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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비비(是是非非)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다는 뜻으로, 사리를 공정하게 판단함을 일컫는 말이다.
是 : 옳을 시(日/5)
是 : 옳을 시(日/5)
非 : 그를 비(非/0)
非 : 그를 비(非/0)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한다는 뜻으로, 옳고 그름을 가리어 밝힌다는 말이다. 이 말에는 잘잘못이란 뜻도 있다. 시(是)는 ‘옳다’ 또는 ‘인정하다’의 뜻이고, 비(非)는 ‘그르다’ 또는 ‘아니다’의 뜻이다. 그러므로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여 일을 공정하게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법정(法頂) 스님의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글 속에 '是是非非都不關(시시비비도부관), 山山水水任自閑(산산수수임자한), 莫間西天安養國(막간서천안양국), 白雲斷處有靑山(백운단처유청산)'라는 문장이 있다. 즉, 옳거니 그르거니 상관말고, 산이든 물이든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 만 극락 세계랴, 흰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될 대로 되고, 다 제 갈 길을 가게 되고,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참견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말이다.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분별 망상을 쉬면 본래 자기 모습이 드러난다. 만나는 사람마다 선지식으로 생각하고, 누가 차갑게 대하면, 나 자신은 그렇게 차갑게 대한 적이 없는지 스스로 물어야 할 것이다.
세상 모든 만물은 양면성을 띄고 있다. 밝은 구석이 있으면 어두운 구석이 있고 긍정적인 측면이 있으면 부정적인 측면이 있는 법이다. 하지만 밝음과 어두움은 자연의 빛이 있기 때문이요, 긍정과 부정은 사람의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빛이 없다면 밝음과 어두움도 없고 사람의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긍정이고 무엇이 부정이겠는가.
대체로 도(道)를 깨우쳤다는 성인들의 경우 이러한 구속에서 벗어난 상태였을 것이다. 성인, 혹은 성현들은 긍정이니 부정이니 하는 것에 의거하지 않고, 자연의 본성을 관조할 뿐이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강조한 도가사상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장자(莊子)는 제물론(齊物論)에서 논쟁과 판단에 대해 이야기한다.두 사람이 논쟁을 하여 어느 한 사람이 이긴다면 그가 옳고 다른 사람이 그른 것일까? 어느 한 쪽이 옳고, 다른 한 쪽은 그른 것일까?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른 것일까?
그것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무릇 모든 사람들이란 나름대로의 편견을 가지고 있거늘, 우리가 누구를 불러다 그것을 판단케 하겠나? 만약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더러 판단해 보라고 하면, 그는 이미 자네와 의견이 같은데,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그렇다고 나나 자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나나 자네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단해 달라고 한들 어찌 올바로 판단할 수 있겠나?”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숱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매일 매일의 삶이 어쩌면 논쟁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아침밥을 먹어야 건강하다는 주장도 있고 아침을 걸러야 건강하다는 주장도 있다. 논쟁에 이긴 쪽의 주장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진 쪽의 주장이 옳다고 할 수도 없는 법이다. 제3자를 데려다 판단을 구하고자 하여도 이미 그의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판단은 무의미한 것이다. 혹은 그러한 논쟁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답을 하여도 판단 자체가 부질없는 것이 되고 만다.
주변 아이들이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아지면“그래 건강이 최고야”하며 마치 공부는 다소 쳐져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 하다가도 막상 시험 기간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문제 하나 가지고 다그치는 것이 일반적인 부모들의 심정일 것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자신의 판단조차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데 하물며 진리를 구하는 데 왕도가 있을 수 없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원래 실상이 없다.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 성내는 것은 모두가 이치에 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음의 불길을 더하지 말고 다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결로 여기라. 장점과 단점은 사람마다 있게 마련이고 세상의 인심은 어느 곳이나 한결같다. 옳고 그른 것은 원래 실상이 없이 마침내 모두가 다 부질없는 것이 된다(愚濁生嗔怒는 皆因理不通이라. 休添心上火하고 只作耳邊風하라. 長短은 家家有요 炎凉은 處處同이라. 是非無實相하여 究竟總成空이니라)."
어떤 왕이 현자에게 물었다. “가장 성질이 나쁜 동물의 이름은 무엇인가?” 현자가 대답했다. “거친 녀석은 폭군이고, 점잖은 녀석은 아첨꾼입니다.”
