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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리는하나임 원문보기 글쓴이: noza
※ 사드문제만 나오면 인터넷에서는 네티즌 사이의 공방이 뜨겁다. 사드배치 찬성,반대를 떠나 먼저 미국편이냐,중국편이냐를 놓고 설전이 곧 잘 벌어지는데 우리는 누구편이냐를 따지기전에 알아야할 일들이 너무 많다. 우매하게 누구편인가를 따지기전에 먼저 미국,중국을 바로 알고 또한 우리 자신을 바로 알아야만 비로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알수있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이글을 쓰게 된다. 희망하건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1).금융제국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1944년 7월 미국은 대영제국의 손에서 금융패권을 인계받는다. 당시 루즈벨트 대통령은 세개의 세계질서확립에 성공한다. 첫째로는 정치질서인데 - 바로 <유엔(UN)>이다. 둘째는 무역질서인데 - <관세및통상협정(지금의 WTO)>이며, 셋째는 화페금융질서인데 - <브레턴우즈체제(Bretton Woods system)>이다. 미국은 이 <브레턴우즈체제>에 의하여 달러의 패권지위를 확보한다. 그러나 20여년이 지나도록(1944 -1971)미국은 실제로 달러의 패권지위를 얻은것은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 걸림돌이 되었을가? 바로 황금이었다.
이<브레턴우즈체제>를 확립하던 초기 미국은 전세계에 모든 환율기준은 달러에 맞추되 달러는 황금을 매개로 할것이라고 약속한다.그럼 어떤 표준을 할것인가?간단하게 말해서 35달러/ 1몬스(황금)로 규정지은것이다. 달러의 이런 전세계를 상대로한 약속으로 말미암아 미국의 금융패권은 사실상 구속에 갇혀야만 했다. 즉 마음대로 달러를 찍으면 안되는것이었다. 엄격한 의미에서 매35달러를 찍을때마다 금고에 반드시 1몬스의 황금을 비축해야만 한다.
미국이 이렇게 약속할수 있었던것은 당시 세계황금량의 80%를 금고에 비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미국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많은 황금이 있으니 그것으로 달러의 신뢰도를 지키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히 유지되는것은 아니었다. 2차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두개의 큰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중 하나가 바로 <6.25한국전쟁>이다. 다른 하나는 잘 아시다싶이 <베트남전쟁>, 특히 미국은 이 <베트남전쟁>에서 8천억달러나 되는 군비를 써버린것이다. 문제는 그러고도 도무지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처럼 전쟁이 길어지자 미국은 당황해났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세계에 한 약속을 이행하기 어렵게 되었기때문 이었다.(황금비축이 문제가 된것).
1971년 8월 미국인들의 손에 남은 황금은8800여톤(Ton)이었다. 이때가 되자 미국사람들은 일이 꼬여간다는것을 알아차렸다. 때를 같이하여 어떤 사람들은 고의로 미국사람들을 골려주려 작정하고 나선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다.
그는 미국사람들의 신뢰를 믿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의 재정장관과 중앙은행행장을 불러놓고 프랑스에 외환달러비축이 얼마냐고 물었다. 대락 23억달러라는 대답이 나오자 한푼도 남기지말고 전부다 꺼내어 미국사람들에게서 황금으로 바꾸어오라고 명령했다. 그것은 미국사람들에게 있어서 된방망이를 안겨준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을 계기로 세계각국 지도자들도 분분히 드골 대통령을 모방하여 황금환불을 요구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1971년 8월 15일 당시의 미국대통령 닉슨은 하는수 없이 황금창구를 페쇄한다는 선포를 하였고 그로하여 <브레턴 우즈체제>는 사실상 와해되는 길에 들어선것이다. 이것은 또한 미국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하나의<배신행위>이기도하였다. 그런데 세계는 그 헝클어진 실마리를 풀지못한채 방황만 하고 있었다. 20여년간이란 세월속에 사람들은 이미 달러를 국제상 유일한 유통화페로 써왔고, 환율도 달러가 아니면 그 기준을 정할수 없다보니 하는수없이 계속하여 달러를 기준으로 하는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 그 시기부터 사실상 달러는 보장이 없는 휴지에 불과한것이 되었다...※
그런데도 달러를 쓰지않을수 밖에 없었던것은 국제무역에서 달러를 내놓고는 환율기준을 정할수 없었기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러시아 - 중국무역에서 러시아는 위안(인민페)를 인정할수가 없었던것이고, 반대로 중국도 루블을 신뢰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이런 이미 형성된 관례는 다른 나라에게는 어쩔수 없는 막무내가로 작용하였지만 미국에겐 더없는 위로가 아닐수 없었다.
1973년 10월, 미국은 바로 이런 기회를 이용하여 석유수출기구(OPEC)를 강박하여 조약을 체결한다. 그 조약에 의하면 무릇 세계의 모든 석유거래는 달러로 계산한다는것인데 , 그 이전에는 각 나라들에서 다른 유통화페를 이용하여 거래를 할수 있었지만 이 조약이 체결된후부터는 반드시 달러로만 거래되게 만든것이다.
그로하여 미국은 황금에서 이탈된 달러의 가치를 석유라는 필수상품과 얽매어 놓음으로써 또 한번 달러의 가치를 재현할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미국사람들의 총명한 "신의 한수"였다. 많은 나라에서 달러가 싫어도 석유는 어차피 써야하는지라 하는수없이 달러를 사용하지 않을수 없게 된것이다. 이것은 달러의 새로운 패권(미국의 금융패권)시대의 서막이기도 하였다.
당시 세계상의 수많은 경제학자,금융전문가들속에서도 이것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를 깨우친자는 별로 없었을것이라고 본다. 20세기 제일 중대한 사건은 1, 2차세계대전도 아니오, 쏘베트련방의 붕괴도 아닌 바로 이 사건이라는것이다. 이후로 인류는 진정한 금융제국의 탄생을 보게 된것이다. 또한 이 금융제국은 전 인류를 그속에 강제로 포함시킨것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달러의 패권지위는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한다. 지금까지 40여년이 지났지만 사실상 그때로부터 인류는 진정 의미에서의 지페시대에 들어서게 된것이다, 달러의 뒤엔 다시는 황금같은 귀금속의 지탱도 없고 , 오로지 미국정부의 신뢰를 바탕으로 유통되었으며 미국이 전세계로부터 부를 갈취하는 수단으로도 작용한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때로부터 미국은 파란종이(달러지폐)만 찍어내도 세계의 실물을 마음껏 가져다 사용할수 있는 인류역사상 전례없는 혜택을 누리게 된것이다. 그 이전의 이런 혜택은 오로지 금,은 등 귀금속을 매개로 하는 교환이 아니면 전쟁을 일으켜서 빼앗아오는 것 뿐이었지만 이런 금융패권이 형성된후로 미국은 아주 손쉽게 세계상의 부를 저렴한 대가로 마음껏 갈취할수 있는 토대가 마련된것이다.
