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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6국 여행기
★ 일 정 : 08' 8/15(金)~8/23(土) ★ 항공편 : 대한항공(KE905/KE916)
★ 여행지 (이동경로) : 독일 (푸랑크푸르트/뮌헨)
체코 (프라하/체스키프롬로프)
폴란드 (아우슈비츠/비엘리츠카)
슬로바키아 (타트라)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 (비엔나/짤츠부르크/짤츠감마굿)
★ 여행사 (여행매니아 : 인솔자 : 박성미)
★ 인원: 26명 (男11 /女15)
★ 이동거리 : 비행기 왕복(8,800Km)+버스 주행거리(4,500Km)+도보(80,790步=55Km)-->13,355Km
[여행기 작성에 앞서]
여행은 누구든지 언제나 즐겁고 마음이 풍요로운 것. 그러나 이번만은 좀 경우가 다르다.목하 세계각국
경제가 어렵고 침체되어 불황 인데다가 우리나라는 97년 환란을 겪을때보다 더 심한 상황이라고 하지
않는가? 물가고에 소비위축,모든 분야에서 고통이 따르고 있는 이런 시점에 허리띠를 졸라 매기는커녕
비용이 많이 드는 유럽여행은 정서상으로 내겐 맞지 않았다. 출발 약 1개월도 훨씬 전 아내는 신문을
받는족족 여행사 광고란을 들춰보곤 하여 이미 낌새를 알아 차렸다. 그러던 어느날 광고면에 동유럽을
형광펜으로 표시하여 당장 여행사를 정하고 예약을 하자는것. 순간 내 맘의 半은 가까운 동남아도 아니
고 먼 유럽은 말이 안되는데 .... 더구나 지난 3월에도 중국엘 다녀왔는데 내년으로 미루면 안되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으며 또 다른 半은 그래 나이 한 살이라도 더 먹기 전에 아직 두 다리 성할때 가자는 것도
일리는 있다고 이해는 했다. 만일 No 할시 우리 가정의 평화가 우선 이기에 아내의 비위를 맞추기로 작
심,여행사 이곳저곳 일정에 따른 가격 등을 비교해 결국 여행매니아로 정했다. 당초 예약 했던것은 확정
상품 이었으나 최소 출발인원 20명 모객이 제대로 안돼 두번이나 출발일정이 변경 되었다. 워낙 살기조
차 힘든 판국이라 그런지 예약한 인원 중 취소한 사람이 많아 끝내 타 여행사(자유투어)인원과 연합으로
추진케 되어 단독상품이 아닌 공동추진의 여행매니아 13명,자유투어 13명으로 26명이 구성케 된것이다.
● 1일차 (8/15) : (金)
비행기 출발 시각이 13시 15분 이므로 인천공항 집결시각은 10시로 되어있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극성
으로 일찍 서둘러 9시 20분경 공항에 도착, 3층 A카운터 한켠에 앉아 여행배니아 직원이 나오길 기다렸
다. 10시가 조금 지나자 인솔자가 나타나 그룹인원을 점검하고 간단한 자기소개와 더불어 여권,지갑 등
소지품에 대한 주의를 당부 하더니 이어서 짐을 부치도록 안내 하였다. 다른때와는 달리 출국장 분위기가
좀 한산한 듯 했다. 그전에 보면 출국 하려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뤘었는데 경제적 어려움을 반증이라도
하는것인가? 아까 집을 떠나 이곳에 도착 했을때만 해도 멀쩡했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하늘이 흐려져
소나기가 줄기차게 퍼 붓는다. 시간이 되자 비행기는 雨中출발,기내 좌석에 앉아 앞뒤를 살펴보니 여기저
기 빈 자리가 눈에 띄었다. 옆에 앉아있던 아내가 장시간 편안한 자세로 가기위해 곧 중간쯤의 다른 좌석
으로 가 앉았다. 프랑크푸르트 까지는 11시간 20분쯤 소요 된다고 한다. 드디어 동유럽 여행길이 시동 걸
렸으며 창가에 앉은 나는 5,6시간쯤 지난 후 아래를 내려다 보고 또 앞좌석 뒤에 붙어있는 모니터에 비행
경로가 나타나는 것을 보며 현재 통과지역을 대충 알 수 있는데 아마도 중앙아시아 대평원을 지나 우랄알
타이 산맥이 나타나는것 같았다. 12년 전 서유럽 여행시에는 각 좌석의 뒤에 모니터가 부착된 게 없었고
다만 동체의 각 칸마다 전면에 대형 모니터가 1대씩 설치되어 있었으나 그 사이 이렇게 바뀌었나보다. 이
모니터로는 레시버를 착용하고 모드를 바꿔가면서 영화나 게임,음악감상,뉴스,비행경로 확인 등 취향대로
돌려 볼 수 있어 장거리 여행에 여간 편리성이 있는 게 아니다.약 6시간이 지났을 무렵 손목에 찬 시계를
현지 시간에 맞추기 위해 7시간을 뒤로 돌렸다. 순간 생체는 숨쉬고 살아있어 노화가 진행되고 있는데 시
간을 거꾸로 돌리니 나이가 7시간 젊어진 느낌이 들기도 했다. 어느새 러시아나 핀란드 상공을 통과 하는
듯 했다. 오후 5시 55분에 프랑크푸르트 암마인 공항에 도착 했으며 공항청사 4군데 중 우리가 탄 비행기
는 2청사로 향해 계류됐는데 입국수속의 신속함에 놀랐다.독일에는 국제공항이 14개 있다고 하며 그중 푸
랑크푸르트 공항이 최대이고 암마인 공항청사 4곳 중 1청사가 가장 크다고 함. 한편 2청사의 출입국 시설
규모는 김포공항보다 약간 클 뿐 내부 시설은 별로였다. 인솔자는 우리일행 26명을 버스가 서 있는 곳 까
지 안내하여 짐을 실은 후 오후 7시 5분경 대형버스에 올라 내일 체코로 향하는 근거리 지점인 슈반도르프
를 향해 320Km를 3시간 50분에 걸쳐 달렸다. 첫날이어서 현지 가이드는 따로 없었으며 버스에 올라 주변
경관을 즐기며 고속도로에 진입,쉬지않고 달렸다. 인솔자 (박성미 : 35세)는 원래 무역학과 출신으로 처음
무역회사에 1년여 근무타가 여행업계에 종사케 된것은 10년차라고 하는데 언어 구사 등 상식도 풍부하고
현지 가이드를 뺨칠 정도의 실력 소유자인 걸 나중에야 알았다. 우리는 여행일정 내내 지금 탄 버스로 8일
동안을 계속 이용케 된다. 인솔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운전기사가 폴란드 사람이니 폴란드 말 두마디만
외워 두라는 것. 즉 진도부리(안녕하세요?) 징꾸에(감사합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다음과 같이 설명이
이어졌다. 독일은 면적이 남한(99,000평방Km)의 3.5배(357,000평방Km)로 가용면적도 10배 그 이상이고
인구는 8,250만명에 1인당 GNP가 4만달러, 그리고 푸랑크푸르트는 7개의 연방 자치주 중 하나의 도시이
며 인구는 67만명 이라고 한다. 옛날에 서유럽 갈때만 해도 인솔자나 현지 가이드가 앞에서 객석을 향해
마이크를 잡고 말을 했으나 이번에는 그렇질 않았다. 2004년에 EU국가 공통사항으로 가이드 등은 앞좌석
에 앞을 보고 앉은 채 마이크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나는 촌닭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우토반은 우
리의 경부고속도로 처럼 따로 있느냐고 물었더니 지금 달리고 있는 도로가 바로 아우토반 이라는 것. 즉,
AUTOBAN--->AUTO(자동차), BAHN(길) 임므로 모든 고속도로가 아우토반 이라는 것이다. 왜 물었는고
하니 주행속도가 100Km/h 도 채 안되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자가용에 한해서는 속도 무제한, 버스나
화물차는 80~100Km/h로 되어 있다는 것. 그러나 차선이 편도 2차선이고 차량 흐름으로 볼 때 승용차도
120Km/h 이상 달리는 차는 보질 못했다.한가지 더 질문했다. 모든 차량들이 주행 중 전조등을 켜고 있는
데 무슨 이유냐고 물으니 역시 2004년에 개정된 법령에 따라 전조등을 반드시 키도록 됐다는 것이다. 이
는 모든 EU국 공통사항 이며 2004년 이후 생산되는 모든 차량은 시동을 걸게되면 동시에 전조등이 필히
켜지도록 설계가 돼 있다는 것임. 유럽국가 모두는 과거에 국경을 통과 할때는 짧게 30분 길게는 4시간
까지 검문검색에 시간이 소요 됐었으나 지금은 국경 톨게이트가 유명무실 해져 건물만 남아 있을 뿐 사람
(근무자)도 없고 말 그대로 Free Pass이다. 다만 고속도로 구간마다 일정구역 통과시 마다 찰카닥 하는
소리가 들려 물으니 주행중에 자동으로 충전돼 있는 돈(요금)이 빠져 나간다고 한다. 독일은 여름이 건기,
겨울이 우기라고 하며 특이한 건 맥주,축구,이상기후라며 예를 들었다. 주식이 빵이라서 그런지 차창으로
스치는 도로 양쪽엔 밀밭이 태반 이었다. 우리 버스가 슈반도르프 마을에 있는 호텔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50분 이었으며 호텔 체크인을 하고나니 11시 반이 다 되었다. 기내에서 중식,석식을 약식으로 했기
에 배가 몹시 고픈채 투숙하다. 장시간 비행에 장거리 이동으로 상당히 피로한 상태다. (6,120步)
● 2일차 (8/16) : (土) 7 : 00 기상 8 : 00 조식 9 : 00 승차
아침부터 하늘이 잔뜩 흐려있고 바람이 불어 제법 쌀쌀하다. 유럽의 날씨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변덕 스럽
다고 하는데 미리 긴팔셔츠와 얇은점퍼 그리고 우산을 챙겨온 덕에 오늘같은 날씨에 대비할 수 있게 됐다.
