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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마지하철역 입구에서 본 산수유꽃봉오리-
전주이씨 종가를 홀로 지킨다. 집안 자랑을 듣고 집안도 들여다 보고, 산성 이야기도 조금 듣는다. 차를 주차한다.
-매화산성 가는 길 :삼태기 모양으로 된 산성입구-
우측으로 대숲이 보이고, 이 대숲은 산성 안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입구에서 안에까지 점점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논산 훈련소 사격장 총소리를 들으며 걸어가는 산성답사길은 묘한 드라마 효과를 갖게한다..
-자연성능을 이루고 있는 서쪽 능선의 북편 : 험해서 고생 좀 한다. -
(잔존 성벽은 잘 보이지 않는다. )
-매화산 정상(320m)을 향해서 기어오르다시피 한다.-
( 낮은 자세로 임하소서.)
-산성입구에서 경주김씨네가 만든 납골당 길은 차가 다닐정도로 잘 닦여 있는데 그 산 능선따라 흰 페인트 표시를 소나무에 해놓았다. 아마도 산성터로 짐작되는 곳에 벌목한 것인지 나름대로 생각해본다. 벤 지 오래된 나무는 이미 썩었고, 최근에 벤 나무는 치우지 않아서 길을 막고 있었고....- 성의없이 베기만 했나보다.
-묫터같은 매화산 정상에서 성터봉 거의 다 가서 만나는 잔존 성벽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다.
바깥 성돌은 다 없어지고 늙은이 이처럼 남아있는 뒷채움석 성돌인지...
건너편에는 정토산이 보이고-
-성터봉(355m) 성벽 위 회곽도로 보이는 곳에 설치된 운동 기구 3점 중 2점. -
누가 얼마나 이용하랴 : 이런 높은 곳, 주민도 별로 없는 곳에: 길은 풀섶으로 덮여있고 나뭇가지가 가로막은 지 오래되고..
북쪽 정토산으로가는 능선에 북문지가 있었을 것으로 성지기는 말하고 있는 데..
(산성 안내판 하나 없는 산성은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 논산시청 홈페이지에도 없다.)
-성터봉 운동기구를 지나서 동쪽 성벽 중 남쪽으로 내려가는 곳에 비교적 잘 남아있는 잔존 성벽 구간-
중간에 광권 신청용으로 보이는 굴 비슷한 곳도 있고, 두툼하게 쌓인 솔가리를 밟으며 성안의 대궐터 쪽으로 내려온다.
-대궐터라고 불리우는 곳에 대나무 숲(왼쪽)과 빈터에 남아 있는 연리지 모양의 나무를 본다. -
(길도 낙엽으로 덮어서 없어진 곳을 미끄러지며 내려온다.)
-왕암저수지와 정토산 줄기 -(1970년대 저수지 축조 사연이 비석 속에 담겨있다.
앞의 높은 산이 정토산(증토산371.7m)으로 성터봉 북쪽 산봉우리이다.
-왕암저수지 유역도 -
매화산성 일대와 삼전리와 소룡리 지내기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 매화산성 >
# 매화산성(梅花山城) - 두 번째 다시 가보기
(*제1차 답사:2010년 3.16.우리 카페
#171 산과 산성이야기, 및 기타 사진 자료실 칸에서 참조 가능함)
소재지: 연무읍 양지리 지나서 (소룡리) 당산말 동쪽편 매화산 일대
답사일: 2021.02.23.(화)
답사자: 산지기 만보, 작은산지기, 카페지기 자부리
접근방법:
호남고속국도 논산IC서 나오자 마자 신호등에서 양지농공단지 표지가 있는 좌측으로 U턴 하듯이 돌아서 20여 미터 직진 후 만나는 큰길에서 우회전 후 바로 좌회전 해서 양지농공 단지길로 들어선다. 동쪽 앞으로는 매화산 연봉이 보인다.
양지1리 마을 회관에서 우측 농로같은 논 가운데로 난 포장도로를 따라 소룡리 쪽으로 가다가 동쪽 산을 바라보면서 좁은 길로 대숲이 보이는 데로 마지막 집 한 채를 찾아 올라간다. 당산말이다.
맨 마지막 집 앞 마당에 주차할 수 있다.