그렇다. 폭군이나 아첨꾼 따위라면, 그들이야말로 어리석고 못난 사람 축에 드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우둔한 인간일수록 항상 철면피한 폭력을 휘두르기 마련이고 못난 사람일수록 간(肝)에 붙고 쓸개(膽)에 붙기를 즐겨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화를 내고 성내는 것은 정도(正道)로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탓이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그들의 방식으로는 이치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행위 앞에서는 차라리 못 본 척, 못 들은 척, 귓가를 스치는 바람처럼 여기면 된다. 그들을 상대로 마음의 불길을 더하다간 그대 자신을 태워 버리게 된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원래 실상이 없다. 장점과 단점은 사람마다 있게 마련이고 세상의 인심(人心)은 어느 곳이나 한결같다
중국 명(明)나라 말기 홍자성(洪自誠)의 저서 채근담(菜根譚)의 다음 말을 음미해 둘 필요가 있다. “꾀꼬리 우는 소리는 아름답다 하고 개구리 우는 소리는 시끄럽다고 하는 것이 보통 인정이다. 아름답게 핀 꽃은 귀여워하고 잡초가 우거진 것은 보기 싫다고 뽑아 버리는 것이 인정이다. 그러나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쁘고 어느 것이 밉다는 것은 다 사람의 감정이 정한 것이지 대자연의 큰 눈으로 본다면 꾀꼬리 울음소리나 개구리 울은 소리나 각기 생명의 노래일 뿐, 아름다운 꽃이나 꽃 없는 잡초나 다 같이 생명 있는 자의 모습일 뿐이다.”
어떤가 ? 아직도 시시비비에 끌려 다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만나거든 비켜갈 줄 알면 그만이다. 다만 귓가를 스치는 바람결로 여기면 그만인 것이다.
내가 그대와 논쟁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대가 만약 나를 이기고 내가 그대에게 졌다면 과연 그대가 옳고 나는 그른 것일까? 내가 그대를 이기고 그대가 내게 졌다면 내가 옳고 그대는 그른 것일까? 그 한쪽이 옳으면 다른 쪽은 그른 것일까? 모다 다 옳거나 모두 다 그른 것은 아닐까? 나도 그대도 알 수 없다면 다른 사람은 말할 여지(餘地)도 없이 잘 모를 것이니 누구에게 판정해 달라고 할까?
그대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그는 이미 그대와 같으니 어찌 올바로 판정할 수 있으며 나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그 또한 이미 나와 같으니 어찌 올바로 판정할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와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판정해 달라고 하면 이미 나와도 그대와도 의견이 다르니 어찌 올바로 판정할 수 있겠는가? 나나 그대와 의견이 같은 사람에게 판정해 달라고 하면 나와도 그대와도 의견이 같으니 어찌 올바로 판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나 그대나 다른 사람이나 모두 알수 없으니 어찌 누구에게 판정을 기대한다 말인가. 무엇을 자연의 공평한 입장으로 모든 것을 조화시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옳다고 하는 의견과 옳지 않다고 하는 의견, 그렇다고 하는 의견과 그렇지 않다고 하는 의견을 말한다. 옳다고 하는 의견이 참으로 옳은 것이라면 곧 옳다고 하는 의견이 옳지 않다고 하는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또 구별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하는 의견이 참으로 그렇다면 곧 그렇다는 의견이 그렇지 않다는 의견과 다르다는 것을 또 말할 필요가 있는가. 변화하는 소리가 서로 대립한다는 말은 아무 대립도 없다는 말이니 마찬가지일 것이다.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누군가와 시시비비(是是非非)를가릴 때는 분명히 어떤 판정의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타당성을 증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논쟁의 과정을 거치더라도 완전한 결과를 도출해 낼수 없을 때가 많다. 왜냐하면 논쟁에서는 명확한 정(正), 부정(不正)의 판단이 아니라 상대편을 이기기 위한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자신의 의견까지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라. 참다운 진실은 논쟁이 없이도 마침내 승리하게 마련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나오는 말이다. "하루종일 시비(是非)가 있다 해도 듣지 않으면 자연히 없어진다(是非終日有 不聽自然無)."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시시비비(是是非非)는 거의 대부분이 하잘 것 없는 비방에서 비롯된다. 남을 헐 뜯어서 욕을 하는 것이 바로 비방이며, 남의 잘못이나 흠을 나무라는 것을 비난이라고 한다. 