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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신년 특강 (Ⅰ)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
말씀 / 시편 1:1-6
요절 /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는 새해가 되면 이렇게 인사합니다. “Happy New Year!” “행복한 새해, 복된 새해 되세요”라는 인사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복을 원합니다. 그런데 대개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이고 물질적이고 세상적인 복입니다. 돈이 많으면 원하는 것을 모두 살 수 있고 뭐든 할 수 있으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유가 많다고 해서 그것이 조금은 도움이 될지언정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SNS(인스타그램)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돈으로 집을 살 수는 있지만 가정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침대를 살 수는 있지만 숙면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식품을 살 수는 있지만 식욕을 살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의사를 찾아갈 수는 있지만 건강을 살 수는 없습니다.” 물론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닐 수 있습니다. 좋은 침대를 사면 숙면에 도움이 될 수 있고, 의사를 찾아가면 건강을 회복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소유의 많고 적음이 진정한 행복을 가르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삶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이 말하는 행복은 뭘까요?
시편은 모두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 1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어 알파벳 첫 글자인 ‘알렙’으로 시작해 마지막 글자인 ‘타우’로 끝마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문학 기법상, 시편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일 뿐만 아니라 인생의 처음과 끝, 곧 전 인생에 걸쳐 적용되는 원리임을 내포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첫째,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없이 살아가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기 꾀를 의지하여 형통하고자 합니다. 그들의 꾀가 때로는 기발하고 현실적인 유익을 주지만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각종 편법, 불법을 동원하다가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가 결국 악한 도모요, 꼼수요, 작당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따르지 않습니다.
둘째,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죄인들은 빗나간 화살처럼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길은 결국 죄의 길이요, 그 길 끝에는 멸망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길에 서지 않습니다.
셋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들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 지위나 가진 것들을 자랑하며 교만이 하늘을 치릅니다. 오만한 자들의 자리는 잠시 큰소리칠 때는 좋았지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는 말씀처럼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리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앉으라고 해도 손사래를 치며 거절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알고 겸손의 자리에 앉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는 본문에 나오는 악인, 죄인, 오만한 자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그들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세상에서 잘 나가고 잘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 있는 사람은 그들의 성공이 잠시인 것을 잘 알기에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그들이 노는 물에서 함께 놀지 않습니다. 그들의 세상적인 가치관, 라이프 스타일에 거리를 둡니다.
또 시인은 좀 더 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여기 ‘오직’은 강한 강조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과 함께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교훈, 가르침으로 넓게 보면, 모세오경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즐거움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맛집에 가서 맛있는 것을 먹거나, 해외여행 인증샷을 SNS에 올리거나 좋은 차, 좋은 집을 소유하는 데서 즐거움을 누립니다. 하지만 복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세상의 즐거움이 일시적임을 압니다. 말씀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말씀이 즐겁습니다. 말씀을 보는 것이 억지가 아니고 즐거움, 그 자체입니다. 이 같은 말씀 사모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옵니다.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습니다. 말씀을 읽다 보면, 하나님과 깊이 교제하게 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길은 없습니다. 말씀을 즐거워하여 묵상하는 중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주관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격려하시고, 위로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믿음과 소망을 주시고, 모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같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참 행복합니다. 주 안에서 형제자매 된 동역자들과 함께 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남편과 자녀들과 함께 할 때 행복합니다. 