어제 푸랑크푸르트에 도착 했을때는 27,8도정도의 날씨여서 괜찮다고 했는데 이곳 슈반도르프의 아침 기온
은 상당히 떨어져 있어 반소매 셔츠로는 어림도 없게 됐으니말이다. 버스는 9시5분에 출발,백랍의 도시라
불리우는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향해 출발했다. 프라하 까지는 165Km로써 약 2시간이 소요 된다고 한다.
독일과 체코의 국경선을 통과(국경선은 '07년 11/20일자로 없어졌고 검문소는 유야무야)하기까지 40분이
걸렸으며 이때 몇방울씩 떨어지던 빗줄기가 제법 커졌다. 고속도로 좌우에는 옥수수와 밀밭이 태반이다.
인솔자는 체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993년 1/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되면서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가 됐으며 면적 : 78,900 평방Km, 인구 : 1,500만명. 프라하 인구 : 120만멍 이라고 한다. 체
코의 화폐단위는 코루나로서 EURO화가 통용 되지 않는다. EU(유럽연합) 가입국은 현재 27개 국가에 이
르나 우리가 방문하는 6개국 중 독일과 오스트리아만 EURO화를 사용하고 여타 4개국은 각기 자국 화폐를
쓴다고 함. 또한 유럽에서 체코 맥주는 독일것 보다 맛이 더 낫고 인기가 있다고 함. 체코산 맥주가 버드와
이저 라고 ... 그러나 국내 유통되는 버드와이저는 미국에서 만든것 이라고 함. 이런저런 설명을 듣다보니
우리는 어느새 프라하에 진입 하였다. 체코는 오라비아 구릉과 분지가 교차하는 복잡한 지형으로 대부분이
"보헤미아의 숲"이라 불릴 정도로 산림이 우거져 있고 또한 목가적인 전원 풍경임을 알 수 있다. 이 나라는
현재 자유민주주의로 전환 하고있는 민족성이 강한 나라로 5~6세기 에 슬라브계 그리스도 교도에 의해 대
모라비아 왕국이 건국 되었으며 체코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바출라프 1세에 이르러 가장 번성 했다고 한다.
14세기에 카를4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프라하는 중부유럽의 중심도시가 돼 대학,카를橋,프라
하성과 신시가 등이 건설 됨으로써 오늘날 프라하의 기초가 형성 됐다고 한다. 그러나 15세기초 루터보다
1세기나 앞서 요하네스 후스에 의한 종교개혁이 시작됐고, 이에 위협을 느낀 로마 법왕이 후스를 이단자로
몰아 처형 하면서 종교개혁 전쟁에 휩싸여 결국 16세기에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고 한다.
19세기 후반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를 받다가 제1차대전 후 슬로바키아의 민족운동에 호응하여
체코슬로바키아로 통합 했으나,제2차대전 중에 나치 독일에 점령됐고,1945년 소련에 의한 해방 후에는 사
회주의 국가로 전환 되었다. 1968년에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자유화 정책으로 "푸라하의 봄"이
실현 되었으나 바르샤바 조약군의 개입으로 이 운동은 좌절 됐으며 1989년에 벨벳혁명으로 불리는 무혈
혁명인 민주화 운동을 거쳐 공산주의 체제를 마감하고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이 탄생 하였으나 적극
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추진하는 체코측과 온건한 혁명을 추구하는 슬로바키아측이 대립,결국 1993년
1/1일자로 오늘날의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 되었다고 한다. 인솔자는 위와같이 설명 하면서 곧 바출라
프 광장에 도착케 되는데 거기에서 체코 전문 가이드가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윽고 광장 초입에서 모두
하차하여 본격적으로 프라하 시가지의 여기저기를 투어케 되는데 비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투어 첫날
부터 나는 버스의 고정석으로 앞에서 3 번째 통로왼쪽 좌석을 앉게됐고 아내는 중간문쪽에 따로 앉아 자리
가 많이 남으므로 편하게 이동하고 있는터다. 비는 내리는데 우산이 하나밖에 없을줄 알고 혼잣말로 "우산
이 한개밖에 없을테데 야단났네" 하고 중얼거렸는데 이 말을 바로 앞 2 번째 좌석에 앉은 나보다 연장자이
신 부부(용인시 거주)가 듣고,얼른 우산 하나를 건네주며 쓰라는것. 그러면서 그 부부는 우산 한개로 같이
받쳐들고 나는 나대로 그분들이 준 우산을 받쳐들면서 하차 하였다. 중간문에서 내린 아내가 우산이 자기
가 쓴것 말고도 별도로 가방속에 있다며 운전기사의 도움으로 차 트렁크를 열고 가방속에서 꺼내 씀으로
써 그분들의 것을 다시 돌려 드렸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 결국 내 우산을 꺼내 받쳐들고 雨中투어가 계
속 되었으나 앞좌석에 앉았던 두분께 인정미 넘치는 대접(?)을 받고보니 사람의 마음은 묘한 것이어서 그
분들에게 남다른 친근감이 생겼다. 이는 아내마음도 마찬가지 ..... 예사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감히
이 여행기에 기술 하였다. 그건 그렇고 하차하여 만난 전문 가이드는 가이드경력 28년차의 고참 여성(안정
숙 : 52세정도)으로 라틴계 처럼 얼굴이 검고 활달한 성격 소유자로 달변인데다가 말이 상당히 빨랐다. 우
리 부부는 이동시에 인솔자나 가이드의 바로 코밑에 붙어 일행 중 늘 선두를 지키며 따랐다. 가이드의 第一
聲은 그저께 까지만 해도 기온이 35도가 됐었는데 어제부터 비가 퍼붓더니 오늘은 15도까지 기온이 뚝 떨
어졌다며 날씨 얘기부터 꺼냈다. 우리 일행은 우산을 받쳐들고 가이드가 안내 하는대로 여러군데를 답사 하
였으며 워낙 비가 억수같이 내리는지라 신발(운동화)속에 물이 스며들어 질퍽한 느낌으로 우중투어를 강행
하였다. 신발사정은 나만이 그런 게 아니고 일행 모두가 같은 처지 였으리라. 중세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작은(비좁은) 거리와 다양한 색상과 형태가 어우러진 프라하성은 모든 관광객들을 중세의 전설적인 시대로
착각하듯 흠뻑 빠져들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프라하 ...... 어떤곳인가? 매년 인구의 5배에 육박하
는 5천만명의 관광객이 찾는다는 이곳 프라하, 파리,로마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멋진 도시로 손꼽힌다. 위
에서 기술 하였지만 우리에게는 "프라하의 봄"으로 기억 되는만큼 아직도 구소련이 남기고 간 찬바람이 세
찬 느낌이 있는곳 이다.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여기저기 가 본곳은 다음과 같다.
1. 바출라프 광장
길이 750M, 폭 60M 이 광장은 양쪽 대로에 유명한 호텔과 백화점 그리고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바출라프
의 현대사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리는 체코인들의 자유,인권,민주를 향한 운동을 시작했고 당시
하벨(후에 대통령이 됨)의 연설에 100만명의 시민들이 자유를 외치며 모였던 곳이다. 따라서 이 광장은 프
라하의 거센 역사의 중심이 되는곳이기도 하다.
