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화와 한의학] 티치아노의 성화와 ‘죽겠네 증후군’
부활 성화 가운데 승리의 깃발을 든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 여럿 있다. 그 가운데 15세기 이탈리아 화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승리의 깃발과 ‘놀리 메 탄게레’
여명의 하늘을 배경으로 오상의 핏자국이 선명한 예수님께서 관 위로 왼발을 딛고 모습을 드러내시는 그림이다. 한 손에는 승리의 깃발을 들고 계신다. 왼쪽 배경에는 앙상한 나무가, 오른쪽 배경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가 그려져 있다. 겨울과 봄, 죽음과 생명의 대비다. 부활 뒤 미래의 희망찬 약속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는 모습을 그린 것도 있다.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이 유명하다. 아마포를 휘날리며 하늘로 오르시는 예수님과 이를 보고 놀라는 두 병사,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줄 모르고 무덤을 찾아오는 세 여인을 삼각 구도로 그린 작품이다. 놀랍도록 감동적이다.부활 성화 가운데 백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신 것을 그린 ‘놀리 메 탄게레’(Noli Me Tangere)란 작품일 것이다. 이것을 주제로 한 작품도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알브레히트 뒤러의 목판화를 살펴본다.
예수님께서 삽을 메시고, 다른 한 손은 마리아의 이마를 향해 뻗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삽을 메고 계신 것을 표현한 이유는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정원지기로 생각하였기(요한 20,15 참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의 손이 마리아의 이마에 닿아 있는데, 마리아의 유골 가운데 예수님께서 손대신 부분만 썩지 않았다는 전승도 있다.
안토니오 다 코레조의 그림에서 예수님께서는 무릎을 꿇은 마리아를 바라보신다. 오른손으로는 그녀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손으로 막으시는 듯하고, 왼손을 들고 검지를 펴시어 하늘을 가리키신다.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요한 20,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린 것이다.‘나를 붙들지 마라.’가 ‘놀리 메 탄게레’이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의 몸이 마리아를 떠나려는 듯 뒤틀려 있다. ‘나를 붙들지 마라.’라는 뜻을 강조한 표현이다.
성스러움과 속됨
-
이제부터 베첼리오 티치아노의 그림을 보기로 하자.
티치아노의 그림은 여느 ‘놀리 메 탄게레’ 작품과 달리 예수님의 몸이 마리아를 향해 있다. 아마포를 망토처럼 목에 두르시고 아랫도리는 기저귀식의 요의(loin-cloth)만 걸치셨다. 정원지기처럼 괭이를 드신 모습에는 젊음이 넘쳐흐르신다.
마리아에게도 흘러넘치는 뭔가가 있다. 그녀는 주름진 풍성한 흰옷에 진붉은 치마를 받쳐 입고 있다. 화가 티치아노가 활약하던 시절 베네치아의 고급 창녀 옷차림이라고 한다. 금발을 늘어뜨리고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을 듯, 기듯이 다가가는 그녀. 화가는 이 마리아 막달레나를 ‘행실이 좋지 못한 여자’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성경에서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루카 8,2), 그녀는 정말 행실이 나쁜 여자였을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러 다니실 때 함께한 여자다. 예수님의 임종과 장례도 지켜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뵙고 하느님을 증언하였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뒤에는 프로방스로 건너가 그곳 동굴에서 30년 동안 참회의 고행을 행했다는 전승도 있다. 이렇게 성스러운 여자였건만 속된 여자로 잘못 알려졌다.
앞에서 보았던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을 다시 보자. 이 그림에는 예수님을 향해 오르막길을 달리는 토끼와 마른 나뭇가지에 앉은 사다새가 그려져 있다. 토끼는 ‘구원에 대한 열망’을, 사다새는 ‘십자가의 피로써 인간을 구원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사다새는 자신의 옆구리를 스스로 쪼아 그 상처에서 나온 피로 죽은 새끼 새를 살린다는 전설이 있다.
다시 티치아노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 뒤로 떡갈나무가 있다. 왼쪽 언덕 위의 집에서 개와 사람이 내려오고, 오른쪽에 양떼가 보인다. 떡갈나무는 ‘강한 신앙심’의 상징이며, 좌우 원경은 각각 속된 세속과 성스러운 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죽겠네 증후군
사람들은 ‘죽겠네.’라는 말을 쉽게 한다. ‘좋아 죽겠네, 화나 죽겠네, 배고파 죽겠네, 슬퍼 죽겠네, 무서워 죽겠네, 놀라 죽겠네….’ 이렇게 죽을 듯이 감정이 북받치어 극도에 이르면 실제로 죽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물고기가 물속에 사는 것처럼 사람은 ‘기’ 속에 산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지 못하듯 사람도 ‘기’가 빠지면 살기 어렵다. 설령 죽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병이 생긴다. 통증도 온다. 때로 목구멍을 뭔가가 막는 것 같은데 뱉으려고 해도 나오지 않고, 삼키려고 해도 넘어가지 않는다. 또 속이 그득하면서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숨이 몹시 차게 되며, 명치 밑과 배에 덩어리가 생겨서 숨이 끊어질 듯 아프기도 하다.
한편, 제 성질에 제가 이기지 못하거나 제가 뀐 방귀에 스스로 놀라 까무러치는 경우도 있다. ‘이를 악문다.’ ‘말도 안 나온다.’ ‘맥이 안 잡힐 만큼 가라앉고, 몸도 싸늘해진다.’와 같은 경우를 ‘기에 적중’된 것이라 하여 ‘중기’라고 한다. 이런 모든 증상을 개인적으로 ‘죽겠네 증후군’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큰 지진이 일어나면서 하늘에서 내려온 주님의 천사가 예수님께서 묻히신 무덤으로 다가가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데,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마태 28,4)라고 한 것도 ‘죽겠네 증후군’에 속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뒤 놀라고 두려워하여 까무러치는 성화 속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성화와 한의학] 마음을 다스리는 법
제우스가 프리기아로 암행에 나선다. 프리기아 하면 미다스 왕이 떠오른다. 미다스 왕은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며 끌려온 늙은 실레노스를 정성껏 돌보아 준다. 실레노스는 누구인가?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자 헤르메스의 아들이다. 물론 판의 아들이라는 등 그와 관련해 여러 설이 있지만 말이다. 디오니소스는 실레노스를 돌보아 준 것이 고맙다며 미다스의 소원을 들어준다. 그가 손을 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게 해 준 것이다.