요즈음 시골에는 물어 볼 사람 만나기가 참으로 어렵다. 마침 양지쪽에 앉아있는 할머니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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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조영연의 글은 성지기라는 카페 필명으로 2010년 3월 답사 후 쓴 글로 보여진다.>
출처: 조영연의「백제사 따라가 보는 산성엣세이」(423∼427쪽)에서 가져온 자료
연무읍 남쪽 양지리, 은진의 진산(鎭山)인 매화산 (梅花山 높이 350m- 일명 마야산摩耶山) 정상에 있다.
논산 톨게이트를 벗어나 20m쯤에서 좌회전하여 양지1리 당산말로 접근한다
당산말은 행정적으로는 소룡 4길로 돼 있으며 마을 뒷길로 계곡을 따라 더 들어가면 폐허된 암자를 포함한 옛 민가지를 만난다.
매화산은 비록 높은 산은 아니지만 황산벌 넓은 평야에 위치해서 보기보다는 의외로 높게 느껴진다. 양 옆 즉 동서에 우뚝한 두 봉우리가 있을 뿐 연무 방면에서 보면 산줄기 양 끝이 뚝 끊어져 성이 있는 능선 부분은 마치 소의 잔등 같다.
매화산이란 이름은 현지에서는 그저 대궐터라고만 알고 있을 뿐 이름을 아는 이 조차 없는데 토박이 국동헌(82)씨가 과거에 그렇게 부르기도 했노라고 귀뜸해 준다. 정상인 북봉에서 서북 방면으로 가다가 남쪽으로 회절돼 내려오는 산줄기와 북봉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산줄기 일부가 다시 서쪽으로 회절돼 내려와 이뤄내는 서쪽 삼각형 골짜기 안이 성이어서 밖에서는 일절 보이지 않는다. 상주 백화산의 금돌성이나 충북 회인의 호점산성의 모습과 흡사하다. 만주 지안의 고구려 환도성이나 대련의 비사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 마야산 고성에 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18 은진현(恩津縣)산천(山川)와 고적조(古蹟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摩耶山在縣南二十四里鎭山 (마야산재현남이십사리진산)
摩耶山古城石築周五千七百十尺內有二井今閉(마야산고성석축주오천칠백십척내유이정금폐)
(* 마야산은 현의 남쪽 24리에 있고 진산이다.
마야산의 고성은 석축으로 둘레가 5710척이고 성안에는 우물 2개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폐 하였다.)
매화산성은 산의 정상 동벽을 중심으로 자연지형을 따라 남북벽 안에 소계곡을 안은 능선을 좇아 내려와 서벽으로 연결되는 포곡식 산성이다. 동국여지승람의 마야산 고성 기록 중 “…今閉 …”으로 미뤄 이 성은 조선 초에는 이미 폐성된 것으로 고려 이전에 성이 축조됐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 할석으로 내탁 외축했으며 둘레 약 1350, 높이 4m 정도로 추정된다.
백제 때 사용후 오래 방치된 탓인지 성벽은 거의 붕괴되고 북벽에서 동벽으로 회절되는 꼭지 부분과 남벽 등 일부 외벽에 군데군데 붕괴되다 남은 잔벽이 있어 성벽의 진행 상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성벽은 이 지역 특유의 약간 푸른색의 구들장 같은 막돌 판석으로 허튼층쌓기로 했던 것 같다. 아무리 붕괴되었다 할지라도 남은 부분을 통해서 유추해볼 때, 외축 흔적은 보이지 않고 마치 뒤채움석만 남은 것처럼 넓고 길쭉한 돌을 척척 쌓은 모습이 어찌 보면 제주도 돌담 같기도 하며 성벽으로는 좀 정제 되지 않은 인상을 받는다. 그런 점에서 극히 일부에서 화강석을 잘 다듬어 바른층쌓기를 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 논산군지의 설명과는 차이가 난다.
물론 지질학적 특성이었겠지만 판석 사용의 성은 몇 군 데 중에서 호점산성의 경우와 가장 유사하다. 그러나 같은 판석이라도 호점산성의 것이 검고 규모도 작고 더 얇은데 비해 여기의 것은 대체로 두께 15센티 전후, 길이 1미터와 폭 20센티미터 이상의 큰 규모에 좀 더 거칠고 예리하며 빛깔도 약간 청색을 띠고 반짝이는 것이 특징이다.
