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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 나한전
시도유형문화재 제172호 (완주군)
송광사 나한전은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이며,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현재 건물은 20세기 초를 전후로 고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옆면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또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 맞추어 천장 윗부분을 가리게 꾸민 우물천장이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인왕상·동자상·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보물 제1244호
종을 달아 놓은 종루는 십자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십자각은 열 십(十)자 모양을 하는 2층형 누각이다. 종이 걸려 있는 중앙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1칸씩 덧붙여 이루는 모양인데, 지붕 역시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북·운판은 돌출된 칸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마루 밑의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으며,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열 십(十)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
송광사 관음전
봉서사
봉황새가 깃들인다는 시적인 이름의 봉서사.
절은 727년 또는 736년에 해철선사가 창건하고 고려 때 보조국사와 나옹왕사가 각각 중창했다고 전하는데, 그에 관한 확실한 문헌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조선시대에서는 1530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신경준이 쓴 『가람고』에 절 이름이 보이고 있어 조선 중후기에 걸쳐 계속해서 법등을 밝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세기 말~17세기 중기에는 유명한 진묵조사가 이 절에서 출가한 뒤 오랫동안 머물면서 절을 중창했다. 그러나 이후의 연혁은 전하지 않고, 근대에 와서는 1950년의 한국전쟁 때 대웅전을 미롯해서 명부전 · 나한전·천왕각·동루·서전·상운암·일주문 등 절의 모든 전각이 불타 없어졌다가 그 뒤 서서히 중건되었다.
근래에는 1963년에 서호산 스님이 주석했는데 이듬해 요사를 지으면서 중건불사를 시작했다. 이어서 1975년에 삼성각, 1979년에 대웅전· 관음전(요사)·진묵전을 새로 지었다. 또한 1994년에는 절까지의 도로포장이 이루어졌다.
진묵대사 부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08호
부도는 승려의 무덤을 상징하여 그 유골이나 사리를 모시는 곳이다. 이 부도는 봉서사내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조선시대의 승려인 진묵대사의 사리를 모시고 있다. 진묵대사는 이 절을 새 단장한 후 이곳에 머물며 수행하다 일생을 마쳤다.
탑은 기단(基壇) 위로 둥근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로 대부분의 부재가 8각을 이루고 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은 대칭되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서로 맞닿는 곳에 각각 연꽃을 굵게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아래·윗면이 약간 눌린 둥근 모습으로, 그 위로 뭉뚝한 지붕돌을 올리고 있다. 꼭대기에는 앙화(仰花;솟은 연꽃무늬 장식),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 장식), 보주(寶珠;꽃봉오리 모양 장식)를 얹어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각 부분의 양식과 장식이 형식적으로 흐르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시대의 부도이다.
봉서사 요사채
봉서사 대웅전
산신상에서 바라다본 봉서사 전경
진묵전
약수 맛에 끌려 자주 찾는다고 진묵대사와 해인사 대장경에 얽힌 설화
이 절에서 수도하던 진묵은 자주 해인사를 내왕하면서 대장경을 모두 암송하였다 하며 하루는 제자를 데리고 급히 해인사로 갔는데, 그날 밤 대장각 옆에서 불이 나 도저히 끌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진묵대사가 솔잎에 물을 적셔 불길이 번지는 곳에 몇 번 뿌리자 갑자기 폭우가 내려 불길이 잡힘으로써 대장경판의 위기를 모면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진묵대사가 지팡이로 바위를 뚫어 발견했다는 약수터가 있다.
남고사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 고구려에서 백제로 귀화한 보덕(普德)의 제자 명덕(明德)이 668년(신라 문무왕 8)에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남고연국사(南高燕國寺)라고 불렀는데, 연국이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말로 산성에 있는 사찰 이름에 많이 나타난다. 이 절 역시 사적 제294호로 지정된 남고산성(南高山城)에 자리하고 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따르면, 남고산성은 901년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쌓았으며 견훤산성·고덕산성이라고도 한다. 견훤은 전주의 동서남북을 제압하기 위하여 산성을 쌓고 동서남북에 각각 사찰을 지었다고 한다.