필레몬과 그의 아내
제우스가 실레노스의 아버지인 헤르메스를 데리고 바로 이곳 프리기아로 떠난다. 인간의 선악을 가늠하고자 정체를 숨기고 암행에 나선 것이다. 그 까닭에 인간이 이들을 알아볼 리 없다. 이들은 걸식도 못하고 문전 박대를 당한다. 이윽고 초라한 오두막에 다다른다.
늙은 농부인 필레몬이 아내 바우키스와 함께 이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엘스하이머의 그림을 보면 노부부가 이들에게 음식을 차려 주는데 참 소박하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면 바우키스가 거위를 요리하려고 거위의 한쪽 날개를 잡고 뒤뚱거린다. 제우스는 이를 말리고 있다. 갸륵한 순간을 담은 그림이다.
노부부를 갸륵하게 여긴 제우스는 말한다. “신을 홀대한 마을 사람들을 벌주려 하는데 너희들은 살려 줄 터이니 이를 피해 얼른 높은 산에 올라가라.”
노부부가 산꼭대기까지 오르자 재앙이 시작된다. 대홍수가 일어난 것이다. 마을은 물에 잠겨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오직 노부부의 오두막만이 범람하는 물 위로 뜨더니 웅장한 신전으로 변한다. 이 신전을 지키며 살던 노부부는 세월이 흘러 어느 날 함께 죽음을 맞는다. 제우스는 노부부를 두 그루 나무로 만든다. 떡갈나무와 보리수다.
롯과 그의 아내
창세기에 보면 세 나그네가 아브라함을 찾아 음식을 대접받은 뒤 죄악의 성읍인 소돔으로 암행에 나선다.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18,21)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돔에 사는 롯은 어떠했을까? 롯은 신분을 감춘 두 천사를 집으로 모시고 정성껏 대접한다. 한데 이들이 아직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읍 사내들이 롯의 집을 에워싸고 음란하게 횡포를 부린다.
두 천사는 “주님께서 소돔을 파멸시키려고 우리를 보내셨소.”라며, 롯에게 가족을 데리고 성읍을 떠나 산으로 달아나라고 한다. 롯은 천사에게 산이 아닌 ‘초아르’라는 근처의 작은 성읍으로 피신하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롯이 초아르에 다다르자 해가 땅 위로 솟아오르고,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 그 성읍의 모든 주민과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 다음날 아브라함이 아침 일찍 가서 보니 마치 가마에서 나는 연기처럼 그 땅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 멸망의 한가운데에서 롯의 가족은 살아남는다. 롯은 완벽하지는 않으나 의롭지 못한 환경에서도 의롭게 살고자 한이다. 그 까닭에 하느님의 베푸심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롯의 아내는 천사의 말을 듣지 않고 뒤를 돌아다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2) 하고 말씀하신다. 하느님의 심판은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이와 똑같을 것이니,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며 남겨 둔 것에 연연하지 말라는 경고이다.
다시 그리스 신화로 돌아와, 손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능력을 가지게 된 미다스 왕은 결국 사랑하는 딸마저도 황금으로 변하는 비극을 불러온다. 롯의 아내와 미다스 왕 모두 재물에 연연하다 죽음과 파멸을 맞이한 것이다. 그러나 없는 재물도 성심껏 대접하여 죽어서도 두 그루의 나무가 된 필레몬 부부의 경우는 경건하고 선량한 인간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 준다.
혜강과 오난
북두칠성이 하늘의 중심이라면 사람의 중심은 마음이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옛적에 신성한 의사들은 사람의 마음을 다스려서 병이 나지 않게 하였다.”라고 강조한다. 마음속에 자리한 의심과 염려, 헛된 잡념, 불평, 자기 욕심을 모조리 없애 버리고, 자신의 생활 방식을 자연의 이치에 부합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공허한 것이고 종일 하는 일이 모두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또한 내 몸이 있다는 것도 다 환상이며 화와 복이 다 없는 것이고 살고 죽는 것이 다 한갓 꿈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동의보감」).
한마디로 마음에 잡념이 없는 허심(虛心)의 경지로, 탐욕이 없음이다. ‘없을 무’(無) 한 글자로 표현되는 경지다. 그래서 「동의보감」은 “본디 아무 것도 ‘없음’이라면 어디에 티끌인들 붙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면서 ‘없음’이 어려운 것, 그래서 ‘허심’의 경지에 이르기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 중국 위나라 죽림칠현의 한 사람이자 철학가인 혜강은 다섯 가지 원인을 들고 있다. 첫째, 명예와 재물이다. 둘째, 기뻐하고 성냄이다. 셋째, 음란과 음욕이다. 넷째, 탐식이다. 다섯째, 정신이 허약하고 정기가 흩어지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를 ‘오난’이라 한다. 이것만 가슴속에서 없앨 수 있다면 “좋은 일을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복이 오고 오래 살 것을 바라지 않아도 자연히 오래 살게 된다. 이것이 양생하는 큰 줄거리이다.” 한데 이처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성화와 한의학] 슬픔이라는 병
마테르 돌로로사
-
슬픔에 잠기신 성모님, 통고의 성모님. 아드님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던 그분의 고통을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마테르 돌로로사’는 슬퍼하시는 성모님의 모습을 말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기신 성모님을 그림으로 남긴 화가가 많다. 눈물을 흘리시는 성모님, 혼절하신 성모님, 일곱 자루 단검에 가슴을 찔려 피를 흘리시는 성모님, 예수님의 시신을 무릎에 안고 계신 성모님, 그리고 십자가 곁에서 애통해 하시는 성모님 등 여러 유형의 그림을 통해 고통의 성모님이 전해져 온다. 그 가운데 십자가 곁에 서서 애통해하시는 성모님을 그린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그림을 보자.
