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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묵상글 들 (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 우리가 모른다고 할지라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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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우리가 모른다고 할지라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누구든지'라고 말씀하셨기에 이것이 꼭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보편적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지만, 특별히 제자들, 특히 베드로 사도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으로 제게는 들립니다.
왜냐면, 아시다시피 주님께서 잡혀 돌아가실 때 제자들 모두 달아났고,
주님 뒤를 따라갔던 베드로 사도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복음을 보면 오늘은 이렇게 '누구든지 모른다고 하면'이라고 말씀하시지만
뒤에는 제자들의 배신에 이어 베드로 사도의 배신을 꼭 집어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시지요.
그러니 모른다고 하는 것은 치매 환자나 건망증 환자처럼 인지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주님 말씀처럼 증거의 문제이고 관계의 문제지요.
그러니까 정말 모르기에 모른다고 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지만
알면서도 모른다고 한 것이기에 이것은 관계를 부정하는 것뿐 아니라
앞으로의 관계를 거부하는 곧 관계를 끊고 살겠다는 단절 선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절을 선언하기 전에 선택을 한 것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삶이 아니라 모르는 채 살기로 선택하고,
주님이 아니라 세상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런 선택과 단절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주님 말씀처럼 주님도 단절하실까요?
사람들 앞에서 모른다고 한 우리를 천사들 앞에서 모른다고 하실까요?
그런데 모른다고 한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나타나셔서는 기어코 증언자로 만드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단절을 선택해도 주님은 단절을 원치 않으십니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 부모만 관계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어떤 후레 자식이 출세와 결혼을 위해 무식한 부모와의 관계를
끊을지라도 부모는 자식과의 관계를 끊지 않잖아요?
그러니 오늘 주님께서 당신을 모른다고 하면 당신도 모른다고 하실 거라는
말씀은 삐져서 하신 말씀이나 엄포를 놓으시는 말씀이 아니라
관계 단절의 이치를 설명하시며 우리에게 엄중히 호소하시는 것입니다.
관계는 쌍방 단절도 있지만 한 쪽에서 관계를 끊어도 끊어지는 것임을.
남북 군 통신선을 북한이 끊어버리자 우리가 아무리 이으려고 해도 안 되듯
주님과의 관계도 우리가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면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관계를 단절하면 누구 손해이고, 누가 아쉽습니까?
우리 손해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아쉬워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아무 손해가 없는 주님이 더 아쉬어하시고 안타까워하십니다.
사랑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관계를 끊으면 하느님의 그 큰 사랑을 못 받는 우리가 손해지만
단절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우리의 손해를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이시지요.
어제 주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벗이라고 부르셨는데
주님의 벗인 우리가 이런 주님 사랑을 무시하고
세상을 선택해서는 안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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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2,10)
오늘 말씀은 아주 짧지만 아주 강력한 당부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마지막 때를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깊은 애정과 사랑으로 가르치십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증언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 받지 못할 것이다.”(루가 12,10)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있다 하시니 말입니다. 혹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이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우리는 이 문장의 뜻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인간 편에서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완고함으로 용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성령의 활동을 무시하고 모욕한 바람에 이러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란, 우선적으로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거스르고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거나, 혹은 성령의 활동을 사칭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성령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완고함을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고집과 완고함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무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사울의 완고함을 꾸짖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이는 고집이 성령을 거스르고 배척하고 무시하는 신성모독에 해당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또한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고난과 박해 속에서 도와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항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 12,11)
이는 진리의 성령께서 증언해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니 반대하는 무리들이 박해를 한다 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성령께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을 증언할 모든 것을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영을 따라 살게 하소서.
더 이상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주님!
당신께서는 용서하시건만 제 스스로 제외시키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빛으로의 초대하건만 제 스스로 어둠에 머물기를 고집하지 않게 하소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를 거부하면서 당신의 영을 모독하지 않게 하소서.
제 안에서 활동하시는 당신을 수락하게 하소서!
당신의 자비와 용서에 승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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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은 지상에서 열립니다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소개하며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맞은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늘은 이미 지상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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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새 복음화는 가치 실현으로 이룩해야 할 질적인 선교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이 말로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편지를 쓴 바오로는 이제는 혈통이 아니라 믿음에 의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시대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로마식의 국제 교육을 받아 바오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그로 인해 다른 사도들과 달리 소아시아 지방은 물론 그리스 지방까지 종횡무진으로 자기 나라처럼 다니며 복음을 전했지만, 그는 뼛속까지 히브리 혈통의 유다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정체성을 새로이 합니다. 즉, 유다인이 먼저 받아들인 믿음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 새로운 이스라엘이요 새로운 인류로서 자리잡도록 그에 앞장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복음의 진리는 로마를 거점으로 서방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 복음 진리가 지구 반바퀴를 돌아서 아시아에는 근세 이후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서양 선교사들은 유럽식 스타일로 복음을 전하고자 했기 때문에 문화 충돌과 박해가 초래되었습니다. 박해를 받은 우리 신앙 선조들은 천주교가 전하는 그리스도 신앙을 ‘무군무부’(無君無父)의 ‘변세사학’(變世邪學)으로 매도하는 관리들의 비난을 들었지만, 우리 선조들은 유창한 어조와 해박한 논리로 답변했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에 성령께서 일러주신 말로 대응한 셈입니다.