2, 박물관 앞에 있는 성 바출라프 기마동상
바출라프는 921년 체코를 통치 하였으며 체코 민족에게 있어 국가형성의 기틀을 만들지만
독일의 영향과 종교정책 등의 이유로 그의 동생에 의해 암살 당하는 비운의 지배자이다.그러나 사망 후 성
인의 반열에 올랐으며 지금도 체코민족에게는 전설적이자 민족적인 영웅으로 추앙 받고있다.이 거리의 중
심에 보헤미아 전설의 영웅 "바출라프"의 기마동상이 세워져 있다.
3. 프라하 구시가 광장
구시가지에 들어서니 작은 골목에는 벽에 갖가지 장식을 하거나 각기 고유한 문양을 새긴 고색 찬연한 건
물들이 즐비하다.이 광장은 구시가의 중심지로 광장 한군데에는 중세 보헤미아의 종교 개혁가 요하네스
후스의 동상을 비롯해 구시청사,틴교회 등이 자리 잡고있다. (요하네스 후스 : 1415년 성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처형당한 종교 개혁가)
4. 구시청사 건물의 천문시계
매시마다 정각이 되면 두개의 원반 위에 있는 천사의 조각상 양쪽 옆의 창문이 열리면서 신이 울리는 종 소
리와 함께 그리스도의12제자가 창의 안쪽 으로부터 천천히 나왔다가 사라지곤 한다고 하는데 그 광경을 보
진 못했다.
5. 화약탑 (火藥塔)
화약탑은 구시가지를 지키기 위한 성벽의 문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데 17세기에 화약 창고로 이용 했다고
한다.
6. 카를교 (Charles Bridge)
1357년 카를 4세때 교회 건축가인 피터 팔레지가 건축하여 1402년 에 완성 됐다고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다리의 길이는 516M에 달함.또한 이다리의 양쪽에는 바로크 시대에 만들어진 30개 (좌우로 15개
씩) 의 조각상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일한 청동상인 "성 네포무크"상 아래의 부조(浮彫)에서 특히 순교
부분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하여 그 부분만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도 양손을 거기에 대고 사진을
찍었다.
7. 비트성당
프라하 시에서 가장 큰 중요한 건축물로 현재 대통령궁 으로 쓰이는 프라하성 안에 있다. 이는 1344년에
시작하여 1929년 까지 무려 585년간 증개축을 거듭 했다고 한다.
8.틴성당
800년 이 넘는 역사를 갖고있는 고딕 스타일의 쌍둥이 청탑이다.
이밖에도 몰다우강(불타바강)에 떠 있는 유람선과 프라하 중앙역,구시가지 광장 한편을 장식하는 니콜라
스 성당 그리고 신시가지를 거닐었으며, 밤에는 카를교의 환상적인 야경을 보기 위해 낮에 버스로 통과한
그곳을 3 명을 제외한 23명이 버스 있는곳 으로부터 걸어서 왕복(3Km정도)하였다. 7시 45분이 되자 다리
양쪽의 전주에 점등 되었으며 몰다우강 건너편에 있는 대형 건축물의 조명은 조금 더 어두어진 8시가 돼
서야 환상적인 야경으로 변신했다. 그런데 시가지 어느곳의 길 양쪽 電柱마다 SAMSUNG 입간판이 부착
돼 있어 그걸 보는 내 마음은 괜스리 흐뭇하였다. 가이드로부터 들은 말 ..... 체코는 2004년에 EU에 가입
한 후로 고물가 시대가 왔다고 하며 아주 옛날에 아인슈타인이 방문했고 또한 감영삼 대통령이 재임시 이
곳을 반문 했다고 한다.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려 우중투어를 강행한 탓에 몸이 지칠대로 지쳐있다. 밤
9시경에야 호텔투숙 하다. (18,370步)
● 3일차 (8/17) : (日) 7:00 : 기상 8 : 00 식사 9 : 00 승차
어제와는 달리 말끔히 개인 하늘이다. 새벽 공기가 맑고 화창한 날씨여서 기분이 상쾌한 아침이다.오늘은
세계 문화유산 도시 체스키크롬로프로 향한다. 별도의 현지 가이드 없이 인솔자가 가이드를 대신한다. 우
리가 묵은 호텔에서 그곳 까지는 약 175Km 떨어졌다고 하며 버스는 9시 정각에 출발 하였다. 체스키크롬
로프는 체코의 남동쪽에 위치한 중세 위성도시로써 마을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 으로 지정된 중세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으로 역사적인 중심가가 잘 보존되어 있어 마치 과거로 회귀한 듯한 느낌을 갖는
곳 이기도 하다. 처음엔 프라하를 빠져 나오면서 고속도로로 진입 하였으나 국도와 지방도로 빠지다보니
2시간 반이나 걸려 11시 30분경에 이곳에 도착 하였다. 프라하성에 이어 체코에서 두번째로 큰 체스키크
롬로프는성은 S자 모양으로 흐르는 블타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작은 도심은 르네
상스와 바로크식 건물들이 좁은 골목길에 오밀조밀 하게 들어 서 있는것이 매우 인상적이다. 우리는 블타
강의 짧은 다리를 건너 마을 광장(스보르노스티 광장)의 한켠에 있는 식당에서 중국식으로 점심 식사를 한
후 약 1시간여의 자유시간이 주어져 일행들은 삼삼오오 흩어진채 주변 거리를 돌아 보았는데 우리 부부도
이곳저곳(귀금속점,토산품점,의류가게,식료품점,잡화점)을 돌다 보니 좁다란 골목길에서 일행과 자주 마
주치곤 하였다. 나중에는 광장의 벤치에 앉아 쉬기도 했으며, 많은 외국인(현지인 인지도 모르나 내 눈엔
체코가 아닌 외국인으로 보였음)들이 서성대거나 역시 벤치에 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을 다음
과 같이 소개코저 한다.
1. 체스키크롬로프성
체스키(체코)+크롬로프(말발굽)의 어원으로 지명이 지어졌다는 이곳은 영주가 13세기에 만든(축조한)성
으로 탑과 정원은 관광객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코 있으며, 전망탑에 올라가면 아기자기한 마
을 전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한폭의 그림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 성 안으로 들어가려면 부제오비츠카
문을 통과 해야 되는데, 특이한 것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만들어 놓은 해자는 대개 물이 채워진다는데
여기서는 물이 없고 그곳에 곰을 사육하고 있었다. 또한 성의 뒤편에 위치한 영주의 정원은 유럽에서 가징
큰 정원 중 한 곳으로 상당히 넓다. 관상수를 보기좋게 다듬고 손질하여 가꾼 모습 이라든가 예쁘게 꾸며놓
은 꽃밭과 꽃길 하며 분수대 등 한마디로 호화스럽게 가꾸고 다듬어진 아름다운 정원의 유혹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우리 부부도 그곳에서 사진을 여러장 찍었다.
2. 망토다리
버스 주차장에서 구시가지로 갈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곳으로,이 다리를 통과해야 아름다운 도시(마을)
를 만나게 된다. 아치 모양의 이 다리는 무거운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으며 밑에는 블타강이 흐르고 있다.
우리 일행이 이 다리를 건너 광장으로 향할때 젊은이들이 웃통을 벗은 채 가약을 타고 위에서 가파르게 떠
내려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밖에도 이곳에서는 스보르노스티 광장옆 성당(성체성당,성오스트성당,성비트성당)과 예수님의 고난의
상(像)을 보고 내일 있을 다음 행선지인 폴란드로 가기 위해 2시45분경 이곳을 떠나 프레보브로 출발했다.
이곳 체스키크롬로프에서 프레보브 까지는 321Km로 약 4시간이 소요될 예정 이라고 들었으나, 막상 5시간
걸려 7시 40분경 호텔에 도착 하였다. 가는 도중 체코에서 2 번째로 큰 도시 브르노(생물학자 멘델이 태어
난 곳)를 통과 하였는데 여기서는 산이 전혀 보이질 않았고, 잘 뚫어진 고속도로 양옆에는 옥수수와 밀밭 일
색이다. 여기서는 대부분의 농작물이 이모작 이라고 힌다. 멀리 보이는 초원이 펼쳐진 상공에는 패러글라
이더를 즐기는 모습도 보였다. 이때 어느 구간을 지날때 였는데 도로 반대편에 차량이 멈춰 선 채로 수십Km
가 먹통이 돼 있었는데 알고보니 차량(화물차) 전복 사고였다. 호텔까지 가는데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인솔자는 우리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영화 (AMADEUS) 한편을 틀어 주었다. 나는 외화를 별
로 즐기지 않는 편이나, 그래도 영화 보기에는 적당한 3번째 자리여서 별 흥미 없이 보았는데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았다.