이 비난과 비방이 함께 어우러지면 적훼소골(積毁銷骨)의 힘을 가지게 된다고 하였다. 적훼소골(積毁銷骨)이란 헐뜯는 말이 쌓이고 쌓이면 뼈도 녹일만큼 무서운 힘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읍견군폐(邑犬群吠), 고을에 개가 많이 모여 들어 짖는다 즉 많은 소인배들이 남을 비방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시비(是非)의 말을 차라리 듣지 않거나 그것에 개의(介意)치 않으면 마치 도도히 흐르는 큰 강물에 침을 뱉거나 소피(所避: 오줌)를 보는 것처럼 자연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용운(韓龍雲)은 시인, 소설가, 독립운동가로서 28세에 승려가 되어 삼일운동 당시 33인의 한 사람이다. 그의 시 '비방(誹謗)' 가운데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은 비방도 많고 시기도 많습니다. 당신에게 비방과 시기가 있을지라도 관심치 마셔요. 비방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태양에 흑점이 있는것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당신에게 대하여는 비방할 것이 없는 그것을 비방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처지를 서로 바꿔서 생각한다는 역지사지(易之思之)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 사람과 같은 처지에 서 보지 않았거든 그를 비난하지 말라. 아무것도 아닌 생각과 생각의 차이가 사단(事端)이 되어 옥신각신 싸움을 하게 되고 심지어는 죽고 못 살 정도로 살갑던 오랜 우정이 깨어져 원수보다도 더 험악한 관계가 되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종종 볼수 있다.
이웃지간에는 말 할 것도 없고, 죽마지우(竹馬之友)인 어릴 적 친구 사이도, 수학(修學)을 같이한 동문이나 한솥밥을 먹는 직장 동료 선후배간에도, 혈연으로 맺어진 일가친척간이나, 가족간에도, 한 이불을 덮고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지간에 이르기 까지 아주 사소한 생각의 차이 하나로 서로 으르렁 거리며 남남 보듯 하고 모래알처럼 모여 살면서도 끈끈한 정으로 어우러지지 못 하고 제 각기 소 닭 보듯 하며 살아가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끈끈한 정으로 매듭 지어진 인연과 관계의 끈이 끊어져 나가면서 사회공동체는 점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국가기강은 썩은 고목나무처럼 자리만 차지하고 있게 되고 가정은 가정대로 지리멸렬한 상태로 하나 둘 빠져 들어가 여인숙으로 전락해 가니 심히 이 나라가 걱정된다.
사람들이 저마다 얼굴 모양새가 다르듯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와 생각이 좀 다르다고 해서 틀린 생각이라거나 잘못된 생각이라고 단정을 해버리고 내 생각만 옳다고 내 주장만 하는 것이 잘못돼는 시발(始發)이 아닌가 생각된다. 더욱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을 나를 반대하고 심지어는 적대시하는 것이라는 극단적인 예단을 하고 선제적으로 적대적 감정을 일으키며 공격을 하는데서 문제의 화근이 되는 것 같다.
그러니 같은 한 사안을 두고도 각자 처지와 입장에 따라서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있고 그 다른 생각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니며 더구나 나를 반대하거나 적대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넓은 마음으로 인정을 하고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나와 다른 남들의 생각이 옳고 더 좋을 수도 있고 내가 옳다고 믿는 나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고 더 나쁠 수도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서로간의 생각과 생각의 차이를 조금씩이나마 좁혀나갈 수는 없을까?
살면 얼마나 산다고 짧게 한번 사는 인생, 무슨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되는 양, 그리 찌푸리고 살 필요가 있을까? 시시비비(是是非非)야 가리며 살아야하겠지만 나와 다른 생각들을 틀린 생각으로 단정하고 내 주장만 하는 것은 그 것이 바로 이기심에서 빚어지는 독선과 아집이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도 유불리(有不利)와 이해관계를 떠나서 이기심으로 움튼 아집과 독선을 버리고 나와 너 우리를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고 나아가서 사람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하고 생명을 생각하고 사회를 생각하고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고 자연과 환경을 생각하고 미래를 꿈꾸는 마음들을 모으고 길러나가야 할 것이다.