본명이 피에트로 반누치인 페루지노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다. 그는 움브리아의 페루자에서 주로 활약하고 그곳에서 죽었기 때문에 ‘페루지노’라는 별명을 얻었다. 움브리아 화파의 전성기를 이끈 상징적 화가이자 거장으로 추앙을 받기도 한 그는 라파엘로의 스승으로 알려졌으며, 보티첼리와 기를란다요 등과 함께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페루지노의 그림 ‘십자가 아래에 있는 성모와 요한’은 표제 그대로 등장인물이 셋이다. 화면 중앙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화면 오른쪽에는 요한, 화면 왼쪽에는 성모님이 계신다.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앞날을 부탁하기까지 한, 예수님의 애제자로 알려진 요한은 슬픔에 차서 두 손을 모아 쥐고 십자가 위의 예수님을 올려다보고 있다. 성모님은 슬픔과 고통으로 차마 아들을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신 채 두 손을 깍지 끼고 계신다. 성모님의 어두운 옷차림을 통해 고뇌에 찬 그 마음이 전해져 온다. 맨발인 채 서 계신 모습 또한 무척 스산하게 느껴진다.
스타바트 마테르
이른바 ‘성모 애상’이라고 하는 ‘스타바트 마테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슬픔에 찬 성모님께서 서 계셨다.’라는 의미로, 중세부터 내려오는 기도문 가운데 하나이다.
기도문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 단락은 고통 중에 비탄에 잠긴 성모님을 노래한다. ‘비탄에 잠긴 어머니, 어둡고 아픈 마음 칼이 뚫고 지나가네. 그토록 비통해하심을 보고 누가 함께 울지 않으리오.’
두 번째 단락은 ‘사랑의 샘이신 성모님 제 영혼을 어루만지사 당신과 함께 슬퍼하게 하소서.’라며 공감을 부른다.
세 번째 단락은 간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거룩하신 성모님 구세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상처를 제 마음에도 깊이 새겨 주시고, 주님의 심판 날에 저와 함께 계시어 제가 불꽃 속에 타 죽게 하지 마옵소서.’
이런 내용에 곡을 붙인 음악이 있다. 페르골레시, 비발디, 하이든, 로시니, 드보르자크 등 여러 거장이 비통하고 애절한 어머니의 심정을 담아 각자 독특하고 개성적인 방식으로 이를 작곡하였다.
페르골레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이던 여인이 수녀원에 들어간 뒤 곧 세상을 떠나자, 그 애절함을 담아 스타바트 마테르를 작곡하였다. 그런데 페르골레시 또한 곡을 남기고 얼마 안 되어 죽었다는 슬픈 사연이 전해진다.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카롤 시마노프스키는 라틴어로 된 이 기도문을 2년 동안 폴란드어로 번역한 뒤 곡을 붙여 바르샤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첫 공연을 가졌다. 그는 자신의 장례식에서도 이 곡이 연주되게 하였다고 한다.
병이 되는 슬픔
사람에게는 일곱 가지 감정이 있다. 기뻐하는 것, 성내는 것, 생각하는 것, 근심하는 것, 놀라는 것, 무서워하는 것, 그리고 슬퍼하는 것이다. 슬픔은 기쁨보다 훨씬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그만큼 사람은 슬픔에 더 민감하다는 뜻이다.
또한 슬픔은 그만큼 사람들 사이에서 공감을 받기 쉬운 감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감정도 마찬가지이지만, 슬픔도 지나치면 장기의 기능을 손상시키고 여러 가지 병을 일으킨다.
한의학에서 슬픔은 간장과 관련된 감정으로 본다. 「동의보감」은 “폐(肺)에 지(志)가 있어서 슬픔이 생긴다. 또한 심이 허하면 슬퍼하게 되고 슬퍼하면 근심하게 된다. 또한 정기가 폐에 와서 어울리면 슬퍼하고 간이 허한데 폐기가 어울려도 슬퍼한다. 또한 슬퍼하면 기도 소모된다.”라고 하였다.
기가 소모되면 탈력이 심해지고 의욕이 떨어지며 운동 능력도 저하된다. 슬픔이 지나쳐 마음이 동요하면 정신도 상한다. 정신이 상하면 미치고 잘 잊어버리며 세밀해지지 못하게 되는데, 세밀하지 못하면 바로잡지도 못한다. 그런 사람은 음낭이 줄어들고 힘줄이 당기며 갈빗대를 잘 놀릴 수 없고 머리털이 까슬까슬하며 얼굴빛이 나빠진다고 하였다.
몹시 슬퍼하여 심포락(心包絡)을 상하면 잊어버리기를 잘하고 사람을 잘 알아보지 못하며 두었던 물건도 잘 찾지 못한다. 그리고 힘줄이 당기며 팔다리가 붓기도 한다. 때로는 실망감, 좌절감으로 우울증에 빠진다. 경우에 따라서 조울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슬픔이 밖으로 퍼지면 증오와 분노로 표출되고, 슬픔이 안으로 쌓이면서 삭혀지지 않으면 이른바 ‘화병’이 생긴다.