이런 금융패권질서의 형성은 미국으로 하여금 달러의 발목을 잡는 황금의 구속에서 벗어나 마음껏 지폐를 찍어대고 마음껏 향수하는 시대의 서막을 연것이다. 달러가 너무 많이 인쇄되어 국내에서 통화팽창이 우려되면 미국은 넘쳐나는 달러를 전세계에 수출함으로써 이런 우려를 해소하며 전세계는 미국을 대신하여 통화팽창까지 막아주어야만 했던것이다.달러의 통화팽창율이 시종 높지않은 것도 이것이 그 이유인 것이다.
만일 달러의 과도한 수출로 미국 국내에 달러가 부족하면 어찌하는가? 그럼 미국은 계속하여 달러를 찍으면 되지 않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것이다.그러나 미국은 그렇게 우둔하지 않다. 그렇게 계속하여 달러만 찍어내다보면 멀지않아 달러의 가치는 폭락할것이고 이는 미국이란 나라와 달러의 신뢰도에도 좋지 않다는것을 미국사람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것이다. 그들은 절제를 아는것이다.
1913년부터 2013년까지 미국 연방준비은행(FED)이 찍어낸 달러는 총 10조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근데 중국은 해방후 1954년 첫인민페를 발행하여서 부터 지금껏 대략 120조위안의 화페를 발행하였다고 한다. 달러환율6.2로 계산하면 대락 20조 달러나 발행하였다는것인데 중국은 이것을 절제없는 발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것이다.
그것은 중국이 개혁개방이후 대량의 미화 즉 달러를 벌어들였고 또한 이시기 대량의 외자기업이 달러를 중국에 투자하였으므로 중국정부의 외환규제정책으로 말미암아 달러는 중국에서 유통이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그에 상응한 위안을 찍어내야 한다는 논리다. 외자기업들은 돈을 벌어 달러로 바꾸어 가져갈것이고 중국 또한 달러를 이용하여 전세계를 상대로 물건, 기술 등을 사들어야 한다.
이런 과정은 달러가 나가고 위안이 갈수록 국내에 쌓이게 되는것이기도 하다. 중국정부도 약 20조 위안이 초과발행하였다고 승인한다. 이런 초과발행된 위안을 어떻게 할것인가는 중국정부의 고심거리가 아닐수 없다. 불살라버릴수도 없을 테고 ,그러니 당연히 미국을 모방하여 위안을 세계에 수출하려고 애쓰는것이다. 그것이 중국이 지금 주도하는 위안화의 국제화일 것이다. 어찌보면 중국의 30여년간의 휘황찬란한 발전의 한면에는 이런 요소도 있지 않을가 싶다.
2). 달러지수 주기율과 글로벌 경제의 관계
달러가 통화팽창이 없는것은 어쩌면 전세계에서의 유통과 떼어놓을수 없는 관계가 있기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요인은 미국 스스로도 달러의 발행을 절제하여 왔다는 점이다. 그들은 무절제 발행은 나중에 스스로 달러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신뢰 마저 떨어뜨려 자신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것이란 생각을 하는것 같다. 그런데 발행만 절제하다보면 손에 달러가 없으면 어찌 하겠는가? 미국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 하나를 고안해 낸다.
그것이 바로 국채를 발행하는것이다.이렇게 하여 나갔던 달러는 다시 국채라는 이름으로 국내로 흘러 들어온다. 미국인들은 돈을 찍어서 공짜이윤을 남기고 또한 국채를 발행하여 즉 돈을 빌려서도 돈을 버는 게임을 고안해낸 것이다. 이렇게 미국인들은 한손으로는 돈을 찍어서 공짜돈을 벌고 또 한손으로는 돈을 빌려서 공짜돈을 버는 금융유희를 고안해낸 것이다.
이렇게 앉아서도 쉽사리 돈을 벌수 있는데 무엇하러 힘들게 공장을 만들고,자신들의 자원까지 낭비하면서 제조업을 하려 하겠는가? 자신들의 자원은 미래를 위하여 남겨두고 남의 것을 가져다 쓰면 된다. 1971년 8월 15일 부터 그들은 차츰 실물경제를 버리고 가상경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점차적으로 제조업이 없는 텅텅빈 나라를 만들게 된것이다. 지금 미국의GDP는 이미 18조달러를 넘었다. 그러나 실물경제GDP는 5조가 못되는것으로 추정한다. 나머지는 전부 다 가상경제가 이루어낸 것 이라는 점이다.
미국은 바로 이런 국채를 발행하는 수법으로 달러를 회수하며 흘러들어온 돈은 미국의 3대 시장 - (선물시장, 증권시장, 국채시장)에 흘러들어 돈이 돈을 낳게 한다음 다시 그 돈을 세계에 수출한다. 이런 끊임없는 왕복순환의 이익갈취는 미국으로 하여금 금융제국의 지위를 고수할수있게 만들었다.미국은 이처럼 전세계 금융패권을 자기의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다.
대영제국이 쇄락한후 사람들은 식민지란 개념은 이제는 없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노라면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는점을 깨닫게 된다. 미국은 금융제국이 된후 이처럼 달러의 패권을 이용하여 보이지 않는 령역에서 자신들의 식민지를 넓혀왔으며 실제로 대부분의 나라들은 이미 미국의 금융식민지라고 할수 있다.