조그마한 생각과 생각의 차이로 빚어지는 앙금은 애초에 훌훌 털어내 버리고 선(善)함으로 정직함으로 한 마음이 되어 각개약진으로 난맥상을 이루는 살벌한 세상으로부터 더불어 살아가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다듬어 나가는 일에 매진해야겠다. 이 일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다음은 조선 후기의 풍자, 방랑시인 김삿갓 김병연(金炳淵)의 시(詩)이다. 시시비비(是是非非)란 제목의 시(詩)인데 '시(是)'자와 '비(非)'자 두 글자만 가지고 철학적인 경구를 남겨준 시(詩)이다.
是是非非 / 金炳淵의 詩
시시비비 / 김병연의 시
年年年去無窮去 日日日來不盡來(년년년거무궁거 일일일래부진래)
이 해 저 해 해가 가고 끝없이 가네, 이 날 저 날 날은 오고 끝없이 오네.
年去月來來又去 天時人事此中催(년거월래래우거 천시인사차중최)
해가 가고 날이 와서 왔다가는 또 가니, 천시와 인사가 이 가운데 이뤄지네.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시시비비비시시 시비비시비비시)
옳은것 옳다하고 그른것 그르다 하는 것이 꼭 옳지는 않고, 그른것 옳다하고 옳은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시비비시시비비 시시비비시시비)
그른것 옳다하고 옳은것 그르다 하는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옳은것 옳다하고 그른것 그르다 하는 이것이 시비일세.
1811년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났을 때이다. 김익순(金益淳)이라는 사람은 방어사(防禦使)라는 높은 직위에 있었다. 김익순이 홍경래에게 포로로 잡히게 되었는데, 심한 고문에 못 이겨 반란에 협조할 것을 약속하고 만다. 난이 진압되고 난 후 김익순은 역적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하였고, 그 후손들은 뿔뿔히 흩어져 숨어 살아야 했다.
김익순의 손자였던 김병연(金炳淵)도 평민으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았다. 김병연은 20세 되던 해에 영월 고을에서 실시된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하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합격 후일담을 이야기 했다. 그때의 시제(詩題)가 ‘가산군수(嘉山郡守) 정시(鄭蓍)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논하고, 김익순의 죄가 하늘에 이를 정도였음을 통탄해 보아라’였다. 김병연은 ‘당연히 법대로 극형에 처하고 기강을 잡아야 한다’고 제출했다며 자랑삼아 이야기를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기겁을 했다. 어머니는 사랑채에 안치된 위패를 보여주며 기막힌 사실을 알려 주었다. 사실을 알게 된 김병연은 사죄를 하고, ‘필(筆)로써 할아버지를 두 번 죽인 불효자가 어찌 하늘을 보겠는가’ 하며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역적의 자식으로서의 부끄러움과 조상에 대한 불효 사이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올라 갖가지 행적을 조선팔도에 남기며 사람들에게 글로 웃기기도 하였고, 기이한 행동으로 수많은 서민들의 친구가 되어, 가는 곳마다 실소(失笑)를 자아내는 행적을 남기며 떠돌아 다녔으니, 훗날 우리들은 그를 ‘방랑시인(放浪詩人) 김삿갓’이라 부르며 그를 기리고 있다.
다음은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지은 팔죽시(八竹詩)이다.
차죽피죽화거죽(此竹彼竹化去竹) 이대로 저대로 되어가는 대로
풍취지죽낭타죽(風吹之竹浪打竹)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반반죽죽생차죽(飯飯粥粥生此竹) 밥이면 밥, 죽이면 죽 생기는 대로
시시비비부피죽(是是非非付彼竹) 시시비비는 저에게 맡긴 대로
빈객접대가세죽(賓客接待家勢竹) 빈객 접대는 가세대로
시정매매시세죽(市井賣買時勢竹) 시정 매매는 시세대로
만사불여오심죽(萬事不如吾心竹) 만사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연연연세과연죽(然然然世過然竹) 그렇고 그런 세상 지나가는 대로 살리라.
