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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라
김 재 성 목사
(한신대 교수/ 민들레성서마을지기)
ㅡ사도행전 19:1-7
아볼로의 주지주의를 넘어서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1절에 아볼로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앞에서 보면 그는 말을 잘하고, 성경에 능통하며, 주의‘도’를 배워서 알고 있었고, 열심히 예수에 관한 일을 말하며, 정확하게 가르쳤다고 한다(행 18:24-25). 맨 끝에 보면, 그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성령 세례를 몰랐다(25b). 본문에 보면, 바울이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 에베소를 방문하게 된다. 거기서 (아마도 아볼로의) 몇몇 제자들을 만나“여러분들이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들은“성령이 있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다”한다. 그들은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예수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잘 알고 있지만 성령은 받지 못한 주지주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나 초대교회 사람들은 많이 배운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지식 이상의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서 보면,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갈릴리에서 활동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셨다. 사도행전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는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성령을 신자들에게 부어 주신다(행 2:33). 사도행전 전체는 이렇게 성령을 충만히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했는가를 보여준다(1:8). 당시의 그 열악한 교통 환경 속에서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복음이 전파된 것은 가히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기에 가능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 빌립, 바울, 일곱 집사, 스데반과 같은 인물들을 묘사할 때, 꼭 그들은 성령이 충만했다는 구절이 빠지지 않는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땅 끝까지 퍼져가는 비전은 사실은 예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예수님은 개인주의적, 영웅주의적 역사관을 갖고 있지 않으셨다. 예수께 그런 관점이 있었다면, 십자가를 지는 대신 많은 기적과 카리스마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누리면서 별 문제 없이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고난 받고 부활 승천하여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우선은 그들에게 고통일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유익하다고 보았다. 성령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교독문>에서, 예수는“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요 16:7) 하신다.
예수께서 아무리 능력이 크시다 해도, 육을 가지신 예수는 이스라엘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은 유다와 사마리아의 한계를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의 증인들이 되었다. 보혜사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예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다(요 14:26). 그래서 이젠 예수를 직접 만나지 않은 사람도 직접 만난 사람 이상으로 예수를 알게 되고 고백하는 일이 가능해졌다. 바울 사도는 생전의 예수를 뵌 적이 없지만, 그리스도를 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누가 기자는 이런 경지를“성령 충만”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충만이라는 개념은 본래 그리스적 개념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프뉴마(영)를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사물에도 깃들어 있고 사람의 몸을 채울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것은 마치 기(氣)와 같아서 사람이 그것을 이용하거나 조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에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영(루아흐)은 인격적인 분이어서 사람들이 이용하거나 조종할 수 없다. 누가 기자는“성령 충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적 영 개념에 익숙한 이방인 신자들이 성령을 친숙하게 이해하게 하였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지만, 우리에게서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의 프뉴마처럼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를 사로잡는 분임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성령을 기와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오늘날 기 수련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기를 주입하기도 하고 기로 병을 고치기도 한다. 성령이 이런 물질적인 것일 수는 없다. 그런데 신자들은“성령 충만”이라는 용어에서 이런 기가 자신을 채우는 것을 연상하고, 자기가 열심히 기도하고 정성을 들이는 만큼 성령을 많이 받고 능력을 받게 된다고 생각을 한다. 성령을 내가 조종, 통제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성령 충만”은 이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는 가운데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주의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요즘식으로 표현하면,“성령의 시스템 속으로”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를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예수를 만났고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사회의 작은 사람들인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배운 사람들보다 신념 있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던 그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을 때, 땅 끝까지 겁 없이 도전하는 능력의 인물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성서의 관점에서 보면, 개인의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갔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짐 콜린스의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보면, 성공하는 기업의 원리도 그와 같다. 시간을 묻는 직원들에게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는 우선은 매력 있고 기업을 잘 이끌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존재보다는 이름도 없고 카리스마가 없어도 사람들에게 시계를 만들어 주어서 누구나 시간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기업주가, 처음에는 고전을 하지만 나중에는 대성공을 거둔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보잉사와 맥도널드 더글라스사가 있는데 보잉 707은 프로펠러로 가는 여객기이고 이때 맥도널드사 역시 프로펠러 기종으로 보잉사보다 훨씬 앞서 가고 있었다. 그런데 보잉사 사장은 매우 모험적이긴 하지만 장기적 안목으로 제트엔진으로 바꾸기로 시스템을 바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투자비용이 많이 드니까 고전했고, 나중에 제트엔진이 성공 못하면 아주 망하게 되는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신념과 용기 있는 지도자가 원칙을 가지고 밀고나가서 결국 제트엔진을 단 보잉 747이 나왔고, 머지않아 맥도널드사를 추월하게 되었다. 맥도널드사는 계속 프로펠러 엔진을 고집하다가 늦게서야 제트엔진으로 바꾸었지만 보잉사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보잉사 사장은 카리스마가 있어서가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성공을 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로서도 부족함이 없었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을 수 있는 그런 성령 시스템의 비전을 보았다. 바로 이 시스템 때문에 복음은 예루살렘을 넘어 땅 끝까지 전파될 수 있었다.