본시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는 서양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태어나셨음을 상기하면 이제는 말씀의 본 고장인 아시아에서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꽃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입니다. 아직도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나, 오랜 역사를 지닌 종교를 신봉하면서도 예수님의 신성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도 진리를 증언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증언은 단순히 신자를 늘려서 교세를 확장하는 식의 양적인 선교가 아닙니다. 로마는 바오로와 베드로의 순교 이후에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받아들여서 전 시민이 신자가 되었지만 경제적 타락과 도덕적 부패를 막지 못해 용병들에게 멸망당했습니다. 로마식 복음화보다는 믿음으로 인한 의로움을 실천적으로 증언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최고선을 증거하고, 종교를 신봉하되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인간 존엄성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공동선을 증거하는, 질적인 선교를 해야 할 때입니다. 형식적 종교 의식이 아니라 실질적 가치의 실천으로 의로운 세상을 이룩하는 일이 새 복음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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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자신에 대한 불만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돈도 없고, 능력도 없고, 외모도 시원찮은 자신의 단점만을 바라보며 그는 불평불만만 가득했습니다. 자신의 이런 부정적인 모습에 걱정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자신에 대한 걱정에 힘든 시간이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피정 갔다가 지도 신부님께서 하루 동안 자신의 장점을 적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각자에게 얼마나 많은 긍정적인 모습이 있는지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피정에 참여하는 하루 동안 자신의 장점을 적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에 자신이 적은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장점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점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이들의 장점도 보였습니다. 즉,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보다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하느님께 받은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걱정할 것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도 깨닫습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을 주님께서 원하실까요? 불평불만 하면서 걱정에 휩싸여 있는 모습을 원하실까요? 자신이 받은 것에 감사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원하실까요?
인간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우리가 힘들고 아파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조그마한 상처와 아픔에도 쉽게 절망하는 우리의 나약함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힘이 되시는 말씀을 하시지요.
“걱정하지 마라.”
심지어는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면서 ‘말하는 것’조차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걱정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행복한 우리가 되기를 바라는 주님이십니다.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께서는 우리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면서 하느님 아버지를 믿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은 걱정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곧바로 일어나 자신의 꿈을 향해 힘차게 달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걱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지만, 주님께서 계시기에 걱정 없이 참 행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걱정을 가져가십니다. 우리의 몫은 걱정보다 감사와 기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행복의 길이 그렇게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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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누구에게나 따뜻한 빛을 준다. 그리고 사람의 웃는 얼굴도 햇빛과 같이 친근감을 준다. 인생을 즐겁게 지내려면 찡그린 얼굴을 하지 말고 웃어야 한다(슈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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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집중하며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아침에 전철역에 나와서 저녁까지 전철만 타며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1호선도 탔다가 2호선, 3호선, 4호선…. 가릴 것 없이 느낌대로 전철을 타며 하루를 보냅니다. 이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일까요? 일하지 않는 무직의 실업자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은 만화가로 사람들의 일상에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전철을 타며 사람들을 자세히 보는 것입니다. 의자에 앉아 조는 사람, 스마트폰에만 집중하는 사람, 친구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 창밖을 보며 신기해하는 어린아이의 모습 등등….
모든 것이 그의 만화 소재였습니다. 그래서 전철을 타면서 돌아다니는 하루 여행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시간 낭비를 하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안에 집중하지 않기에, 그 안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무 생각 없이 전철만 타고 있다면 시간 낭비처럼 생각되지만, 만화소재를 찾기 위함이라면 중요한 일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삶에 집중하며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누가?