오늘날 수많은 주권나라 대국들도(중국포함) 기실은 이런 미국의 금융식민지 지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나라가 있고, 헌법이 있고,군대가 있다고 하여도 결코 달러를 떠나서는 꼼짝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각종방식의 최종결과는 결국 달러를 통하여 표현되는것이며 궁극적으로 그들의 실물재부는 이 달러라는 교환수단에 의하여 끊임없이 미국이라는 나라에 흘러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점은 40여년간 미국의 달러지수 주기도표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1971년 8월 15일 달러가 황금이란 매개와 이탈되면서 미국인들은 황금의 속박에서 해탈된것이다. 그리고 마음껏 지페를 찍어내게 되었다.달러의 발행량이 커지면서 달러지수는 자연스레 낮아지게 되었으며 1971년부터 특히 1973년 석유위기를 겪으면서 달러지수는 계속하여 낮아지는데 이는 바로 달러의 과량발행을 의미하는것이다. 이렇게 달러지수는 10년가까이 하락세가 지속된다.
이런 현상은 당시의 세계경제에 대하여 말할때 나쁜일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과량의 국내에 정체된 달러가 자연스레 밖으로 넘쳐흐르게 된다는것을 의미하며 실제로 이런 대량의 달러가 남아메리카로 흘러들어 그곳의 투자열기를 불러일으켰고 번영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보아온 70년대 남아메리카의 경제번영이다.
이번 달러의 방출기는 대략10년을 유지하였는데 1979년 미국인들은 갑자기 그 방출수문을 닫아버렸다. 달러지수가 낮다는것은 미국인들의 달러방출을 의미하며 반대로 그 방출수문을 닫아버리면 달러지수는 곧바로 상승하게 되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생기겠는가? 당시 달러가 방출되었던 남아메리카는 한창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 단계였는데 갑자기 자금줄이 끊기자 사단이 안 생길리가 없는것이다.
① 포클랜드제도 해전 폭발
위기에 처한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분분히 떨쳐나서 해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예로 아르헨티나는 당시 매인평균GDP가 발달국가 수준까지 도달하였는데 이런 경제위기가 출현하자 앞장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이런 쇠퇴의 길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여러가지인데 하필이면 그당시 아르헨티나는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군부세력이었다.
레오폴도 갈티에리 총통은 경제에는 깜깜부지인 사람인지라 그는 전쟁으로 그 경제위기를 모면하려 하였다.그는 아르헨티나에서 600키로 떨어져있는 포클랜드제도를 탈환하기로 마음먹은것이다. 그런데 이 제도는 영국에 의하여 이미 100년동안이나 식민지지배를 받고 있는 터였다.갈티에리 총통은 바로 이 포클랜드제도를 탈환하기로 마음 먹었다.
근데 남미는 미국의 뒷뜰안으로 여겨지는 터여서 갈티에리 총통은 사람을 몰래 보내어 당시 미국대통령 레이건의 태도를 알아보려 하였다. 레이건은 이미 갈티에리의 이 섬을 탈환하려는 계획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짐짓 모른체 하면서 "그건 당신들의 일이다.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만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갈티에리는 이것을 미국의 묵인으로 받아들이고 포클랜드제도 전쟁을 일으킨것이었다.
포클랜드제도는 손쉽게 아르헨티나의 손에 넘어왔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전국이 환호에 들끓었고 갈티에리는 영웅으로 떠받들리기 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영국 총리 태쳐부인은 절대로 이 결과를 받아들일수 없다면서 미국 총통 레이건에게 공개적인 입장태도 표시를 요구하였다. 이때 레이건은 돌연 중립적입장을 바꿔 아르헨티나를 강력히 규탄한다는 성명을 내고 태쳐부인의 손을 들어줬다.
그리하여 영국은 항모를 동원하여 포클랜드제도 재탈환전쟁을 벌이게 된것이다. 항모전단은 8천해리의 원정을 떠나 손쉽게 포클랜드제도 재탈환에 성공하였다. 그와 동시 달러는 강세로 돌아서기 시작하였고 국제시장 자본은 미국국내로 흘러들었다. 때를 같이하여 미국련방준비은행(FED)은 달러의 이자율상한조정 결정을 내린다. 이는 이미 계산된 미국의 암수였다. 바로 남미의 자본을 미국에 회수하는 전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많은 투자자들이 이 전쟁으로 하여 남미에서 위기를 느끼자 순식간에 남미의 투자를 철수하여 미국본토에 돌아오게 된것이다. 이렇게 미국으로 흘러든 자본은 고스란히 미국의 3대시장 - 채권 - 증권 - 선물 시장으로 몰려든것이다. 미국은 이로하여 달러가 황금과 이탈된후 처음으로 그 가치를 재현하였고 미국사람들은 앉아서 고스란히 그 혜택을 보게 된것이다.당시 미국 3대금융시장은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달러지수는 저가60선에서 단숨에 배를 넘어120선까지 치솟았다. 미국사람들은 이렇게 번돈에 만족하지 않고 되돌아서 남미의 경제공황으로 이미 바닥을 친 저가재산들을 사들였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손쉽게 남미의 재부를 손아귀에 넣었다. 비유하자면 미국인들은 남미의 <양털을 자른것>이다. 이것은 달러지수가 처음으로 강세를 맞이한 계기이고 결과이다. 근데 이런 일이 한번으로 끝난다면 그것은 우연이라 볼수 있겠지만 반복적으로 생기고 주기적으로 생긴다면 이는 규칙이라고 할수 밖에 없는것이다.
남미의 이런 금융위기가 최고봉을 맞이한 1986년 이후로 달러지수는 또다시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그동안 일본의 금융위기, 유럽의 화페위기를 겪은것이다. 달러지수는 계속하여 하락세를 보였고 대략 10년이 지난후 1997년 달러지수는 또다시 강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강세시기는 6년을 지속한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규칙성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십년하락, 6년상승, 또다시 10년하락,6년상승이라는 규률성이 있는듯하다는 점이다.
② 아시아 금융위기 폭발.
1986년 달러지수가 다시금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옹근 10년동안 달러는 썰물처럼 미국을 빠져 밖으로 나갔는데 그 주요 목적지는 아시아였다. 당시 아시아 <4소룡>의 출현, 등 현상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었다. 많은 아시아 사람들은 이 번영을 자신들의 신근한 노동과 총명한 지혜의 결과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미국달러의 쏠림현상이 가져다준 결과라는것을 몰랐다.
이런 달러의 아시아 투자가 바로 이번 번영을 가져다준 주된 계기란 사실을 몰랐다. 이렇게 10년간 아시아 사람들이 한창 번영의 성과에 도취되어 있을때 미국사람들은 또다시 <양털을 자를때>라고 생각하게 된것이다. 1997년, 그들은 다시 말해서 달러지수가 10년 하락세를 유지한후 미국인들은 아시아에 대한 투자를 공제하고 달러의 공급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다시금 달러지수를 끌어올리기 시작하였다.
