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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5월 20일 수요일
[(백) 부활 제7주간 수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백] 시에나의 성 베르나르디노 사제
말씀의 초대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양 떼를 잘 보살피라고 하고 이별을 알리자, 그들은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를 배웅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주시고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사고 기도하신다(복음).
제1독서
<나는 하느님께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을 굳건히 세우시고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그것을 나누어 주실 수 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0,28-38
그 무렵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의 원로들에게 말하였다.
28 “여러분 자신과 모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양 떼의 감독으로 세우시어,
하느님의 교회 곧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29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가
양 떼를 해칠 것임을 나는 압니다.
30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31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32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건히 세울 수 있고,
또 거룩하게 된 모든 이와 함께 상속 재산을 차지하도록
여러분에게 그것을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33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34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35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36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37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38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1ㄷ-19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기도하셨다.
11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12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3 이제 저는 아버지께 갑니다.
제가 세상에 있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14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16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7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18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19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요한 17,15-16). 세상 속에 있는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제가 신학생일 때의 일입니다. 술에 취한 선배를 방까지 데려다주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선배는 자신은 취하지 않았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부제님이 꾀를 냈습니다. “후배가 술에 취하였으니 선배가 방까지 데려다주세요.” 그러자 선배는 저를 부축하려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선배는 자신이 저를 돕고 있다고 생각하였겠지만, 실제로는 제가 선배를 부축하며 방까지 갔습니다.
외짝 교우 가정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자가 아닌 쪽은 자신이 배우자의 신앙생활을 허락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배우자의 신앙이 그 가정을 지탱하는 힘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세상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로 여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서 세상을 지탱하고 있습니다. 돈과 권력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느님께 속하기에, 세상의 가치가 아닌 하느님의 힘으로 이 세상을 떠받칠 수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세상을 지탱하는 사명을 지녔음을 기억합시다.(권순호 알베르토 신부)
온전히 상호 내재하시고 상호 일치하시는 성삼위의 사랑!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상 생활 내내 예수님의 머릿속에 강하게 각인되어 있던 자아 인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당신이 하나라는 인식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신 안에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계시고, 당신 안에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 계신다는 의식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신과 아버지 사이에 성령께서 항상 함께 하신다는 상호 내재의식이 확고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시는데, 극진한 사랑의 표현이 삼위일체적 사랑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께서 온전히 서로 일치하시고 사랑하시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한 마음 한뜻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한 가정 안에서 부모 둘다 자녀를 극진히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러나 부모가 서로 일치하지 않고, 서로 존중도 하지 않고, 항상 다투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준다면, 자녀 입장에서 얼마나 난감하고 불편하겠습니까?
반대로 부모 두 사람이 서로를 애지중지하고, 극진히 사랑하고 배려하는 모습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면서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보기 좋고 효과적이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서로 온전히 일치하고 존중하고 배려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이 너무나 소중하고 은혜로운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삼위일체 하느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11)
언제 어디서든 상호 내재하시고, 상호 일치하시고, 상호 존중하시고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바라보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존재 자체로 오늘 우리에게 건네는 무언의 말씀이 각별합니다.
우리 역시 서로 존중하고 사랑하고 일치하며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학교로 예를 들면 이사장, 교장, 교감이 따로국밥이 아니라 온전히 일치하고 서로 존중하며, 그 마음으로 학생들을 지극정성으로 동반해야 하겠습니다.