바로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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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8월 22일입니다. 서품 30주년을 지내면서 신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싶었습니다. 옆에 있는 퀸즈성당 5시 미사를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고맙게도 신부님들이 10분이나 함께 하셨습니다. 예전에 평화신문을 운영하셨던 신부님도 한국에서 오셨는데 함께 하셔서 기뻤습니다. 사제서품 54주년이 되신 신부님께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육적으로는 점점 늙어 가지만 영적으로는 건강해 져야 한다.”라고 해 주셨습니다. 1년 넘게 미사를 도와주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성당에서 축가를 준비해주셨고, 손님들을 위해서 음식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뉴저지에 사시는 자매님은 축하 케이크를 가져오셨습니다. 엠이 부부들은 음료수를 가져오셨습니다. 퀸즈성당 교우들께서는 뒷마무리를 깔끔하게 해 주셨습니다. 태풍 아이다의 영향으로 비가 내렸지만 많은 분들이 함께 하셨고,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산악반이 있어서 가입했습니다. 토요일 오후 늦게 북한산으로 1박2일 산행을 갔습니다. 배낭에는 산에서 먹을 부식과 텐트, 암벽 등반을 위한 장비가 있었습니다. 밤길에 갑자기 비가 내렸습니다. 길을 잃어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옷도 비에 젖고, 무엇을 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마침 저 앞에 불빛이 보였고, 집이 있었습니다. 하루 신세를 질 수 있는지 말씀드렸더니, 주인께서는 기꺼이 방을 내 주셨습니다. 산을 좋아해서 산에 집을 짓고 사신다고 하였습니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따뜻한 방의 기운이 지금도 느껴집니다. 비가 그친 다음날 아침에 가지고 있던 부식을 감사의 표시로 나눠드리고,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신문사를 운영하면서도 뜻밖의 도움을 받곤 합니다. 한국에서도 도움을 주신 분도 있고, 애독자 중에서도 도움을 주신 분도 있습니다. 작년에는 정부에서 3개월 치 직원들의 급여를 지원하였고, 올해에도 지원이 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이가 많았기에 자식에 대한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셨고, 하늘의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늙은 나이에 귀하게 얻은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에게 민족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희망은 없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믿음이라는 뿌리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잘 아는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한 말씀이면 종의 병이 치유될 것이라는 백인대상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구원의 역사는 놀라운 능력과 업적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는 때로 부족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신앙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였던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부하를 죽도록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었고, 사탄아 물러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토마사도는 예수님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봐야만 부활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이렇게 허물이 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완벽함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능력과 업적으로 드러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부족함에도 감사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결함이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잘못을 했지만 뉘우치는 이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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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 유비무환有備無患 -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시는 분이시옵니다.”(시편130,3-4)
오늘 미사중 입당송 후렴이 우리 영혼에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제 졸저 책명이자 29년전 1992.1.15.왜관 수도원 성전에서 종신서원 미사때 제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여전히, 아니 살아갈수록 절실해지는 평생 화두같은 물음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하루하루의 깨달음을 마음에 새기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몇가지 깨달음의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요셉수도원 초창기부터 지금까지(1986-2021), 35년간 사진을 모아 원장수사가 방대한 5권의 사진첩을 만들었습니다. 새삼 감회가 새로웠고 초발심의 자세를 회복하는 호기도 됐습니다. 사실 초창기는 앞을 내다 볼 수 없으니 잘살고 못살고를 떠나 하루하루가 생존의 문제였습니다. 여섯 단어로 요약되는 삶이었습니다. ‘혼돈’, ‘무질서’, ‘젊음’, ‘순수’, ‘열정’, ‘역동성’이었고 정말 살아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영적 젊음과 순수와 열정을 새로이 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2.엊그제의 깨달음도 잊지 못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나 제관, 착한 사마리아인은 누구나의 가능성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순간적 판단과 결행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초주검이 된 이를 놔두고 슬며시 외면하고 떠난 사제와 제관을 마냥 비난할 수만을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후 집무실에서 일하다 잠시 숙소에 들렸더니 복도에서 천정 열린 문 아래에 사다리를 놓고 원장수사가 혼자 여름철에 썼던 선풍기들을 올려 놓고 있는데, 수고한다는 말만 던지고 떠나려던 차, 이게 아니다 싶어 가까이 갔습니다. 혼자 들어 올려 사다리에 올라가 넣는 작업이 참 위태해 보였습니다. 남은 큰 선풍기 3개는 번쩍 들어 전달해 올리니 간편하게 짧은 시간에 끝냈고, 참 잘했다 싶었고 순간 아찔했습니다.
귀찮다는 생각에 그냥 놔두고 지나쳤다면 그대로 초주검이 된 이를 놔두고 외면하고 떠난 사제나 제관의 처지가 될뻔했습니다. 이렇다면 이건 사람이 되는 기본적 자질에 무조건 실격임을 뜻하며 내내 마음 찜찜했을 것입니다.