이로하여 아시아의 많은 기업과 은행들은 달러의 유통량이 급속도로 줄어들자 곤경에 빠지게 된다. 어떤 기업들은 아예 돈줄이 끊겨 규모를 줄이던데서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제2차 금융위기의 징조였다. 이때는 말그대로 물이 끓어 99도에 이르러 섭씨1도만 올라가면 바로 끓어번질 정점을 한발 앞둔 상태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비등점에 불을 붙일가? 또다시 아르헨티나처럼 전쟁을 유도할것인가?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것은 아니었다. 총명한 미국인들은 그 비등점을 고심하고 있은것이다. 그들은 이런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역적 위기를 만들어내는 것 만으로도 이 비등점을 점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연구해낸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보게된것은 소로쓰라는 금융투기업자의 양자 펀드와 수백개 헤지펀드들을 동원한 타이(태국)에 대한 공격이었다.
이리떼처럼 일제히 달려들어 제일 빈약한 태국의 화페인 바트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불과 일주일의 공격은 바트를 무너지게 만들었고 그 파장효과는 동남아로 급속도로 퍼지면서 말레이시아, 싱가폴,인도네시아, 필리핀을 거쳐 북상하여 대만, 홍콩,일본,한국을 거쳐 러시아까지 전파된것이었다. 그리하여 동남아 금융위기가 폭발한것이다. 이때를 비유하자면 이미 물은 섭씨 백도에 도달하여 끓어번지기 시작한것이며 불안을 느낀 전세계 투자자들이 분분히 아시아로 부터 자금을 회수하게 만드는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때를 같이하여 미국사람들은 기다렸다는듯이 또다시 달러의 이자율을 올리는 수법을 써서 달러의 주가지수를 끌어올린다. 그리하여 이렇게 아시아로부터 철수된 자본은 고스란히 미국의 3대시장에 흘러들어 미국에게 제2차의 번성기를 가져다 주었다. 미국인들은 이렇게 재다시 <양털을 자른후>되돌아서 아시아의 바닥친 저가재산들을 사들였다. 이때는 아무런 준비가 없던 아시아는 그냥 앉아서 당하기만 하게 되는것이다. 이 난리속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것은 중국이었다.
③ 중국을 겨냥하다.
이 이후로 이것은 마치 조석처럼 규칙이 되어버린듯 하였다. 달러지수는 또 다시 6년간 강세를 유지하다가 2002년부터 하락세로 돌아섰는데 그후 또 다시 10년이 지난후 2012년 미국사람들은 재차 달러지수를 끌어올리려는 시도를 하였던 것이다. 방법은 계속하여 그 낡은 방법, 즉 지역성 위기를 조성하는것, 그리하여 우리가 보게된것은 선후로 중국주변을 둘러싼 "천안문 사태", "댜오위도우(센카쿠) 분쟁", "황옌도우 분쟁", 등이다.
이런 사건들은 전부 이 시기에 일어난것들로 이는 미국의 배후조종으로 이루어졌다는것을 알수 있다. 가석한것은 미국은 그에 앞서 2008년 스스로 "불꽃놀이"에 자신들이 먼저 금융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그리하여 달러지수는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겉으로 보기엔 중 - 필리핀의 "황옌도우 분쟁" , 중 - 일의 "됴우위도우(센카쿠)분쟁" 은 달러지수의 강세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것 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러할가?.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달러지수가 세번째로 연속10년의 하강세를 이어간후에 이런 일들이 나타난것일가? 이것에 대하여 생각해본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다. 허나 이것은 묵과할수 없는 문제라는 점이다. 만일 우리가 1971년 달러가 황금의 속박에서 벗어난후 확실히 지수주기율같은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미국사람들은 바로 이런 규률에 따라 또 다시 다른 나라의 <양털 자르기>를 하려 했던것임이 분명하다.
나는 그 차례가 바로 중국이었다고 본다. 그럼 무엇때문에 중국이라고 보는 것인가? 그것은 중국이 그동안 세계 각나라의 투자가 집중된 곳 인데다 달러가 집중적으로 흘러든 곳 이라는 점이다. 경제규모로 볼때 중국은 남아메리카 전체보다도 더 크며 , 전체 동남아 경제규모보다도 더 크다. 다량의 투자가 중국으로 몰려들어 중국은 이미 세계2위의 경제규모를 갖춘것이다. 경제규모만으로 따진다면 더는 중국을 하나의 나라로 볼수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점들을 미루어 볼때 미국사람들이 세번째<양털 자를>목표로 중국을 정했다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④ 홍콩 시위 사태.
만일 이 판단이 정확한것이라면 2012년 부터 "중 - 일 센카쿠영토분쟁", "중 -필리핀 황옌도우 분쟁", " 중 - 베트남의 갈등" "홍콩의 독립운동"등 수많은 중국을 에워싼 갈등들은 우발적이라고 볼수 있을가? 재작년 "홍콩의 시위"사태는 실제로 그해 5월부터 움트기 시작하였으며 6월,7월,8월 이렇게 몇달을 지나면서도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서 나는 또 다른 사건의 시간표와 대조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것은 미연방 은행의 (FED) QE 퇴출시간표다. 4월부터 소문만 무성하던 이 시간표는 5,6,7,8,월을 거치면서도 꼭 마치 무엇을 기다리기라도 하듯 시종 퇴출을 안 한것이다.
QE퇴출을 안한다는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볼때 달러는 계속하여 초과발행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며 달러지수는 상승조건이 충족되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9월말이 되어서야 미연방은행(FED)은 QE탈퇴를 선언한다. 때를 맞춰 달러지수는 상승세가 뚜렷해지고 10월초 "홍콩사태"가 폭발한다. 세심히 관찰해보면 이 두 사건의 일치는 절대로 우연이라고 볼수 없다.
기실 "중 - 일 센카쿠분쟁","중 - 필리핀 황옌도우쟁","중국- 베트남981시추대분쟁"등 사건들은 어느 하나라도 도화선이 될수 있으며 폭발점이 될수 있는것이다. 이 네개의 폭발점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폭발이 된다면 지역성 금융위기를 불러오기에 중분하다. 달러지수의 상승세에 맞춰 이런 위기상황을 만들어야만 불안한 자본들이 중국을 떠나 미국본토에 흘러들게 하는데 효과발휘를 할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미국은 이번에 상대를 잘못선택한것이다.
