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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 ]
1927년 미국 뉴욕에서 유럽의 프랑스 파리까지의 기나긴 거리, 소위 망망대해를 소형 비행기 한 대에 올라타고 33시간에 걸쳐서 단독 대서양 횡단 비행에 최초로 성공한 약관 25세의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름하여 '찰스 린드버그(Charles Lindbergh)'
찰스 린드버그는 1902년에 태어나 1974년에 사망한 세계 역사에 남을 전설적인 비행사였습니다. 그의 대서양 횡단기록이 남긴 영향은 세계 항공역사에 전설로 기록되고 있으며이후 항공업의 발달에도 굉장히 큰 기여를 했습니다. 물론 그는 영웅이 되어 엄청난 유명세를 떨쳤습니다.
1957년 거장 빌리 와일더에 의해서 린드버그의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의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원제:The Spirit of St. Louis)>입니다.
40년대 필름느와르, 50년대 로맨틱 코미디로 이름을 날린 빌리 와일더 감독, 그가 각본까지겸한 이 영화는, 전설적인 영웅의 일대기를 영화화하는데 걸맞는 네임밸류를 가진 '감독'이연출하게 된 것입니다(원래 빌리 와일더 감독은 감독 못지 않게 시나리오 작가로서도 유명한 인물입니다). 거기다 주연은 가장 호감 가는 미국적 이미지의 배우인 ‘국민배우’ 제임스 스튜어트(지금은 톰 행크스가 미국의 국민 배우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은 한국 개봉 제목과 미국 원제가 모두 의미가 있습니다. 개봉제목인 <저것이 파리의 등불이다>는 린드버그의 저서 '날개여, 저것이 파리의 불빛이다'에서 따온 것입니다. 단순한 저서제목이 아니라 꽤 감동적인 문구이죠. 이는 쏟아지는 졸음과 외로움을 견디며 33시간의 목숨을 건 비행에 도전한 린드버그가 목적지인 파리에 도착하자 감격에 겨워 외친 말입니다.
영어 원제인 <The Spirit of St. Louis(센트루이스의 정신)>는 린드버그가 타고 날아간 비행기의 이름입니다. 센트루이스의 사업가 몇 사람이 이 비행기를 만드는데 스폰서 역할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135분에 달하는 상당히 긴 편인 이 영화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항공사와 계약하고 비행기를 만들고 비행준비를 하는 과정을 다룬 전반부, 드디어 비행기에 올라타고 긴 항로를 따라서 역사적 비행에 도전하는 후반부. 전반부에서는 린드버그 특유의 무모하고 좌충우돌적인 성격과 용기를 보여주고 있고, 비행 전에는 잠 못 이루고 긴장하는 모습도 보여줍니다.
후반부는 비행기 안에서 고독과 싸우고, 졸음과 싸우고, 영하속의 항로에 갇혀서 사투를 벌이는 장면 등 실제 비행과정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비행기 안에서의 모습으로만 영화의 절반을 이끌어가는 것은 무리이므로 린드버그의 독백과 회상 장면이 상당부분 삽입되어 영화의 지루함을 덜어 줍니다.
사실 전기 영화이자 기록영화와도 유사한 이 영화의 2시간 15분이 지루하다고 한다면 33시간동안 라디오도 없이, 대화를 나눌 친구도 없이, 잠 한 숨 못자고 비행한 린드버그가 알면 섭섭하겠죠.
한 실존인물의 일대기를 다룬 실화영화인 이 작품이 지루하지 않고 매끄러운 결정적 역할은 재치있는 각본을 쓴 빌리 와일더의 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중간 중간에 나오는 위트있는 대사들은 지루함에 빠지기 쉬운 영화를 경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 파리 루브르제 공항에 도착한 린드버그
기억에 오래 남았던 대사로는 승객을 태우고 곡예비행알바를 하던 린드버그가 위험하지 않냐는 노인의 질문에 "걱정되시면 제 낙하산을 드리겠다"라고 대답하는데 "만약 낙하산이 끊어지면 어떻게 되나"라고 되묻자 "그렇게 되면 원금에 이자까지 쳐서 두배로 물어드리겠다"라는 대답을 하는 부분입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영화는 1925년 5월, 뉴욕의 롱아일랜드에서 시작합니다. 대서양 횡단 비행을 앞둔 찰스 린드버그는 계속되는 우천으로 이륙을 못하고 마음을 졸이며 숙소에서 잠을 청합니다. 자신의 생사를 가를 도전을 앞두고 억지로 잠을 청해보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몸만 뒤척입니다.
* 파리 에펠탐을 보면서...
