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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22)
반역의 도시.
온통 어수선한 기운으로 가득한 남경을 일컫는 말이다. 어느 한날 북경으로부터 전해 온 소문은 남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남경왕 주홍이 반역을 도모했다는 것이었다.
반역. 황조가 존재한 이래 가장 엄한 벌로 다스리는 죄다. 구족을 멸한다고 했으니 그 죄의 무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거사 실패의 소문은 남경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우선은 남경왕 주홍과 친분을 쌓았던 이들은 세간을 정리하여 밤을 틈타 야반도주를 감행했고, 그동안 남경왕부와 거래했던 모든 장사치들도 발길을 끊었다.
남경은 반역의 도시로 흉흉해졌고, 그 중심은 바로 남경왕부였다.
“뭐 해! 주방에 가서 그릇 챙겨야지. 은수저가 있다고 했잖아.”
“벌써 다른 것들이 다 가져갔지 지금까지 남아 있겠어요? 잔말 말고 거기 있는 도자기나 챙겨요! 깨트리지 않게 조심하고.”
“이건 왕야께서 아끼시는 물건인데......”
사내는 망설이는 듯한 얼굴로 흰 바탕에 남색 문양이 새겨진 도자기를 쳐다보았다. 청화자(靑花瓷)라는 이름을 가졌다고 들었다. 한 번은 현무호 시전의 아른 사람에게 도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기 중의 하나라며 가져오기만 하면 은자 오십 냥을 준다고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가져간단 말이에요. 당신과 나는 오 년 동안이나 이곳에서 일했어요. 일 년도 안 된 것들이 물건 쓸어 가는 것 못 봤어요?”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여인은 사내가 물끄러미 보고 있던 도자기를 덮치듯 낚아채 천으로 둘둘 말아 한쪽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방 안에서 상당한 물건을 챙겼는지 청화자가 놓인 곳에는 잡다한 물건들로 수북했다.
“그래도 그동안 왕야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살았는데........ 군주 마마!”
어색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던 사내는 문밖에 어린 그림자를 보더니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남경왕부의 실질적인 주인인 주하연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오갈 데 없는 당신들을 거둬 준 분이 왕야였잖아요!”
주하연 뒤에 서 있던 홍아는 울먹이며 소리쳤다. 세상인심이 박하다지만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두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왕부의 곳간은 진즉에 털렸고, 지금은 각 건물의 세간이 털리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며칠 전까지 왕부에서 일을 해주던 그들이 아닌가.
문득 서러움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홍아와는 달리 주하연의 얼굴은 별다른 표정이 없었다. 한편에 쌓인 아버지가 아꼈던 물건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동안 물건들을 응시하던 그녀는 납작 엎드린 두 사람을 보며 무심히 물었다.
“그 정도면 사는 데 이장이 없겠느냐?”
새삼스러울 것도, 서운해 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이제 남경왕부는 사라질 터이고, 그나마 이곳에서 일했던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걸로 족하다.
“할 수 있는 한 많이 가져가거라. 시전에 내다팔아 봐야 제값을 받지 못하니까 당분간 생활할 만큼만 팔아서 쓰도록 해라. 그리고 군사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빨리 떠나야 할 거야.”
“군주 언니!”
“가자, 홍아야!”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주하연은 몸을 돌렸다.
“언니, 빨리 가요. 봉선각에도 들이닥쳤을지도 몰라요.”
주하연을 따라 나온 홍아는 그녀의 손을 잡고 길을 재촉했다.
“아니다. 천천히 가자. 내겐 필요 없는 것들 아니냐.”
“언니!”
그제야 주하연의 의도를 눈치 챈 홍아는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곳에 있는 세간마저도 하인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그녀는 일부러 봉선각을 비웠던 것이다.
봉선각을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이 건물 저 건물을 천천히 둘러본 두 사람은 어느덧 봉선각 앞에 도착했다. 봉선각 또한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었다. 마치 마적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방 안에는 남아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잠은 자겠구나.”
그나마 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침상을 보며 주하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군주 언니, 우리도 그만 가요.”
지금껏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가장 먼저 몸을 피해야 할 사람이 바로 그녀임에도 불구하고 말을 꺼내지 못했다. 십 년 만에 돌아왔고,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 그녀가 아닌가.
“참! 너도 이젠 가야지.”