동·남·북벽의 안팎은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려울 정도로 급경사이고, 부분적으로 석축 흔적이 남았으나 다른 부분은 급격한 토축성처럼 보인다. 또 석축한 부분의 기단부 앞쪽에 약간 삭토하여 판판하게 돌출된 부분이 있어 성벽 붕괴를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무너진 곳을 통해 볼 때 능선 바깥쪽을 삭토하고 거기에 석축한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성벽 상단은 폭 10m 정도 평탄하여 내외벽을 이룬 두꺼운 성벽처럼 보이며 내벽의 석축은 발견할 수 없다.
북, 동, 남 성벽의 옹호 속에서 부채꼴 조개처럼 서쪽으로 사오백 미터 점점 좁혀져 내려와 만나는 계곡 지점이 서문지이자 수구다. 여기는 남북 성벽이 회절되어 이룬 서벽의 중간부로서 수구 대용 계곡수가 있고, 성 안팎으로 드나드는 주 출입문이다. 좌우에 연결된 성벽이 중단된 계곡변에는 지금도 약간 두껍게 쌓은 구조물이 있고 주민들은 이곳을 문닫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문닫이는 바로 문지를 의미하고 이는 곧 서문지로 추정된다.
이 서문지 안쪽은 서벽을 이루는 능선에 은폐되어 성안은 전혀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대신 문지 안에 들어서면 성안은 삼태기 속처럼 아늑하다. 여러 채의 건물들이 들어설 수 있는 이 널찍한 공간을 국동헌 씨를 비롯한 주민들은 대궐터라고 한다.
최근까지 그 위에 절이 들어섰는데 절이 세워질 때마다 가물어서 원성이 잦아 폐사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돌을 들어올리면 밑에 빈대가 득실거렸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석축 일부가 남은 건물터에는 대나무가
불과 몇 년 전 답사 때보다 훨씬 더 우거져 앞으로는 그나마 보기가 어려울 것 같다. 거기서 사오십 미터 남쪽 지점에 맑은 샘이 있고 흘러내린 물은 서문 옆으로 빠져나간다.
만일 전설대로 이곳이 대궐터이라면 사비(부여)의 행궁 역할을 했을 것이니 공주대 서정석 교수가 제시한 매화산성의 동방성(東方城)설은 한결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북봉 정상은 곡성 형태로 두껍게 쌓고 그 위에 둥근 토축이 있는데 장대지가 있었던 곳이 아닌가 추측된다. 거기서 북동 상여봉 방면으로 이어진 능선의 출입을 위해 북봉에 분문지를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닫이 바로 아래 현재 폐 암자가 있는 지역에는 과거 여러 채의 민가가 있었던 넓은 공간으로 이곳에 다수의 군사가 주둔해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더욱이 남북성에서 뻗어내린 줄기들이 이 부분을 다시 감싸는 형국이어서 대궐터가 있는 문닫이 내측을 내성, 이곳을 외성 삼아 내외성 구조를 이루지 않았을까까지 생각을 넓혀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성의 규모는 한층 커진다.
서쪽 입구를 제외하고는 성은 외부가 전체적으로 빙 둘러진 급경사로 둘러싸인 천연요새가 되며, 특히 주적(主敵) 방향인 동쪽으로부터 은폐되어 성의 입지 조건이 퍽 양호한 편이다. 외부로부터 접근이 어렵다는 점은, 「한원(翰苑)」 중 ‘득안성은 산에 의지한 험(險)한 곳'이라는 내용과도 상당히 근접하다. 설령 이곳이 득안성은 아니라 하더라도 지리적 조건상 북쪽의 황산성과 함께 이 지역의 중요 거점성으로서 그 중요성은 부인될 수 없을 것이다.
