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본다
김상영
큰물이 졌다. 양동이로 쏟아붓듯 장대비가 내리자, 개울은 금세 미어터졌다. 성난 파도같이 요동치는 형국이었다. 다리 밑 콘크리트 벽을 콱 들이받은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며 철렁철렁 차올랐다. 한 뼘만 더 쳐 오르면 우리 집 철망 울타리 밑동을 송두리째 쓸어갈 위기였다. 소싯적에 홍수로 제방이 무너지자, 아래채마저 기운 어설픈 가족사가 다시 닥칠까 안절부절못하였다. 개울을 끼고 사는 마을 사람들도 범람하는 물 앞에서 무력하였다. 이따금 스티로폼과 농약병과 호스 나부랭이 그리고 호박 몇 덩이가 엄벙덤벙 떠내려와 아래 쪽으로 흘러가는 걸 망연자실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나마 의지하는 건 마을을 막아선 콘크리트 옹벽뿐이었다.
광란의 밤이 잦아들었다. 냇물의 본성은 교과서에 실린 동요처럼 착하디착하였다. 큰물이 시냇물로 다소곳해졌을 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개울가 무성하던 풀들이 깡그리 도륙 나고 바닥이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그 정경이 너무나 정결해서, 맑고 깨끗하다는 소쇄원조차 부럽지 않았다. 단옷날 창포물에 머리 감고 그네 타던 누님들을 보는 듯하였다. 돌과 자갈과 모래가 깔깔하게 돋은 개울이다. 부실한 울타리를 보강함에 더없이 좋은 자재가 널렸다. 이곳이야말로 내 관할구역이다. 이 영역을 아무도 침범할 리 없고 보면 무주공산임이 분명하다.
냇바닥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안데스 계곡을 가로질러 비행하는 도르래에 못잖다. 머리가 나쁘면 팔다리가 고생한다고, 다리를 건너 돌아 계단으로 개울을 들락거릴 줄만 알았었다. 사다리가 가파르긴 하였으나 멜빵 달린 비료 뿌리기용 플라스틱 통에 큰 돌 작은 돌 가릴 것 없이 한가득 씩 담아 올렸다.
우리 집 울타리는 하천을 따라 길게 뻗어 있다. 장터 쪽 구석진 구역부터 큰 돌을 가지런히 잇대 세우기 시작하였다. 그 사이사이에 자갈을 채워 나갔다. 감당이 불감당으로 돋아나 뻗대던 잡초들이 비로소 항복할 것이었다. 시멘트 몇 포를 사 왔다. 울타리 밖 솔솔 허물어지던 곳곳마다 잔돌이나 납작 돌을 끼워 넣은 후 야무지게 처발랐다. 장갑 손으로 물렁 죽탕 시멘트를 쓱쓱 문질러 붙이자 제법 조형미가 돋았다. 큰물에 휩쓸려 허물어질 염려도 물 건너갔다.
얼마 후 또 한차례 장대비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하늘에 구멍이 났나, 해도 해도 너무한다고 푸념하였다. 파인 곳이 더 파이자, 개울이 한층 넓어지고 돌부리가 허옇게 드러났다. 앞 냇가가 가식 하나 없는 속살을 다 드러낸 것이다. 저 이쁜 것들이 아까워서 어쩌나 싶었다. 손댄 김에 정원 가장자리도 돋우기 시작하였다. 낮은 둑 위에 시멘트를 발라가며 돌들을 층층이 쌓았다. 돌벽이 높아진 그만큼 흙을 북돋을 수 있었다. 모래 몇 경운기를 원 없이 퍼 넣었다. 땅심이 깊어져 작물이 뙤약볕 가뭄을 견디기에 훨씬 수월할 것이었다. 울타리와 정원 텃밭이 든든하게 보강되긴 했으나 그래도 뭔가 미흡하였다. 아하 예술이 빠졌구나. 집을 에둘러 노란 페인트칠을 하였더니 화장발을 제대로 받았다. 온몸은 땀 범벅이었으나 후줄근하던 집은 뽀샤시 살아났다. 그 정경을 보는 기분이 타는 목마름 끝에 찬물 들이켜듯 청량했다. 멀리서 가까이서, 앞태도 보고 뒤태도 봤다. 자꾸자꾸 바라봤다. 저절로 뒷짐이 져지는 건 가슴을 더 열고 싶어서다. 허리춤 고이고 짝다리를 짚어도 좋다.
집을 손보는 건 수필 퇴고하는 과정을 빼닮았다. 퇴고란 내 글과의 교감이자 사랑이다. 그 달콤함이 연애와 같다. 돌을 줍고 시멘트를 바르면서도 글을 생각한다. 황홀한 글 감옥이라 아니할 수 없다. 수필을 취미 삼은 작가를 축복이라 흠모하는 이도 있건만 알아주는 사람이 드물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오랜 시간을 바치는 정성을 헤아리지 않는다.
심금을 울리는 노래 한 곡을 지으려고 작사 작곡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수정을 거듭했을 것인가. 노래에 중력이 스며들고 사람 끌어당기는 힘이 실리려면 가수는 얼마나 자신을 내려놓았을까. 자기의 민낯을 다 보여야 인기를 얻을 수 있을 터다. 그러한 진정성은, 큰물에 자신을 다 드러내는 하천 바닥과 진배없다.
몇 년 전 수필집을 내고 나서 별난 일을 겪었다. 장터 사는 소 씨 어르신이 내 책을 일곱 번이나 읽었다는 거였다. 진솔하게 펼쳐 쓴 내 생활이 재미있었음이다. 문법은 아지랑이처럼 가물가물해지고 느낌만이 일렁이며 쓴 작품들이긴 했다. 다른 책은 없나 청하길래 문학지 너덧 권을 전달해 드렸다. 통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해석할 수 없다. 직업의 귀천이나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수필이 준 선물이다. 작품 한두 편으로도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하고 더 깊이 소통하게 해준다. 펜은 상상 이상으로 영향력이 있다.
어느 신부가 강론에서 고기 먹고 싶으면 저 자신이 사 주라고 하였다. 아낸들 내 마음을 어찌 속속들이 알아줄 것이며, 시집간 딸내미들에게서 무슨 응원을 바랄 건가. 개울을 오르내리며 집을 손보고 못난 글 수리하는 나 자신이 대견하다. 이런 내게 박수를 보내며 스스로 칭찬한다.
“김 작가, 아주 좋아.”
늘그막이 좋은 것은 어떤 사연도 털어놓을 수 있음이다. 나이 지긋해지니 뻔뻔도 늘었는지 부끄러운 과거사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사람살이에 흉 될 것이 뭐 그리 있겠는가. 흥겨운 마음으로 갯돌을 주워 올리듯 가슴 열어 속을 허문다. 뻐끔한 구멍에 맞는 잔돌을 골라 막듯 문장에 들어맞는 낱말이 떠오를 때가 기쁘다. 수필에 플러그를 꼽고 행복을 충전한다. 걸작을 못 쓰면 어떤가, 행복은 이미 내 곁에 있는걸. 평생에 이토록 내가 바라던 일을 하고 살 때가 있었을까. 훗날에 이르러 ‘그때가 좋았네.’ 소리가 절로 나지 싶다. 앞 개울이 한결같이 나를 반기고, 와글와글 얘기 보따리도 얼른 풀어달라 보챈다. 흥겨운 나날을 만끽하는 나를, 실실 웃으며 바라본다. (23년 가을 / 15.3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