갑자기 생각난 듯 주하연은 침상 옆 벽면으로 다가가 벽에 걸린 그림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여기에 비밀 창고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나 봐.”
벽에 달려 있는 조그마한 고리를 잡아당기며 주하연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잠시 안쪽을 더듬어 조그마한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리 와라!”
상자를 들고 침상에 앉은 그녀는 홍아를 불렀다. 그러고는 상자 뚜껑을 열어 안쪽에 있는 물건을 침상 위로 쏟아 냈다. 휘황한 광채가 퍼져 나왔다. 그동안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선물로 받았던 것들을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주로 가락지나 비녀 또는 장신구들이 대부분이었으나 금은으로 세공된 그것들은 척 보기에도 상당히 고가품들이었다.
“자!”
값이 나갈 만한 것들을 추려 낸 주하연은 천에 그것들을 싸서 홍아의 손에 쥐어 주었다.
“왜 제게......?”
“아무도 모르게 떠나. 그것들은 깊숙이 숨기고, 성문을 나갈 때는 여기 있는 것들을 써.”
“무슨 말이에요, 언니. 저 혼자 갈 순 없어요.”
“또 바보 같은 소리 한다. 난 도망치고 싶으면 언제라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어? 오히려 네가 있으면 방해가 된단 말이야.”
“그래도.......”
홍아는 말끝을 흐렸다. 결코 주하연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상승의 무공을 익힌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도망칠 수가 있다.
“내 걱정은 말고 네 살 걱정이나 해. 그리고 물건 팔 때는 역골공으로 얼굴을 바꿔야 한다. 잘못하면 수중에 있는 것 다 털리는 수가 있으니까.”
“그럼 만날 곳이라도 정해요, 언니. 제가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니가 쫓아오면 되잖아요.”
일단 남경을 빠져나가며 역골공으로 얼굴을 바꾸고 다른 곳으로 도망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기에 하는 말이었다.
“아니다. 이번에는 네가 북으로 가라. 내가 남으로 갈게. 그리고 세상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나거든 그때 돌아오너라. 여기로.”
“언니!”
홍아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를 주인으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언니로 여겼고 시집을 가더라도 그녀 곁에 있을 거라 맹세했었다.
“울고 있을 때가 아니다. 네가 빨리 떠나야만 나도 갈 수 있다. 일어나거라!”
엄한 눈으로 홍아를 쳐다보던 주하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봉선각을 나선 두 사람은 빠른 걸음으로 한가운데 건물을 향해 몸을 날렸다. 세간을 챙기던 식솔들은 모두 떠났는지 왕부의 각 건물은 폐허처럼 스산했다.
정적만이 감도는 건물들을 가로질러 아버지의 거처에 도착한 주하연은 흉물스럽게 변해 버린 방 안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섰다가 침상을 한쪽으로 치웠다.
“여길 치우면 자금산으로 통하는 비밀통로가 있어.”
내공을 운용한 그녀의 손에 백색광채가 어리고 아래쪽 나무판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두 사람 시야에 나타났다.
“어서!”
“언니........”
주하연을 향해 큰절을 올린 홍아는 눈물을 흘리며 통로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꼭 살아남으셔야 해요.”
“그래, 살아남을 거다. 어떻게 살아난 목숨인데........”
“약속했어요.”
확인이라도 하듯 주하연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홍아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래, 약속하마. 반드시 살아남는다고 약속하마.”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홍아의 모습을 좇던 주하연은 다시 내공을 운용하여 실내를 처음 상태로 복구시켰다.
“흑! 흑흑! 우왕!”
멍한 눈으로 침상 모서리에 기대앉아 있던 주하연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삼 일, 울고 싶어도 울지를 못했다. 세간을 실어 나르는 식솔들을 보면서 애써 당당하고자 했다. 웃으며 그들을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는 울 수 있다. 혼자 남았으니, 운다고 수군거릴 이들이 없기에 마음껏 울 수 있다.