당시 나이 25세인 청년 린드버그는 중부의 세인트루이스에서 낡은 복엽기를 몰며 우편기 조종사로 일했습니다. 하지만 비행 중 엔진 고장으로 비행기를 잃고 낙하산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이제 삶의 밑천인 비행기마저 잃고 빈털털이가 된 린드버그는 새 비행기를 사기 위해 25,000달러(현재 가치로 35만 달러)의 상금이 걸린 뉴욕~파리 논스톱 비행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당장 타고 갈 비행기를 살 돈이 턱없이 모자라 세인트루이스의 부유한 사업가들에게 펀딩을 받습니다. 그들은 이 무모한 계획에 투자하는 대신 비행기의 이름은 (The Spirit of St. Louis)으로 요구합니다(린드버그는 디트로이트 출신이지요).린드버그는 샌디에이고에 있는 라이언 사에 비행기를 주문합니다.
*날개에 매달려서 곡예비행을 하는 린드버그
라이언 사는 5인승 단엽 단발 비행기를 개조하여 여유 공간의 대부분을 연료통으로 채웁니다. 심지어는 조종석 앞부분도 연료통을 추가하는 통에 조종석에서는 앞을 볼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린드버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특수 제작된 작은 잠망경이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날아다니는 연료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대략 40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는 비행시간을 조종사 한 사람이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다른 경쟁자들은 죄다 2인1조로 도전을 합니다. 하지만 린드버그는 사람을 줄이고 연료를 더 채우기 위해 혼자 조종하기로 합니다. 그러고도 모자라 조명탄, 낙하산, 심지어는 무전기도 떼어내 비행기 무게를 줄입니다. 대서양 하늘에 배수의 진을 친 것이지요.
지루한 기다림이 끝에 고독한 비행이 시작됩니다. 대서양의 추위, 날개에 얼어붙어 양력을 떨어뜨리는 얼음, 안개, 그리고 참기 어려운 졸음과 싸우며 린드버그는 파리에 도착합니다. 비행 거리는 5,809 km였고, 비행시간은 33시간 30분 만이었습니다(지금은 여객기들이 이 구간을 7시간 남짓으로 날아갑니다).
* 몰려오는 졸음을 참고...
33시간 비행에 성공하고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파리의 루브르제 공항에 몰려들어 린드버그를 연호하는 장면이 감동적이기도 하는데 고향에 돌아와 놀랍게도 400만 명의 인파가 린드버그를 대대적으로 환호하는 장면은 '실제 기록사진'을 이용하여 마무리하였습니다.
*아! 졸려라
[ 파란만장했던 린드버그의 일생 ]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 경로
* 고도계와 계기판도 없는 비행기 - 몸의 감각에만 의존한 하늘에서의 33시간
1927년 5월 20일 아침, 린드버그는 드디어 뉴욕의 롱아일랜드를 출발했습니다. 세인트루이스의 정신은 힘차게 하늘을 날았습니다. 하지만 저녁때가 되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생각보다 날씨가 추워서 비행기 날개에 얼음이 덮인 거였습니다. 그는 손전등으로 날개를 비춰 상황을 살펴 가며 조심히 비행했습니다.
다행히 얼음은 몇 시간이 지나자 녹기 시작했습니다.한시름 놓은 순간, 이번에는 쏟아지는 졸음이 린드버그를 괴롭혔습니다. 사실 지난 열흘 동안 날씨 때문에 비행기의 출발이 자꾸 미뤄지면서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고 그래서 린드버그는 그동안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던 거였습니다.
게다가 캄캄한 밤에 하늘을 나는 것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정신을 차리려 애쓰며 비행에 집중했습니다.린드버그는 이렇게 쉬지 않고 33시간 30분 동안을 날아, 파리 시각으로 5월 21일 밤 10시 24분에 파리 인근의 르부르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최초로 뉴욕과 파리 사이를 쉬지 않고 혼자 날아간 사람이 되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하늘의 역사를 새로 쓴 젊은이에게 고국인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열광했습니다.
* 파리에서의 대환영
센트루이스의 정신이 르부르제의 넓은 풀밭 활주로에 내려앉자 20여만 명의 사람들이 비행장을 가로질러 비행기를 향해 새카맣게 떼를 지어 달려갔습니다. 린드버그의 비행기가 대서양을 날아 루브르제 공항에 착륙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리 시민들을 흥분시킨 것입니다.
