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137편 포로들의 노래
---(팟캐스트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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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우(甘雨) 라디오/TV)---
http://gamwoo.tv/천수답의-새벽묵상-시편137편/
시편 137편에 대한 본교 성경주석의 서론은 다음과 같다. “시137편이 포로의 노래(Song of the Captive)로 일컬어져 온 것은 적절한 일이다. 그것은 포로가 된 땅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묘사한다. 그들을 사로잡은 자들이 그들을 힐난하고, 그들로 하여금 수금을 켜서 시온의 노래들 중 하나를 부르도록 요구할 때 가인(歌人)들은 침묵을 지켰다. 포로들의 마음은 울적했다. 이 시에 나타난 애처로움은 고난과 낙담 중에 있는 포로들에 대한 독자의 동정을 유감없이 자아내는 것이다.”(성경주석, 시 137:서론)
(시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 137: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그렇다. 때로는 노래도 싫고 밥도 먹기 싫을 때가 있다. 자유가 없고, 나라가 없고, 예배가 없는 삶은 무의미한 상실, 바로 그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저들이 편안하고 자유로울 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방탕하고 타락하여 우상을 숭배하다가 비로소 나라가 망하고 포로 신세로 전락하고서야 신앙의 자유를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들은 바벨론에 종속되어 이방 나라들 가운데 흩어지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새롭게 하였다. 그들이 버드나무 위에 그들의 수금을 걸어 놓고 황폐된 성전을 생각하며 슬퍼할 때에 진리의 빛이 그들을 통하여 비쳐나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열방에 퍼지게 되었다. 이방 사람의 희생 제도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도를 왜곡한 것이다. 이방 나라의 의식을 신실히 지키는 많은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에게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제사 제도의 참뜻을 배웠으며 믿음으로 구주에 대한 허락을 굳게 잡았다.”(소망, 28)
많은 경우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난 후에 그것들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가족이 세상을 떠난 후에 비로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기회를 놓치고 난 다음에서야 비로소 시간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 건강 할 때는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만 병이 들면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신앙의 자유와 매일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언제든지 예배에 나아 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귀한 특권인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래서 예배가 사람과의 약속보다 더 하찮게 여겨지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피곤하도록 일하지만 피곤하면 예배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어떤 것쯤으로 여긴다.
이런 경우 우리는 "하나님 없음"을 경험 할 수밖에 없다. 종교가 의무감이나 이기심의 동기에서 시작된 빗나간 신앙이었다면, 그래서 때로 교회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피곤하고 걸리적거리는 불편한 생활의 떼어 버릴 수도 없는 부적처럼 느껴진다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 없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삶의 포로가 되게 하신다. 영적 나태함을 고치는 하나님의 방법은 고난과 시련이다. 생활이 힘들어져서 교회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찬송을 부르고 싶어도 노래가 나올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을 경험해야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좋았던 것인지 비로소 알게 된다.
비록 3일 천하로 끝난 사건이었지만 나에게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을 시도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신앙이라는 영역에서만 살았던 나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떼어 낼 수 없는 부적같이 버거운 분이셨다. 그래서 결심을 했었다. 하나님을 거부하기로 .... 방황 끼 있는 사춘기 소년의 가출이랄까? 집을 떠나 3일을 돌아다니고 보니 배도 고프고 춥기만 하고 슬슬 부모님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무모한 방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3일 만에 아버지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짧은 시간 나는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지 경험했다.
바벨론 70년, 나라를 잃고 신앙의 자유와 안식일의 쉼도 없이 포로로 전락한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비로소 하나님이 소중했고 안식일의 예배와 자신들의 나라가 그리워 졌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 강변의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었다. 노래하기를 그친 것이다. 노래 대신 울음이 찬양대신 탄식이 입술에서 새어 나왔다.
(시 137: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시 137: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시 137: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혹시 지금 우리의 상태가 그렇지 않은가? 신앙의 즐거움이 없고, 예배를 드려도 감동이 없고, 하나님을 배반 할 수 도 그렇다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충성 하고 싶지도 않은 어색한 동거....
만일 그렇다면 오늘 시편 137편의 이스라엘의 형편을 우리의 처지로 가져 올 필요가 있다. 어리석은 일은 꼭 내가 경험할 필요는 없다. 남의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기회를 잃어버려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처럼, 폐암 수술실로 들어가는 흡연자의 후회처럼 지금 그대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기 전에 통곡하고 울어라! 그것이 오히려 지혜로운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볼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그래서 상실의 슬픔 속에서 탄식하지 않도록
감사와 기쁨이 가득한 생명력 있는 믿음 되게 하소서
신앙의 자유가 없는 북녘동포들을 생각합니다.
주님, 이 땅 이 한반도에 속히 통일을 허락하소서!
남북이 하나가 되어 얼싸안고 주의 앞에서 즐거운 찬송을 부르는 그날이 속히 오도록
저희의 믿음을 준비시켜 주시고 북쪽 위정자들에게고 애민하는 마음 가지게 하소서
주신 시간과 재능과 재물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고
그것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치 있게 사용하는 지혜로운 청지기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