1984년도에 제작된 이 작품(미국산)은 모짜르트의 35년 생애 중 주로 후반 10년간의 사건을 극화 한것인데, 모짜르트
를 질투하는 살리에트의 고백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는, 모짜르트의 천재성을 여과없이 보여줌과 동시에 살리에트를 질
투의 화신으로 표현 함으로써 영화의 끝은 더욱 단적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오페라 장면은 마치 자신이
오페라 극장의 한 좌석에 앉아 있는 듯한 그런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가끔씩 유머가 섞인 부분은 웃음을 안겨 주지만
마지막 장면, 비운의 천재 모짜르트의 죽음은 우리에게 많은 여운과 안타까움을 남긴다.
인솔자(박성미)는 며칠 후에 있을 오스트리아 투어에서 모짜르트가 태어난 곳을 방문케 됨에 따라, 사전 연관
성 있는 영화(아카데미 수상작품)로 모짜르트를 우리에게 미리 각인시켜 주기위해 이 영화(CD)를 틀어 준 것
으로 이해 되었다. 영화가 끝난다음 음악(CD)도 계속 틀어 주었는데 이는 장시간 버스투어에 지루함을 덜어
주기 위함이리라. 음악은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클라식으로 내 귀에는 지루하게 들렸다. 차라리 우리 일
행의 연령층이 남녀 할것없이 50대~60대 이므로 흘러간 노래나 신 트로트 등 뽕짝이 나을 뻔 했는데, 아마도
인솔자가 30대인 자신의 수준이나 취향에 맞춰 나름대로는 일부러 고상한 음악을 선사한 것으로 이해코 있다.
위에 기술 한바와 같이 7시 40분경 호텔에 도착, 체크인 하고 투숙하다. (6,170步)
● 4일차 (8/18) : (月) 6 :00 기상 7 : 00 조식 8 : 00 승차
오늘은 국경지역인 이곳 프레보브를 떠나 폴란드로 이동케 된다. 유태인의 최대 수용소였던 제2차 세계대전
의 아픔을 간직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비엘리츠카에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금광산을 투어키 위해서다.
버스는 8시 정각 호텔을 출발하여 폴란드의 옛수도 크라카우 에서도 서쪽으로 60Km 정도 떨어진 아우슈비
츠 (아우슈비츠는 독일어식 지명이고 실제 폴란드 지명은 오쉬비엥칭 : OSWIECIM) 를 향해 달리고 있다. 인
솔자는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간다. 오늘은 여러분께서 지옥과 천당을 구경 하시게 된다고 .... 이 말은 지옥
같았던 포로수용소,그리고 삶에서 필수불가결한 소금을 캔 광산 투어를 압축표현한 것이리라. 거기까지 거
리는 172Km 로서 약 3시간이 소요 된다고 한다.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한 날씨,바람은 없으나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은 다소 차갑다. 도로의 좌우에 심어져 있는가로수는 열매가 매달린 사과(능금)나무 그리고 들판은 옥수
수 밭,멀리 구릉지가 보인다. 그 앞에 초원의 언덕에는 젖소가 한가하게 풀을 뜯고있고, 밭을 가는 농부도 눈
에 띈다. 인솔자가 폴란드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폴란드는 국가 이름이지만 기원은 POLE=FIELD 로서
그 뜻은 평평한,낮은,결국 평야라는 의미라고 함. 국토의 면적은 한반도의 1.4배인 312,700 평방Km,인구
3,879만명,수도는 바르샤바(인구: 170만명),1인당 GNP : 13,000달러,통화단위 : 주워티 그리고 접경국가는
체코,슬로바키아,독일,러시아,리투아니아,우크라이나,벨라도스 등 7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이 나라에는
유별나게 호수가 많다고 함.(큰 호수만 9,300여개가 된다고) 2시간 반을 달리니 체코와 폴란드의 국경을 통
과케 된다.설명은 계속된다. 폴란드는 농업국가 임으로 주된 농작물은 감자와 밀이고 특히 보드카가 유명 하
다고한다. 폴란드 출신 유명인사는 음악가 쇼팽,요한 바오로2세,베네딕토16세,바웬사 또 여성으로 노벨상수
상자 퀴리부인이 있다고 한다. 카톨릭이 국교로 되어 있으며 종교세를 연40%씩 내고 있다고. (사실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듦) 11시가 가까워오자 아우슈비츠 수용소 근처까지 온 모양이다. 여러분은 잠시후에 폴란드
전문 가이드를 만나게 될거라고 .... 11시 5분 드디어 수용소 주차장에 버스가 멈췄다. 건장한 사나이 : 윤기
선(40세) 이곳 가이드 경력 8년차라고 한다. 인사를 한 후 꺼내는 말 : 이틀 전에는 우박까지 내리고 날씨가
아주 고약했는데 여러분은 운이 좋으십니다. 여기 날씨는 아주 변덕스러운데 다행히도 오늘은 날씨가 아주
좋으네요. 우리는 가이드를 따라 수용소 안쪽으로 들어서자 폴란드 여성(55세 정도)이 우리앞에 다가왔다.
내부는 그가 안내 해야 되기때문. 첫번째 들어간 곳은 레시버를 교부 받는 곳이었다. 가이드가 휴대형 마이
크로 설명하면 싸이클이 맞춰진 레시버를 귀에 착용한 우리는 라디오 듣듯 가이드의 설명을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것이다. 세계 도처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북새통이며 그룹단위로 각棟 각실을 관람하는 요령은 앞
팀이 그 방 설명이 끝난 후에 다음팀이 들어가 각기 가이드의 설명을 듣게 되는 것이다. 미국인,아프리카인,
유럽인,동양인,그러나 일본 관광객은 전혀 보이질 않았다. 나중에 가이드로 부터 들으니 일본인은 개인일
경우는 몰라도 단체로는 일본 외무성에서 폴란드행 자체를 불허 한다는것. 그 이유는 과거 그들이 일으킨 전
쟁 잔혹사가 있었기 때문이다.다음은 직접 목격하고 가이드가 설명한것을 그대로 간추린 것이다.당초에는 수
용소가 32개동 이었으나 5개동은 폭파되고 남아 있는것은 27개동 이라고 한다. 이 수용소는 나치가 유태인
을 학살 하기위해 만든 것으로 폴란드의 오쉬비엥칭(독일어로 아우슈비츠)에 위치하며 이곳은 바르샤바에
서 약 300Km 떨어진 곳이고 이곳에서 처형 당한 사람들은 유태인,옛소련군 포로,정신질환을 가진 정신 장
애인,동성애자,나치즘에 반대 하는자 들이었다. 나치가 세운 강제 수용소 중에서 여기가 최대 규모라고 한
다. 정문에는 독일어로 이렇게 써 있다. "ARBEIT NACHT FREI" (일 하면 자유로워진다) 라는 기만적인 문
구를 건물 정면에 써 붙인것이다. 이 문을 통해 매일 강제 노동에 끌려나간 수감자들이 하루 12시간씩 일을
해야했다. 이곳은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촬영지로도 유명 하다고 함. 이 수용소에서 600만명의 유태인이
목숨을 잃었으며 붉은 벽돌로 된 27개 동의 수용소에는 평균 13,000~16,000명 정도가 수감돼 있었다고
한다. 한편 1974년에 세워진 희생자 박물관은 1979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유산으로 지정 됐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전쟁 이후 그대로 보존 되어온 죽음의 블록과 제11화장터,총살의 벽,수감동,감시탑,
고압전류가 통했던 철조망,정문,유태인을 처형 했던 가스실과 처형 당한 사랍들의 사진,시체를 태웠던 소각
장 등이 그대로 보존돼 있어 잔혹했던 나치 범죄에 의한 비극의 역사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벽면에 붙어
있는 사진과 진열대 안의 물품 그리고 각 방의 용도등은 다음과 같다. 즉 오케스트라 행진곡을 연주 하면서
수감자를 통제했던 곳,독가스 제조용 "싸이클론B"라는 약품 6~7Kg으로 만든 독가스로 1,500명 가량을 죽
일 수 있는 가스실이 별도로 있고, 차마 눈 뜨고 볼수 없는 성기가 잘려나간 처참한 사진,이는 생체 실험을
위해서 였으며 가스실 희생자들의 머리카락을 모아 놓은 방도 있고,그 머리카락으로 만든 천(옷감),수거된
안경,수거된 의족과 의수,목발,어린이와 어른들의 신발,수감자들이 끌려올때 가져온 밥솥,밥그릇,숟가락과
포크,그리고 가방 : 이 가방의 표면에는 나중에 돌려 받을줄 알고 찾을때 쉽게 식별이 되도록 큼직하게 본인
의 이름들을 써 놓았다. 죽음의 블록은 제10블럭과 제11블럭 사이의 공간으로 양쪽에서 높은 벽으로 막혀
있으며 제10블럭의 창문에 붙어있는 나무판은 그곳에서 자행된 사형 집행을 볼 수 없게하기 위한것이라고
한다. 제 11블럭은 수용소에서 격리된 형무소로 지하 감옥은 최초의 집단 학살 실험이 자행된 곳이라고 한
다. 또한 점호 광장에는 집단 교수대가 있고,화장터는 수용소를 둘러 쌓고있는 철조망 밖에 있으며 그 입구