그러나 슬픔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는 말자. 슬픔은 가장 인간적인 감정이다. 슬픔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도 공감할 수 있으며, 타인을 사랑하고 위로할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곁에서 슬픔을 이겨 내지 못하신 성모님께서는 인간이 겪는 그 어떤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을 겪으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 성모님을 통해 우리를 슬픔에서 건져 주시고 우리가 죽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빌어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다.
성모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몸소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성화와 한의학] 환각
“카이사리아에 코르넬리우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탈리아 부대라고 불리는 군대의 백인대장이었다”(사도 10,1). 그가 이끄는 군대는 이탈리아 출신의 로마 시민권을 가진 병력으로 구성되어 ‘이탈리아 부대’로 불렸으니 위세가 당당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군대의 백부장은 의외로 선량한 사람이었나 보다. 사도행전에서는 코르넬리우스를 ‘신심이 깊은 그는 온 집안과 함께 하느님을 경외하며, 유다 백성에게 많은 자선을 베풀고 늘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10,2 참조)라 말하고 있다. 주둔군 장교였지만 식민지 유다인들의 존경도 받던 그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를 만난다.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의 만남
-이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어느 날 하느님의 천사가 코르넬리우스의 환시 중에 나타나 말하였다. “너의 기도와 너의 자선이 하느님 앞으로 올라가 좋게 기억되고 있다. 이제 야포로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데려오게 하여라”(4-5절). 하느님의 계획이기에 반갑지 않은 만남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의 만남을 베르나르도 카발리노의 그림 ‘성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 백인대장’으로 만나 보자. 카발리노는 나폴리의 거장 카라바조의 직계인 바로크 화파에 속하는 화가이다.
그림에는 많은 인물이 그려져 있다. 야포에서 베드로와 함께하던 형제와 할례받은 신자들, 코르넬리우스의 친척과 친구들이다. 그림의 중앙에는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가 그려져 있는데, 놀랍게도 코르넬리우스가 베드로의 발 앞에 몸을 숙여 절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런 그를 일으키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입니다.”(26절)하고 말한다. 코르넬리우스는 베드로를 예수님께 대하듯 극진히 예우한다. 상대를 마음으로 따르며 맞아들이는 만남이다.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의 환시
코르넬리우스가 “주님께서 선생님께 지시하신 모든 말씀”(33절)을 듣고 싶다고 청하자 베드로는 이렇게 설교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하느님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35절). 그러고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일러 준다.
이때 성령께서 말씀을 듣는 모든 이에게 내리셨다. 다른 민족들에게도 성령의 선물이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란다. 베드로는 코르넬리우스를 비롯해 성령을 받은 모든 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지시하였다(48절 참조).
그런데 베드로는 어째서 생면부지의 코르넬리우스를 만나러 간 것일까? 베드로도 코르넬리우스와 마찬가지로 그즈음 환시를 보았기 때문이다.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들어 있는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광경이었다(11-12절 참조).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15절)는 소리도 들려왔다.
이 환시가 무슨 뜻일까 하며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베드로는 코르넬리우스를 만난 뒤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는다. 이방인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거룩한 자손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이로써 첫 이방인 세례자가 나왔다. 하느님의 계약이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서 이방인들과도 새롭게 이뤄지는 순간이다.
코르넬리우스는 이방인으로서 첫 번째로 세례받은 신자가 되었다. 전승에 따르면 뒷날 그는 카이사리아의 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터키의 북서쪽 지역인 스켑시스라는 도시로 선교하러 갔다가 그곳의 주교가 되었다고도 한다. 여하간 그는 환시 중에 본 천사의 말에 따라 베드로를 만나 더 거룩하게 변모한 것이다.
환각의 세계
놀랍게도 베드로와 코르넬리우스 모두 환시를 겪었고, 이 환시를 통해 서로 만났다. 이는 모두 하느님의 뜻이다. 프란치스코, 브루노 성인과 잔 다르크 성녀가 본 환시도 여기에 속할 것이다.
환시나 환청, 나아가 실체적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데도 지각하는 냄새, 맛, 감각 등을 포괄하여 환각이라고 한다. 환각의 세계는 넓고 다양하다. 증상에 따라 원인도 다양하지만, 일상 중에 환각을 겪는 대다수 원인은 조현병을 비롯한 정신 질환일 수 있다. 특히 환각제나 알코올 중독과 같은 중독성 정신증일 때가 많다. 독한 양주인 압생트의 애주가였던 빈센트 반 고흐가 여기에 속한다.
알코올 의존증은 우울증과 불안증, 운동 마비, 보행 곤란, 의식 혼미 등과 같은 증상이 수반되는 환각을 일으킨다. 「동의보감」은 술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술은 오곡의 진액이고 쌀누룩의 정화인데, 비록 사람을 이롭게 하지만 상하게도 한다. 왜냐하면 술은 몹시 열하고 몹시 독하기 때문이다. 몹시 추울 때 바닷물은 얼어도 오직 술만은 얼지 않는 것은 열 때문이다. 술을 마시면 정신이 쉽게 흐려지는 것은 그것이 독하기 때문이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면 그 독기가 심장을 침범하고 장이 뚫리고 옆구리가 상하고 정신이 착란하며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생명을 잃게 된다.”
그러니 잠언 말씀의 충고도 잊지 말자. “빛깔이 좋다고 술을 들여다보지 마라. … 결국은 뱀처럼 물고 살무사처럼 독을 쏜다. 네 눈은 이상한 것들을 보게 되고, 네 마음은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게 된다”(23,31-33). 술 때문에 환시나 환청이 올 수 있다는 말이다.
술은 ‘백약지장’, 곧 ‘온갖 뛰어난 약 가운데서 으뜸’이라는 뜻도 있지만, 절제해야 마땅하다.