비행장을 둘러싸고 있던 2.4미터의 쇠사슬 울타리가 단번에 납작하게 짓밟혀 찌그러졌습니다. 곧 이어 사람들이 린드버그를 조종석에 끌어내린 다음 그를 약탈한 전리품처럼 떠메고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중에 둥둥 떠서 공항 청사로 행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비행 헬멧은 누군가 잡아채서 벗겨갔고 그의 옷은 서로 잡아 당겨 거의 찢겨질 위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그는 땅 위에 내려섰고 두 명의 프랑스 비행사들이 린드버그를 구조하여 공식적인 공항 접견실로 안내했습니다. 이후 대사관저로 가서 우유 한잔과 약간의 음식을 섭취하고 기나긴 잠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린드버그를 떠메고 군중들이 난리들을 피울 때 한 쪽에서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어느 불운한 미국 구경꾼 한사람이 린드버그와 닮았다는 이유로 군중들이 그를 떠메고 이동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미국인은 몸부림을 치면서 항의를 해보았으나 군중들은 유리창이 부서지는 소동 끝에 공항 통제실로 떠메고 가서 내려놓았습니다.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고 코트와 벨트, 넥타이, 구두 한 짝과 셔츠 절반이 뜯기어 나갔습니다. 마치 광산 폭발사고를 당한 조난자 같은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어리둥절한 공항 직원들에게 자기 이름은 해리 휠러이며 뉴욕의 모피상이라고 해명했습니다. 그는 오직 집에 가고 싶다는 심경을 피력했습니다.
린드버그가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르부르제에서 청소부들이 6개의 틀니를 포함한 분실물을 1톤 이상 수거했습니다. 린드버그가 기나긴 잠을 깨고 대사관 발코니에 나타나자 수많은 군중들이 그를 보려고 이른 새벽부터 새까맣게 모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후 대통령 관저로 가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고 곧 이어 파리 시가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100만 명에 가까운 파리 시민들이 연도에 운집했습니다.
* 미국에서의 대환영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미국인들은 곧 바로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 버렸습니다. 일종의 광풍이 전국을 휩쓸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제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에게 평생 세금을 면제해 주자, 항성이나 행성에 그의 이름을 붙여주자, 항공부를 신설하여 그를 종신 장관에 임명하자, 5월 21일을 영구적인 국가 공휴일로 정하자, 미네소타주를 린드버그 주로 바꾸자 등등.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린드버그의 이름을 붙였으며 공원, 거리, 산, 병동, 동물원, 강, 고등학교, 다리 등 온갖 것들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린드버그에게 발송된 편지가 350만 통을 넘었는데 대부분 여자들이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때 미혼이었습니다. 그는 어디서나 메이저 리그 야구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평생 무료입장권을 받았습니다.
영국을 거쳐 배를 타고 귀국한 린드버그는 이후 3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센트루이스 정신을 타고 다니면서 각종 환영식에 참석했습니다. 환영식에 참석한 그의 얼굴은 슬픈 얼굴에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비행기를 타고 있을 때만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의 순회 여행은 69개 장소에 비행기를 타고 나타나 환영식에 참석했습니다.
* 상금 시상식, 오른편이 오티그
하룻밤을 묵게 될 때에는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아침에 방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그를 만지고 밀면서 성가시게 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예 사생활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탁소에 보낸 셔츠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가 만찬장에서 먹은 닭의 뼈와 냅킨을 가지려고 주방에서는 난장판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산책도 하지 못했고 은행이나 약국에도 갈 수가 없었습니다. 화장실에 갈 때도 사람들이 따라 다녔습니다. 그가 서명한 수표는 현금화되는 경우가 드물었고 대신 액자에 넣어 전시되었습니다. 그를 환영하는 행사는 처음부터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흥분한 구경꾼들과 심지어 환영단의 관리들조차 착륙을 하여 활주로를 달리는 그의 비행기를 향하여 돌진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는 비행기 구조상 전방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매번 위험천만한 사태가 벌어질 뻔 했습니다. 이렇게 난리 법석을 떨면서 미국 전체 순회 비행이 끝난 다음 그는 이 비행기를 워싱턴의 스미소니안 박물관에 기증합니다.
* 도전
1919년 5월 15일 라파예트 호텔 경영자인 레이먼드 오티그는 특별한 상을 제정하여 공표했습니다. 뉴욕과 파리 간 무착륙 비행을 성공한 조종사에게 상금 25,000달러를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역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 상이었지만, 그것은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상이기도 했습니다.
1924년까지 도전자가 없자 오티그는 기간을 5년 연장했습니다. 여러 도전자 중에 찰스 린드버그는 나이도 젊고 비행 경력도 별로 없는 편이었습니다. 첫 번째 도전자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적기를 75대나 격추한 프랑스의 영웅 르네 퐁크였습니다.