고려 때까지는 교종(敎宗) 계통의 사찰이었으나, 조선 세종 때 선교(禪敎) 양종을 통합하여 정한 48개 사찰에 들지 못하면서 사세가 크게 위축되었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선종(禪宗) 사찰이 되었다. 고덕산을 남고산(南高山)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창건 당시 남고연국사라 하였으나 언제부터인지 남고사(南固寺)로 표기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18세기 중엽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처음 나타난다. 이는 견훤이 산성을 쌓고 사고(四固) 사찰을 지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관음전·삼성각·사천왕문 등이 있다. 이 중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하고 약사불과 아미타불을 협시로 한 삼존불이 모셔져 있다. 불상 뒤에 걸린 영산회상도는 1907년(융희 1) 현수(賢殊)·선정(善正) 등이 그린 것이다. 관음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1680년 창건되어 1992년 10월 7일 불에 탄 것을 1995년에 복원하였다. 사천왕문에는 다른 절에서처럼 사천왕상을 모시지 않고 사천왕을 그린 탱화만 모셔 둔 점이 특이하다.
남고사 사천왕문
사천왕문은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풍판을 댄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이 전각은 자연 주초 위에 원형 기단을 놓고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심포형식을 하고 있다. 편액은 ‘사천왕문’이 붙어 있고 주련은 걸려 있지 않다. 내외부에는 단청이 그려져 있고 외부 벽화로는 비천상 벽화와 인왕상 및 양벽에는 초화문이 그려져 있다.
내부에 사천왕상은 봉안되어 있지 않고 사천왕도 4폭만 모셔져 있다. 화기는 있으나 확인하기 어렵다
사천왕문에서 바라다본 대웅전
남고사 관음전
관음전은 1998년에 건립되었으며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서, 석축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우고 주심포형식으로 인법당 형태를 하고 있는 목조기와집이다. 본래 1680년(숙종 6)에 세워진 관음전이 이 자리 부근에 있었으나 1992년에 화재로 없어졌고, 1995년에 본래의 자리보다 앞으로 물러나와 지금처럼 다시 세웠다. 자리가 조금 바뀐 것은 본래 대웅전과 너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편액은 ‘관음전’과 ‘고덕산 남고사’가 붙어 있으나 주련은 걸려 있지 않다. 창호는 2분합을 하고 있다.
남고사 대웅전
대웅전은 1978년에 세운 건물이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대웅전은 석축을 쌓고 원형기단을 놓고 배흘림기둥을 세우고 다포형식으로 지었다. 편액은 ‘대웅전’이고 주련은 6기가 걸려 있다. 창호는 꽃창살인데 굉장히 아름답다. 중앙칸은 4분합이고, 좌우 협칸 1쌍은 각각 2분합으로 되어 있다.
내외부는 단청이 화려하며, 외부의 벽화에는 위쪽은 팔상도가. 아래쪽은 나한도가 그려져 있다. 내부의 천장은 우물반자이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하고 있으며, 닫집과 수미단이 설치되어 있다. 내부의 벽화에는 관음보살상을 비롯하여 여러 도상의 보살상과 비천상, 연화를 비롯한 화훼를 그려 화려하다.
선린사 창건은 절에서 전하기로는 조선시대 영조대(1725 - 1776)에 보운선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 뒤 절은 쇠락되었다가 근래에 이르러 1966년에 지금의 혜안(慧安)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중창되었다. 1966년까지는 다른 전각은 없었고 단지 인법당만이 있었다고 한다. 절의 중창은 이 해에 요사 건립을 시작으로 1973년에 미륵존상 봉안, 1975년에 봉향각, 1978년에 대웅전, 1983년에 진영각, 1992년에 종각을 계속해서 새로 지으며 이어졌다. 또한 1973년 무렵부터는 절 아래에 고시원을 두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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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전
대웅전은 1978년에 건립하였는데, 앞면 5칸, 옆면 2칸이고 원형 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으며 다포양식의 팔작지붕을 이은 목조기와집이다. 편액은 ‘대웅전’이고 주련은 6기를 걸어 놓았고, 내외부에는 단청이 화려하게 칠해져 있다. 외부벽화는 심우도와 석가불회도가 그려져 있고, 내부벽화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문은 2분합문으로서 빗살창으로 되어 있다.