본당 주임 신부님, 보좌 신부님, 원장 수녀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배려하고, 서로 일치하면서, 온전히 하나 되어 교우들을 섬기는 데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어느 단체, 어느 공동체에서든 마찬가지로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자녀들을 위해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로 일치하고 합심해서 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직장에서도 회장과 사장, 부장이 온전히 일치하며 한 마음이 되어 직원들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흐르지 않으면 거룩할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 17,17-19)
찬미 예수님! 부활 제7주간 수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남겨두고 떠나셔야 하는 애틋한 마음을 담아 아버지께 기도를 올리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도 중에 우리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아주 독특하고 심오한 구절이 하나 등장합니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태초부터 죄가 없으신 완벽하고 거룩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미 백 퍼센트 거룩하신 분이, 십자가를 코앞에 두고 새삼스럽게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말씀 안에는, 어떻게 쓰레기 같은 죄악을 뒤집어쓰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처럼 거룩한 상속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지에 대한 놀라운 물리학적, 영적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신비를 풀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지형을 묵상해 봅니다. 그곳에는 거룩한 흐름의 역설을 보여주는 두 개의 큰 바다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이 넘치는 '갈릴래아 호수'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바다인 '사해'입니다. 두 바다는 모두 요르단 강이라는 똑같은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는 온갖 물고기가 뛰놀고 주변에 푸른 나무가 우거지지만, 사해는 아무런 생명도 살지 못하고 이름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되어버렸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결정적인 이유는 단순합니다. 갈릴래아는 위에서 받은 물을 아낌없이 아래로 흘려보내는 '흐름'이 있지만, 사해는 들어온 물을 움켜쥐고 내보내지 않는 '고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흐르지 않는 거룩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은 내 안에 쌓아두어 썩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아 쉼 없이 이웃에게 흘려보낼 때 비로소 완성되는 동적인 생명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라고 하신 것은, 당신이 하느님 아버지라는 영원한 샘으로부터 솟아나는 생명의 물길이 되어, 십자가라는 거대한 수로를 통해 당신의 몸을 통째로 내어주심으로써 그 거룩함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흘려보내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라는 거룩한 샘물이 세상의 메마른 땅을 적시기 위해 마련하신 유일한 물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왜 거룩해지지 못하고 매일 제자리걸음일까요? 그것은 내 영혼이라는 수로에 세상의 이기심, 자존심, 돈에 대한 탐욕이라는 시커먼 흙덩이와 쓰레기가 잔뜩 쌓여 물길을 꽉 막아버렸기 때문입니다. 물길이 막힌 수로는 물을 공급받지 못해 금세 갈라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립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내 영혼에 쌓인 죄의 퇴적물을 걷어내고, 내 삶의 물길을 온전히 예수님의 본성(진리)과 똑같이 맞추어 연결하는 것뿐입니다.
이 위대한 생명의 소통, 거룩함의 전달 현상이 구약성경에서 아주 웅장한 알레고리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열왕기 하권 4장에 나오는 엘리사 예언자와 수넴 여인의 아들 이야기입니다. 수넴 여인의 어린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울부짖다가 어머니 무릎에서 숨을 거두고 맙니다. 절망한 어머니는 죽은 아이를 엘리사 예언자의 침상에 뉘어놓고 엘리사에게 달려갑니다. 엘리사는 죽은 아이가 있는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보여준 행동은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기괴하면서도 놀랍습니다. 엘리사는 침상에 올라가 그 죽은 아이의 몸 위에 엎드립니다. 자신의 입을 아이의 입에 맞추고, 자신의 눈을 아이의 눈에 맞추고, 자신의 두 손을 아이의 두 손에 완벽하게 포개어 맞춥니다. 거룩하게 살아 숨 쉬는 예언자의 온몸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죄와 죽음의 몸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포개어진 것입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예언자의 거룩하고 뜨거운 생명의 주파수(온기)가 죽은 아이의 차가운 몸으로 전염되어 흘러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죽은 아이의 몸이 따뜻해지더니, 마침내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를 하고 눈을 번쩍 뜹니다. 엘리사의 생명과 아이의 죽음이 완벽하게 공명하여, 생명이 죽음을 집어삼킨 위대한 부활의 기적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열왕기 하권 4장).
이 엘리사의 기적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거룩한 희생의 완벽한 예형입니다. 우리가 어찌 스스로 거룩해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수넴 여인의 아들처럼 죄악으로 인해 이미 차갑게 죽어버린 영혼들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입술과 눈과 못 박힌 두 손을, 차갑게 식어버린 우리 영혼의 형태에 완벽하게 포개어 맞추셨습니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거룩하게 하시어) 쏟아내신 그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이, 끊임없이 흐르는 샘물이 되어 우리 영혼을 적셨습니다. 주님의 심장 박동과 내 심장 박동이 완벽하게 일치하며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순간, 우리 영혼 안에 있던 죄악과 상처의 찌꺼기들은 밀려 내려가고, 우리는 참된 하느님의 자녀, 거룩한 상속자로 다시 숨을 쉬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교부이신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님은 오늘 복음을 이렇게 해설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것은, 당신에게 거룩함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흠 없는 제물로 바쳐진 당신의 육신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거룩함의 파동으로, 죄악에 물든 우리 영혼의 반죽 전체를 거룩하게 부풀리려 하심입니다." (출처: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요한 복음 주해』).