앞에는 1947년 4/16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헤스"의 사형을 집행한 교수대가 있다. 화장터
내부에는 두대의 가마(火爐)--(원래는3대)가 있는데 이곳에서 하루 350구의 시체가 화장 됐다고 한다. 소
름이 절로 끼친다. 견학을 마치고 나올때에는 아까 지급 받았던 레시버를 반납 하였다. 중식을 현지식으로
마친 지금 시간은 오후 1시30분, 지금까지 지옥을 둘러 봤다면 이제 천국에 가 볼 참이다. 그것은 바로 소
금광산을 두고 하는 일이다. 이곳에서 소금광산이 있는 비엘리츠카 까지는 약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고
하며 버스는 지방도로 계속 달린다. 도로 좌우 에는 적송과 자작나무 등 침엽수가 많았으며 사과나무도 눈
에 많이 띄었다. 차창으로 보니 아파트는 거의 없고 개인주택 만 볼 수 있었다. 나는 가이드에게 폴란드의
의약분업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이 나라는 '89년에 민주화가 되면서 의약분업을 그때부터 이미 실
시하고 있단다. 이곳에는 큰 江이 비스와강이며 크라카우를 거쳐 바르샤바로 흐른다고 한다. 폴란드 교민
은 2천명이 채 안되며 클라카우에 있는 교민은 37 명 뿐이다. 폴란드 출신으로 노벨상 수상자는 퀴리부인
쇼팽,바웬사가 있다고 ..... 곧 도착하여 보게 될 소금광산은 1978년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이래 1990
년 까지 운영됐고 1993년부터 관광이 개시 됐다고 한다. 드디어 비엘리츠카(소금광산)에 도착,관광이 시
작된다. 바다에서 소금을 얻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동유럽 에서는 광산에서 소금을 캐내는 산업이 발달된
것이다. 22일에 있을 오스트리아 투어 시의 짤쯔부르크 역시 소금산업으로 유명해 도시 이름을 "소금의 성
"이라 지었을 정도라고 한다.--- (salz(소금)+bueg(성)=salzburg). 지하 갱도에 카메라를 지참 하려면
4 EURO (약6,400원)의 스티카를 구입하여 카메라에 부착해야 된다고 한다. 나는 지하 어두운 곳은 Flash
를 터뜨려도 피사체만 밝게 나올뿐 주변이 까맣게 나옴으로 아예 카메라를 지참치 않을 양으로 차 안에 놔
두고 내렸다. 그러나 나중에 갱도 내에 들어서니 막상 스티카 부착 여부는 확인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금광
산 투어는 지하 135M 를 원형계단으로 약 10분간 내려가는곳 에서부터 출발케된다.소금바위 속 지하 100M
의 전시장에는 비엘리츠카의 역사와 소금을 파내는 방법을 보여주는 전시실이 있으며 소금으로 만든 수많은
조각품과 예배당도 있고 코페르니쿠스,쇼팽,괴테,요한 바오로2세,바웬사 등 인물들의 조각상도 있었다.이곳
에서 일하는 광부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에 종교를 갖게되고 각종 조각품을 만들기 시작 했는데 이
모든것을 소금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이다. 샹들리에도 성당 내부도 모두 소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둘러보는데 소요된 시간은 90분,만보계의 수치는 3,350步였다.지하갱도 135M 지점에서 출구로 올라올때는
리프트 카를 타고 단 2분도 안걸렸다. 그런데 이곳 소금광산 갱도 길이는 300Km 에 달한다고 한다.(서울-->
대구간의 거리와 맞먹음) 소금광산 관광이 끝난 후 이어서 유럽 최초의 지정문화 도시이자 폴란드의 옛 수도
인 크라카우로 이동 하였다. 크라카우는 베네딕토 16세의 고향 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크라카우 까지는 13
Km 의 근거리이다. 역대 폴란드 왕이 거처하던 궁전이었던 바벨성을 관람한 후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중앙시장 등 구시가지 관광을 끝으로 오늘의 일정이 모두 끝났으며 이어서 호텔 투숙하다. (10,180步)
● 5일차 (8/19) : (火) 6 : 30 기상 7 : 30 조식 8 : 30 승차
오늘은 이곳 크라카우에서 슬로바키아를 경유하여 헝가리로 향한다. 당초 여행 일정표 상에는 동유럽 6국으
로 나와있어 슬로바키아도 투어 하는것처럼 보이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단지 이 나라 도로로 진입하여 통과
할 뿐이다.여행사는 뻔뻔스럽다고나 할까,고객으로 하여금 혼돈이 오게 만드는 것이다. 아마 타 여행사도 마
찬가지 일것으로 생각된다. 버스는 8시 35분에 출발,지방도로와 고속도로를 통해 달리며 몇개의 소도시를 거
쳐 동유럽의 알프스라 불리는 타트라 산맥을 끼고,산맥의 등허리를 달려 오후 3시 40분에 슬로바키아의 소도
시 반스카비스트리차의 한 호텔 레스토랑에서 오믈렛으로 점심식사를 마친 후 다시 고속도로에 진입,부다페
스트로 향하고 있다. 이곳에서 헝가리 국경 까지는 약 100Km,국경을 지나 70Km쯤 더 가면 부다페스트라고
한다. 헝가리 국경을 통과한 시각은 5시 10분 이었다. 저녁 6시 50분경 부다페스트의 다뉴브 강변 주차장에
도착 했으며 꼬박 10시간 이상을 버스에 몸을 맡겼었다.이보다 앞서 아침에 버스에 오른 후 인솔자는 국경을
지나 슬로바키아에 진입하자 말문을 열며 오늘은 3개국에 발을 디디게 된다면서 (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
슬로바키아의 국가 개요를 다음과 같이 설명 하였다. 면적은 49,000 평방Km,인구 : 540만명,수도 : 브라티
슬라바(인구: 45만명),통화단위 : 코루나,1인당GNP :15,000~16,000달러 라고 하며 슬로바키아는 체코,폴
란드,우크라이나,오스트리아와 접해 있고 3개 주와 행정상 독립된 수도인 브라티슬로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결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보헤미
아와 합체하여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으로 되었다. 그러나 1948년 공산당이 권력을 잡은 뒤 체코인들이 주
도권을 쥔 엄격한 체제를 맞았다. 그러다가 1989년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 몰락과 함께 연방 으로부터 분리
하려는 움직임이 높아져 1993년 1월에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각각 독립 하였다. 슬로바키아는 1차 세계대전
이 일어나기 직전 50년을 포함해 900년간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한다. 기후는 체코보다 대륙성 이며
수력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북부로 갈수록 산세가 높으며 지금 우리가 통과하는 이 지역이 바로 타트라 산맥
이다. 이 산맥의 길이는 26Km에 달하며 최고봉은 해발 2,650M에 이른다. 전체 면적중 40%가 산림 지역이
고 경작지는 17%에 불과하다. 저지대 에서는 밀,보리,옥수수,유채꽃 등이 재배 되고 소나 돼지를 많이 사육
하고 있어 낙농 유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산악지대 에서는 철광석,구리,마그네사이트,아연 등이 채굴 된다고
함. 이 나라는 습한 대륙성 기후로 인해 여름엔 덥고 비가 많이 오며,겨울에는 춥고 눈이 많이 내린다. 눈은
3~5M까지 쌓인다. 유채꽃으로는 자동차용 Oil 을 만드는데 공해가 적다고 한다. 한편 이 나라는 '04년에 EU
에 가입했으며 내년부터는 EURO화가 통용될 예정이라고 한다. 이동 거리가 너무 길고 시간이 오래 걸리므로
인솔자는 영화("Gloomy Sunday")한편을 틀어 주었는데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988년에 발표된 닉 바르코의 소설"슬픈 일요일의 노래"를 극화 한것으로 이 영화는 노래가 작곡 되었던 1935년 부다페
스트를 배경으로 영화보다 더 영화처럼 살았던 매혹적인 파노라마가 드라마틱 하게 펼쳐진다. 안드라스가 이 곡을 처음
연주해 주던날 일로나는 안드라스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가 이 노래를 부르던 날 안드라스는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눈다. 역시 비극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그들의 운명을 쥐고 있는 미스테리의 노래 "글루미 선데이"와 미로처
럼 아득한 사랑 이야기가 흥미롭게 엮어진 영화라고나 할까 ~~~.