중국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중국 사람들은 교묘하게 "태극권법식"으로 하나하나의 모순들을 유연하게 풀어 나갔다. 그리하여 미국은 지금껏 자신들이 애타게 바라는 그 비등점의(99도) 마지각 섭씨1도를 높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물은 아직도 끓어번지지 못하였고 미연방 은행(FED)의 기준금리 인상은 계속하여 늦출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많은 사람들이 아직까지 중국을 잘 모르는데 중국은 지구상 "모략"의 발원지이며 그 역사는 유규하다. <손자병법>, <삼국연의> 등은 그것을 잘 알려준다. 특히 <손자병법>은 미국 장교급들의 군사학원 필수과목이기도 하다. ※
그쯤되어 미국도 중국의 <양털 자르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인지하였던지 아니면 한나무에 목을 매달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던지 "홍콩사태"를 추동하는 동시에 다른곳을 물색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방향이 과연 어데였던가? 여기서 한가지 논리를 추론한다면 <미국은 세계를 자신들의 키우는 양떼로 생각하는것이며 어느양의 몸에 털이 잘 자랐으면 가위들고 그 양털을 자른후 놓아준다. 그러고 다시 가위를 들고 또 다른 양털이 풍부한 목적양을 찾는다는 것이다.>
⑤ 우크라이나 위기.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러시아사이의 접경지대 나라이다. 야누코비치대통령이 이끄는 우크라이나도 역시 미국에게는 삐집지 못할 틈바구니는 못된다. 미국은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말을 따르지 않는 야누코비치를 떨어뜨리는 동시에 유럽 - 러시아의 밀월관계를 차단하여 유럽의 투자환경을 악화시키는 등 <꿩먹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때는> 그런 효과를 노린것이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국내에는 일대 색갈혁명이 일어났고 미국인들의 예상대로 목적을 실현하게 되었다. 때를 같이 하여 러시아 대통령 푸틴은 크림을 합병한다. 이것은 워낙 미국인들의 계획밖이었지만 마침 유럽과 일본을 압박하여 러시아를 제재하는데 동참하게 만듬으로써 유럽과 러시아의 경제침체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데 활용하게 된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왜 이렇게 할가? 많은 사람들은 지역과 정치각도로만 문제를 보고 자본의 각도에서 문제를 바라보지 않기에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힘들어 한다. 우크라니아 위기가 촉발된후 유럽과 러시아사이의 급속한 관계악화와 서방나라들의 러시아 제재에 따른 결과는 유럽의 투자환경을 악화시켰을뿐만 아니라 수많은 자본이 유럽을 떠나는 효과를 만들어 내었다는 점이다.자료에 따르면 이 시기 유럽을 떠난 자본은 수조억달러에 이른다고 한다.이로써 미국은 그 첫단계 목적을 달성한것이다.
중국의 자본을 빼내어 올수 없다면 유럽의 자본이라도 빼내어 미국본토에 흘러들게 하여야 하는것이다. 이 한 수는 희극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위기로 손쉽게 이루어졌다. 그런데 다음의 한수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수치의 통계에 의하면 그렇게 유럽을 떠난 자본 전부가 직접 미국3대 시장에로 흘러들어간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많은 자본들은 유럽을 떠나 홍콩에 머문것이었다.
많은 자본들은 역시 미국의 경기회복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었으며 반대로 이미 하락세로 접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세계 제일의 증장세를 이어가는 중국시장을 선호한것이다. 또한 때를 맞춰 중국정부가 추진한 후깡퉁(沪港通)정책으로 중국증시에 진출하여 한몫을 벌어보려 시도한것이었다. 과거 서방의 자본은 중국증시에 감히 발을 들여놓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중국정부의 엄격한 외화정책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들어가긴 쉽지만 나오기가 힘든것이 문제였다. 그렇기 때문에 서방의 자본들은 중국증시에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하였던것이다. 근데 후깡퉁(沪港通)의 정책은 그들로 하여금 그런 우려들을 해소하게 만든것이다. 그들은 후깡퉁을 이용하여 홍콩에서 직접 상해증시의 주식들을 사고팔고 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돈벌면 손쉽게 홍콩을 통하여 빠져나갈수 있었던것이다. 통계에 의하면 수조달러에 달하는 자본이 홍콩에 머물러 있으면서 중국증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것이다.
이처럼 미국사람들이 공들여 마련한 첫단계의 수고는 도무지 그들의 의도에 따라 직접 미국3대시장으로 흘러들지 않았다. 미국은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이 자본이 미국시장에로 흘러들게 만들어야만 하는데 그 목적달성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리하여 두번째단계의 작업을 시작할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바로 홍콩에 대한 위기조성 시도라는것이다. 그것은 또한 이런 세력들이 절대로 홍콩에서 손뗄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국경제는 무엇때문에 이렇듯 세계의 자본이 미국본토에 흘러드는데에 의탁하여야만 하는가? 그 원인을 분석하여 보자. 1971년 8월 15일 달러가 황금이란 매개체와 이탈한후 미국경제는 차츰 실물생산을 포기하였고 실물경제에서 멀어져갔다. 미국인들은 저급적인 말단의 제조업을 발전중 국가에 이전하였으며 (그들의 말로 쓰래기 산업)대량의 이런 기업들이 중국에 흘러 들어가 자리잡은것이다.
미국본토에는 그야말로 최첨단 산업들인 예를 들면 IBM, 마이크로소프트, 등 기업들외에 70% 사람들은 금융업과 금융서비스업에 종사하였다. 이시기의 미국은 이미 텅텅빈 가상경제의 나라가 되어버린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실물경제가 없는 상황에서 투자유치가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버린것이다. 자본을 흡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가상경제의 대문을 활짝여는것 뿐이다 그 가상경제의 대표적인것이 바로 3대 시장인 - 선물시장, - 증권시장 - 채권시장인 것이다.
그렇기에 반드시 대량의 자본이 그 3대시장에 흘러들어 돈을 낳게하는 방법으로 돈을 번 다음 다시 그 돈을 이용하여 세계 다른 나라의 <양털 자르기>하는 수법 , 오로지 이것만이 작금의 미국이 생존하는 유일한 방식이 되어버린것이다. 이러한 <생태환경>은 반드시 수많은 자본이 미국으로 흘러들어 미국인의 일상생활과 경제를 뒷바침해 주어야만 가능하다.