그런데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니, 얼마나 기쁘고 행복할까요? 우리가 하나님과 데이트하는 설렘을 가지고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만날 때 즐겁고 행복한 사람은 금방 헤어지고도 또 생각이 납니다. 또 만나고 싶어 합니다. 계속해서 함께 하고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복 있는 사람은 말씀이 즐겁고 말씀을 가까이할 때 행복하기에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묵상’하는 것은 깊이 있는 성경 읽기를 말합니다. 인터넷 기사 읽듯 머리글만 보고 대충 읽는 것처럼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베뢰아 사람들처럼 성경 말씀이 그러한지 상고하는 자세로 읽는 것입니다. 묵상은 마치 음식을 먹듯 말씀의 맛을 음미하며 꼭꼭 씹어 먹고 깊이 소화하여 나에게 피와 살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 묵상은 말씀을 내면화하게 하며 자신에게 적용하여 삶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무신론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이론적 무신론과 실천적 무신론이 그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이론적 무신론이고,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실제 삶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것은 실천적 무신론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가장 크게 비판받는 이유는 신앙과 삶의 불일치 때문입니다. 이는 교회 안에 실천적 무신론자들이 많은 결과입니다. 말씀을 형식적이고 피상적으로만 읽고, 묵상하지 않은데 그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말씀을 수시로 묵상하는 사람은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말씀 따로, 삶 따로가 아니라 말씀과 혼연일체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는 말씀을 통해 마음이 늘 새롭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꿀보다 더 단 말씀의 맛을 누립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말씀을 갈급해하며 찾게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말씀 묵상 시간이 주의 음성을 듣는 가장 행복한 시간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매일 아침 일용할 양식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시편 1편 말씀을 묵상하고 암송하면서 순간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상반기에 시편 150편 전체를 필사하며 시편 말씀의 은혜를 새기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개인적으로도 꾸준히 말씀 묵상을 하면 좋겠습니다. 일용할 양식 책에 보면 매월 계획표가 있고 맥체인 성경읽기표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꾸준히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이 주는 은혜로 충만한 진정 복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복 있는 사람을 시인은 무엇에 비유합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를 자주 볼 수 있지만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흔하지 않았습니다. 척박한 땅의 메마른 나무만 주로 보다가 시냇가에 심은 푸른 나무를 보면 탄성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수분을 충분히 공급받기에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 수양버들이 그 많은 가지에 빽빽한 잎을 자랑하는 것은 주로 물가에 심어졌기 때문입니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푸르고 싱싱합니다. 생명력이 왕성합니다. 그래서 철을 따라 때가 되면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푸르고 싱싱하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고난이 있더라도 고난에 의해 말라버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의 생명력으로 승리하며 푸르른 인생을 살아갑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을 만나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힙니다. 내적으로 성숙해지고 예수님의 성품을 깊이 닮아갑니다. 일생을 통해 말씀을 통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가는 곳마다 이 같은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혀 그 열매를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눕니다.
그 외에도 말씀 묵상을 통해 얻어지는 열매는 많습니다. 말씀을 묵상함으로 지혜롭게 됩니다. 시편 19편 7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이 주는 지혜 중 가장 귀한 것은 구원을 주는 지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습니다. 말씀은 죄와 사탄의 얽매임에서 구원을 얻게 하는 지혜를 줍니다. 이는 말씀 안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사실 우리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하는 죄의 세력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죄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모든 죄의 세력에서부터 벗어나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죄에서 구원, 이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에 있어 가장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이는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영접할 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세상 그 무엇보다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죄에서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고,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말씀을 통해 죄를 예방하고, 혹 죄를 지었더라도 말씀으로 죄 사함을 누리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입니다. 죄로부터 구원을 얻는 삶이 복된 인생입니다.