성의 남쪽 아래로는 작은 곡간 평야 건너 성태봉 줄기가 가야곡 ->양촌, 논산-> 양촌 방면 643 지방도를 보이지 않게 한다. 서남방면은 진산->묵산리->신흥리 혹은 진산 탄현에서 운주 용계산성을 통과 강경, 연무, 사비쪽으로 들어가는 교통로가 지난다. 아마 매화산성은 동에서 오는 군사가 논산의 양촌 방면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지키는 것이 주 임무였던 것 같다. 따라서 백제 최후의 전투시 신라군의 삼도(三道) 중 가장 진입이 용이한 3도(三道)길로 들어오는 적들에 맞서 활약했을 것으로 보이고 , 그와 아울러 산직리 방면에서 들어오는 2도길은 황산성과 협력 방어를 하지 않았을까 한다.
매화산성의 동방성 추정설을 소개한다.
매화산성은 높은 산이라는 입지 조건이나 큰 규모, 전설 등을 들어 백제 오방성(五方城)중 동방성인 득안성(得安城)일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서정석, 백제의 성곽; 김영심 충남지역의 백제성곽 연구)
백제는 멸망당시 도성에 5부(五部), 지방에 동(東-得安城) ·서(西 -刀先城)· 남(南-久知下城)·북(北-熊津城)·중(中-古沙城) 5방의 (五方)의 행정 조직과 그 하부에 郡 ·城의 체계를 가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동방(恩津)과 북방성(熊津)의 위치에 관해서는 학자들 대부분 동의하나 나머지는 이설들이 많다.
동방성으로 비정되는 득안성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고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德殷郡 本百濟德近郡 景德王改名 今德恩郡…(삼국사기 권 36 雜誌 地理 3)
德恩郡 本百濟德近郡 新羅景德王改德殷 高麗初改德恩郡(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恩津縣 建置沿革條)
國本有五部三十七郡二百城 … 至是 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都督府 各統州縣 …(三國史記 권28 백제본기 의자왕 20년조)
이들을 종합해보면 ‘덕근->덕안=득안:은진’으로의 지명 변천을 볼 수 있다.
서정석은 「翰苑」 권 30의 蕃夷部百濟條의 기록 “國東南百里有得安城方一里”, “其諸方之城 皆憑山險爲之.. ”등에 근거해서 동방성을 논산의 매화산성과 달이산성(達伊山城)으로 보고 그중에서도 전자를 동방성으로 비정하였다.
우연의 일치인가 현재도 논산훈련소가 이 근처에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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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23일에 다시 찾았을 때는, 양지리 당산말 끝에서 만난 전주이씨 종가댁 할머니(95세)가 바깥 마당 양지쪽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주차를 위해 허락을 받고는 몇 마디 말을 나누면서 알아낸 사실은. 산성 쪽으로 고개가 있고 그 고개는 삼전리로 통한다는 점과,
산성 옆으로 난 삼전리(蔘田里) 가는 고개는 왕암저수지의 유역 지형도에는 지내기재로 표시되어 있었고 삼전리 방면 사람들이 그 고개로 해서 옛날에는 구자곡면(현 연무대) 소재지인 마산리 장을 보러 다녔다는 이야기도 듣는다.
산성 입구에 대밭 이야기를 하자 대숲이 자기집 뒤까지 온통 덮고 있었는데 당신이 포크레인을 동원해서 밭을 일궜다는 이야기와 함께 대궐터에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집도 없다고 하는 사실 등을 듣는다. 저 대밭이 백제시대에도 있었을까, 아니면 산성과 무슨 연관성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매화산성 답사내내 앞산 너머 훈련소 사격장에서는 사격연습하는 총성이 일말의 무서움을 불러일으키는 효과음처럼 들린다.
폐허가 된 민가주변에도, 없어진 암자 터에도 대나무만 무성하고, 옛 성터에는 여전히 산성 안내판 하나 없이 그 높고 외진 성터봉 성벽위에는 웬 어울리지 않는 운동기구만이 덩그렇게 녹슬어 가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길은 낙엽 속에 묻혀 사라지고, 그나마 길을 낸다고 베어놓은 나무들은 치우지도 않고 그 자리에 팽개쳐진 채 여전히 그냥 길을 온통 틀어막고 있으니 베어내나마나한 상태가 되었다.
내려오는 내내 뒷맛은 웬지 허전하고 씁쓸하기만 하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성안의 폐가처럼 되어갈 텐 데 하는 생각에 답답함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