이제 인솔자의 이야기는 헝가리로 돌아간다. 면적 : 93,000평방Km(남한의 94%에 해당), 인구: 1,020만명,
수도 : 부다페스트(인구 : 220만명), 통화단위 : 포린트, 인접국은 오스트리아,슬로바키아,크로아티아,유고
슬라비아,슬로바키아에 둘러쌓인 내륙국가로서 BC10세기의 마자르족이 조상이며 10세기 말에 게자와 이
스트반 1세 부자에 의해 국가 통일이 이루어져 초대 왕조인 마르파드 왕조가 성립됨과 동시 그리스도로 귀
의케 돼 이스트반은 로마 교황으로부터 국왕의 칭호를 받게된다. 14세기 중엽에 와서는 중부유럽에 제국을
세운 후 혼란을 거듭하다가 1514년에 對오스만 십자군 모병을 계기로 농민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에 패한 후
오스만 제국의 점령하에 들어가며,헝가리 서부는 합스부르크의 세력 속으로 흡수돼 결국 18세기 말에는 오
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이 탄생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이중왕국 붕괴와 더불어 혁명이 일어났
고 ,1918년에 공산당이 창건 됨과동시 소련군의 점령하에서 개혁이 이루어져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 되었다.
자~! 역사는 여기까지고 ....다뉴브강(다뉴브는 영어식 표기이고 독일어로는 도나우라고 함)은 약 2,850Km
의 거리를 남동쪽을 향해 흘러 루마니아,독일,슬로바키아,오스트리아 등 10개 나라를 거쳐 흑해로 빠진다.
그런데 다뉴브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을 부다,동쪽지역을 베스트라 부르며 부다와 페스트는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별개의 도시로 발전 했다고 한다. 즉 부다는 고대 로마의 군사기지로 시작,다뉴브강을 건
너는 요충지가 되면서 1361년 헝가리의 수도가 됐고,페스트는 13세기 이후에야 도시를 이루기 시작해 중세
이후 상업과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한 도시 였다고 한다. 1849년에 비로소 다리로 이어지면서 합병돼 지금의
부다페스트가 됐다고 한다. 강변 주차장에서 선착장으로 이동,곧바로 유람선에 승선하여 세체니다리(이 다
리는 부다와 페스트를 잇는 헝가리 최초의 다리임)를 중심으로 약 50여분간 일정구간을 왕복 하면서 저녁무
렵의 주변 경관과 어우러진 부다왕궁 하며 국회 의사당 등 굵직굵직한 호화스런 건물을 바라보며 찬사가 절
로 나와 넋 나간듯 흠뻑 빠져 들었다. 순간 우리의 한강과 비교 되었다. 한강의 남과 북은 아파트 천지이나
이곳 다뉴브강의 동,서는 아파트는 보이질 않고 초대형 집합건물 일색이다. 선상에서 주변 경관을 즐기며
마신 맥주맛은 그야말로 굿이었다. 크루즈를 마치고 나니 해가 기울어 어느새 불이 켜졌으며 그 야경은 말
그대로 환상적이다. 석식 후 호텔 투숙하다. (2,830步)
● 6일차 (8/20) : (水) 6 : 30 기상 7 : 30 조식 8 : 30 승차
아침부터 유난히 햇살이 따가운 듯했다. 이곳 외지에 있는 마을 호텔에서 부다페스트 시내로 진입키 위해서
는 거리도 있거니와 일찍 서둘러야 타 여행팀과의 교차 만남을 피할 수 있고, 인파로 붐비는곳을 다소라도
편하게 행보 할 수 있다는 게 인솔자의 말인데,우리 일행 중 두사람이 시간을 착각하여 20분이나 늦게 승차
하였다. 미리 승차한 우리는 내심 불편한 심기 들이었으나 그 두사람이 늦게 차에 오르자 분위기를 깨지 않
으려고 일제히 격려의 박수까지 쳐 주었다. 이윽고 버스가 출발 하였다. 유럽 풍경이 그렇듯 이곳도 어김없
이 초원,숲,벌판,나지막한 야산,드물게 보이는 빨간 지붕의 집과 또 어느곳 인가를 지날땐 호숫가도 보면서
약 1시간 반만에 부다페스트 시내에 진입 하였다. 그런데 그 넓은 땅을 지나오면서 사람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으며 주마간산식 으로 자연 경관을 차창너머 감상 할 따름이었다. 맨 먼저 찾은곳이 부다페스트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겔레르뜨 언덕,여기서 현지 가이드(정근태 : 38세 男,경력 5년차)를 만났다. 언덕에 올라보
니 다뉴브강과 환상적으로 어울린 부다왕궁의 모습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16세기
터키와의 전투로 성은 완전히 붕괴 되었다가 17세기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해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궁전으
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한다. 이후19세기에는 화재,그리고 1,2차 세계대전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며 오늘
날의 왕궁 모습은 1950년대에 다시 보수 한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의 궁전은 화려했던 과거와는 달리
단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부다페스트의 또 하나의 명물인 어부의 요새로 올라갔다.
어부의 요새는 왕궁언덕 북쪽에 있는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흰색 건축물로 고깔모자를 뒤집어 씌
운듯 끝이 뾰족한 지붕의 모습이다. 요새에 올라가 내려다 보는 다뉴브강과 맞은편 페스트 지구의 풍경은 그
야말로 한폭의 그림 이라고나 할까.가이드 설명을 들으니 19세기에 어부들이 강을 타고 습격해 오는 적군을
막기위해 성채에서 파수를 봤다고 해서 "어부의 요새"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12시가 가까워 오자 태양
열은 더욱 강렬해 졌고 땀이 주르륵 흐른다. 그러나 그늘 속으로 들어 가기만 하면 땀은 금새 식고 시원해
지는것,이는 습도가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는 26도 정도였던 날씨가 한낮으로 치달으며 아마 30도는 되는
가 보다. 우리 일행은 부다 지구에서 겔레르뜨 언덕,어부의 요새,위에서 내려다 본 왕궁에 이어 위풍당당한
모습의 국회의사당 등 관광 후 세체니 다리를 건너 페스트 지역으로 들어갔다. 이 다리는 부다와 페스트 지
구를 연결 하는 8개의 다리 가운데 최초로 놓인 다리로 현지인들은 "체인브리지"라 부른다고 한다. 어제 유
람선을 타면서 야경을 본것처럼 밤에는 조명이 들어와 시가지와 어울려 장관을 이루는 것이다. 페스트 지구
에 들어와 먼저 1884년에 건축돼 전통을 자랑 한다는 환상적인 외관의 극장 "오페라 하우스"를 차창으로 보
았고 이어서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해 1896~1926년 까지 30년에 걸쳐 완공 됐다고 하는 영웅광장을
둘러 보았다. 마침 오늘은 건국 기념일 이어서 군인들이 3시에 있을 기념행사에 대비해 이 시간에 예행연습
을 하는 장면이 목격 되었다. 896년에 건국 하였으니 오늘이 헝가리 로서는 1,112년째 맞는 건국 기념일인
것이다. 이 광장 중앙에는 부족국가 였을 당시에 헝가리 민족을 이끌었던 7개 부족장의 기마상이 있고, 천사
카브리엘의 동상이 36M 의 높은 기둥 위에 세워져 있으며 뒤편으로는 정복 시대의 위세를 떨쳤던 왕과 위대
한 인물들의 동상 14기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았다. 다음으로 들른곳은 성 이스트반 성당이며 중식 후 3
시 10분에 헝가리를 출발하여 음악의 도시이자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로 향했다. 이곳에서 거리는 약
240Km,2시간 남짓 걸린다고 한다. 버스 이동 중 차창으로 LG입간판이 보였고,도로 좌우편에는 옥수수밭,
그리고 풍력발전기의 群落이 보였다. 한참을 달리다 보니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을 통과하게 되었다. 이
때 시각이 5시 10분경, 국경을 지나 어느 소도시에서 저녁식사를 모처럼 한식으로 한 후 7시 30분경에 호텔
도착,체크인 투숙하다. (8,530步)
● 7일차 (8/21) : (木) 6 : 00 기상 7 : 00 조식 8 : 00 승차
오늘 투어 일정을 소화키 위해서는 일찍 서둘러야 한다. 버스에 오르자마자 인솔자는 이제 비엔나로 향한다
면서 오스트리아를 다음과 같이 소개 하였다. 국토 면적은 83,850 평방Km, 인구 : 830만명, 수도 : 비엔나
(영어식 표기는 "빈", 인구 : 150만명), 통화단위 : EURO, 1인당 GNP : 40,000 달러. 이 나라는 헝가리 슬로
바키아,스위스,슬로베니아,이탈리아,독일,체코와 인접하고 있으며 국토의 2/3가 알프스 산맥지역이다. 역사
를 살펴보면 고대를 거치는 동안 동방으로뷰터 슬라브족을 동반한 아바르족,5세기 후반에는 이래왕국을 형
성하여 로마 교회와 손잡고 카롤루스 대제의 영도하에 오스트마르크를 설치케 되며 9세기 말에는 신성 로마
제국이 탄생된다. 그후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제국은 해체되고,공화국이 성립되어 1938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방이 단행됨.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케 되며 나치 독일이 패배하자 1945년에는 소련군이 진주,미
/영/불/소의 4개국 점령하에 마셜플랜을 받아들인 결과 1955년 오스트리아 국가 조약으로 자유 영세 중립
국으로 주권이 회복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영세 중립국은 스위스도 마찬가지. 비엔나로 이동하는 도
중 좌측에 다뉴브강 줄기의 운하가 흐르고 있고 거기에 유람선이 오가고 있었다. 다뉴브강의 독일어식 표기
는 도나우강 이다. 버스는 어느새 비엔나 시가지에 진입 하였다. 이때 현지 가이드 (박태훈 : 36세 男,가이드
경력 : 15년차)가 버스에 올랐다. 직행한 곳은 시 외곽에 위치한 쉔브런 궁전(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
으로 1440개의 방으로 이루어짐). "쉔브런"이란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아름다운 샘"을
발견 한데서 유래 됐다고 하는데 이 궁전은 1713년 레오폴트 1세에 의해 건립됐고,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지금과 같은 화려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고 한다. 궁전 건물 뒷편의 정원까지 합하여 약 42만평(우리나라 여
의도 면적 : 89만평)이라고 하는데 이 광대한 정원에는 화단,분수,조각상 등이 어우러져 아름답기 그지없다.