※ 그렇기에 무릇 어느 집단이나 국가가 이런 자본의 흐름을 막는다면 그는 곧 미국의 적이 되는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문제만은 철저히 알고 있어야만 한다. ※
3). 유럽의 일체화, 아시아의 일체화는 미국이 느끼는 위협
1999년,1월1일부터 유로가 정식으로 가동됬다. 불과 3개월 이후 코소보 전쟁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코소보전쟁이 미국과 나토가 연합하여 밀로세비치의 정권을 타격한 줄로만 알고 있다. 미국은 당시 밀로세비치정권이 코소보지구에서 다량의 알바니아인들을 학살하였다는 소름끼치는 비인도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전쟁이 끝난후에야 이 소문은 거짓으로 드러났다.
그후 미국인들은 이것이 CIA와 서방매체가 손잡고 조작한 사기극이라는것과 목적은 유고슬라비아 정권을 뒤엎기위한것임을 승인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코소보 전쟁은 정말로 유고슬라비아정권을 뒤엎기위한 전쟁이었을가? 유럽인들은 처음엔 모두가 그렇다고만 생각하였다. 그런데 이 72일간의 전쟁이 끝난후에야 유럽인들은 비로소 악몽에서 깨어났다.
①코소보 전쟁
유로가 가동초기 유럽인들은 신심에 벅차있었다.그들은 유로의 환율을 달러대비 1 : 1.07로 하였다. 코소보 전쟁이 일어나자 나토회원국들인 유럽인들은 이 전쟁에 참가하였다.전력을 다해 미국을 위하여 코소보를 공격하였다. 72일간의 무차별 폭격을 거쳐 밀로세비치의 정권은 끝장났고 유고슬라비아는 투항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난후 유럽인들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유로가 불과70여일 사이에 30%나 떨어져 0.82달러/ 1유로가 된것이다. 그때가 되서야 유럽인들은 모든것을 알아차렸다. 정말이지 "남에게 팔려간줄도 모르고 남을 대신해 돈을 세어주는 꼴"인것이다. 이것은 그 이후 프랑스와 독일 이 두 유럽의 중심나라가 미국의 이라크전쟁에 견결히 반대를 하고 나선 까닭이기도 하다.
어떤이들은 서방의 민주주의 나라지간에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2차 세계대전이후 지금껏 서방의 민주주의 나라지간에는 확실히 싸움이 없었다.그러나 그것은 어데까지나 군사적충돌이 없었을뿐 경제, 금융 충돌이 없은 것은 아니다. 코소보전쟁은 미국인들의 유로에 대한 간접적인 경제,금융전쟁인것이다. 결과 때린것은 유고슬라비아인데 아픈것은 유로였다 .
유로가 탄생하기 전까지는 전세계의 유통화페는 오로지 달러뿐이었다. 전세계적으로 계산에 사용되는 달러는 80%에 달하였다. 지금도 60%가까이 되고 있지만. 유로의 탄생은 이런 달러의 이익을 23%나 뜯어간것이다. 유럽연맹은 27조억달러에 상당하는 경제체이다. 이런 유럽연맹의 탄생은 순식간에 당시의 제일큰 무역체인 북미자유무역지대(24조억달러규모)를 능가한것이다.
이러한 규모의 유럽연맹은 당연히 내부무역에서 달러를 사용하려 할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유로가 탄생한것이다. 유로의 탄생은 일시에 달러의 1/3의 결산량을 뜯어갔다. 지금껏 세계적으로 23%의 무역결제는 유로를 사용한다. 이는 달러의 지분을 그만침 뜯어간거나 다름없다. 초기에 미국사람들은 유로의 탄생이 미치는 효과에 대하여 충분한 예상을 못하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유로가 달러의 패권지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처럼 유로의 탄생은 직접적으로 미국의 이익을 건드렸다. 그리하여 미국은 이 교훈은 잘 섭취하여 한편으로는 유로를 억제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도전자들을 사전에 억제하여야만 했던것이다.
② 아태지역 - 동아시아 연합경제체의 탄생을 막아라.
중국의 굴기는 미국에 있어서 또하나의 도전자가 아닐수 없다. 2012년 뚀우위도우(센카쿠)분쟁, 황옌도우 분쟁은 바로 미국이 성공적으로 중국의 새로운 도전을 억누르려는 시도였다고 할수 있다. 이 두개의 중국주변에서 발생한 정치적 사건은 비록 대량의 자본이 중국으로부터 미국에 흘러들어가는 효과는 만들어내진 못하였지만 일정부분 미국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도 볼수 있는것이다. 그것은 어데까지나 미리 매설해놓은 지뢰마냥 중국에게 있어서는 애환거리가 아닐수 없기 때문이다.
2012년초, 한중일의 동북아 자유무역지대의 협상이 막바지 단계로 접어들면서 4월 중일 화페호환 , 및 쌍방의 국채보유에 대한 협약이 맺어졌다. 그러나 이때 공교롭게도 "뚀우위도우(센카쿠) 분쟁", "황옌도우 분쟁"이 연속으로 일어나면서 순식간에 앞의 협약들을 물건너가게 만들었다. 사실상 이는 <동아시아경제협력체>의 파괴를 위한 또 다른 미국의 배후 개입을 의미하기도 한다.
몇년이 지난후에야 한중사이에서 가까스로 자유무역협정 담판이 개시되긴 하였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때 이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것은 한중일 동북아 자유무역협정하고는 비교할 가치가 없기때문이다. 만일 한중일 동북아 자유무역협정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자연적으로 한, 중,일, 대만, 홍콩,마카오,등이 스스로 묶여지는 20조달러 규모의 제3경제체의 탄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제3의 경제체가 탄생한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여기서 그치지 않을것이다. 남으로 밀고 나가 동남아권을 흡수하며 동아시아 경제체로 발전한다는것이다.이렇게 된다면 북미와 유럽을 능가하는 30조억 달러를 넘어서는 세계상의 제1의 경제체가 탄생할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것이다. 근데 상상은 여기서 그치는것이 아니다. 우리는 계속하여 그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로 하자 .
