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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의 서문
프리드리히 니체
우리들, 인식하는 인간들은 우리들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일찍이 자신에 대해서 탐구해 본 적이 없었다.----그렇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가 있을까?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리라”([마태복음] 6장 21절)라고 말한 것은 옳은 말이다. 우리의 보물은 우리 인식의 벌통이 있는 곳에 있다. 우리는 본성상 날개달린 피조물로서 그리고 정신을 수집하는 꿀벌로서 항상 그 벌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애쓰고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무엇인가를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는’----이다. 그 이외의 생활, 이른바 ‘체험’에 관해서라면----우리들 가운데 누가 그런 것을 살필 만한 진지함을 지니고 있겠는가? 혹은, 그런 시간이라도 가지고 있겠는가? 그와 같은 일에 대해서는 아마도 우리는 ‘전념했던’ 적이 없었다. 우리의 마음은 거기에 없는 것이다----아니 귀(耳)마저도 거기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이 몰두한 사람의 귀에 마침 정오의 열두 번 종소리가 세차게 쳤을 때 그 사람이 갑자기 일어나 ‘방금 몇 시를 친 거지’하고 스스로 묻는 것처럼, 우리도 때때로 훨씬 뒤에서야 귀를 비비며, 아주 당황해서 ‘도대체 우리는 방금 무엇을 체념했었지?’라고 물으며, 더욱이 ‘우리는 진정 누구인가?’라고까지 물으며, 앞서 말한 것처럼, 훨씬 뒤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체험, 우리의 생활, 우리의 존재의 열두 시의 종소리의 진동을 세어 보게 된다. 아아! 그러나 우리는 잘못 세는 것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우리들 자신에게 있어 이방인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오해하고 혼동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법칙이 영원히 적용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결코 ‘인식자’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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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도덕적 편견의 기원에 대한 나의 사상----이것이 바로 이 논박서論駁書의주제이다----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자유정신을 위한 책]이라는 제목의 잠언록에서 처음으로 간략하나마 소개되었었다----그 책은 소렌토에서의 겨울 동안에 시작되었는데, 그때 나로서는 방랑자처럼 발걸음을 멈추고서 그때까지 나의 정신이 편력해 온 넓고 위험한 영역을 가로질러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1876년부터 77년의 겨울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사상 자체는 그 전부터의 것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음의 여러 논문에서 다시 취급하게 되는 사상과 같은 것이었다. 부디 이 오랜 중간 시기 동안에, 그 사상이 보다 원숙해 지고, 명확해 지고, 강력해 지고, 완전한 것이 되었으면!
어쨌든 내가 아직도 그 사상들에 집착하고 있으며, 그 사상들이 그 동안 더욱더 긴밀히 밀착되고 서로 얽히고 섥히어 왔다는 데서, 처음부터 그 사상들이 나에게 단절되고 변덕스럽거나 산발적인 것들로서가 아니라, 공통의 근저에서부터 깊은 곳을 결연히 파고들어가고,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며, 고도의 정밀성이 요구되는 인식에의 근본의지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라는 확신의 기쁨이 한층 더했다. 왜냐하면 철학자가 하는 일은 마땅히 이런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라도 개별적으로, 따로따로 다룰 수는 없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분리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없고, 개별적인 진리를 파악할 수도 없다. 오히려 한 그루의 나무가 열매를 맺는 그러한 필연성으로서 우리의 사상, 가치, ‘긍정’과 ‘부정’ 및 ‘가정假定’과 ‘역접逆接’이 우리들 내부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모두가 서로 밀접하고 친근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하나의 의지, 하나의 건강, 하나의 토양, 하나의 태양의 존재의 증명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 우리의 열매가 당신들의 기호에 맞을는지 혹은 맞지 않을는지? 그러나 이런 것은 나무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 철학자들에게도 물론 상관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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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공언公言하고 싶지 않은, 내게 있는 특유한 망설임----왜냐하면 그것이도덕에, 이제까지 지상에서 도덕으로 찬양되어 온 모든 것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것은 원하지도 않던 것으로 불가항력으로 너무나 일찍 내 삶에 자리잡고, 나의 환경, 연령, 계율 혹은 관습과는 너무나 상충하는 것이어서 거의 나의 선천성으로 생각할 정도였지만----이러한 망설임 때문에 나의 호기심과 의혹은 아주 일찍부터 우리의 선악이란, 진실로 어디에서 유래하였는가라는 의문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악의 기원의 문제는 이미 13살 소년 시절에도 나를 따라다녔다. “가슴 속에 반은 어린이를, 반은 신을”(괴테, {파우스트}) 품고 있었을 시절에 나는 이 문제를 두고 나의 최초의 문학적인 유치한 장난, 나의 최초의 철학적 습작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그때 제기한 문제의 해결에 대해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신에게 영예를 돌려 신을 악의 아버지로 생각했던 것이다. 나의 선천성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일까? 저 새롭고 부도덕한, 혹은 적어도 비도덕적인 ‘선천성’과 그 ‘선천성’이 말하는, 아아! 그처럼 반칸트적이고 수수게끼 같은 정언명령定言命令 때문에 그랬단 말인가?(물론 이 정언명령에 그후로 내가 차츰 주의깊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지만.)