3.‘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분도 성인의 말씀도 하루하루 절실히 깨어 본질적 투명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답이 되는 유비무환의 자세이겠습니다. 늘 생각하는 바, 일일일생, 일년사계에 견주어 내 현재 삶의 지점을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루로, 일년사계로 압축할 때 어느 지점에 와 있겠느냐의 확인입니다. 여기에다 내 임종어를, 또 장례미사까지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제 경우 장례미사시 입당성가는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의 ‘아무것도 너를’ 기도곡과 퇴장성가는 아씨시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를, 또 강론은 제 좌우명 기도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를 부탁할 생각입니다.
4.어제 금요강론시 귀한 깨우침을 준 내용입니다. 토마스 머튼 이후 최고라는 베네딕도 영성의 세계적 대가인 80대 초반의 오스트랄리아 출신의 트라피스트 수도사제 마이클 케이지의 인터뷰시 한 대목입니다.
“그렇다! 언제나 성공은 부패하기 마련이다(Always success corrupts). 너도 알겠지만, 공동체 안에서의 삶이 그것에 대한 최고의 치유제이다.”
참 깊은 은혜로운 통찰입니다.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 삶이 성공에 자만하지 않고 깨어 겸손히 부패하지 않고 참 자기를 살도록 견제 역할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예언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함이 그를 겸손으로 이끄는 긍정적 역할을 함도 깨닫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깨달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함에 대한 답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도 우리에게 귀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첫째,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생각과 말과 행위로 용기있게 주님을 증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입니다. 그래야 주님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겠기 때문에 이런 증언의 삶도 참 좋은 유비무환의 삶이 될 것입니다.
둘째, 성령에 따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성령을 모독하는 무지의 죄는 절대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에게 자명한 진리가 진리의 성령, 사랑의 성령이신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성령께, 주님께, 이웃에 활짝 열린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입니다.
스스로 문을 닫아 걸고 차단함은 스스로 자초하는 심판이자 바로 성령께 대한 모독이고 이런 경우는 하느님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이런 성령 모독의 죄를 짓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도록 늘 깨어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성령께 귀기울이며 성령의 인도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것 역시 참 좋은 유비무환의 삶이 되겠습니다.
셋째, 장차 있을 어떤 곤경이나 역경에서든 무엇을 행할까, 무엇을 말할까 미리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언젠가의 그날 그때에 앞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성령에 따른 겸손한 삶 자체가 참 좋은 유비무환의 대책이 되겠습니다. 오늘 사는 대로 내일도 그대로 살겠기 때문입니다.
이 모두를 떠받쳐 주는 것이 주님께 대한 희망과 신뢰의 믿음입니다. 희망과 신뢰의 믿음은 함께 갑니다. 희망이 있기에 항구한 신뢰의 믿음이 가능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항구한 한결같은 믿음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가 말하는 아브라함이 참 좋은 모범입니다. 믿음을 통하여 실현되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도록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주님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희망이자 믿음입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백절불굴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음은 한결같이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과 신뢰를 둘 때 가능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 증언의 용기, 성령의 인도에 따른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는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유비무환의 삶을 살도록 당신께 대한 참 좋은 희망과 믿음의 은총을 선물하십니다.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 뿐이리라.”(시편34,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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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희망을 이야기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 12,8)
예수님은 우리의 증언을 목말라하십니다. 그분에게 우리가 하찮은 존재라면 우리가 그분을 안다고 하건 말건 상관없으실 텐데, 우리가 그분께 꽤 중요한가 봅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2,10)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을 잘 알고, 그 아는 바를 타인에게도 전하길 바라시지만, 행여 그렇지 않더라도, 심지어 당신을 거슬러 말할지라도 용서하십니다. 실제로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해치는 이들을 위해 아버지께 용서 기도를 바치셨지요.
그런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에 대해서는 단호하십니다. 이는 앞으로 제자들이 활동할 교회의 시대, 성령의 시대를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1-12)
이 말씀에서 제자들의 앞날에 고발과 체포와 신문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예수님을 책으로 배우지 않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함께 먹고 마시고 지내면서 삶을 나눈 예수님, 즉 그들이 아는 예수님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마주하게 될 이들은 종교지도층이나 정치 권력자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제자들이니, 가뜩이나 긴장된 순간에 무얼 준비한다고 해서 제대로 될 리 없지요. 오히려 그 때는 철저히 성령께 내어맡겨야 하는 순간이 될 겁니다.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시고 너희도 나를 증언하리라."(복음 환호송)
성령과 제자들이 함께 예수님의 증언자가 됩니다. 아직 겁쟁이에 부족하고 미숙한 제자들이 성령의 파트너가 되는 겁니다. 제자들이 성령의 도구로서 자기 힘을 빼고 성령께 온전히 의탁할 때 성령께서 내용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은 제 존재의 허약함에서 눈을 들어 희망을 가져도 좋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믿음과 희망의 모범인 아브라함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로마 4,16)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믿었습니다."(로마 4,18)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정확한 당위성과 절차를 거쳐 이루어졌다면 믿음은 별 소용이 없었을 겁니다. 당연하고 자연스런 과정에서 도출되는 결과를 놓고 믿음을 거론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가 훤히 예측되는 상황에서 인과론에 의거해 기다리는 걸 희망이라 하지 않지요. 아브라함의 예처럼 희망할 수 없는 처지에서 바라는 게 희망입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의 조상이 되리라는 하느님 말씀을, 내외 모두 생명력이 거의 끊겨갈 나이까지 아들 없이 기다린 믿음이 희망을 잉태한 것이지요.
