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처녀를 찾아서/靑石 전성훈
꿈속에서 보았던 봄을 노래하는 처녀를 찾아서 길을 나선다. 창동 전철역에서 버스를 타고 덕성여대 정문 앞 솔밭공원에 내려, 4.19 국립묘지 뒷산에서 시작되는 진달래 능선으로 간다. 솔밭공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나와서 솔 향기를 맡으며 천천히 걷기도 하고, 활기찬 아이는 미끄럼틀에서 신나게 장난을 친다. 주택가 주차장 한구석에서는 젊은 남녀가 마주 보면서 느긋하게 담배 연기를 내뿜는다. 아침에 코끝으로 스며드는 담배 냄새는 너무나 짜증 나고 역겹다. 37년간 담배를 입에 물고 지지고 볶으며 한때는 구수하다고 느낀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 냄새가 너무나 싫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담배 냄새를 뒤로하고 부지런히 걷는다. 적막한 절집 보광사를 지나서 본격적으로 산행을 시작한다. 산으로 오르려고 보니 북한산 국립공원사무소에서 설치한 안내문이 보인다. 무슨 내용인가 들여다보니, “조선 시대 소나무의 벌채와 묘를 쓰는 것을 금한다는 표시의 사산금표(四山禁標)라는 설명과 함께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궁금장(宮禁場)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동안 이곳을 몇 번 나갔는데도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지 않아서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산으로 오르는 초입부터 여기저기 분홍색 진달래가 꽃봉오리를 활짝 열고 어서 오라고 노래한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이곳을 왜 진달래 능선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 주변에 진달래가 지천으로 피었고, 꽃을 피우려고 봉오리를 펼치고 눈웃음치는 진달래가 무수하다. 그야말로 진달래투성이인 진달래 꽃동산이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몇 장 찍는다. 시간이 너무 일러서 그런지 몰라도 진달래 능선을 따라 올라가는 사람이 없다. 나 홀로 한적한 산골짜기를 걸으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친다. 30분 정도 산을 오르고 바위에 걸터앉아 물 한 모금 마신다.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수유리와 미아리가 보이고, 그 너머 아득히 멀리 불암산과 수락산의 멋진 모습이 다가온다.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걷는다. 능선 끝에 오를 때까지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이런저런 상념 속에서 아침 공기를 흠뻑 들어 마신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자 인수봉, 백운대, 만경대 그리고 용암봉을 잘 볼 수 있는 전망 좋은 곳에 도착한다. 쌓였던 안개도 옅어져 간다. 햇볕이 고개를 내밀고 반짝이자 등허리에 땀이 솟는다. 겉옷을 벗어서 배낭에 집어넣고 힘을 내어 조금 지친 다리를 달래가며 걸음을 옮긴다. 1시간 30분가량 걸려서 대동문에 도착한다. 몇 년 동안 대동문 성벽 보수공사를 했는데 드디어 깔끔한 모습으로 단장을 하여 오래된 담장과 새로 만든 담장이 조화를 이룬다. 바람이 부는 봄날의 즐거움을 만끽하려고 산을 찾은 사람들이 예상 밖으로 많다. 나처럼 혼자 오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두세 명 혹은 대여섯 사람이 무리를 지어서 북한산을 찾는다. 20여 분 이상 앉아서 푹 쉬고 소귀천계곡으로 방향을 잡아 내려가기로 한다. 무릎이 신통치 않아 계단을 내려갈 때는 많이 쑤시기 때문에 체력의 한계를 벗어난 극기훈련 같은 아득한 기분이 든다. 별수 없이 올라갈 때보다 훨씬 더 조심하면서 등산용 지팡이에 의지한 채 천천히 내려가야 한다.
봄 처녀를 찾아서 진달래 능선에 올랐는데 봄 처녀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고, 온통 분홍색 진달래꽃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숨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답답한 마음에도 불현듯 짚이는 게 있다. 분홍색 꽃을 예쁘게 피운 진달래처럼 봄 처녀를 닮아, 봄 향기를 풀풀 내면서 호수같이 검은 커다란 눈동자로 함박웃음을 선사했던 그녀, 20대 초반의 청초한 모습으로 내 마음을 빼앗아간 그 사람, 인생의 굴레라는 무겁고 버거운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더니 어느새 검은 머리에는 싸락눈이 한 말이고, 비단결같이 곱던 얼굴에는 주름살이 살그머니 꽃을 피우네. 그 누가 세월의 무상함을 피할 수 있으리오. 세월 따라 몸도 마음도 변하기 마련이고, 그 속에 꽃피던 사랑과 믿음의 애틋한 마음도 변해 버린 줄 그 누가 알리요.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다’라는 옛 시인의 이야기처럼,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포개어 담아 다정히 손잡고 입맞춤하고 싶다. 세월의 흐름에 순응하며, 오늘도 내일도 한 걸음씩 길을 걷고 또 걸어가야겠다. 봄 처녀를 찾아서, (2024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