우리 교회는 교권주의를 극복하고 평신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공동체를 세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 의해서 좌우되거나 주도적인 구성원 한두 사람이 교회를 좌우하는 낡은 모델을 깨고, 누구나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은 대로 헌신하고 참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서, 그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돌아가게 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은 평신도들로 구성되는 실행위원회와 운영위원회인데, 전체적으로 볼 때 이것은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이라 할 수 있다.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람들
우리가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가서 성령의 능력과 은사를 받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행복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이 된다. 처음 컴퓨터를 배울 때, 그리고 처음 개인 홈피를 만들 때,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는 일만 한다고 주위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컴퓨터를 배우면 배울수록 무궁무진하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홈피를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모르는 사람들과 은사를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나 재미가 있었다. 나중에, 목회에서나 강의에서나, 그때 배운 것들이 그렇게 유용할 수가 없었다. 홈페이지에 올린 설교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목회자들도 보는 것 같다. 디지털 카메라로 행사 사진들을 홈페이지 <앨범>에 올리면서, 만나는 시간 시간이 화제의 시간이 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어 모두가 정성을 다하게 된다. 교회에서는 주일 꽃꽂이 사진을 홈피에 영구보존하게 되는 아이디어가 나오니까 꽃꽂이하는 분들이 더 정성을 들인다. 그리고 교회 밖 사람들도 꽃꽂이를 볼 수 있게 되고, 꽃꽂이를 보고 시를 쓰기도 하고, 때론 외국에서 그 사진을 보고 시를 쓰기도 한다. 홈피를 통해 미국에 있는 분들이 글을 쓰기도 하고, 국내 소식을 듣기도 하고 또 그곳 소식을 전해 주기도 한다. 요즘 목요강좌 자체도 재미있지만, 강좌 후에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서로 답을 달아주는 것이 또 재미있고 의미도 있다. 전에는 <성도의 교제>라고 하면 교회에 와서 함께 차 마시고 대화 나누는 것을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것 못지않게 홈피를 통해서 대화를 하고 성도의 교제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이렇게 홈피가 활성화 된 교회들은 그만큼 교우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서로 사랑하게 된다. 다들 자기를 표현하고 싶어 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한다. 하루만 안 보아도 서로 보고 싶고 만나고 싶기 때문에 홈피를 통해서라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서로 만나고 싶어 하고 뭔가 쓰고 사진을 찍고 소감을 쓰고 답변을 달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때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되고, 그 은사는 사랑과 자유 안에서 서로 반하게 하고 만나고 싶게 한다. 그리고 쉬지 않고 자유롭고 창의적이며 사랑을 이루는 영감과 아이디어들을 얻게 된다.
아트 프라이라는 사람은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면서 나중에 기억하기 좋게 종이를 끼워 두었는데 뒤적거리다 보니 끼운 종이가 자꾸 빠져나갔다. 이럴 때 우리는 전혀 창의성이 없이 우직하게 노력만 해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해마학습법을 이용하여 찬송가 번호를 열심히 기억해 두는 것이다. 그건 우직한 것일 수는 있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어쩌면 외우다가 잘 안 되서 짜증을 부릴 수도 있다. 그러나 아트 프라이는 그렇게 하는 대신 어떻게 그 끼운 종이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거기에 접착제를 바르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포스트잇이다. 3M이라는 회사는 광산업을 하다가 망해서 아주 위태하게 출발했지만, 이런 창의적 아이디어 때문에 포스트잇과 스카치테이프만으로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다. 이런 창의적인 것은 머리가 좋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필요 속에서 나오고 곤경 속에서 나온다. 그가 찬송하는 가운데 그런 아이디어를 얻었듯이,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갈 때 뜻밖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시스템에 들어간 사람은 처음에는 별로 대단한 사람 같지 않은데, 자기 능력으로 아니라, 그분의 능력을 힘입기 때문에 어느 샌가 보면 위대한 생애를 사는 것을 볼 수 있다. 반대로 자기가 잘나고 가진 게 많다고 자만하는 사람들, 교회를 다녀도 무슨 직분을 받은 것으로 자만하고,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빠져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단한 것 같아도 나중에 보면 아주 작고 종재기 같은 사람이 된다. 하찮은 이익이나 일에 매여서 평생을 보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마치 혼자 노를 저어서 대양을 건너려는 사람과도 같다. 성령의 시스템에 들어간 사람은 노를 젓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지만 인생이 그 노력만으로 되지 않으며, 때로는 순풍이 아닌 풍랑이 일어도 그것을 타고 내가 알지 못하는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성령에 자기를 맡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새 술에 취하여라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성령이 있다는 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자, 성령이 그들에게 내렸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와 같이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은 이런 모습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모습이 얼마나 뜨겁고 신명났던지, 옆에서 보던 사람들이,“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다(행 2:13).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이런 빠져듬과 황홀경에 있다. 그들은 이론적이거나 냉소적이기보다는, 빠지고 반하고 미치고 취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한 편으로 설교 말씀을 경청하고 목요강좌에서도 배워야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뜨겁게 찬양하고 간절히 기도하고 성도의 친교 속에서 푹 빠지고 봉사와 헌신에 열의를 다하는 가운데, 성령의 은사를 나누는 희열을 경험을 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술에 취해 보지 않고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한다. 이성적인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사람에게는 있음을 다들 느낀다는 의미다. 사람은 아폴로니우스적인 것(이성적인 것)만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인 것(취하고 빠져듬)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황홀경을 느끼는 것은 외부의 물질에 의해 취하는 때가 아니라 내 속에서 솟아나는 것에 의해서 취할 때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진정한 자유를 느낄 때,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 때 우리는 황홀경을 느낀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은 우리가 성령 안에 있을 때 가장 충만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이 진정으로 술 취한 사람보다 더 취할 수 있고 진정으로 황홀경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주지주의적이고 냉소적인 아볼로의 신앙으로 살지 말고, 성령의 시스템 속으로 푹 빠져 들어가야겠다. 그리하여 부족한 것 많은 우리들이지만,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그리고 영감을 받으며 살며, 새 술에 취한 사람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자기가 하는 일에 반하고 취하고 미치고 빠져드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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