호락호락하지 않은 삶의 여정은 한때 우리 가슴을 뛰게 했던 꿈이 뭐였는지조차 잊혀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그분의 목소리라고 믿고 걸어왔지만 꿈과 희망이 보이지 않아 무너질 때도 있지요. 바로 그 순간이 성령과의 파트너십을 떠올려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더 이상 사람에게 기대하거나 희망할 수 없는 순간, 그야말로 희망에 부고를 접한 그 순간에 우리 존재에 희망을 불어넣으실 수 있는 존재는 성령이시니까요. 성령께서 힘이 다 빠진 우리 안에서, 침묵하는 이성과 지식을 대신해서,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실 겁니다.
신뢰가 깨어진 순간에 더 믿고, 희망이 스러진 순간에 더 희망하며 성령과 함께 각자에게 허락된 순례 여정을 계속하시길 기원합시다. 약속은 반드시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성령과 더불어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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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루카12,12)
'깨어 있자!'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한 단락을 이루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얼마나 자신 있게 그리고 기쁘게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고 있는가?
성당 밖인 삶의 자리, 곧 믿지 않는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내가 하느님을 믿는 신자이며, 성당에 다니는 사람임을 얼마나 잘 드러내고 있는가?
혹시 부끄러워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십자성호도 잘 긋지 못하는 신자는 아닌지?
나는 얼마나 내가 믿고 따라가고 있는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루카12,9)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그리고 구체적인 이슈 앞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신자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깨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깨어 있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처럼, 굳게 믿고 희망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지금 깨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바로 '성령'입니다.
오늘도 굳게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합시다!
그래서 성령을 받고, 이 성령께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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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그 증언의 첫째 자리에 와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울러 그 증언은 예수님을 아는 사람들 사이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고 부정하고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도 민망하고 쑥스러운 일인데, 예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가 아닌 사람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식사 전
기도를 하려고 성호 긋기도 어려워하는 우리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하기가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야기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지 성령께서 알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예수님을 알기도,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기도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성령을 모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것, 그것은 성령께서 이끄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리지 않는 삶의 자세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증언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도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를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부와 성자와 일치시켜 주십니다.
내 생각과 말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성령의 활동을 위한 자리와 시간을 내어 드리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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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8-9절)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복음이란 것은 어떤 부분은 흔들리고 어떤 부분은 굳건한 것은 아니다. 만일, 복음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은 아무 은총도 입지 못한다. 반대로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거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그러니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야 누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이 사회에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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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 12)
성령께서는
새로운
삶을 향해
활짝 열려
있으시다.
새로운 시작
새로운
희망에는
언제나
가장 좋으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위하여 간격을
없애주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희노애락에
함께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
삶의 자리에
깊숙히
들어오셔서
자비를 나누시는
가장 좋으신
인격체이시다.
인격체는
인격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사랑으로
드러난다.
참된 관계는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참된 소통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로하시고
일깨우시고
인도하신다.
하느님 사랑에
참여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신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보여주신다.
구체적인
열매를
맺게하시는
분이시다.
단절된 삶을
하느님께로
이어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이다.
생명의
나아갈 방향을
알고 계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
우리의 삶을
내맡긴다.
새로운 사람
온전한 사람이
되게하신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소통으로
밝히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려주신다.
성령의 뜨거운
말씀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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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 내 안의 성령께 모두를 맡기며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2,8-9)
예수께서는 이어 박해를 겪더라도 성령께서 해야 할 말을 알려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춰보면 우리 신앙의 목표는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 정의와 자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도 방향도 오직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요.