선린사 대웅전
선린사 전경
화심 순두부 (본점)
전북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는 이 순두부 집은 규모로만 보면 전국 최대이다. 본관과 연회장으로 나뉘어진 식당에서는 약 50명의 직원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점심시간이면 화심 순두부를 맛보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3대째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이 순두부 집은 직접 공장을 운영하여 두부를 생산하고 있는데 특히 쥐눈이 콩 두부라는 독특한 맛의 두부를 개발하여 손님들에게 인기가 좋다. 콩을 사용하여 만든 음식들이어서 남녀노소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는 것도 화심 순두부 집이 성시를 이루 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메뉴들도 매우 다양하여 순두부찌게는 물론 콩을 이용해 자체 개발한 빈대떡, 전골, 도너츠 등이 입맛을 돋군다. 가격도 저렴한 편이어서 부담 없이 별미를 즐길 수 있다. 특히 도너츠는 콩특유의 고소한 맛으로 아이들의 입맛에 아주 잘 맞는다.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이들의 한 손에는 어김없이 콩 도너츠 봉지가 들려있는걸 볼 수 있다.
송광사의 위치와 찾아오는 길
위치
송광사(松廣寺)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종남산(終南山)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17교구 본사 금산사의 말사이다. (061-243-8091)
대중교통편
전주 시내에서 송광사 가는 버스는 다음의 3개 노선이 있다.
1) 806번 시내버스
전주대학교를 출발하여 이동교 - 안행교 - 서부시장 - 완산동 - 시립도서관(소양방면 출발차량) - 전동 - 팔달로 - 모래내 - 기린사거리 - 안덕교 - 성당묘지 - 옷삼거리 -소양을 경유하여 송광사에 닿는다. 운행시간은 08:15, 11:05, 14:05, 17:08, 20:10이다.
2) 814번 시내버스
전주교도소를 출발하여 평화주공 - 전동 - 팔달로 - 모래내 - 기린사거리 - 안덕교 - 성당묘지 - 웃삼거리 - 소양을 경유하여 송광사에 닿는다. 운행시간은 06:33, 08:31, 09:13, 11:11, 11:53, 13:51, 14:33, 16:31, 17:13, 19:11, 19:53, 21:51, 22:33 이다.
3) 838번 시내버스
전주대학교를 출발하여 이동교 - 안행교 - 서부시장 - 완산동 - 시립도서관(소양방면 출발 차량) - 전동 - 팔달로 - 모래내 - 기린사거리 - 안덕교 - 성당묘지 - 웃삼거리 - 소양을 거쳐 송광사에 닿는다. 운행시간은 07:16, 07:59, 09:56, 10:39, 12:36, 13:19, 15:16, 15:59, 17:56, 18:39, 20:36, 21:19 이다.
승용차편
호남고속도로 전주 나들목을 나와 남원 방면으로 계속 직진하면, 익산ㆍ봉동으로 빠지는 17번 국도를 지나 진안 방향의 26번 국도와 만나는 우아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여기서 진안방향으로 좌회전해야 하는데, 직진 길은 지하차도이므로 차를 우측 차선으로 빼야 좌회전할 수 있다. 26번 국도를 3분 정도 달리면 길 오른쪽으로 빠지는 길이 나오며, 송광사 이정표도 서 있지만 작은 편이고 '소양'이라는 이정표가 크게 붙어 있다. 이 소양 방면으로 가다가 면소재지 안에서 다시 송광사 방면의 좌측 길로 접어들면, 차례로 벚나무 길과 송광사를 만나게 된다.
첫댓글 자세한 설명에 감사드립니다. 화심 순두부~ 화심 순두부~
한눈에도 신심이 이는 멋진 곳입니다 감사합니다_()_
정만법우님..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대복 많이받으세요.. 어리석은 이 중생이 또 너무나 많은것을 얻어듣고 보고 합니다.수련대회에 얼른 가고싶은 충동이 듭니다. 가슴이 뭉클거리면서 ...그리고 그리도 외치셨던 순두부 맛도 얼른 맛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