이 시는‘대 죽(竹)’ 자를 이두식(吏讀式)으로 풀이하여 ‘대로’로 해석하는 특이한 시로 한시(漢詩)의 격을 무시한 파격시다. 불가에서는 예로부터 이 시를 신라시대 부설거사(浮雪居士)가 지은 것이라 여겨왔다. 그러나 이 시가 김삿갓(김병연)의 시집에 수록되어 현재 전해지고 있다. 이는 후인이 김삿갓의 를 수집하여 시집을 만들 때 일부의 시가 잘못 김삿갓의 시로 착각되어 포함되었으리라 여기고 있다.
부설거사(浮雪居士)는 어려서 출가하여 불국사(佛國寺)에서 스님이 되었는데 총명 영특하여 식견이 뛰어났다고 한다. 영조(靈照), 영희(靈熙) 두 스님과 도반(道伴)이 되어 두류산(頭流山)에 가서 경론(經論)을 연구하고 법왕봉(法王峰) 아래 묘적암(妙寂庵)을 짓고 10년간 정진하다가 오대산(五臺山)으로 가던 도중 두릉(杜陵)의 백련지(白蓮池)에 있는 구무원(仇無寃)의 집에 며칠 머물다 주인의 딸 묘화(妙花)가 스님에게 연정을 품고 병이 나게 되어 구무원의 청에 의해 숙세(宿世)의 업연을 어찌할 수 없다 하고 묘화를 아내로 맞아 들여 환속(還俗)을 하여 거사(居士)로 도를 닦았다.
영조, 영희 두 스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세속에 남아 공부를 하다 아들 등운(登雲)과 딸 월명(月明)을 낳고도 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죽은 뒤 영조, 영희 두 스님이 찾아와 화장(火葬)을 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묘적암(妙寂庵) 남쪽에 부도(浮屠)를 세웠다.
시시비비(是是非非)
진실과 거짓의 명확한 구분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한다는 뜻으로, 정당함과 부당함, 진실과 거짓을 명확하게 구분함을 의미합니다. 이 사자성어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강조하며, 사실에 근거하여 올바른 것과 그른 것을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는 원칙을 나타냅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다양한 상황에서 올바른 판단과 정의의 실현을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이는 개인의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적 선택부터, 법정 판결, 사회적 논쟁, 정치적 의사결정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성어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원칙을 상기시키며, 사회적 혼란이나 개인적 갈등 상황에서 진실을 명확히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모든 판단과 결정이 사실과 정의에 기반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는 개인적 정의감뿐만 아니라, 사회적 공정성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또한, 주관적 감정이나 편견에 휘둘리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하여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합니다. 객관적인 판단은 공동체 내에서 신뢰와 협력의 기반을 마련합니다.
현대에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원칙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미디어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는 경우가 많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명확히 구분하는 능력은 개인과 사회에 필수적입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는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할 때의 기준을 제공하며,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구축하는 데 기여합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
순자(荀子) 수신(修身)편에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요,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是是非非謂之知, 非是是非謂之愚)"라고 한 것에서 유래했습니다.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가려내는 것이 지혜이며, 그와 반대로 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라는 뜻입니다.
조선 중기 문인 이식(李植) 선생은 과거시험 출제를 맡아 '시비(是非)'에 대한 주제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하늘에서 정해진 바른 이치이니 저것이 옳으면 이것은 그르고, 이것이 옳으면 저것은 그르게 마련이다. 따라서 시시비비를 따질 때에는 본디 일정한 논의가 있게 마련이니, 그 사이 사사로운 것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성스럽고 밝은 임금이 위에 계시고 많은 어진 신하들이 아래에서 보좌하고 있음에도, 선비마다 도(道)를 달리하고 사람마다 의논을 달리하면서 각자 자기들의 마음을 갖고 시비의 기준을 삼고 있다. 그리하여 급기야 사사로운 것과 바른 것이 한데 뒤섞여 분별할 수가 없게 됐고, 풍속이 무너져 바로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장차 대도(大道)가 소멸될 운명에 처해 있고 다시 바로잡을 수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이쪽이나 저쪽이나 소견이 각각 타당하기 때문에 바꿀 수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아니면 옳고 그른 것은 분명히 따로 있는데 각자 자기 생각만 따라서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때문인가? 어떻게 하면 시비를 하나로 통일시키고 국론(國論)을 바로잡아 폐단이 없도록 할 수 있겠는지 이에 대해 확실한 의논을 들려주기 바란다." 여기서 책문(策問; 과거 시험 문제)에서도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중요한 논제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시비비(是是非非)
시비는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다는 뜻으로, 사리를 공정하게 판단함을 이르는 말이다.
