체를 완벽하게 서사할 뿐만 아니라 무궁무진한 변화를 줄 수 있는 판본체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거듭시켜 강한 것을 부드럽게, 육중한 것을 가볍게 표현하여 부드러움 속에 강한 것을, 가벼움 속에 중후한 것을 표현하였다.
현병찬선생은 제주도를 대표하는 서예가 답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청, 제주국제평화센터, 제주검찰청, 법원, 제주시민헌장탑 등 제주도의 수많은 비문과 현판의 글씨를 남겼다.
또한 대한민국미술대전, 대한민국공무원미술대전, 세종한글서예대전, 대한민국현대서예문인화대전, 경인미술대전, 대한민국한글서예대전, 대한민국서예문인화대전 등 이루 다 헤아일 수 없을 만큼 많은 서예대전의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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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은 현재 한국미술협회 한글서예분과 위원장, 세종한글서예큰뜻모임 부이사장, 제주도한글서예사랑모임 이사장, 사단법인 영주영묵회 이사장, 제주도서예문인화총연합회 공동회장, 한국서학회 이사, 공무원서예인회 고문, 제주도서예가협회 고문, 국제서법연합 제주지회 고문, 중국연변문자예술협회 해외고문, 정연회 자문위원 한국예문회 회원 등 사회단체직무를 맡아 계속적으로 서예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곬이라는 아호에 걸맞게 현병찬선생은 수 십년을 서예가의 외곬으로 정진하였으며 2003년 정년퇴직 후 제주도 저지문화예술인마을에 서예전시관 <먹글이 있는 집>을 건립하고 필묵을 벗 삼아 여생을 즐기고 있다. (본 내용은 월간 서예문인화 12월호와 11월 30일자 동북아신문에 게재되었음)
첫댓글 감사하는마음으로 잘보았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훌륭한 작품 감상 잘 했습니다.
귀한 작품 감상할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_^
인품도 아주 훌륭하신분...!
잘보구갑니다
고향 현병찬 선생님글을 서예세상에서 좋은 글 감상톡록 배려에 감사드림니다
축하드립니다.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