이러한 동아시아 경제권은 점차적으로 서쪽의 인도와 남쪽의 아시아국가들을 통합하고 북쪽으로 중앙아시아5개국을 통합하며 또 다시 서쪽으로 더 나아가서 중동의 부분적 아시아 나라까지 통합한다면 이렇게 꾸려진 아시아대륙의 경제체는 50조달러를 훌쩍 넘어서서 북미와 유럽을 합친 규모보다 더 커질수 있다. 만일 이렇게 방대한 자유무역체가 형성된다면 이들이 과연 유로나 달러를 결제수단으로 쓰려할가? 당연히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화페 아시아 원이 곧 탄생할것이며 이는 달러지위에 대한 새로운 도전을 의미하게 될것이다. 중국이 이 과정중에서 바라는것은 바로 위안의 국제화이다.중국은 위안을 내세워 달러처럼 만들려 하고 있다. 달러가 북미의 유통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세계화페로 된듯이 중국도 바로 아시아경제체의 중심으로서 그의 역할을 발휘하려 할것이다. 중국 위안의 국제화 의미는 시진핑의 일대일로에 힘입어 그 역할이 점차적으로 막대해져 달러, 유로에 이어 세계자본과 세계금융권을 3분할것이다.
중국인들은 언녕 이런 구상을 하여 왔을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이 이를 모를리 있을가?.미국이 전략적 핵심을 태평양 동아시아에 옮긴다고 선포할때부터 이는 자명한 일이었다. 이어서 일본을 시켜 "뚀우위도우(센카쿠)분쟁"을 일으키게 하고 필리핀을 추동하여 "황옌도우 분쟁"을 일으키게 하는것 등은 이를 잘 설명한다. "뚀우위도우(센카쿠)분쟁"은 처음 일본 우익세력들이 섬매립으로 시작하여 분쟁을 일으켰고 "황옌도우 분쟁"은 머리돌아뿌린 아키노 정권이 미국의 추동하에 중국에게 고의적인 마찰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것은 단지 겉으로 드러난것이지만 실상은 미국의 <위안이 달러에 대한 도전>을 견제하기 위한 사전의 심사숙고를 거친 의도적인 계획이라고 본다. 미국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제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또다시 이런 도전자를 용납할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반드시 동아시아의 경제공동체부터 막아야 한다고 생각할것이다.
자칫하다가는 한중일 이 세나라의 동아시아 경제공동체의 연쇄작용에 힘입어 전체 아시아대륙의 공동체가 탄생되는일은 어쩌면 별로 긴 시간이 필요없이 불과 몇년이면 이루어질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국제금융패권의 3분천하가 이루어지게 되는것이다. 한번 상상해보라. 손에 1/3의 금융권을 가지고 패권이라고 할수 있겠는가?...게다가 이미 껍데기만 남은 미국의 가상경제에서 금융패권까지 없다면 미국은 과연 초강대국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이런 점을 고려해볼때 오늘날의 중국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안들에는 항시 미국의 그림자가 있음을 알수 있다. 그것은 멀리를 내다보는 미국이 장래에 우환이 될수 있는 중국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동아시아 재균형 전략이란 과연 중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과 베트남, 중국과 필리핀 등 사이의 분쟁을 해소하기위한것일가? 아니다, 절대 아닐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굴기하는 중국에 대한 견제일뿐이라고 본다.
4). 미군은 오로지 달러를 위해 전쟁한다.
사람들은 흔히 미국의 강대함은 화페, 과학기술, 군사 이 세가지 버팀목이 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오늘날에 볼때 진정으로 미국의 초강대국지위의 버팀목은 화페와 군사이다. 그리고 화페를 지탱하는 힘은 곧 군사력이다.세계의 어떤 군대이든지 싸움은 곧 돈을 태우는것이나 다름없다. 근데 미군도 전쟁하면서 물론 돈을 태우지만 그것은 한편으로는 돈을 태우지만 한편으로는 돈을 버는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다른 어떠한 나라도 할수 없는오직 미국만이 할수 있는 일이다.때로는 실수할때도 있기는 하지만...
① 이라크 전쟁.
미국은 무엇때문에 이라크를 침공했을가?. 아마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르는것은 두 글자 - 석유 일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진정 이라크의 석유때문에 전쟁을 하였을가? 대답은 NO이다. 만일 미국이 석유때문에 이라크전쟁을 발동했다면 무엇때문에 전쟁이 끝난후 이라크로부터 한통의 석유도 가져가지 않았겠는가?그리고 석유 값이 전쟁전의 38달러/배럴 으로부터 전쟁후 149달러/배럴 까지 치솟아 올랐는데도 말이다.
뿐만아니라 미국의 백성들도 미군의 이라크점령으로부터 저가의 석유에 대한 향수를 못 누렸다. 그렇기때문에 미국의 이라크전쟁은 석유를 위한전쟁인것이 아니고 달러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인가? 도리는 아주 간단하다. 세계를 재패하기위해 미국은 전세계가 오직 달러를 사용하게 하여야만 했다. 바로 전세계가 오직 달러만을 쓰게 하기위해 미국은 오래전 1973년에 이미 신의 한수인 석유의 결재를 달러와 묶어놓는 작업을 한것이다.
세계석유조직 (OPEC)의 우두머리인 사우디아라비아를 협박하여 세계의 모든 석유를 오직 달러로 결산하게끔 만든것이다. 이것을 정확히 이해할수 있다면 그대는 무엇때문에 미국이 석유산지나라에서 전쟁을 발동했는가를 알수 있을 것이다. 석유산지나라에서의 전쟁은 자연적으로 석유값의 폭등을 초래하게 되어있다.석유값의 폭등은 달러의 수요량의 확장에 직접적 영향을 끼친다.예를 들어 전쟁전에는 38달러면 한배럴의 석유를 살수 있는데 지금은 석유값이 폭등하여 4배로 뛰어서 150달러가 수요된다.
당신손의 38달러는 원래석유량의 1/4밖에 살수 없다. 나머지 3/4배럴 석유의 의미는 아직 112달러의 미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방법은 오직 자기의 산품을 들고 미국에 가서 달러를 바꾸어야 한다. 이때 미국은 아주 자연스레 그리고 광명정대하게 달러를 찍어댈수 있는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전쟁을 통하여 (석유산지나라에서의 전쟁을 통하여) 석유값을 끌어올림으로써 달러의 수요량을 늘리는 비법인것이다.