다행히도 나는 일찍이 신학적 편견과 도덕적 편견을 가늠할 수 있었고, 또한 악의 기원을 이 세계의 배후에서 찾는 것도 그만두었다. 심리학적 문제일반에 관한 타고난 예민한 감식력에다가, 어느 정도의 역사와 문헌학에 대한 수련으로 해서 나의 문제는 다른 것으로 변형되었다. 즉 인간은 어떤 조건하에서 선과 악이란 가치판단을 생각해 냈던가? 그리고 그 가치판단들 그 자체는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그것이 이제까지 인간의 번영을 저지하여 왔던가, 혹은 촉진시켜 왔던가? 그 가치판단은 삶의 고난, 빈곤, 타락의 징조인가?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는 삶의 풍부한 힘, 의지, 용기, 자신, 미래가 나타나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답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한 감히 그 해답을 시도해 보기도 하였다. 나는 여러 시대, 여러 민족, 그리고 개개인의 등급을 구별해 보았고, 나의 문제를 세목으로까지 전개시켜 보았다. 나의 여러 대답에서 새로운 문제, 질문, 추측, 가능성들이 나타났고, 마침내 나는 나 자신의 영역, 나 자신의 대지를 갖게 되었다. 아무도 그 존재를 예측치 못했던 은밀한 정원을, 가지가 무성하고 꽃이 만발한 하나의 숨겨진 별개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오오,우리 인식자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다만 오래도록 침묵을 지킬 줄만 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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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기원에 관한 나의 가설假說의 일부를 발표할 최초의 충동을 받은 것은 명확, 간략하고 빈틈 없으며 얄궂다고도 할 수 있는 조그만 책에서였다. 나는 그 책 속에서 전도顚倒되고 비꼬인 계보학적 가설을, 진실로 영국적인 타입의 가설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모든 반대물, 적대물이 지니는 매혹의 힘으로써 나를 끌었다. 그 작은 책의 제목은 {도덕적 감정의 기원}이란 것으로 파울 레 박사가 1877년에 내놓은 것이었다. 그 책에서 하나하나의 명제, 하나하나의 결론에 대해서도 ‘그게 아닌데’하고 제동을 걸고 나설 어떤 점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기분이 언짢거나 참을 수 없는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나는 당시 집필중이던 먼저 말한 그 저서 속에서 이 책의 명제들에 대해서 어설픈 언급도 하고 적절한 언급도 했었는데 그것은 그 명제들을 논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논박해 봤댔자 별 수 있을 것인가!----오히려 적극적인 정신에 알맞도록 그럴듯 하지 못한 것을 좀 더 그럴듯한 것으로 바꾸고, 때에 따라서는 하나의 실수가 있다면 그것을 다른 실수로 바꾸어 놓기 위해서였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내가 처음으로 지금 이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계보적인 가설을 내세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때는 참으로 미숙했었다. 왜냐하면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여전히 나 자신의 일에다 나 자신의 언어를 쓸 수 없었으며, 온갖 과오와 동요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코 나의 가설을 부인하지않으려는 사람이었으니까. 하나하나의 점에 관해서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45절 “선악의 이중二重의 선사先史”(즉, 귀족계급에 기원을 가진 것과 노예계급에 기원을 가진 것)에 관한 서술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리고 금욕주의적 도덕의 기원과 가치에 대해서는 136절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타주의적 평가양식----모든 영국의 도덕 계보학자들처럼 레 박사도 이 평가양식 속에 도덕적 평가양식 그 자체를 인정하고 있다---과는 하늘과 땅만큼 동떨어진, 그것보다 훨씬 오래되고, 훨씬 근본적인 도덕, 즉 ‘풍습의 도덕’에 관해서는 96절과 99절 및 하권 89절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동등한 힘을 지닌 사람들 사이의 합의(모든 계약, 따라서 모든 법의 전제로서의 균형)로서의 정의의 기원에 관해서는 92절 및 [방랑자]의 26절, {서광}의 112절을 참조하기 바라며, 또한 형벌의 기원에 관해서는 [방랑자]의 23절, 33절을 참조하기를 바란다----형벌에 있어서 협박이란 것은 본질적인 것도 근원적인 것도 아니다. “레 박사도 주장하는 바와 같이----그것은 오히려 어떤 특정한 사정 아래, 그리고 항시 하나의 부수물로서, 어떤 첨가물로서 비로소 형벌 속에 도입되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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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무렵 도덕의 기원에 관한 나 자신의 가설이나 타인의 가설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내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가설에 대한 일들은 그것이 목표에 이르는 많은 수단 중의 하나로서만 나의 관심을 끌었다.) 