결론적으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라는 주님의 선언은 우리에게 세 가지 위대한 영적 자존감을 깨우쳐 줍니다.
첫째, 우리는 본래 그리스도와 완벽하게 똑같은 모양, 곧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고귀한 악기라는 사실입니다. 모양이 다르면 공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공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애초에 하느님을 닮게 빚어졌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둘째, 우리가 다시 그 거룩한 모습으로 회복되어 온전한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내어주시는 '은총(성령의 진동)'과 '진리(말씀의 악보)'에 철저히 공명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내가 먼저 맑은 소리굽쇠가 되어 공명하기 시작하면, 그 진동으로 내 곁에 죽어가던 또 다른 누군가의 영혼을 깨워 하느님의 모상으로 회복시키고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성경 에제키엘서 37장의 '마른 뼈들의 환시'는 이 세 가지 원리를 장엄하게 보여줍니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서 있는 골짜기에는 바싹 말라빠진 뼈들만이 뒹굴고 있었습니다. 생명도 없고 스스로 소리도 낼 수 없는 철저한 절망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에제키엘에게 명령하십니다. "이 뼈들에게 내 말을 대언하여라" (진리의 전달). 그리고 "사방에서 숨기운(루아흐, 성령)아 불어와서 이 죽은 이들에게 숨을 불어넣어라" (은총의 진동).
에제키엘이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진동에 온전히 공명하여 소리치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그 메말랐던 뼈들이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서로 맞아 들어가고,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마침내 숨기운이 들어가 거대한 하느님의 군대(본래의 거룩한 모상)로 일어서 함께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에제키엘 한 사람의 거룩한 공명이 온 골짜기의 죽은 뼈들을 깨워 하느님의 거룩한 군대로 부활시킨 것입니다. (출처: 『주석 성경』 에제키엘서 37장).
나도 누군가를 진동시켜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 이것이 부활을 사는 우리의 가장 벅찬 자존감입니다. 세상의 온갖 더러운 소음들을 산산조각 내고, 하느님과 영원히 동기화된 찬란한 천국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이라는 뜻입니다. 그 헤어짐을 교회에서는 ‘선종(善終)’이라고 말합니다. '착하게 살고 복되게 생을 마친다'라는 뜻을 가진 선생복종(善生福終)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은 ‘여한이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헤어짐보다는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아직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라고 하며 지금의 삶을 바로 사는 것이 먼저라고 가르쳤고, 한편 고타마 붓다는 집마다 죽음을 겪지 않은 곳이 없음을 깨닫게 하며 죽음이 모든 인간의 보편적 현실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시며 죽음을 단순히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 그것을 넘어서는 생명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35년 사제 생활 하면서 헤어짐과 만남이 있었습니다. 헤어짐은 늘 아쉬움과 서운함이고, 만남은 늘 긴장과 설렘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순간에 충실한 것입니다.
저는 해바라기의 ‘지금은 우리가 헤어져도’라는 노래를 좋아합니다. 가사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하나도 아프지 않아요./ 그저 뒷모습이 보였을 뿐 우린 다시 만날 테니까./ 아무런 약속은 없어도 서로가 기다려지겠지요./ 행여 소식이 들려올까, 마음이 묶이겠지요. / 어쩌면 영원히 못 만날까./ 한 번쯤 절망도 하겠지만/ 화초를 키우듯 설레이며 그날을 기다리겠죠/ 우리가 지금은 헤어져도/ 모든 것 그대로 간직해줘요. 다시 우리가 만나는 날엔 헤어지지 않을 테니까.” 회자정리가 삶의 이치라면 이자정회(離者定會)도 삶의 이치입니다. 강물이 흘러서 바다로 가듯이,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얻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며 살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의 원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하며 자기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꾀어내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그렇게 애써 일하며 약한 이들을 거두어 주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라고 친히 이르신 주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도 갈등과 분열이 있었습니다. 열심한 사람에 대한 질투와 모함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기보다는 세상의 것에 마음을 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는 먼지가 쌓이듯이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악의 유혹이 자리 잡기 마련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늘 깨어 있으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명심하라고 당부합니다. 만남과 헤어짐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제자들에게 닥쳐올 박해와 시련을 예견하셨습니다. 유대인 공동체와 이방인 공동체의 갈등과 분열도 예견하셨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조직화 되면서 소외되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예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두 가지 청원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셨습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청하셨습니다. 그 진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듯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과 아픔을 만나게 됩니다. 산을 넘으면 또 산이 나오듯이 우리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기쁨도 찾아오고, 슬픔도 찾아오고, 즐거움과 분노도 찾아옵니다. 모든 갈등과 아픔을 벗어나서 행복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과 아픔을 이겨 낼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청하는 것입니다.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베르나르디노(Bernardino)
신분 : 신학자, 설교가
활동지역 : 시에나(Siena)
활동연도 : 1380-1444년
같은이름 : 베르나르디누스, 베르나르딘
성 베르나르디누스(Bernardinus, 또는 베르나르디노)는 1380년 9월 8일 이탈리아 시에나 근방 마사 마리티마(Massa Marittima)에서 정치가였던 아버지 톨로 델리 알비체스키(Tollo degli Albizzeschi)와 어머니 네라 델리 아베두티(Nera degli Avveduti)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다시 3년 뒤 아버지마저 여의고 고아가 되어 친척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1391부터 1397년까지 시에나에서 인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후 그곳 대학에서 3년 간 교회법을 배운 그는 라틴어 고전뿐만 아니라 성경과 신학에도 심취하였고 신심의 실천에도 열의를 보였다.