是자는 해(日)처럼 정확하고 바르다(正)는 뜻이 합하여 '옳다'를 뜻한다. 正자는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바르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正자와 日자가 결합한 是자는 '태양(日)은 올바른 주기로 움직인다(正)'는 뜻이다. 즉 是자는 태양은 일정한 주기로 뜨고 진다는 의미에서 '올바르다'와 '옳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非자는 새의 좌우(左右)로 벌린 날개, 나중에 배반하다, '…은 아니다' 따위의 뜻으로 쓰였다. 갑골문에 나온 非자를 보면 새의 양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非자의 본래 의미는 '날다'였다. 하지만 후에 새의 날개가 서로 엇갈려 있는 모습에서 '등지다'라는 뜻이 파생되면서 지금은 '배반하다'나 '아니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잘못, 아님, 그름 따위 부정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김삿갓은 객관적이고 중립적 입장서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시비를 명확히 가리는 시비주의자이다. 김삿갓 시 중에는 시(是)와 비(非) 단 2글자로 지은 시도 있다. 제목도 시시비비가(是是非非歌)이다. 허황된 이론을 가지고 옳다 아니다 하며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부류를 풍자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
是是非非非是是, 是非非是非非是.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으며,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옳지 않음이 아니다.
是非非是是非非, 是是非非是是非.
그른 것을 옳다 하고 옳은 것을 그르다 함이 이 그른 것이 아니며, 옳다는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함이 도리어 이 그른 것을 옳다 함이다.
놀랍게도 200년 뒤의 서양인인 도널드 럼즈펠드는 이 시와 거의 같은 내용으로 궤변을 늘어놓는다. 일명 "There are known knowns" 답변으로 "Known knowns/Unknown unknown"라는 개념 자체는 첩보 분야에서 이미 어느 정도 보편화된 개념이었지만, 이라크가 대량 살상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 여부에 대한 확실한 대답이 필요할 때 unknown unknowns라는 말을 꺼낸 것 자체가 매우 부적절하게 받아들여져 많은 비판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태복음 7장에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고 남에 대해서 단순한 판단을 넘어서 정죄하는 행위를 경계하고 계신다.
'잘잘못못'은 잘은 긍정적인 이미지이다. 그러나 못은 부정적인 이미지다. 잘은 칭찬을 할 때 '잘했다'라던가, 못은 '못했다'라던가 하는데 사용이 된다. 잘은 옳고 바르며 정확하고 좋은 뜻을 가진 반면에 못은 그르고 삐뚤며 부정확하고 나쁜 뜻을 가졌다.
상대를 비판하기에 앞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비판을 할 경우에는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비한 마음이 먼저이며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택함을 받은 성령이 계신 전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시시, 잘잘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행여나 비비, 못못의 삶을 추구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비판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경고한다. 자신을 먼저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티kavrfo(칼포스) 나무의 부스럭이와 들보 doko;n(도콘) 지붕을 바치는 중심이 되는 기둥에 비유한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깨닫지 못하느냐? 깨닫지 katanoei(카타노에이스), 깊이 생각지 않는다, 숙고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이러한 사람은 죄 없다고 스스로 여기는 자나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스스로 돌아 볼 것과 자기를 먼저 살필 것을 충고하신다.