1926년 9월 21일 루스벨트 비행장에서 시도한 도전은 비행기가 이륙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폭발하면서 끝납니다. 르네 퐁크는 가까스로 피했지만, 함께 탄 두 명의 승무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린드버그가 도전하기까지 6명의 젊은이가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린드버그는 비행기가 오래 날기 위해서는 충분한 연료와 최소한의 무게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게를 줄이기 위해 다른 승무원 없이 혼자서 탑승하기로 했고, 최소한의 식량에 모든 구명장비를 생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엔진과 연료통 사이에 앉기를 거부했습니다.
불시착 때 너무나 많은 조종사들이 그 사이에 낀 채로 압살을 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조종석 위치인 비행기 앞부분에 주 연료통을 설치하고 조종석은 훨씬 뒤로 물렸습니다. 이는 전방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다는 의미였지만 린드버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기계공이 잠망경을 설치해 주었으나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 영화에서...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임한 과감한 조치였습니다. 대신 2,750파운드의 충분한 연료를 구비할 수 있었습니다. 린드버그의 비행기 이름은 그 비행기를 사는 데 자금을 대준 세인트 루이스의 사업가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세인트 루이스의 정신’이라고 붙였습니다.
린드버그가 대서양 횡단 비행에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919년 5월 글렌 커티스가 설계한 NC-4 비행정이 대서양을 최초로 횡단한 비행체였습니다. 그해 6월 14~15일에는 영국의 비행사 존 앨콕과 아서 브라운이 한 번도 쉬지 않고 대서양을 횡단했습니다.
최초의 대서양 무착륙 횡단 비행은 앨콕과 브라운이 기록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뉴펀들랜드에서 아일랜드까지 약 3,030킬로미터의 최단거리를 16시간 27분 비행했습니다. 린드버그는 앨콕과 브라운에 비해 훨씬 먼 거리를 긴 시간에 걸쳐 ‘단독으로’ 비행했다는 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린드버그의 정확한 판단력과 목숨을 건 도전 정신은 인류의 장거리 비행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었으며, 이후 항공기와 비행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 기계에 대한 사랑, 더 높이 더 멀리 나는 꿈으로 성장하다
찰스 린드버그는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일곱 살 때 부모가 이혼한 것은 약간의 시련이었습니다. 린드버그의 아버지가 딴 여자와 바람피우는 것을 안 어머니가 아버지의 머리에 권총을 들이 대자 화가 난 아버지가 어머니를 두들겨 패면서 부부는 이혼을 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1902년 2월 4일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나, 미네소타 주의 리틀 폴스와 워싱턴 D.C.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에 성격은 소심했고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습니다. 하도 조용해서 나중에 기자들이 그의 소년 시절을 취재하러 고향에 찾아갔는데 아무도 그를 기억하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습니다.
* 영화에서, 라이언 사 공장
할아버지 때에 스웨덴에서 이민을 왔고 아버지는 1907년부터 1917년까지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고등학교 교사였습니다.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의 미국 참전을 반대하였는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린드버그도 이후 반전주의자가 됩니다.
학교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기계를 만지는 데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동차를 아주 좋아했습니다. 191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년 동안 농장에서 일한 후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의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습니다. 2년의 교육을 마치자 그는 비행술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22년에는 링컨 비행학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하늘을 나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해 4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짜릿한 추억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변화무쌍한 세상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 오른쪽이 부인, 아래 아들은 둘째?
그는 더 멀리 더 높이 날아가는 것을 꿈꾸어 보았습니다. 하늘을 꿈꾸는 것, 그것이 곧 린드버그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링컨 학교에서의 순회비행을 통해 그는 평생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이 세상을 마음껏 날아다니리라 마음먹습니다.
1923년 린드버그는 드디어 자신의 비행기를 소유하게 됩니다. 미국 정부가 제1차 세계대전의 부산물인 커티스 JN-4 ‘Jenny’를 경매에 내놓은 것입니다. 500달러로 이 비행기를 구입한 린드버그는 비행술은 물론 비행기 자체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게 됩니다.
비행기는 위험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는 10월 제니를 아이오와에 가서 팔 때까지 운행하면서 여러 번의 사고를 겪었는데, 사고를 통해 위험에 대한 대처 능력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조심해도 당시 비행기를 탄다는 것은 죽을 각오를 포함한 모험이었습니다.