1400년 흑사병으로 온 나라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을 때, 그는 약 4개월 동안 시에나의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 병원에서 흑사병 환자들을 돌보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였다. 1402년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 그는 이듬해 9월 8일 콜룸바요 수도원에서 허원을 하였고, 1404년에 사제품을 받고 다음해에 세지아노(Seggiano)에서 설교를 시작한 이래 죽기까지 설교 활동을 계속하였다.
성 베르나르디누스는 1408년부터 다음해까지 페라라(Ferrara)에서, 1410년에는 시에나와 파비아(Pavia)에서 설교했는데, 이 시기에 그는 예수 성명에 대한 설교를 시작함으로써 롬바르디아(Lombardia) 지역의 복음화에 기여하였다. 1417년부터 그는 밀라노(Milano)에서 대중 설교가로서 활동하면서 뛰어난 웅변술과 정열적인 설교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는 걸어서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 지방을 순회하며 정열적으로 설교하였는데, 그의 주된 설교 주제는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과 참회와 사랑의 실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도박, 고리대금업, 마술, 미신 등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한편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의 정치적 권력 투쟁을 그 시대의 근본적인 악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특별히 예수 성명의 신심을 전파했는데, 이 신심은 교회에서 새로운 것은 아니었으나 사람들이 그 신심의 깊은 신학적 기초를 깨닫도록 그리스어 예수(ΙΗΣΟΥΣ)의 첫 세 글자를 로마자로 표시한 ‘IHS’를 고안하였다. 그가 만들어 낸 이 모노그람마(Monogramma)는 ‘이 표징 안에서’(in hoc signo),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표징으로’ 혹은 ‘인간의 구원자 예수’(Jesus hominum Salvator)라는 뜻이다.
그는 빛나는 태양의 중앙에 이 글자를 새긴 문장을 사용하여 설교를 마무리할 때마다 공경 예절을 행하였다. 그는 이 문장으로 어떤 미신적인 상징이나 특정 파벌의 훈장 등을 대체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는 예수의 성명을 성경의 요약이요 일치의 상징으로 생각하였다. 그 후 성 베르나르디누스와 그의 제자들의 사도직을 통해서 예수 성명에 대한 공경은 널리 확산되었고, 이 문장은 교회와 가정, 공적인 건물 등에도 사용되게 되었다.
반면에 당시의 일부 인문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은 이러한 그의 활동을 불신하고, 이 기도를 위험한 혁신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1424년 볼로냐(Bologna) 대학에서 예수 성명 신심에 대한 공식적인 반발이 시작되었다. 무려 8년 동안 그는 교도권과 신학계로부터 숱한 고발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지만 1432년 1월 7일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Eugenius IV)의 칙서 “아포스톨리케 세디스”(Apostolicae Sedis)를 통해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 그의 활동이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마르티누스 5세(Martinus V) 교황으로부터 시에나의 주교로 임명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설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1430년부터 12년 동안 프란치스코회 엄률회의 총대리로 활동하면서 프란치스코회의 보다 엄격한 규칙을 회복하자는 수도회 내부의 개혁 운동에서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1439년에는 피렌체(Firenze) 공의회에 참석하여 그리스 정교회와의 일치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1444년 고향에서 설교를 마친 후 그는 고령의 나이와 쇠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나폴리(Napoli) 왕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출발하였으나, 아브르초(Abruzzo)의 라퀼라(L'Aquila) 부근에서 열병에 걸려 라퀼라의 작은 형제회 수도원에 머무르다가 그곳에서 5월 20일 사망하여 그곳 성당에 묻혔다.