▶️ 是(이 시/옳을 시)는 ❶회의문자로 昰(시)는 동자(同字)이다. 해(日)처럼 정확하고 바르다(正)는 뜻이 합(合)하여 옳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是자는 ‘옳다’,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是자는 日(해 일)자와 正(바를 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正자는 성(城)을 향해 진격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바르다’라는 뜻이 있다. 이렇게 ‘바르다’라는 뜻을 가진 正자와 日자가 결합한 是자는 ‘태양(日)은 올바른 주기로 움직인다(正)’는 뜻이다. 즉 是자는 태양은 일정한 주기로 뜨고 진다는 의미에서 ‘올바르다’와 ‘옳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으로 해석한다. 是자는 때로는 ‘이것’이나 ‘무릇’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래서 是(시)는 (1)옳음. 옳은 것 (2)도리(道理)에 합당함 (3)이. 이것. 여기. 이곳 등의 뜻으로 ①이, 이것 ②여기 ③무릇 ④이에(접속사) ⑤옳다, 바르다 ⑥바르게 하다 ⑦옳다고 인정하다 ⑧바로잡다 ⑨다스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의(義),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불(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다. 용례로는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을 시비(是非), 옳다고 인정함을 시인(是認), 그릇된 것을 바로잡음을 시정(是正), 바로 앞에서 이야기한 날을 시일(是日), 마찬가지로나 또한을 역시(亦是), 만일에 또는 가다가 더러를 혹시(或是), 도무지나 전혀를 도시(都是), 변하여 온 사물의 처음 바탕을 본시(本是), 나라의 근본이 되는 주의와 방침을 국시(國是), 옳다고 여기에 확정되어 있는 그 정당의 방침을 당시(黨是), 회사나 결사의 경영 상의 방침 또는 주장을 사시(社是), 학교의 기본 교육 방침을 교시(校是), 민족 정신에 비추어 옳다고 여기는 주의와 방침을 민시(民是), 다른 것이 없이 곧을 변시(便是), 자기 의견만 옳게 여김을 자시(自是),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꼭 들어 맞음을 칭시(稱是), 시비를 가릴 줄 아는 마음을 시비지심(是非之心), 옳은 것은 옳다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한다는 시시비비(是是非非), 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 또는 도리에 맞는 것과 어긋나는 것을 시비곡직(是非曲直), 옳으니 그르니 하고 시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일을 시야비야(是也非也), 어저께는 나쁘다고 생각한 것이 오늘은 좋다고 생각됨을 작비금시(昨非今是), 겉은 옳은 것 같으나 속은 다름을 사시이비(似是而非) 등에 쓰인다.
▶️ 非(아닐 비, 비방할 비)는 ❶상형문자로 새의 좌우로 벌린 날개 모양으로, 나중에 배반하다, ~은 아니다 따위의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非자는 ‘아니다’나 ‘그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非자를 보면 새의 양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非자의 본래 의미는 ‘날다’였다. 하지만 후에 새의 날개가 서로 엇갈려 있는 모습에서 ‘등지다’라는 뜻이 파생되면서 지금은 ‘배반하다’나 ‘아니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飛(날 비)자가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非(비)는 (1)잘못, 그름 (2)한자로 된 명사(名詞) 앞에 붙이어 잘못, 아님, 그름 따위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말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그르다 ③나쁘다, 옳지 않다 ④등지다, 배반하다 ⑤어긋나다 ⑥벌(罰)하다 ⑦나무라다, 꾸짖다 ⑧비방(誹謗)하다 ⑨헐뜯다 ⑩아닌가, 아니한가 ⑪없다 ⑫원망(怨望)하다 ⑬숨다 ⑭거짓 ⑮허물, 잘못 ⑯사악(邪惡)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不),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남의 잘못이나 흠 따위를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을 비난(非難), 옳은 이치에 어그러짐을 비리(非理), 예사롭지 않고 특별함을 비상(非常), 부정의 뜻을 가진 문맥 속에서 다만 또는 오직의 뜻을 나타냄을 비단(非但), 제 명대로 살지 못하는 목숨을 비명(非命), 보통이 아니고 아주 뛰어남을 비범(非凡), 법이나 도리에 어긋남을 비법(非法), 번을 설 차례가 아님을 비번(非番), 사람답지 아니한 사람을 비인(非人), 잘못되거나 그릇된 행위를 비행(非行), 불편함 또는 거북함을 비편(非便), 결정하지 아니함을 비결(非決), 사람으로서의 따뜻한 정이 없음을 비정(非情), 옳으니 그르니 하는 말다툼을 시비(是非), 옳음과 그름을 이비(理非), 간사하고 나쁨을 간비(姦非), 아닌게 아니라를 막비(莫非), 그릇된 것을 뉘우침을 회비(悔非), 이전에 저지른 잘못을 선비(先非), 교묘한 말과 수단으로 잘못을 얼버무리는 일을 식비(飾非), 음란하고 바르지 아니함을 음비(淫非), 같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비일비재(非一非再), 중도 아니고 속인도 아니라는 비승비속(非僧非俗),꿈인지 생시인지 어렴풋한 상태를 비몽사몽(非夢似夢),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라는 말을 비례물시(非禮勿視), 모든 법의 실상은 있지도 없지도 아니함을 비유비공(非有非空)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