제자의 길은 결코 내 힘으로 홀로 수행될 수 없는 어려운 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분의 전 인격에 동화되려는 몸짓 없이 신앙을 고백하거나 실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떠나 주님과 온전히 일치할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도구삼아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는 반드시 고통과 박해가 따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모시고 있기만 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체가 강력한 복음선포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사랑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하여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언제나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예수님과 동화되지 않고 그분을 안다고 증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두려움 없는 신앙고백은 주님과의 일치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오늘 잠시 자신을 돌아보며 과연 나의 시선과 마음의 지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내 영혼의 주파수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방식에 맞춰져 있는지 성찰해봐야겠지요. 자신을 다른 것들로 채우며 만족해 하는 태도를 바꾸어 발걸음을 주님께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겪는 고통과 박해 앞에서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거룩한 여유’를 지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 신앙은 늘 고통과 시련 중에 빛을 발합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그 사람이 참된 주님의 자녀인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성령의 이끄심보다는 ‘더러운 영’의 유혹에 쉽게 휘말려 주님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마저도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한 채 세상 금력과 권력에 굴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오늘도 어떤 어려움 중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을 믿으면서, ‘그분이 원하는 선택과 결단’을 하고 꿋꿋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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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성인의 순교 장면은 정말이지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합니다.
평소 순교에 대한 강한 열망으로 불타오르던 성인이었기에 언제든지 순교할 마음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른 교우들에게도 자상하게 순교 교육을 시키며 그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마지막인 듯 거룩하게 살았습니다.
마침내 올 것이 왔습니다.
한밤중에 포졸들이 들이닥친 것입니다.
결박을 당하면서도, 심한 구타 가운데서도 성인께서는 태연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잘 오셨습니다. 이 먼 곳까지 오시느라 얼마나 수고들이 많으셨습니까? 저희는 오래 전부터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선 조금 쉬십시오. 곧 식사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으니, 요기를 하고 가시지요. 그동안 저희는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성인께서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이게 한 다음, 신자들을 독려했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다 함께 기쁜 얼굴로 질서정연하게 순교의 길을 떠납시다.”
해 뜰 무렵 성인은 포졸들을 깨워 정성껏 준비한 아침식사를 대접했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포졸들에게는 잘 다려진 새 옷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최경환 성인과 40여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은 마치 잔치 집에 가는 듯이, 단체 소풍이라도 가는 듯이
그렇게 순교의 길을 떠났습니다.
관헌으로 끌려가는 동안 사람들은 무든 구경거리라도 난 듯이 신작로로 몰려 나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이비 교도들’ ‘천주학쟁이’라고 욕하며 돌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징그러운 동물이라도 바라보듯이 우리 순교자들을 바라봤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일 앞장서 걷던 최경환 성인께서는 뒤를 돌아보며 이렇게 신자들을 격려했습니다.
“형제들이여, 용기를 냅시다.
이 정도의 여행을 힘겨운 고난으로 여기지 맙시다.
주님의 천사가 황금으로 만든 자를 가지고 우리의 모든 발걸음을 재고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앞장을 서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바리아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생각합시다.”
마침내 최경환 성인께서는 태형 340대, 곤장 110대, 치도곤 50대를 맞고 옥중 순교합니다.
그는 죽어가면서도 휘광이의 칼날에 순교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
끔찍한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고 의연한 순교자들의 모습은
초세기 교회부터 명맥을 유지하며 내려오는 하나의 전통입니다.
위대한 순교자들께서 참혹한 죽음 앞에서도 그리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언제 어디서든, 이승과 하직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강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성령의 현존과 동행에 대한 확신은 자신의 모든 것, 현재와 미래, 자신의 생사조차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에 편안히 내어맡길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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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영적 광견병에 성령까지 모독하는 죄를 짓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령을 주러 오신 분이십니다.
성령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려는 선물입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말은 하느님 사랑의 선물을 악하게 여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으로 악령을 쫓아내실 때 그들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령을 모독하는 말입니다.
선물을 줄 때 선물 안에 담긴 사랑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악하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혹은 이런 것도 예가 될 것입니다.
첫 순교자 스테파노 부제가 하늘이 열려 사람의 아들이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신 것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총으로 보는 환시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귀를 막고 스테파노를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런 두 예를 볼 때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은 정말 용서받지 못할 것 같기는 합니다.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병 중에도 치사율이 100%인 유일한 병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공수병’입니다.
개에게 물려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물을 두려워하게 되어 결국 탈수로 죽게 된다고 합니다.
물이 무슨 죄가 있을까요? 그러나 자기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깁니다.
이것을 ‘피해의식’이라 합니다.
물론 물 안에 독이 들어있을 수도 있고 꿀이 들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물 자체를 두려워하여 마시지 않으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이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이 유다인들에게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절대적인 피해를 보는 것처럼 예수님을 증오합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은 ‘피해의식’입니다.
또는 스테파노 성인이 하늘에서 하느님의 옥좌를 본다고 해서 그들에게 무슨 피해를 주는 것일까요?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죽는 것처럼 귀를 막고 그 말을 하는 사람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벼랑 끝, 상담』이란 책에 나온 피해의식 환자의 한 사례를 간단히 소개해 드립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은 지독히 미워하고 딸만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는 폭행을 당하고
그런 딸을 어머니가 과잉보호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여인은 남성에 대한 불신과 그와 반대로 여성에 대한 극도의 믿음이 커집니다.