[성화와 한의학] 보이지 않는 기와 지압
‘의심하는 토마스’를 주제로 한 그림이 많다. 그림을 보기 전에 토마스가 누구인지부터 살펴보자.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토마스는 겐네사렛 호수의 어부 출신으로, 요한 복음에서는 그를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11,16. 20,24. 21,2)라고 일컫는다. 그를 달리 부르는 이름이 ‘디디무스’(Didymus)인데, 이 말이 쌍둥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이를 직접 확인한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찾아오셨을 때 대화를 나누었고(20,27-29 참조),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신 예수님께서 직접 주신 빵과 고기도 먹었던 토마스는(21,1-13 참조) 곳곳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함께한 증인으로 언급되고 있다.
토마스의 상징물은 성모님의 허리띠이다. 성모님께서 승천하신 뒤 그에게 발현하시어 생전에 두르시던 허리띠를 그에게 주셨다고 하는데, 그리스 아토스산의 바토페디 수도원에서 보관하고 있는 허리띠가 바로 이 유물이라고 한다.
초상화 속의 그는 창이나 칼을 들고 있거나, 곱자를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는 왜 창이나 칼을 들고 있을까? 성령 강림 이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전교에 나선 그는 고대 이란의 왕국이었던 파르티아를 거쳐 인도에서 전교하다가 창과 칼에 난자를 당해 순교했다는 전승이 있기 때문이다. 루벤스의 그림에는 인도의 이교 광신도들이 창칼과 돌멩이를 들어 그를 쳐 죽이려는 장면이 있다.
한편 그는 왜 곱자를 들고 있을까? 곱자는 나무나 쇠를 이용하여 ‘ㄱ’ 자 모양으로 만든 자이다. 먹통과 함께 목공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인데, 인도 군다포러스 왕의 궁전을 지을 당시 토마스가 이 일에 목수로 참여했다는 전승이 있다.
토마스의 의심과 믿음
-
‘의심하는 토마스’를 주제로 한 그림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토마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담고 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20,27).
벨기에 플랑드르의 화가 마르텐 데 보스의 ‘성 토마스의 의심’이라는 작품을 감상하기로 한다. 보스의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둡다. 어둠 속에서 예수님의 벗은 상체가 강하게 빛난다. 그래서 그림의 어두움을 인식하지 못한 채 밝은 곳을 따라 우리 시선은 예수님의 상처, 그 신성한곳으로 집중된다.
옷을 보자. 예수님의 붉은 옷이 수난의 상징이라면 토마스의 짙은 녹색 옷은 희망을 상징한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사선으로 두 제자의 붉은 옷은 예수님을, 토마스 곁에 서 있는 제자의 노란 옷은 토마스를 돋보이게 하면서 긴장과 두려움의 순간을 평온한 분위기로 반전시키고 있다.
손을 보자. 제자들은 상처를 가리키기도 하고, 어쩐 일이냐는 듯 놀란 손짓이다. 성모님께서는 두 손을 모으시고, 예수님께서는 한 손을 펼쳐 못에 찔린 상처를 보이시면서 다른 손으로는 토마스의 팔을 잡아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를 확인시켜 주신다. 토마스는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로 그 상처를 만지면서 다른 손으로 놀랍고 두렵다는 손짓을 하고 있다.
렘브란트가 두 팔을 벌리고 허리를 뒤로 젖히며 뒷걸음치는 놀란 모습의 토마스를 그렸다면, 보스의 그림 속 토마스는 손짓으로 그 놀라움을 나타낸다. 더구나 토마스는 처음부터 무릎을 꿇고 있다. 불신하면서도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서려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 순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0,28)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할 수 있었겠는가!
예수님 못 자국과 지압
보스의 그림에는 성모님과 열한 명의 제자가 예수님을 빙 둘러싸고 있다. 한데 제자들의 시선이 제각각이다. 두리번거리며 서로를 보거나 아예 엉뚱한 곳을 보며 두려워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비로소 확신하며 놀랐기 때문이다. 보고서야 비로소 믿음이 생긴 순간을 이처럼 두려움과 놀라움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 몸에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면서 작용하는 것이 있다. 바로 ‘기’(氣)라는 것이다. 기는 끊임없이 흐른다. 기가 흐르는 통로를 경락이라 한다. 이 통로에서 생체 반응이 가장 강하게 일어나는 특정 부위가 경혈이다. 이 경혈에 자극을 주어 기의 불균형을 조화시키는 치료법이 침 또는 지압이다.
경혈 가운데 ‘노궁’(勞宮)과 ‘용천’(湧泉)이라는 경혈은 가정에서도 할 수 있는 유효한 지압 경혈이다. 노궁은 예수님의 손에 난 못 자국 부위와 거의 비슷하게 둘째와 셋째 손가락이 손바닥에 닿는 사이에 있다. 육체적 피로와 노심초사한 정신적 피로를 치료해 준다고 하여 ‘노궁’이다. 입안이 헐고, 잘 놀라며, 가슴이 조여 오고, 소화가 잘 안 될 때 지압하면 좋다.
용천은 예수님의 발에 난 못 자국 부위와 거의 비슷하게 발바닥 앞쪽 ‘인’(人)자 주름의 오목한 곳에 있다. 물이 솟아나는 샘과 같고, 문란해진 체내 수분 대사를 치료해 준다고 하여 ‘용천’이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면서 아프고, 마른기침이 나며, 어깨나 등이 굳고 아플 때 치료하는 곳으로 좋다.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는 예수님 옆구리의 상처를 ‘커대버’(cadaver, 시신)의 상처처럼 극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죽음과 부활을 현시적 차원에서 묘사했다. 그 반면 보스는 이 상처를 영광의 상처로 표현함으로써 부활을 영생 차원에서 묘사하였다.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고 하신 말씀을 커대버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기’도 마찬가지다.