얼마나 울었을까. 눈이 퉁퉁 부은 주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자 속이 후련해진 듯했다. 잠시 주변을 돌려보던 그녀가 아버지의 거처를 나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주방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그릇들을 모아 차곡차곡 정리한 다음 만두 빚을 재료를 모았다. 다행히 음식 재로들은 가져가지 않았는지 상당분량의 재료들이 남아 있었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만두 속을 만든 그녀는 부엌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얼마나 빚었을까, 한 솥 가득 들어찬 만두를 보며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언제부터인가 만두를 빚을 때마다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다 보면 만두는 어느새 그의 얼굴로 변한다. 오뚝한 코 모양을 닮은 만두가 있었고, 환하게 미소 짓는 입을 닮은 만두가 있다. 커다란 눈을 닮은 만두가 있는가 하면 그의 귀를 닮은 만두가 있다.
솥 안은 그의 얼굴로 가득하다.
한참 동안 흐뭇한 얼굴로 만두를 쳐다보다가 뚜껑을 닫고 불을 지폈다.
홍아에게는 떠난다고 했다. 하지만 떠날 수가 없다. 자신이 사라지면 어디선가 감시하고 있을 동창무인들은 남경부에서 일했던 모든 식솔들을 잡아들일 것이다. 그들 때문에라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
그리고 그 때문에 떠날 수가 없다.
자신 때문에 역적의 사위가 되어 버린 그 사람 때문에.
그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도망칠 수가 없다.
“또 나타났군요.”
모락모락 솟구치는 뜨거운 수증기를 보며 주하연은 또 웃었다. 따로따로 만들었던 그의 형상을 닮은 만두는 뜨거운 기운을 받으면 한로 합쳐져 얼굴이 된다. 희뿌연 수증기 속에 그의 모습이 들어 있다. 웃는 모습이.
하염없이 수증기를 쳐다보던 주하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음식 장만이 끝났으니 이제부터는 봉선각을 청소할 참이다. 솥뚜껑을 열어 한 김 뺀 만두를 소반에 차곡차곡 담아 밖으로 나왔다.
어두에 쌓인 왕부는 쥐 죽은 듯 적요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오늘따라 사위가 유난이 어두운 듯해 그녀는 봉선각에 도착하자마자 등부터 찾았다. 이곳저곳에서 모아 온 수십 개의 등에 불을 붙여 봉선각 주변으로 즐비하게 늘어놓았다.
“그나마 빙천수라마공을 익혔으니까 한빙쇄혼진(寒氷鎖魂陣)을 구축할 수 있겠네.”
한빙쇄혼진은 외가인 수신가에 내려온 진식이다. 공격을 위한 진식이 아닌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진으로, 빙천수라마공을 익힌 이가 반드시 필요한 진이다. 빙천수라마공을 운기하고 진 안쪽에 있으면 주변의 모든 사물은 얼어 버린다.
“일단은 준비부터.”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눈을 감고 있던 주하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왕부 곳곳에 세워져 있던 석상들을 가져와 위치를 가늠하면서 하나씩 놓았다. 봉선각 주변으로 오십여 개 석상을 배치하자 어느덧 동녘 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왔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고 그녀는 마지막 하나 남은 석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제 그 석상 하나만 제 자리에 놓으면 한빙쇄혼진을 발동할 준비는 끝난다. 안쪽으로 들어가 빙천수라마공을 십이 성까지 끌어올리면 봉선각은 얼음의 궁전으로 변할 것이다.
“얼음 공주의 얼굴이 못생기면 안 되는데. 그래도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 얼굴이 전 마음에 들어요.”
음미하듯 봉선각 주변을 보던 곰보 소녀의 얼굴이 석상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어디서부터가 시작이었을까. 석상들 주변으로 서리가 끼기 시작하더니 이내 차가운 한풍으로 변해 봉선각을 감싸기 시작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다음이었다.
봉선각 전체가 얼음의 성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오십여 개의 석상이 얼음으로 뒤덮였고,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 백색 운무는 안개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주하연이 머무는 봉선각이 얼음 성으로 변해 가는 그 시간, 남경왕부 정문으로 일단의 무리가 접근했다.
“주하연은 아직 안에 있다고 합니다.”
궁룡 하후야를 향해 보고를 올리는 인물. 북경을 출발한 동창 첩형 오영천이었다.
하후야의 보조를 맞추기 위해 비교적 느긋하게 움직인 오영천은 삼 일 전, 은밀히 남경에 입성했다. 하지만 그는 남경 성문을 통제 하는 것을 제외하면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단지 세간을 정리하여 남경을 빠져나가는 자들만 파악해 두었을 뿐이었다. 상부의 지시사항이었다. 도망치는 자들은 또 다른 동조자를 만나 도움을 청할 것이고, 그들까지 전부 엮어서 일망타진해야만 이번 작전이 끝나는 것이다.