특히 끝자락 언덕에는 프러시아 전쟁에서 승리케 된것을 기념하여 1775년 아리아 테레지가 지은 글로리에
테가 있다. 가이드는 이런 얘기를 들려 주었다.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
데 그녀의 당찬 기품이 곧 이런 환경 속에서 나온 게 아니겠느냐고 ... 그럼 비엔나는 어떤 곳?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는 유럽의 古都로 지금도 중부 유럽에서 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를 이루며, 수백년 동안 대제국
의 수도였고 알프스,카르파티아 산맥을 관류코 있는 다뉴브(도나우)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또 비엔나는 음
악 에서도 수세기 동안 세계적 중심지 였다. 모짜르트.베토벤,슈베르트,브람스,요한스트라우스 등 음악의 대
가들이 이곳을 그들의 본거지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민속춤에서 파생한 왈츠는 1820년에 이곳에서 확립
되었으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빈 관현악단(비엔나 필 하모닉)의 본거지 이기도 하다는것. 연중
음악회가 열리고 있으나 7,8월엔 공연이 없다고 한다. 시내로 들어와 파리 오페라극장,밀라노의 스칼라극장
과 함께 유럽의 3대 오페라 극장의 하나인 국립오페라 하우스의 전경을 관람 했는데 가이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을 가한다. 오페라 하우스에서 황금홀 연주시간은 전반 45분은 모짜르트,후반 45분은 요한스트라우스1
세가 연주 된다고 한다. 이어서 우리는 쇼핑街인 게른트너 거리(우리나라 명동 거리와 흡사)를 활보(?)하다
가 구시가지의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비엔나의 상징이자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인 슈테판 성당
내부에 들어가 거대하고 웅장한 모습의 천정 벽화 등 그림을 위시하여 내부 시설물 등을 관람 하였다. 그런
데 이곳 성당에는 137M에 달하는 청탑이 있다. 다음엔 네오고딕 양식의 웅장한 건물인 시청사와 카레성당,
미술 아카데미(히틀러가 시험에 두번이나 응시해 낙방 하였다고),광장 좌측에 있는 마리아 테레자의 모습과
링 거리(1865년 까지는 성벽 이었으나 그 후 Ring거리를 만듦),광장의 신시청사,빈대학 등을 차창관광 하였
다. 이때가이드로 부터 들은 말을 열거하면 ... 오스트리아는 노벨상 수상자를 16명이나 배출했다. OPEC의
본부가 이곳 비엔나에 있다. 오스트리아는 23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뉜다. 국민이 내는 세금은 연간 소득의 46
%까지 있다. 이 나라에는 우리 교민이 2,000명 정도 되며 그 중 1,200명이 학생이다. 오스트리아는 1,2,3차
산업이 발달해 있다.(2차 산업은 철강/기계,3차 산업은 은행/관광 등), 오스트리아는 1995년에 EU에 가입
하였다. 바로크식 박물관은 300년 전에는 마굿간 이었다. 비엔나로 이름이 나 있는것은 비엔나 소시지와 비엔
나 커피가 있다. 여기 말로 "안녕하세요"에 해당하는 인사는 : "그리스 곳"이라 한다. 알프스는 이곳 오스트리아
외에 4개국(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등)에 걸쳐있다. 짤츠부르크 축제기간은 7/末~8/末사이 3주간 이다. 다
뉴브강(운하)은 2,850Km로 최종 흑해로 흘러간다. 이런저런 얘기를 듣는사이 가로수로 마로니에(칠엽수)가
눈에 들어온다.우리는 점심식사 후 2시 15분에 이곳 비엔나에서 짤츠부르크로 이동하게 된다. 거리는 약 300
Km로 4시간 가량 소요될 예정 이라고 한다. 장시간 이동중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인솔자는 이제 이동하여 도
착케 될 짤츠뷰를크의 미라벨 정원에서 촬영 했다고 하는 영화 "The Sound of Music"을 틀어 주었다. 영화
의 줄거리는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 된다.
노래가 영화의 중심인 이 영화는 1958년 작품으로 오스트리아에 살았던 어느 가족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꾸민 것인
데 수녀원의 견습수녀 마리아는 성격이 쾌활하고 노래를 좋아한다. 마리아는 아내를 여위고 자녀 7명과 함께 살고있는
폰트래프 대령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마리아는 군대식으로 엄격하게 교육 받은 아이들에게 즐거운 노래를 가르
쳐 주고 알프스의 아름다운 자연을 느끼게 해 줌으로써 아이들의 명랑함을 되찾아 준다. 영화의 제목처럼 가장 기억에
남는것은 아름다운 음악이다. 도레미송,에델바이스와 같은 아름다운 노래를 마리아와 아이들이 같이 부를때는 인간의
목소리는 이토록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느낌을 주는 휴먼 드라마이다.
버스로 장시간 이동시 이런 영화를 보여주는 인솔자는 참으로 재치도 있고 격을 아는 여성이다. 물론 각본에
짜여진 수순으로 알고 있지만 ,,, 우리가 갈곳 아니면 간곳과 관련있는 영화만을 선정해 보여 줌으로 영화 내
용을 이해 함에있어 한결 수월 하였다. 나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1년에 2,3편 보는 게 고작인데 요 며
칠사이 3편을 내리 본 셈이다. 짤츠부르크에는 6시 10분경 도착 하였으며 먼저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장
소로 유명해진 미라벨 정원을 둘러 보았다. 미라벨 정원은 많은 조각상들과 분수,꽃(화단)들이 어우러져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정원"으로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여주인공 마리아와 아이들이 "도레미 송"을 불렀
던 장소로 1960년대에 만들어진 바로크 양식의 정원이며 이곳에서 바라보는 호헨 짤츠부르크성은 황홀할 정
도로 아름답게 보였다. 이곳은 지금은 정원 이지만 옛날에는 궁전에 속해있어 일반인들이 입장할 수 없었다고
한다. 17세기 부터 전체적인 조경을 중시했던 바로크 양식의 전형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녁식사 후 우리는 모짜르트가 살았던 곳 즉,모짜르트 하우스로 이동 하였다. 모짜르트 하우스는 마카르트
광장에 있는 분홍색의 건물로 그가 성장한 후 한때 살았던 곳으로 전쟁중에 피해를 입어 현재 남아있는 곳은
탄츠마이스터홀 뿐이며 1981년 모짜르테움 재단에 의해 증개축 됐다고 한다. 자자흐강이 흐르는 슈파츠교를
지나 동서로 뻗어있는 게트라이데 거리는 짤츠부르크의 중심지 이기도 하다. 활기가 넘치는 이 거리에 옛날
에는 각 상점마다 독특하게 만들어 놓은 철제간판이 인상적 이었다고 한다.가령 시계 수리점은 "시계"를 간판
으로 내 걸고, 생선 가게는 "생선"을 간판으로 내 걸었다는것이다. 이 거리에는 크고작은 유명한 상점들과 레
스토랑이 즐비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점들은 저녁 7시가 지나서인지 문을 닫은곳이 많았다. 또 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왜 그리도 많은지 아마도 유서깊은 짤츠부르크의 낭만을 즐기기 위함이 아닐지 모르겠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자자흐강에 인접한 곳에 15세기에 건축된 모짜르트의 생가가 있다. 모짜르트 생가는 그가
1756년에 태어났던 집으로 게트라이데 거리 9번지에 있다. 이 건물 3층에서 태어난 그는 17세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전시관으로 돼 있는데 그가 유년시절에 사용했던 바이올린,피아노,악보,침대 그리고
그가 아버지와 주고 받았던 편지들이 전시 돼 있다고 한다. 마침 어두워질 무렵 이었으므로 우리는 그곳을 들
어가 보진 못했다. 이어서 짤츠부르크 성당(성 베드로 성당) 앞까지 걸어가 성당 외관과 주변만 돌아 보았는
데 이 성당은 8세기에 화재로 소실 됐었다고 하며 지금의 것은 17세기부터 약 40년에 걸쳐 재건한 것으로 르
네상스 양식을 띈 바로크식 건물이자 모짜르트가 세례를 받았던 곳이라고도 한다. 짤츠부르크 음악축제가 시
작 된것은 이곳 대성당앞 광장(야외 극장처럼 의자가 여러개 계단과 줄로 놓여 있었고 약 300명정도 수용 가
능한것으로 보았음) 에서 공연한것이 시초라고 하며 지금도 이 광장에서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이후 자유시
간이 30분간 주어져 삼삼오오 흩어졌으나, 우리 부부는 호기심에 여러군데를 다리 아플 정도로 둘러 보았다.