[성화와 한의학] 얼굴 보고 건강 알기
-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29).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기도하시고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순간을 그린 성화가 많다. 그 가운데 조반니 벨리니의 작품 ‘그리스도의 변모’를 보자.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
그림의 장소는 산 정상이다. 어떤 산일까? 성경에선 “높은 산”(마태 17,1)이라 말한다.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 있는 ‘타보르 산’으로 추측한다. ‘타보르’(Tabor)는 히브리어로 ‘높은’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림 속의 산은 작은 마을의 동산 같다. 멀리 다른 산들마저 다 고만고만하게 그려져 있다. 변모하신 장소치고는 웅장하지 않지만, 이를 통해 예수님의 변모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는 듯 정겹고 부드럽게 다가온다.
때는 이른 아침이다. 하늘은 벌써 밝아 구름이 다양한 색조로 빛나고, 온 마을이 이미 깨어 있다. 농부가 소를 몰며 일하러 가고, 동네 어귀에서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눈다. 변모하신 상황치고는 ‘신성’의 장엄함이 없이 평범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이 더욱 살갑고 정겹게 안겨 온다.
그림의 중심에 예수님께서 계신다. 황금빛 후광이 빛을 발하고, 거룩하게 변모하신 모습으로 서 계신다. 바로 천상의 ‘본성’을 드러내신 순간이다.
예수님 왼쪽에 모세가, 오른쪽에 엘리야가 서 있다. 모두 경이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자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이와 같은 모습으로 계시리라는, 그 평범한 위로가 우리 안에 정겹고 부드럽게 녹아든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림 아래쪽에는 세 제자의 모습이 담겨 있다. 왼쪽부터 살펴보자. 야고보는 바위 절벽 아래로 금방이라도 내뺄 듯 엉거주춤한 자세다. 베드로는 무릎을 꿇은 채 하늘을 바라보며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 요한은 아예 엉덩방아를 찧고 땅에 주저앉아 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실 때 데리고 가신 제자들이다. 장차 큰일을 감당해야 할, 특별히 은총을 받은 이들이다. 그런데 깨어 기도하지 못하고 잠에 빠진 이들은 이른 아침에서야 깨어나 광채에 휩싸인 주님을 보고 그만 압도당한 채 겁에 질려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잠시 그림 밖으로 나와 성경을 보자.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 모세, 엘리야와 함께 이 영광의 황홀한 빛 속에서 같이 살자고 한다. 변모하신 예수님께서 모세,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루카 9,31)라는 말씀을 나누시고 난 바로 뒤에 말이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구름이 홀연히 일더니 제자들을 덮쳤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하는 소리가 울려온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신성을 증명하시는 말씀이다.
이로써 이들은 아들의 길에 함께하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아들의 길은 어떤 길인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의 길이다. 고난과 환란과 핍박의 길, 죽음을 향한 길, 십자가의 길이다. 이 길을 함께 하라는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제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보자. 조반니 벨리니는 이 그림에서 예수님의 좌우로 나무 두 그루를 그려 넣으며, 오른쪽은 풍성하게, 왼쪽은 시들어 마르게 표현했다. 우리가 이 부르심대로 이 길에 함께한다면 풍성한 평화를 누리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삶 자체가 시들고 말라 버릴 것이라는 상징적 묘사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기막힌 구성인가! 예수님과 함께 모세, 엘리야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모습을 그린 라파엘로의 그림이 유명하지만, 필자가 조반니 벨리니의 이 그림을 더 좋아하는 이유다.
색과 택과 신
예수님께서 변모하시는 순간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마태 17,2)눈부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평범한 우리도 얼굴에 광채를 띨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한의학에서는 겉으로 나타나는 색채, 그 색의 광채, 그리고 겉으로 나타난 정신 상태를 의미하는 ‘색’(色), ‘택’(澤), ‘신’(神)을 관찰하여 건강 여부를 가늠한다.
색도 관찰하고, 그 색이 밝고 윤택하여 광채가 나는지, 어둡고 메말라 광채를 잃었는지를 살펴본다. 또 신성한 빛이 보이는지, 기혈이 성하거나 쇠하지는 않은지, 또는 앓고 있는 질병의 경중과, 그 질병이 나은 뒤의 경과가 어떠한지도 알아낸다.
병이 깊은데도 신성한 빛이 보이는 것은 ‘신기’가 있는 것이므로 예후가 양호하겠지만 가벼운 병인데도 신성의 빛이 좋지 않으면 신기를 이미 잃은 것이므로 예후가 불량하다. 색은 좋은데 광채가 없거나 신기가 없으면 죽고, 색은 없어도 신기가 있어 은은히 비추고 있으면 산다.
그러나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나는 것은 좋지만, 눈동자 위쪽에서 안광이 쏘는 듯 내비치는 것은 정신 신경계에 이상이 있다는 징조다.
눈이 크고 안광이 쏘는 듯하면 체액 대사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오는 질환이나, 하반신 질환에 약하다는 징조다. 갑상선 기능 항진 때도 눈빛이 유난히 밝게 광채가 난다. 이처럼 모든 지나친 것은 좋지 않다.
예수님께서 간절히 기도하시던 도중에 변모하셨듯이 진심으로 기도할 때나 진정으로 사랑할 때, 진지하게 소통할 때, 지나치지 않고 절제하며 살아갈 때 우리 얼굴도 기쁨과 행복, 평화의 얼굴로 변모할 것이다. 생명력 넘치는 색과 택과 신기로 빛날 것이다.
[성화와 한의학] 기(氣) 체조
먼저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요한 세례자의 죽음을 간추려 보자.
헤로데 생일 잔칫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춘다. 흐뭇해진 헤로데는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6,23) 주겠다며 굳게 맹세한다. 살로메는 자기 어머니 뜻에 따라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6,25) 하고 청한다. 헤로데가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살로메에게 주자, 살로메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준다.
살로메와 요한 세례자
-
이 내용을 주제로 한 그림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으로 다음 두 작품을 꼽고 싶다.