오백 명의 부하들을 남경 곳곳에 풀어 둔 채 남경왕부는 이백의 무인들만 데리고 왔다.
“주인을 버리고 도망치던 것들이냐?”
온갖 세간을 짊어지고 한 곳에 모여 있는 이들을 보며 하후야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소가주님. 어쩔지 몰라 전부 잡아 두었습니다.”
“보내 줘라! 주하연이 안에 있다는데 굳이 쓰레기들까지 잡아들일 필요는 없다.”
벌벌 떨고 있는 자들을 가만히 쳐다보던 하후야는 남경왕부 정문을 향해 걸었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 주하연이라 했던가.......”
그러나 남경왕부 안으로 들어선 하후야는 주하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부하들에게 수색을 맡기고 봉선각까지 왔으나 그가 본 건 희뿌연 운무뿐이었다.
“쿡! 뛰어난 오성을 지녔다고 하더니.......”
뿌연 운무가 진(陣)에 의해 생겨난 것을 알아본 하후야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주하연의 입장에서 진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키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상관없지. 난 귀광두만 기다리면 되니까.”
느긋한 얼굴로 운무를 향해 다가간 하후야는 내공을 실어 안쪽을 향해 외쳤다.
“난 동창제독 하후장설의 장자인 하후야다. 해진하고 밖으로 나오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
“흥! 세상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구나. 내시 아들이 군주를 향해 반말지거리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리고 진을 설치한 것을 보고도 순순히 나올 거라 여긴 네놈은 바보고. 내시에 멍청한 머리까지 갖췄으니 조화를 이루었구나.”
“죽일 년! 오영천!”
진 안쪽에서 들려온 소리에 얼굴이 붉어진 하후야는 뒤편을 향해 냅다 고함을 질렀다.
“존명! 일 조는 진을 뚫어라!”
고개를 숙인 오영천은 고함을 내질렀다. 오영천의 명령을 받은 열 명의 동창무인들이 몸을 날려 운무 속으로 뛰어들었다.
“난 지금 식사 중이니까 방해하지 않는 게 좋다, 내시 아들.”
봉선각 계단에 앉아 만두를 입 안으로 가져가며 주하연은 차갑게 말했다. 설치한 한빙쇄혼진은 가공했다. 처음 진이 발동할 때는 차가운 한기만 돌았을 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진의 중심이 되는 곳에 앉아 빙천수라마공을 운기하자마자 엄청난 변화가 목격되었다.
온 사방이 전부 끝없는 설원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잘못 보았나 싶어 몇 번이고 눈을 비벼 보았다. 그러다가 생각 난 장소가 바로 진의 휴문(休門)이었다. 진에 의해 생긴 변화가 가장 약한 곳인 휴문에는 어느 정도 사물의 구분이 가능했는데 그런 곳이 세 곳이 있었다.
처음 빙천수라마공을 운기했던 진의 중심과 정원의 한 곳, 그리고 지금 앉아 있는 계단이 바로 휴문이었다. 계단에 앉아 전면을 응시하고 있던 그녀의 눈에 진 안으로 들어와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창무인들 열 명이 잡혔다.
“그리고 이 안에 들어온 놈은 살아서 나갈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내시 아들.”
입을 오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주하연은 동창무인들을 보며 빙천수라마공을 끌어올렸다.
일순 그녀의 몸에서 북풍한설 같은 차가운 기운이 흐르고, 반투명하게 변한 양손이 허공을 갈랐다.
빙천수라참(氷天修羅慘)이었다.
한편 명령을 받고 안쪽으로 들어온 동창무인들은 기절할 듯 놀란 얼굴로 눈앞의 광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남경왕부로 들어왔고, 봉선각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런데 봉선각이 있어야 할 곳에는 온통 설원이었다.
백색의 설원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광활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같이 들어왔던 동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동료들을 찾기 위해 몸을 돌린 동창무인 한 명은 해쓱한 얼굴로 전면을 쳐다보았다.
어디서부터 왔는지 엄청난 눈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허억!”
동창무인은 나직한 비명을 토해내며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크아악!”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동창무인은 강풍에 날린 낙엽처럼 훨훨 허공을 날았다. 그 또한 진의 모용이란 사실을 빙천수라참을 펼친 주하연이나 당한 동창무인은 알지 못했다.