* 영화에서...조종석이 뒤에 있어 전방이 안보이고 옆으로 볼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1년 동안 텍사스 육군 비행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하기 직전, 다른 비행기와 공중에서 충돌했지만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습니다. 1925년 린드버그는 세인트루이스의 로버트슨 항공회사에 취직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한 린드버그의 집념으로 그는 특별한 직업을 선택하게 됩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시카고까지 특별 항공우편로를 통해 우편물을 전달하는 조종사가 된 것이죠. 또한 비행기 날개 위를 걷는 등 곡예비행을 통해서도 실제 비행 경험을 쌓아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오티그 상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세기의 도전을 감행하여 대서양 횡단 비행을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오랫동안 하늘을 꿈꾸어온 몽상가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 세계를 들썩이게 한 아들의 유괴사건 - 진저리를 치고 미국을 떠나다
* 신문에 보도된 유괴 사건
세기의 모험에 성공한 린드버그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추앙받는 유명인사가 되었습니다. 비행기의 출발지점인 뉴욕에 돌아오자 열광적인 축제 분위기였고 이어서 전국 순회 공연을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온통 광란의 도가니였습니다. 이후 1929년에는 재력가의 딸이자 소설가인 앤 모로와 혼인하였습니다.
신혼부부는 세계일주를 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1930년 6월에는 사랑의 결실인 아들까지 낳게 되어 행복은 배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의 씨앗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린드버그 부부가 뉴저지에서 조용히 전원생활을 하고 있던 1932년, 그들의 생후 20개월 된 아들이 유괴당하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유괴범은 린드버그에게 5만 달러를 내놓으라고 협박했습니다. 린드버그는 경찰의 도움을 뿌리치고 암흑가의 대부를 통해 유괴범과의 교섭을 구했지만, 아이는 끝내 주검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독일 이민자인 브루노 하우프트만이 살인 용의자로 체포되었습니다. 그의 재판 첫날 10만 명이 몰려들었습니다. 당시는 구경거리만 있으면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전기의자에 앉아 처형되었는데 그는 결코 자기는 살인자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이승을 하직했습니다.
* 재판정에서 린드버그와 하우트만
이 사건은 영화(마크 라이델 감독의 <린드버그 유괴사건>1996)로도 만들어져 전 세계인을 안타깝게 하기도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으로 미국에서의 삶에 진저리를 친 린드버그는 아내와 둘째아들 존을 데리고 영국으로 이사했습니다. 유럽에서 프랑스의 생리학자 알렉시스 카렐과 협력하여 장기(臟器)를 몸 밖에서 산 채로 보존하는 ‘카렐-린드버그 펌프’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 전기의자에 앉아있는 하우트만
* 독일의 기술력에 감동해 나치 숭배하기도, 만년에는 헌신적인 보수주의자로 활동
린드버그는 제2차 세계대전의 미국 참전을 반대하여 군에서 해임되기도 한 반전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행적을 보인 적도 있었습니다. 독일 공군을 방문한 후 그 뛰어난 군사력과 기술력에 감탄하여 나치의 숭배자가 된 것입니다.
심지어는 히틀러의 딸랑이 괴링에게서 훈장을 받아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독일과 미국을 전쟁을 벌인 뒤에도 린드버그는 훈장을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점차 린드버그가 나라의 영웅이 되기에 적합한 인물인가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 히틀러 딸랑이 괴링에게서 훈장을 받는 장면
일본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할 때 공군에 복귀할 의사를 표시했으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린드버그의 요청을 거부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1954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공군 준장의 계급으로 지위를 회복했지만, 나치 숭배 경력은 그의 생애에 끝내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 만년의 린드버그, 슬퍼 보입니다
그는 만년에 헌신적인 보수주의자가 되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선행을 베풀었으나 끝내 국민들의 사랑을 되찾지 못햇습니다. 린드버그는 1974년 8월 26일 하와이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은 20세기에 가장 위대했던 미국의 영웅이 끝없는 수수께끼에 싸인 인물이며 영웅으로서의 자질이 사람들이 생각한 수준보다 상당히 떨어진다는 지적만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 하와이의 그의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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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인터넷에서 영화를 볼수 있는 것을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어 아쉽네요. 극적인 삶을 살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감명을 주지요. 방금전에 장예모 감독 공리가 주연한 전기영화 "화혼"(반옥량)을 봤습니다. 한국에 나혜석(내가 증권거래소에 다닐 때 한국은행에서 오신 김 건 사장님이 있었는데 나혜석씨 아들이라고 했었습니다), 멕시코에 프리다 칼로가 있다면 중국에는 반옥량이란 여류화가가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영화를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장예모 감독 공리 주연 영화는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강추합니다
고마워요, 꼭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