먼저, 프랑스 화가 귀스타브 모로의 ‘환영: 살로메의 춤’이란 그림이다. 눈부신 후광으로 감싸인 요한의 잘린 목이 바닥이 흥건해지도록 많은 피를 흘리며 공중에 떠 있다. 살로메가 팔을 뻗어 이를 가리키면서 춤춘다. 몽환적이며 이국적인 신비로움에 빠져들게 하는 그림이다.
두 번째 그림은 독일 화가 로비스 코린트의 ‘살로메’다. 화면에 여러 사람이 있다. 피 묻은 칼을 든 사내, 머리 잘린 시체의 두 다리를 쥐고 있는 사내, 공작의 날개로 보이는 부채를 든 무표정한 얼굴의 시녀, 그 오른편에 야릇한 미소를 짓는 한 사람, 그리고 무릎 꿇고 요한의 머리가 담긴 검푸른 쟁반을 두 손으로 머리에 인 사내가 보인다.
이들 한가운데에 살로메가 있다. 머리에는 꽃 장식을, 이마에는 구슬띠를 하고, 드러낸 유방 위로 진주 목걸이가 늘어져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살로메는 반지를 잔뜩 낀 손을 펼쳐 엄지와 검지로 쟁반 위 얼굴의 눈꺼풀을 젖혀 요한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화려하면서도 괴기하고, 요염하면서도 냉혹함이 함께 서린, 전율이 이는 그림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마리아 유잉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오페라 ‘살로메’에는 잘 알려진 몇 개의 아리아가 있다. 성경과는 달리 이 오페라에서는 살로메가 요하난(요한 세례자)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 사랑을 요하난이 받아 주지 않자 살로메는 안타까워한다. 그녀의 심정을 슈트라우스는 아리아 ‘저는 당신의 육체를 사랑하게 되었어요’에 담았다.
요하난! 당신 몸이 탐나
요하난! 당신 몸은 마치
꺾이지 않은 순수한 백합같이 하얘
…당신 몸을 만져 보게 해 줘!
잘 알려진 또 다른 아리아는 목이 잘린 요한의 머리를 안고 그 입술에 키스하면서 부르는 “아, 당신은 내게 키스해 주지 않았지요!”이다.
아! 넌 네 입술에 키스를 못하게 했지
요하난! 난 이제 키스할 거야!
과일을 깨물 듯이 네 입술을 깨물어 주지
그래, 난 이제 키스할 거야
당신 입술에 말이야, 요하난
살로메의 이런 괴기함이 전율을 자아내는 가운데, 달빛은 무대 위를 교교히 비추고 음악은 불협화음으로 치닫는다. 헤로데의 명령을 받은 경비병들이 내리치는 방패의 쿵쾅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살로메가 그들의 방패에 맞아 죽으면서 오페라의 막이 내린다.
이 오페라에서 인상적인 것 세 가지를 꼽으면 첫째, 살로메가 요한에게 키스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피 맛인가? 아니야! 아마 사랑의 맛일 거야. 다들 사랑은 가슴 아픈 맛을 지녔다고 하잖아.” 두 번째는 살로메가 노래하는 “사랑의 비밀은 죽음의 비밀보다도 신비하잖아.”이다. 세 번째는 오보에의 관능적인 선율에 맞춰 추는 살로메의 ‘일곱 베일의 춤’이다.
특히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배역을 모두 소화해내는 천재적 성악가 마리아 유잉이 이 오페라에서 일곱 베일을 하나씩 벗다가 마침내 알몸으로 열연한 장면은 충격을 줄 만큼 인상적이다.
일곱 가지 기의 계율
오페라 살로메의 주요 부분을 ‘일곱 베일의 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한의학의 주요 부분은 ‘일곱 기의 계율’이라 할 수 있다. 그만큼 한의학은 기의 순환과 기의 보강에 중점을 두고 있다.
「동의보감」에서 “사람이 기 속에서 사는 것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과 같다. 물이 흐리면 물고기가 여위고, 기가 흐리면 사람이 병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곱 계율을 지켜야 한다. “말을 적게 하면서 속에 있는 기운을 보양할 것, 성생활을 조절하면서 정기(精氣)를 보양할 것, 기름기 없는 음식을 먹어 혈기(血氣)를 보양할 것, 침을 삼켜서 오장(五臟)의 기운을 보양할 것, 성을 내지 않고 간기(肝氣)를 보양할 것, 맛있는 음식으로 위기(胃氣)를 보양할 것, 사색과 걱정을 적게 하여 심기(心氣)를 보양할 것” 등이다.
의학 서적뿐 아니라 장자나 퇴계 이황도 기의 원활한 순환을 위한 기 체조를 다양하게 기록한 바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쉬운 방법 하나를 소개한다.
“무릎을 꿇고 앉아 심기를 안정시킨 뒤, 기가 하부의 발에 이르게 한 뒤 마음속으로 기가 마치 물이 흐르는 듯이 전신의 각 부위로 퍼지게 한 다음에 천천히 몸을 펴고 손을 펴서 양쪽 옆구리에 가까이 놓고, 마치 손바닥에서 끊임없이 기가 출입하는 것처럼 한다.”
독일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는 목 잘린 요한이 눈을 미처 감지 못한 채 입을 반쯤 벌린 그림을 그렸다. 기가 죽어 없어진 ‘커대버’(Cadaver, 시신) 같은 그림이다. 하지만 영국의 삽화가 오브리 비어즐리는 잘려 나간 요한의 목에서 떨어져 바닥에 고인 핏방울을 피어오르는 수선화의 모습으로 그렸다. 성인은 죽었어도 기가 살아 곧 다가올 우주의 큰 뜻을 예언하는 듯하다.