“저럴 수가.......”
비명 소리와 함께 운무 밖으로 날아 떨어진 부하의 모습에 하후야는 나직한 신음을 내질럿다. 가슴이 으깨진 채 떨어진 부하의 몸에서는 피가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산 바닥에 떨어짐과 동시에 얼음 조각처럼 부서져 버린 것이었다.
“아악!”
연이어 들리는 비명 소리와 함께 진 안으로 들어갔던 부하들의 시신이 허공을 날아 차례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형상 또한 처음 튀어나온 부하와 다를 바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순간 얼음 조각으로 부서져 내렸다.
“빙천수라마공을 익혔다더니....... 역시 고금오천무라 이건가!”
이내 정신을 수습한 하후야는 파편처럼 흩어진 부하들의 시신을 보며 중얼거렸다. 사시 ㄹ부하들을 들여보낸 건 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듣지 못하고 애꿎은 부하들만 잃고 말았다. 왈칵 화가 치밀어 진 안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주하연! 그 속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는 몇날 며칠이고 여기서 기다릴 수 있다. 네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린단 말이다.”
“기다리지 말고 직접 들어와라, 내시 아들. 이 주하연을 잡고 싶으면 네놈이 직접 들어오란 말이다.”
“오영천, 운무 주변에 불을 놓아라!”
하후야는 신경질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한기를 발생하는 진이라면 불에는 약할 터이고, 진이 약해지는 순간 안으로 진입하면 될 것이다.
잠시 후.
봉선각 주변으로 활활 타는 불길과 함게 검은 연기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수많은 남경왕부의 건물들이 하나 둘씩 뜯기고, 그곳에서 나온 나무들은 불을 피우는 재료로 이용되었다.
아침나절부터 타기 시작한 불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타올랐다. 수백 채에 달했던 건물들이 차례로 스러지고 남경왕부가 있던 자리는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네.”
사방에서 밀려드는 열기가 한빙쇄혼진을 뚫고 들어오기 시작하자 주하연은 우울한 미소를 머금었다. 비만 내려 준다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무심하게도 하늘은 비를 내려 주지 않는다.
“그래도 몸이 허락할 때까지는 버텨 봐야지.”
원망스런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던 주하연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진의 중심에 해당하는 침소에 도착하여 한가운데 가부좌를 하고 빙천수라마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빙극지기가 솟구쳐 나와 한빙쇄혼진의 흐름을 따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동창무인들이 불을 끄지 않는다면 내공이 마를 때까지 계속해야 하리라. 그러다 죽는다면 그 또한 운명이나 받아들일 심산이었다.
“쯧쯧! 멍청한 놈! 저 아름다운 건축물을......... 저런 무식한 놈들 때문에 과거의 유산이 단절되는 거리고. 안 그렇소, 반 대주?”
남경왕부 건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금산 자락. 제갈승후는 한편에 서 있는 까까머리 인물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말을 건넨 인물은 칠 척에 육박하는 엄청난 덩치의 인물이었다. 얼굴을 사선으로 가르는 기다란 흉터를 가진 이자는 북천지옥대 서열 이 위이자 혈사지옥인의 수장인 지옥혈권(地獄血拳) 반시웅(潘始雄)이었다.
그리고 반시웅 뒤쪽으로 그와 같은 복장을 한 백 명의 무인들이 진득한 살기를 흘리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남경왕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동창무인 이백이라....... 너무 적군.”
무심한 눈으로 불꽃을 바라보던 반시웅의 입에서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걱정 마시오, 반 대주. 앞으로 많은 싸움이 있을 거요. 이번 동창무인을 없애는 건, 몸을 푸는 정도로만 여기면 될 거요. 남천벌도 없애야 하고, 마교도 있고, 그리고 제 삼의 세력까지. 어쩌면 남은 생을 전쟁터에서 보내게 될지도 모르오.”
“어떻게 죽이면 되오?”
“어차피 권을 쓰는데 그냥 쳐 죽이면 될 거요.”
“클, 오랜만에 손맛을 좀 보겠군.”
“좀 쉬어 두시오. 아마 내일이나 돼야 귀광두가 나타날 거요.”
“그놈에게 요광이 죽었다던데.”