그의 문장은 IHS가 새겨진 평판(平板) 혹은 태양이고, 광고업자들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1450년 5월 24일 교황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에 의해 시성되었다.
성 아우스트레지실로 (Austregisilus)
활동년도 : +624년
신분 : 주교
지역 : 부르주(Bourges)
같은 이름 : 아우스뜨레지실로, 아우스뜨레지실루스, 아우스트레지실루스, 우뜨릴, 우트릴
프랑스 부르주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국왕 군트람누스(Guntramnus)의 샬롱쉬르손(Chalon-sur-Saone) 궁에서 지내던 성 아우스트레지실루스(또는 아우스트레지실로)는 중대한 문제로 결투를 해야 할 입장에 놓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상대자가 말에서 떨어져 죽어버렸다. 이때 그는 이 사건을 세속에서 자신을 빼내려는 주님의 섭리로 생각하여 왕에게 궁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평소 수도생활에 대한 성소를 느끼고 있던 그는 친구인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로부터 사제품을 받고 마침내 리옹(Lyon)의 생 니지에(Saint Nizier)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후에 그곳의 원장이 되었다. 영적인 지혜로 유명했던 그는 612년에 고향인 부르주의 주교로 선출되어 12년 동안 봉사하다가 선종하였다. 그의 제자 중에는 성 아만두스(Amandus)가 유명하다. 그는 우트릴(Outril)로도 불린다.
복녀 골룸바 (Columba)
활동년도 : 1467-1501년
신분 : 동정녀, 3회원
지역 : 리에티(Rieti)
같은 이름 : 골롬바, 꼴롬바, 꼴룸바, 콜롬바, 콜룸바
콜룸바(또는 골룸바)는 이탈리아 중부 리에티 태생으로 그녀의 부모는 양복 짓는 사람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가 딸을 낳게 되자, 천사처럼 보인다하여 안젤리카(Angelica)라고 불렀으나 세례 때에 콜룸바로 개명하였다. 그녀는 몸과 영혼이 매우 아름답게 성장하였다. 콜룸바는 그녀에게 읽기를 가르쳐 준 도미니코 수녀회 수녀로부터 성 도미니코(Dominicus, 8월 8일)와 시에나(Siena)의 성녀 카타리나(Catharina, 4월 29일)에 대한 신심을 배웠고, 그녀의 일생 동안 위의 두 성인 성녀가 자신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10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러나 부모는 어느 부유한 청년과 약혼하기를 강요했고, 결국 콜룸바는 자신의 머리를 자르면서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 몸과 마음을 드렸다고 선언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매우 엄격한 생활을 하면서 성녀 카타리나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기회를 엿보았다. 한 번은 거의 5일 동안이나 죽은 상태에 있었는데, 후일 그녀는 그때 팔레스티나(Palestina)의 성지를 둘러보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19살 되던 해에 그녀는 도미니코 수도회 재속 3회원이 되었다. 그 후 콜룸바는 자주 감옥을 방문하여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고해성사를 받도록 하였다.
그녀의 일생은 온갖 기적들로 장식되었다. 비테르보(Viterbo)에서는 마귀 들린 사람을 고치는 등 수많은 치유의 기적도 보였다. 물론 이런 이상한 기적들로 인해 교회 당국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의 고해신부이자 전기 작가인 세바스티아누스 안젤리 신부는 그녀를 적극 옹호하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Alexander VI)가 페루자(Perugia)를 방문했을 때 그녀를 직접 대면하였는데, 놀랍게도 그녀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게 되자 그녀의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얼마 후에 그녀가 마술을 한다는 소문으로 큰 소동이 벌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였다. 차츰 차츰 그녀는 온갖 병에 시달리다가 34세를 일기로 주님 승천 대축일 아침에 운명하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교회 당국은 그녀의 공식적인 장례를 허용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1625년 교황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