중요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도덕의 가치였다. 이 문제를 두고 나는 나의 위대한 스승인 쇼펜하우어와 거의 배타적인 관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 책의 정열과 내적인 항의는 마치 눈앞에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그에게 향해졌다. (그 책도 또한 하나의 논박서였기 때문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비이기적인 것의 가치, 즉 연민, 자기 희생, 자기 헌신과 같은 본능들의 가치였는데, 이본능들이야말로 쇼펜하우어가 실로 오랫동안 미화하고 신성시하고 피안화彼岸化함으로써 마침내 그것들이 그에게는 ‘가치 그 자체’가 되어버렸고, 이것을 근거로 하여 그는 삶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정을 얘기했다. 그러나 나에게서 훨씬 더 근원적인 불신, 훨씬 더 나를 파고드는 회의론이 고개를 쳐들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본능들에 대해서였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인류에게 닥친 거대한 위험을 보았고 그것의 가장 숭고한 유혹과 매혹을 보았다. 그러나 무엇에로의 유혹과 매혹인가? 허무에로인가?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종말의 발단을, 죽음과 같은 정체를, 회고적인 권태를, 삶에 반항하는 의지를, 궁극적인 병의 여리고 우울한 증표를 보았다. 계속적으로 터져 나가 철학자들마저 휩쓸어 병들게 하는 연민의 도덕을, 나는 이미 섬뜩하게 된 유럽 문화의 가장 무서운 징조로 해석하고, 새로운 불교에로의, 유럽적인 불교에로의----허무주의에로의 우회로로 해석하였다.
왜냐하면 현대철학자들이 연민을 과대평가하고 편애하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연민의 무가치에 대해서 의견이 일치했었다. 나는 플라톤, 스피노자, 라로쉬푸코 및 칸트의 이름만을 들지만, 이들 네 사람의 정신은서로서로 다른 점이 많지만, 그러나 연민의 경시라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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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과 연민의 도덕의 가치에 관한 이 문제는(나는 감정의 현대적인 여성화를 유해한 것으로서 반대한다) 처음에는 단순히 고립적인 문제, 단순한 하나의 의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단 이 문제에 집착해서 이것을 문제시 하게 된 사람은 누구나 내가 경험한 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즉 어마어마한 새로운 전망이 그의 눈앞에 열리고, 새로운 가능성이 현기증처럼 그를 엄습하며, 모든 종류의 불신, 의혹, 공포가 치솟게 되며 모든 도덕에 대한 믿음이 붕괴한다. ----결국엔 새로운 무엇이 이루어져야 함을 알게 된다. 이 새로운 요구를 다음과 같이 표현해 보자---- 우리는 여러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비판을 필요로 하는데 사실은 이런 가치들 자체의 가치가 우선 문제시 되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가치들을 발생케 하고 전개시키고 변화시켜 온 조건과 환경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결과로서의, 징후로서의, 가면으로서의, 위선으로서의, 질병으로서의, 오해로서의 도덕 뿐만 아니라 원인으로서의, 치유로서의, 자극제로서의, 속박으로서의, 독약으로서의 도덕도). 그와 같은 지식은 이제껏 결코 존재한 적이 없으며, 또한 그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들 ‘여러 가치’의 가치를 주어진 것으로서, 사실로서,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여겨왔다. 일반적으로 인류의 복지와 진보(인간의 미래도 포함시켜)에 기여한다는 점에서 ‘선인’이 ‘악인’보다 높은 가치를 대표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해 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만일 그 반대가 진실이라면? 즉 ‘선인’ 속에도 퇴보의 징후가 숨겨져 있다면, 또한 어쩌면 현재를 위해서 미래를 희생시키려는 그런 위험, 유혹, 독약, 마취제가 숨어 있다면? 아마도 현재의 삶이 보다 안락하게, 보다위험성이 적게, 그러나 동시에 보다 비열하고 저급한 것으로 되는 게 아닐까?----그리하여 다름 아닌 바로 도덕에,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강력함과 호화로움에 도달하지 못하는 책임이 지워진다면? 그 결과로, 저 도덕이야말로 위험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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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튼 이러한 전망이 내 앞에 전개된 이래, 나에게는 박식하고 대담하며 근면한 친구들을 물색해 볼 필요와 이유가 생겼다. (나는 지금도 물색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나는 전혀 새로운 문제를 가지고 또한 새로운 안목으로써 도덕의----실제로 존재하였고, 실제로 생명을 지니고 있었던 안목으로써 도덕의---- 저 광막하고 아득하며 그리고 감쪽같이 숨겨진 대지를 여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이 땅을 처음으로 발견하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닐까?