“그렇소. 맞아 죽었소. 팔 다리가 뜯겨져 나가더니 마지막엔 폭발하듯 터져 버렸소이다.”
“놈은........ 내 거요, 총사. 다른 건 다 양보해도 놈만은 절대 양보 못하오.”
“그건 반 대주가 알아서 하시오. 참! 재미는 좀 보셨소?”
제갈승후는 싱긋 웃었다. 그가 자금산으로 온 이유는 혹여 있을지 모를 비밀통로 때문이었다. 하루 전날 도착하여 수하들을 굴어 놓고 기다리고 있자니 혈겸마광인 중 한 명이 조그마한 소녀를 끌고 왔다.
“오랜만에 몸을 좀 풀었소. 좋은 걸 많이 가지고 있더구먼.”
품속에서 폐물 몇 가지를 꺼내 코에 가져다 대며 반시웅은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얼마 버티지 못하고 기절해 버렸지만 오랜만에 최고의 쾌락을 맛보았다. 아직 그 여운이 사라지지 않아서인지, 비녀에 어린 체취를 맡자 하초로 피가 몰리는 듯했다.
“그런데 우리가 중 흉내를 낸다 해서 속아 넘어갈 거라 보는 거요?”
호흡이 거칠어지려 하자 반시웅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이곳에서의 임무를 마치면 자신을 제외한 혈사지옥인은 련으로 철수하고, 혈삭마령인들이 투입되게 된다.
혈사지옥인이 권장을 쓰는 무인들이라지만 소림사 승려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죽어 있는 모습만 가지고 하후장설이 속아 넘어갈지 그것도 문제였다.
“그가 속아 넘어가느냐 하는 건 문제가 아니외다. 하후장서에게 분노만 심어 주면 우리의 임무는 끝나오. 왠지 아시오?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키오. 특히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일수록 선후를 따지지 않는단 말이오. 일단 아들의 죽음과 관련되었다고 생각되는 자들은 무조건 죽일 것이오. 그리고 모두를 쳐 죽이고 난 다음에, 기분이 좀 풀리면 그때야 죄가 있는 자와 없는 자들을 따진다오.”
권력을 가진 자들, 힘을 가진 자들의 속성이다. 잠영루 살수들을 없앨 때 위지천악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권력을 가진 자들일수록 혈연에 집착이 강하고 자식의 죽음에 더욱 분노한다.
하후장설 또한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분노가 쏟아질 곳은 가장 먼저 귀광두와 소림사가 될 터이고, 그 다음은 천붕회 나머지 문파로 이어질 것이다. 북황련, 남천벌, 마교, 그리고 하후장설의 싸움은 그 다음부터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목적은 위지천악과 하후장설이 영원히 손을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요. 이 제갈승후는 말이오, 머리 위로 한 사람만 둘 거요. 이놈 저놈 다 모실 수는 없단 말입니다.’
제갈승후, 이인자의 자리만을 원한다는 그는 일인지하만인지상를 원할 뿐이었다. 그 일인에 여러 명이 포함되는 걸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되도록 혈사지옥인이 왔다 갔다는 단서를 남기지 않아야겠지요.”
“남천벌 놈들도 와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은 어떻게 할 거요?”
몸을 돌려 내려가는 제갈승후를 향해 반시웅은 물었다. 남경왕부 주변에 와 있는 무인들은 자신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남천벌 무인 삼백여 명이 자금산 너머에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귀광두 때문에 온 거요. 회하에서 남경왕부를 도왔다는 오명을 벗으려면 하후장설에게 귀광두와 봉선군주의 목을 가져가야 하거든요. 신경 쓸 필요 없소이다.”
“그럼 귀광두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그런 건 아니외다. 굳이 귀광두가 아니더라도 일어나게 될 일이었는데 그가 있어 시간이 단축된 것뿐이오. 한마디로 운이 없었던 거지요. 그리고 귀광두는 재수가 없는 별호 아닙니까. 피곤할 텐데 그만 내려가서 쉽시다. 원래 처녀와 잘 때는 부드럽게 해야 보신(保身)이 되는 법인데.......”
“끄응! 총사는 묘한 습성이 있소이다. 잊어버릴 만하면 생각나게 하니 말이오. 그나저나 귀광두나 어서 만났으면 좋겠소.”
낮게 신음을 뱉어낸 반시웅은 제갈승후를 따라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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