아들은 어머니가 자기를 미워한다고 여깁니다.
문제는 이 피해의식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 대상이 모든 남성에게 확대되고 심지어는 아들에게까지 확대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학대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는데, 결국 찾아낸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에요.”
이 말을 들은 남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내가 외도를?’ 그러나 아내는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자신이 학대해야 하는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DNA 검사를 받고 나서야 아들임을 인정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인 아들도 내가 가진 피해의식이 사랑의 선물로 보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또 물건을 살 때도 식은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어렸을 때 사촌 동생과 고모로부터 반지를 훔쳐 갔다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제 돈 주고 사도 나올 때 혹시 훔친 것 아니냐는 모함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런 피해의식은 누가 무엇을 주어도 좋은 의도로 줄 수 없다고 믿게 만듭니다.
돈 주고 사도 불안한데 거저 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엔 이렇게 ‘사랑 자체에 대한 불신’이 생기고 자신에게 오는 모든 사랑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데 결국 그렇게 성령까지도 무시하는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고 여기는 ‘피해의식’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결국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됩니다.
부모님은 인정하지 않아도 부모가 주는 음식까지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죽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은 욕해도 성령은 모독하면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피해의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어렸을 때 받았던 상처에서 옵니다.
어렸을 때 당연히 받아야 하는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면 그것이 피해의식으로 자리 잡습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의 ‘격리 원숭이’ 실험에서 태어나면서부터 어미의 사랑을 받지 못하게 격리하여 키운 원숭이는 세상 모든 존재가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무서운 존재로 여기며 무리에 섞이지 못하게 됩니다.
혼자 자해하고 자위합니다.
억지로 새끼를 낳게 하여 새끼가 자신에게 오더라도 그는 새끼까지도 자신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겨 새끼를 밀쳐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는데 어떻게 사랑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받지 못해 사람까지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피해의식이 있는 사람이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을 그 꼴로 자라고 내버려 둔 하느님을 거부하며 그분이 주시는 모든 사랑까지도, 심지어 성령까지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사랑으로 입은 상처는 사랑으로밖에 치유되지 않습니다.
사랑에 대한 불신은 사랑을 다시 받음으로써 믿음으로 바뀝니다.
주위에서 부모보다 큰 사랑을 보여주는 이가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먼저 자신이 피해의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부족한 사랑을 채우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무엇보다 『하느님이시오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를 읽으며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랑에 가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습니다. 그러다 주님의 크신 사랑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남이 안 해 주면 나라도 해야 합니다.
사랑에 대한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것이 은총으로 보입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 사랑을 믿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렸을 때 심어지고 자라나는 피해의식을 없애고 사랑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대한 지식과 믿음을 증가시키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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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의미는
깨달은 바를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남기보다
지혜로서 삶으로 드러날 때,
알고 있다는 단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며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기에
이미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며
하늘에서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다면
곧,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않거나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지 않으면
그는 이미 예수님과 떨어져 있는 사람이며
영원한 생명과 떨어져 있게 됩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가진 이들은
환난과 시련이 다가오면 흔들립니다.
그러나 삶으로 살아가는 이들은
삶에 기반을 두며 뿌리 깊은 신앙을 살아가기에
어떤 어려움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한때의 느낌이 아니라
삶으로 믿음을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체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들이 가진 희망은 강력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믿고 삶으로 경험하는 가운데
사랑으로 드러나며 믿음이 더욱 굳건해 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삶으로 믿음을 증언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흔들림 없이 더욱 깊은 사랑이 자라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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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016.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로마4,13.16-18)
그것은 성경에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믿는 분, 곧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 모두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17)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너희 후손들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하신 말씀에 따라 "많은 민족의 아버지" 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18)
로마서 4장 17-21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때에 아들을 얻은 것은 하느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동시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결실이기도 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서 로마서 4장 17절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유다인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셨음을 언급하고 있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창세기 17장 5절의 인용이다.
여기서 '내가 ~만들었다'로 번역된 '테테이카'(tetheika)는 '티테미'(tithemi)의 완료시제인데, 여기서 '삼았다', '만들었다', '되게 했다'(have made)는 의미로 쓰였다. 여기서 완료 시제로 쓰였다는 것은 과거의 어떤 결과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상태를 강조한다. 즉 아브라함의 지위가 이미 과거에 확정되었으며, 현재까지 요지부동하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얻게 된 이 약속을 유다인들은 혈통적으로 그와 관련있는 자신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오해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민족'에 해당하는 '폴론 에트논'(pollon ethnon)는 '많은 족속들', '많은 민족들'(many nations)로서 유다인과 이방인의 구분없이 모든 사람들이란 의미이지만,신학적으로는 엄격히 따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 포함된다.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은 '폴론 에트논'에 속하며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되지만(갈라3,7.9), 표면적으로 유다인일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은 사람들은 '폴론 에트논'에서 제외된다.