또 복 있는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3b). 쉬운 성경은 이 대목을 ‘그가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함으로 내적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외적인 면에서도 형통하게 됩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친히 그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요셉은 억울하게 노예 생활을 하고 누명을 쓰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이 하는 모든 일마다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3).”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범사에 그의 삶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가 노예 일을 하건, 감옥에서 지내건, 그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하나님은 그를 기뻐하시고 하나님도 그와 함께하시고 그의 매사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요셉은 모든 시련과 유혹과 힘든 환경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므로 하나님과 함께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매사에 형통하게 하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 삶 속에서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훈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요셉처럼 고난이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매순간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고, 복된 길로 형통한 길로 인도해가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죽고 후계자로 누가 세움을 받았습니까?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을 앞두고 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새로운 리더로서 해야 할 일이 많았습니다. 모세 이후, 군 조직을 새롭게 정비하고 군사들에게 훈련과 기술을 연마시켜야 했습니다. 또 전술 전략을 짜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무엇을 명령하셨습니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수1:8,9).” 하나님은 정복 전쟁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다 지켜 행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호수아가 형통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시적인 측면에서 우리 눈에 보기에 성과가 있을 때만 형통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형통은 내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설령 외적으로 가시적으로,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이 없을지라도 그 사람에게 두신, 또 그 공동체에 두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다면 형통한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지만,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했던 하박국 선지자의 삶이 과연 먹통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형통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하나님이 자기 민족과 세상에 두신 뜻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힘든 고난들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면 형통한 삶이니 움츠러들 필요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 형통한 것은 말씀을 기뻐하고 주야로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그의 발에 등이요, 그 길에 빛이 됩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형통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복 있는 사람의 비결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원하지만 별로 기쁘지 않게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하루 삶 속에서 얼마나 웃으며 살아갈까요? 얼마나 행복을 느끼며 살아갈까요?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학생들은 전공으로 힘들고, 장래 취직 염려 등으로 힘들어 합니다. 직장에 다니시는 분들은 직장 스트레스로 인해 잘 웃지 않습니다. 가정 문제와 자녀 양육 등으로 주름살이 늘어만 갑니다. 캠퍼스의 척박한 영적 환경 속에 양들을 섬기고 제자 양성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목자 생활의 기쁨도 많이 줄었습니다. 또 사람은 대체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웃음이 적어진다고 합니다. “자, 웃으세요” 해야 간신히 웃습니다. 저도 자신을 생각할 때 늘 표정이 굳어져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참 많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은 곧 성경 말씀에 그 비밀이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할 때 행복해집니다. 저는 주일예배를 위해서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였지만, 다른 때는 광야에 심은 나무와도 같았습니다. 주일 말씀도 의무감에 감당할 때는 은혜보다는 제 머릿속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2024년 새해에는 주일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늘 매사에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한 행복을 누리고 나눌 때, 우리의 자녀들, 우리의 친구들, 우리의 양들도 행복해집니다. 제가 제 자신부터 말씀을 통한 행복을 누리므로 그 행복이 자녀들과 양들과 우리 교회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악인들은 아무리 열심히 살고 지혜롭게 살고자 해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겨는 껍데기로서 바람이 불면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 말씀을 떠나 사는 인생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그것을 성취한다고 해도 결국은 인생의 허무와 절망에 빠지고 불행하게 됩니다. 결국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합니다. 악인들은 최후 법정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의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인생은 최후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심판을 견디는 사람이 있고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기서 ‘견딘다’는 것은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재판장이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면을 받았기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은 사면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지 못합니다.
6절은 우리 인생들에 대한 마지막 평가입니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들의 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칭찬과 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악인들의 길은 아무리 좋아 보이는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며 멸망과 심판의 길입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무려 85년 동안 추적 관찰을 통해 행복을 연구했는데, 행복은 ‘소유’가 아닌 ‘좋은 관계’에 있다고 했습니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심해지는 지금 시대에 공동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공동체 중에서도 말씀 안에서 행복을 누리며 말씀의 관계로 맺어진 ‘Bible Fellowship’이 최고입니다. 초대 교회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기쁨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하나님을 찬미할 때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기쁨에 함께하고자 모여들었습니다. 저도 우리 모임에 처음 왔을 때 지금도 생생히 남아 있는 첫인상은 기쁘고 행복한 모습입니다.
우리 모임은 말씀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이름에 딱 ‘Bibie’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주야로 묵상하게 도와주는 좋은 영적 도구도 있습니다. 말씀 소감과 일용할 양식입니다. 일용할 양식 책자를 보면 과거와 비교되지 않게 세련된 모습이 되었습니다. MZ세대에 맞게 일용할 양식 앱도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형식은 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 묵상이라는 본질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 묵상을 강조하는 것은 부담을 지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복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말씀 묵상에서 주어지는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세상 그 어떤 삶보다도 앞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새해에도 여전히 세상은 시끄럽고 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크고 작은 여러 현실적 어려움들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런 세상과 현실 속에서 우리가 주야로 즐거워하는 말씀 묵상을 통해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더불어 하나님이 주시는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형통한 삶 되기를 기도합니다. 2024년 새해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캠퍼스와 사회 공동체 가운데 말씀 묵상을 통한 은혜를 나누므로 ‘행복 바이러스’가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