피 흘려 주님을 드높이며 증언했던 요한 세례자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끝없이 찬미하며 외칠 수 있도록 기를 잃지 말아야겠다.
[성화와 한의학] 달팽이 효능
“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마태 2,19-22).
헤로데와 아기 예수님의 수난
이 헤로데는 누구인가? 베들레헴과 그 근방의 두 살 아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여가며 아기 예수님의 목숨을 노렸던 자다. 열 명의 아내와 열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왕권을 사수하려고 자식은 물론 친척과 처가를 거의 몰살하다시피 살육한 자이기도 하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이 악티움에서 옥타비아누스와 해전을 벌일 때 연합군 편에 붙어 군대를 파견했으나, 막상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해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되자 돌변하여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다.
‘헤로데 대왕’이라고도 불렸던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오늘날 간암이나 매독으로 보이는 증세가 온몸에 퍼지자 칼리로의 온천으로 가 치료했다는 말도 있고, 동맥 경화증을 앓았다고도 한다. 어찌했건 헤로데는 반란을 일으킨 장남을 처형한 지 닷새 뒤, 예리코 궁전에서 죽었다.
헤로데의 장례는 그의 후계자 아르켈라오스를 통해 장엄하게 치러졌다. 헤로데의 시신은 왕가에서 입는 자주색 천으로 감싸고, 머리에는 왕관을 씌웠으며, 손에는 왕홀이 쥐어졌다. ‘그의 친지들과 무공 훈장을 받은 의장대가 왕조의 무덤이 있는 베들레헴 남쪽 헤로디움까지 동행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헤로데와 예수님의 수난
-
벨기에의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의 ‘그리스도를 모욕함’을 다루기에 앞서 마태오 복음을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고 끌려가시기 전 총독 관저에서 모욕당하시는 장면이다.
“그분의 옷을 벗기고 진홍색 외투를 입혔다. 그리고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분 머리에 씌우고 오른손에 갈대를 들리고서는,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들의 임금님, 만세!’ 하며 조롱하였다”(27,28-29).
그림에는 흉기를 든 자들과 가시관을 씌우려는 자, 갈대를 쥐여 주려는 자 등 간악한 인간들이 꽉 차 있다. 그들과 함께 개마저 예수님을 물어뜯을 듯이 으르렁댄다. 왼쪽 뒤로 예수님의 처참한 모습을 보려는 이들의 호기심에 가득 찬 눈이 쇠 창틀에 매달려 있다.
예수님께서는 유혈이 낭자한 얼굴을 모로 늘어뜨리신 채 말없이 밧줄에 묶인 두 손을 반쯤 벗겨진 옷 위에 얹고 계시다.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끌고 갈 모양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은 자색 옷이 아니라 푸른색 옷이다.
예수님께서는 총독 관저에서만 조롱을 당하셨던 것은 아니었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루카 23,11).
여기에 나오는 헤로데는 앞에서 말한 이가 아닌 또 다른 헤로데이다. 헤로데 대왕은 아들 아르켈라오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그리고 또 다른 아들 필리포스에게는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를, 안티파스에게는 갈릴래아를 주었다(루카 3,1 참조).
그들 가운데 안티파스는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여 그녀의 딸 살로메의 간청으로 요한 세례자를 처형한 자다. 곧 예수님을 재판하고 조롱한 뒤 빌라도에게 넘긴 헤로데가 바로 이 안티파스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리켜 “그 여우”(루카 13,32)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자색 옷과 달팽이
총독 관저에서 조롱당하실 때 예수님께 입혀진 옷의 색깔을 마태오 복음사가는 “진홍색”(27,28), 마르코와 요한 복음사가는 “자주색”(마르 15,17; 요한 19,2)이라 하였다. 그 당시 자주색은 왕가를 상징하는 색이며, 이른바 ‘자주색 혈통’만이 입을 수 있는 색이었다. 또한 가장 값비싼 염료이기도 하다.
자색 염료의 대표 산지는 ‘페니키아’이다. 이 지명은 ‘자주색’이라는 의미의 헬라어 ‘포이니케’에서 유래하였다. 페니키아에서 ‘순수한 자주색’으로도 불린 이 색은 햇빛에 노출되면 하늘빛 자주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자색 염료의 또 다른 대표 산지로 ‘티아티라’도 유명하다.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사도 16,14)의 이야기가 「성경」에 나올 정도다.
가장 높은 등급의 자색 염료로는 뿔고둥과 달팽이가 많이 쓰인다고 한다. 달팽이 가운데 붉은색을 띤 달팽이가 있는가 하면, 껍데기는 물론 살마저 고동색을 띤 달팽이도 있다. 이런 것들이 자색 염료의 원료로 쓰였다.
로마 시대 때도 귀족들의 별미였던 달팽이 요리는 중세 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요리법을 선보이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에도 ‘카라콜레스’, ‘에스카르고’ 달팽이 요리는 고급 요리로 평가된다.
달팽이는 약용으로도 쓰인다. 아이를 낳은 뒤 모유가 부족할 때 좋다. 활력을 강화하며 어린이의 발육을 돕는다. 혈당을 떨어뜨리고 소변을 시원하게 보게 해준다. 그래서 허약증을 겪는 중년이나 성장이 더딘 어린이, 또는 당뇨병 환자나 간과 신장, 비뇨기 기능이 약한 사람이 달팽이를 자주 먹으면 좋다.
헤로데와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보자.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마르 8,15)라는 「성경」 말씀처럼 헤로데의 자주색 천과 왕관, 왕홀은 온통 허세의 누룩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자주색 옷은 참사랑의 빛이며, 가시관은 생명의 화관이다. 손의 갈대는 영원한 진리의 길로 이끄는 이정표이기에 온통 하늘나라의 누룩이다.
예수님의 수난은 우리 안에 좋은 누룩이 발효되게 해 주시는 사랑이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