표면적 유다인들은 그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일지라도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상속과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또한 '내가 ~만들었다'는 뜻의 '테테이카'(tetheika) 동사의 인칭이 1인칭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동작의 주체가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이 믿는 모든 이들의 조상이라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파테라 폴론 에트논'(patera pollon ethnon; a father of many nations)이라는 자리에 앉히셨듯시, 그분께서는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도 역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 자리에 앉히신다.
이 지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얻지 못한다(요한1,12.13; 에페2,8.9).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앞에서' (17)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4장 17절 상반절에서 아브라함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된 것을 밝혔다. 이제 이어지는 후반절에서는 아브라함이 믿은 대상이 바로 부활과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느님이심을 밝힌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나이가 백 세가 되어 자식을 가질 희망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였음에도 죽은 이들을 살리시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부활과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하느님을 믿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런 믿음을 통해 자신의 마음속에 생기는 인간적인 회의의 시험을 이겨냈다.
성경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가르친다(히브11,1).
그것은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가능성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바로 이 믿음이 더할 수 없이 큰 재산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인 하느님을 두 가지 능력의 소유자로 요약하며 밝히고 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시다. '살리시는'으로 번역된 '조오포이운토스'(zoopoiuntos)는 '살리다', '생명을 주다'등의 뜻을 가진 '조오포이에오'(zoopoieo)의 현재분사로,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한계를 초월하여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의 출생을 통하여 하느님의 이러한 능력을 체험하였다(로마4,19).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생명을 맘대로 주관하시기 때문에, 수명을 단축시키거나 연장하시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기도 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 월경이 끊어져 버린 사라의 태를 소생시켜서 이사악을 선물로 주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히브11,12)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신 전능하신 하느님이신 것이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창조하시는 능력을 나타내는 말인데, 창조의 능력이 없는 인간은 이 능력을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생물과 무생물의 생성 및 보존은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에 의한 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서 이러한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을 뿐이다.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면, 아직 보이지 않으며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처지와 상황을 바라볼 때에 그에게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았으나, 창세기 15장 5절에 나오는 대로 하늘의 별 수만큼 셀 수 없이 많아지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희망을 가지게 된다. 믿는 이들의 희망의 근거는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한편, '믿었습니다'로 번역된 '에피스튜센'(episteusen)은 '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로서 믿음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나타낸다.
아브라함이 처한 상황은 늙어 전혀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이었으나 하느님의 약속이 진실하다고 믿었으며, 그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지 그분의 전능성(창세18,14)과 신실성(2티모2,13),그분의 말씀이 지닌 권위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 내 안의 성령께 모두를 맡기며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12,8-9)
예수께서는 이어 박해를 겪더라도 성령께서 해야 할 말을 알려주실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 비춰보면 우리 신앙의 목표는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의 말씀과 생명, 정의와 자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도 방향도 오직 주님을 따르는 것이지요.
제자의 길은 결코 내 힘으로 홀로 수행될 수 없는 어려운 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그분의 전 인격에 동화되려는 몸짓 없이 신앙을 고백하거나 실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떠나 주님과 온전히 일치할 때,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나를 도구삼아 하느님의 일을 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과 더불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데는 반드시 고통과 박해가 따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모시고 있기만 한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자체가 강력한 복음선포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 대한 전적인 믿음과 사랑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과 일치하여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언제나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고, 예수님과 동화되지 않고 그분을 안다고 증언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두려움 없는 신앙고백은 주님과의 일치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오늘 잠시 자신을 돌아보며 과연 나의 시선과 마음의 지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겠습니다. 내 영혼의 주파수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방식에 맞춰져 있는지 성찰해봐야겠지요. 자신을 다른 것들로 채우며 만족해 하는 태도를 바꾸어 발걸음을 주님께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며 겪는 고통과 박해 앞에서도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 자신을 맡기는 ‘거룩한 여유’를 지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 신앙은 늘 고통과 시련 중에 빛을 발합니다. 어려움 가운데서 그 사람이 참된 주님의 자녀인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성령의 이끄심보다는 ‘더러운 영’의 유혹에 쉽게 휘말려 주님을 등지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마저도 자신의 정체성을 망각한 채 세상 금력과 권력에 굴복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오늘도 어떤 어려움 중에도 주님께서 함께 해주심을 믿으면서, ‘그분이 원하는 선택과 결단’을 하고 꿋꿋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도록 힘썼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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