나중에 보니 다른 일행들도 거의 우리와 같은 코스로 거닐게 돼 길을 잃지 않으려고 함께 다녔다. 어느새 밤
(8시경)이 되니 어둠이 깔렸다. 흩어졌던 일행은 집결장소(모짜르트 생가 앞)로 모였으며 버스 주차장 까지
가기위해 20여분을 걸었다. 호텔까지 가는데는 약 30분이 소요됐다. 호텔 체크인 후 투숙하다. (17,280步)
● 8일차 (8/22) : (金) 6 : 00 기상 7 : 00 조식 9 : 00 승차
오늘은 동유럽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이 어느새 1주일이 훌쩍 지나가버려 한편 아쉽기도
하고,또 한편으론 단체 행동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생각하니 한마디로 시원섭섭 하다. 투어 두쨋날 체코에
서 비를 만난것 말고는 그 후 날씨가 매일 좋았는데 오늘도 쾌청한 날씨여서 여간 다행이 아니다. 그도그럴것
이 유럽 날씨는 변덕스럽다고 하지 않는가? 이제 마지막 남은 투어코스, 짤츠감마굿으로 이동케 된다. 이곳
호텔에서 70Km정도 떨어져 있는 그곳 까지는 1시간 이면 갈 수 있다고 한다. 짤츠감마굿은 짤츠부르크에서
남동쪽으로 떨어진 아름다운 호숫가 지대(76개의 호수가 있다고 함)로 사방이 높은 산 봉우리로 둘러쌓인 자
연 경관이 뛰어난 곳이라고 한다. 버스는 10시 15분 장크트 길겐(St.Gilgen)마을에 도착,10시 50분에 예약
된 유람선에 우리 일행만 승선하여 주변 경관과 산호빛 나는 호수에 비친 산 등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며 약 45
분간 망중한을 보냈다. 인솔자는 선장실에 들어가 선내 방송으로 좌우로 펼쳐지는 산과 건물과 지형 등에 대해
연신 설명을 가했다. 이곳 장크트 길겐 마을은 모짜르트의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가 태어난 곳이라며 모짜르트의
누이동생도 음악적 소질이 뛰어났는데 모짜르트에게 가려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 짤
츠감마굿 에는 우리 교민이 30여명 살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승선한 곳의 선착장과 나중에 하선시의 선착장
은 상당한 거리가 있으며, 버스는 거기에서 우리를 기다린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는 장크트 길겐에서 볼트강
길겐(Wolfgang Gilgen)마을까지 선상유람 하면서 초록빛 호수의 물살을 가르며 유유작작 자연 경관을 만끽
하고 있는것. 이 얼마나 여유롭고 풍성한 신선놀음인고! 볼트강 길겐 마을 선착장에서 하선,자유시간이 약 30
분간 주어져 우리 부부는 호반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마을 길 소로에 접어들어 약 0.5Km떨어진 곳까지 올라가
면서 주변의 토산품점 등 상가를 둘러 보았다. 30분의 자유시간이 끝나 집결시각이 됐는데도 인솔자(박성미)
가 보이질 않아 이상하다 생각 했는데 20분이 훨씬 지나서야 허둥지둥 선착장쪽에서 잰걸음으로 오는것이 아
닌가. 버스에 올라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돈지갑을 잃어버려 혹시나 하고 우리가 타고왔던 배(유람선)에 확
인차 갔다오느라 늦어졌다는것.정작 우리에게는 여권,지갑 등 소지품 챙기는 걸 주의 하라고 입버릇처럼 누누
히 당부했던 그 자신이 지갑을 잃어버리다니 ... 이거 뿐만이 아니다. 그저께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로 이동하
던 날엔 점심식사 후 식당에 휴대폰을 그대로 놔둔채 한참 후(버스출발 1시간 후)에야 버스 안에서 전화를 찾
는것이 아닌가.운전기사의 휴대폰으로 그 식당에 확인 했으나 허사. 그러함에도 인솔자는 아무렇지도 아니한
듯 의연한 자세로 거기에 신경 쓰거나 하는 일 없이 자기 일에 충실 하였다. 우리는 항시 소지품 챙기는것에 소
홀 해서는 아니되겠다.지금 버스는 맥주로 유명한 독일 산업의 중심지 뮌헨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이곳에서
뮌헨까지는 140Km로 2시간 정도 소요 된다고 한다. 인솔자는 뮌헨의 인구는 120만명으로 푸랑크푸르트의 2
배 정도 된다면서 뮌헨은 바이메른州의 州都라고 소개한다.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경을 넘어 뮌헨에는 3시 35
분에 도착,시내 중심가에 있는 마리엔 광장에서 하차한 후 신시청사를 비롯,구시청사와 광장 중심에 서 있는
마리탑 등을 둘러 보았다. 지금 시간은 4시30분,1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져 우리 부부는 광장을 중심으로 여
러개 블럭을 거닐었다. 조금전 까지 멀쩡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 오면서 갑자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게
아닌가. 광장 앞에 몰려 든 관광객 인파들,비를 맞으면서도 피할 줄 모른다. 이는 잠시후 5시가 되면 신시청사
의 중앙 종루에 있는 인형시계에서 인형이 1단계,2단계로 나와 종소리에 맞춰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서
다. 물론 우리 일행들도 그 장면을 지켜 봤다.이어 5시 반에 버스에 승차,공항 까지는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
았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보딩시간이 되어 비행기에 오르니 올때와는 달리 만석이다. KE916편은 출발시각 밤
8시 15분이 되자 정시에 활주로를 빠지기 시작 20여분 후에 이륙 하였다. 기내에서 1시간 후쯤 저녁식사가 나
왔고 새벽엔 아침식사가 나왔다. 오랜만에 먹어 본 기내 비빔밥,그간 빵만 먹어온 터라 꿀맛같았다. 이보다 앞
서 이륙 5시간쯤 지나 시계를 다시 우리 시간에 맞춰 7시간을 빠르게 돌려 놓았다. 11시간 남짓 걸려 23일 오
후1시반경 인천공항에 착륙하였다. 이때 견장으로 작대기 3개를 단 남자 승무원이 반가운 소식이라며 올림픽
소식을 전했다.우리나라가 오늘현재 금8/은10/동6으로 종합 7위를 마크하고 있다는것. 기내의 모든사람들은
너 나 할것없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입국절차를 마친 우리 일행은 짐을 찾고 각기 해산, 우리 부부
가 공항 리무진을 타고 집에 도착한 시간은 4시 반경 이었다. (11,310步)
체 코 : 프라하
[왼쪽 : 현지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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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8일간 이므로 하루에 1건씩 쓰겠으니 양지 하시길요. 이유 ---->한 번에 긴 것을 읽으려면 지루할 뿐만 아니라 눈의 피로를 막기 위함 이오니 아셨져
경제도 어렵지만 그래도 여행은 언제나 가슴 설레이게 하지요.
편집하시느라 고생이 마나여.....복받을껴~~~~요 ㅎㅎㅎㅎㅎㅎㅎㅎ
정말 잘 보았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네요...명절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보내세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