만약 내가 이러한 맥락에서 다른 여러 사람들 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레 박사를 생각하였다면, 그것은 그의 문제 자체의 본질상 그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방법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점에 있어서 잘못 생각을 한 것이었던가? 어쨌든 내가 원한 바는 그처럼 날카롭고 공정한 눈을 가진 사람을 보다 옳은 방향으로, 진실한 도덕사에의 방향으로 이끌어 주고, 그가 푸른 허공을 헤매는 것 같은 엉터리 영국식 가설에 빠지지 않게끔 기회를 보아 경고해 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도덕 계보학자에게는 어떤 색깔이 푸른색보다 몇 백 배나 더 중요하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회색으로, 말하자면, 문서로 기록된 사실, 현실적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실,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다. 그것은 요컨대 인간 도덕사에 관한 오랫동안 판독하기 어려웠던 상형문자象形文字의 전체이다!
이 문자를 레 박사는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는 다아윈을 읽었었다. 그래서 그의 가설 속에서는 다아윈 식의 야수와 ‘이젠 물지 않는’ 극히 현대적이며 겸손한 도덕적 군자가, 적어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예의바르게 서로의 손을 잡고 있다. 이 군자(나약한 남자)는 어딘가 선량해 뵈는 데다 세련되고 무관심한 표정을 띤 얼굴에 일말의 비관주의와 권태가 뒤섞인 빛조차 띠고 있다. 마치 이 모든 것들을----도덕의 문제들----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와 반대로 진지하게 다룰 만한 수고의 보람은 반드시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 보람이 있을 것이라는 한 예를 들면, 언젠가는 이 문제를 털어내 놓고 명랑하게 취급할 수 있게 될 것이란 점이다. 이 명랑성이----나의 말로 한다면 즐거운 지식----하나의 수고의 보람인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오랫동안의 용감하고 근면하고 남 모르는 진지성, 확실히 몇몇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진지성에 대한 보람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마음 속에서 ‘전진하라! 우리의 낡은 도덕도 또한 희극의 일부이다!’라고 외칠 때가 오면 그때 우리는 ‘영혼의 운명’이라는 디오니소스적인 희곡을 쓰기 위한 새로운 갈등과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그리고 우리의 현존하는, 위대하고, 노련하며 영원한 희극 시인은, 내기를 해도 좋거니와, 반드시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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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책이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하기 어렵고 귀에 거슬린다 하더라도, 그 허물이 반드시 내 탓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독자가 이미 나의 이전의 저서들을 읽고, 그리고 그때 다소간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면 이 책은 매우 알기 쉬울 것이다. 사실상 나의 이전의 저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나의 {짜라투스라}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 책 속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때로는 깊게 감정을 상하고, 때로는 심오하게 기뻐해 본 사람이 아니면 어느 누구도 그 책을 이해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 없다. 그 까닭은 그와 같은 노여움과 기쁨을 느낀 사람만이 그 작품이 태어난 조용한 경지에, 그리고 그 태양광선과 같은 명료함, 아득함, 드넓음, 확실함에 같이 참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독자들은 잠언의 형식에 어려움을 느낀다. 이는 오늘날 이 형식이 너무도 안이하게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절차탁마되어 이루어진 잠언이란 단순히 읽는다고 해서 해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서 그 해석이 시작되어야 하지만 거기에는 또한 해석의 기술이란 것이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의 세 번째 논문에서, 이런 경우 내가 ‘해석’이라고 여기는 일례를 들어 보았다----이 논문의 서두에는 하나의 잠언이 붙어 있으며, 논문 자체는 그것의 주석에 불과하다. 물론 이처럼 기술로서의 독서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오늘날 가장 깊이 망각되어 있는 한 가지 일이 필요하다. 이 일을 망각하였기 때문에 나의 저서가 읽을 수 있게 되기까지에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따라서 이 하나를 위해서 독자들은 거의 소(牛)가 되어야 하며,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현대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하나의 일이란 되새기는 것(反芻)을 말한다.
오버 엔가딘의 실즈 마리아에서
1887년 7월
*이 글은 김태현 역의 {도덕의 계보}(청하, 1982년)의 서문이며, 독자 여러분들은 이 책을 꼭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