게다가 미국인들의 이라크에서의 전쟁은 단지 이 하나의 목적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찌보면 달러의 패권지위를 보장하기 위한 측면이 더욱 크다. 당시 아들 부시가 무엇때문에 기어이 이라크전쟁을 발동하였는지를 지금에 와서 볼때 아주 명확히 드러난다. 싸담 후쎄인은 테러주의자도 아니고 알 카에다 조직도 없으며 생화학무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데도 싸담후쎄인의 교수형대에서의 처참한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싸담 후쎄인이 스스로 총명한체 하면서 대국사이에서 불꽃놀이를 한 결과였다고 본다.
1999년 유로의 탄생은 후쎄인으로 하여금 유로와 달러사이, 그리고 미국과 유럽연맹사이에서 불꽃놀이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게 한것이다. 그리하여 후쎄인은 앞으로 이라크의 모든 석유는 유로로 결산한다고 선포한것이다. 이것은 미국으로 하여금 극도의 격분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후쎄인의 이런 선포는 곧바로 연쇄반응을 불러 일으켰는바 선후로 러시아의 푸틴대통령, 이란의 마흐무드대통령, 베네수엘라 차베스대통령 등도 잇따라 자기나라의 석유도 앞으로 유로로 결산할것이라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결국 일은 이렇게 커진것이다. 이것을 가만히 놔둘 미국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미국의 가슴에 칼을 박는 행위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라크전쟁은 피면할수 없는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나의 이런 견해를 너무나 자의적인 해석이 아닌가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싶은것이 있다. 그것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후 제일 처음 한 일들이 무엇 이었는가이다.
미국은 후쎄인을 잡기도 전에 급급히 이라크의 임시정부부터 구성한다. 다음은 임시정부를 통한 첫번째 법령부터 공포한다.그것은 바로 앞으로 이라크의 모든 석유는 달러로 결산한다는것이었다. 유로로 결산한다에서 다시금 달러로 결한한다로 고친것, 이것이 바로 미국은 달러를 위하여 전쟁한다는 나의 견해에 대한 첫번째 확증이다.
② 아프카니스탄 전쟁.
어떤이는 나보고 그럼 미국이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전쟁은 달러를 위한 전쟁이 아니지 않는가? 아프카니스탄은 석유도 안나는데 말이다, 라고 물을것이다. 하물며 아프카니스탄전쟁은 9.11테러 사건이후 전세계인의 주목하에 이루어진 전쟁이고 알 카에다 조직에 대한 복수이며 또한 알 카에다 조직을 비호한 달레반에 대한 징벌이 바로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실질이 아닌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이제부터 과연 그러한가를 따져보기로 하자.
아프카니스탄 전쟁은 9.11테러 이후 한달이 지나서 시작되었다. 급박한 전쟁이었고 준비없는 전쟁이었다. 절반쯤 싸우고 나니 순항미사일이 바닥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전쟁은 계속되었고 미국방부는 하는수없이 핵무기고를 열고 1000여매의 핵미사일에서 핵탄두를 뜯어내고 보통탄두를 달아 900여발을 발사하고 나서야 전쟁을 끝낼수 있었다. 이것은 그야말로 준비없는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은 왜 이 전쟁을 꼭 치러야만 했는가?
그것은 미국사람들이 더는 기다리기 어려웠던것이다. 그보다 중요한것은 미국사람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던것이다. 21세게초엽, 미국은 이미 빈껍데기인 가상산업나라로 전락하여 해마다 7000억달러의 자본이 흘러들어야만 생활을 유지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9.11 사태이후 한달도 채 안된 사이에 전세계인들의 미국에 대한 불안감은 가중되었고 이런 불안한 투자자들의 심리작용으로 말미암아 한달사이에 3000억달러의 거금이 미국시장을 떠나버린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급박한 전쟁을 하지않을수 없는 직접적 원인이다. 미국으로서는 하루빨리 전쟁을 치러 투자자들의 미국에 대한 신심을 회복시켜야만 했던것이다. 카불에서의 첫 순항미사일의 울림소리와 함께 다우존스는 급속히 상승했고 하루만에 600여점이나 올리 뛰었다. 떠나가던 자본들이 다시 흘러들기 시작하였으며 년말까지 4000여억달러의 자금이 흘러들었다. 이것은 아프카니스탄 전쟁도 결국은 달러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나의 두번째 증거이다.
③ 전세계를 향한 <신속타격체계>.
많은 중국인들은 항모에 대한 기대가 아주 컸다.그것은 그들이 항모의 역할에 대하여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자신들도 항모를 보유할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였던것 같다. "료우닝호"의 출현은 바로 이런 중국인들로 하여금 항모보유국의 항렬에 이름을 올릴수 있게 만들었다. 항모가 가지는 의미는 대국의 상징과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나는 그냥 상징뿐 그렇게 큰 의미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날이 갈수록 글로벌사회의 금융화된 지금에 있어서 항모의 역할도 점점 미약해지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역사적으로 놓고 볼때 항모는 물류시대의 산물로서 대영제국이 글로벌 무역을 추진하던 시기 자신들의 제품을 전세계로 수송하고 또한 전세계각지로부터 필요한 자원들을 실어들여야 했기에 강대한 해양군사력을 필요로 하여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항모는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것이라고 불수 있다.
당시는 해상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고 해양재패권을 확보해야 하는 물류중심의 시대였기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세계는 이미 자본중심의 시대로 바뀌었다. 몇백억, 몇천억, 지어는 몇조억의 자본도 한곳에서 다른 한곳에로 수송되는 과정은 컴퓨터의 자판기를 몇번 두드리는 몇초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물류의 흐름을 통제하던 항모로는 이미 지금의 자본흐름을 통제할수는 없게 되었다.
그럼 오늘날에 있어서 과연 무엇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의 흐름을 통제할수 있을가?오늘날 미국사람들은 전세계를 향한 <신속타격체계>의 구축에 안깐힘을 쏟고있다. 탄도미사일, 순항미사일, 초음속 비행기, 심지어 마하5, 마하10에 이르는 초음속 비행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것은 순식간에 지구상의 어떤한 자본의 집결지에도 타격을 입히는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지금 미국은 자신들의 탄도미사일이 이미 28분이내에 전세계 어떤 곳도 타격을 입힐수 있는 수준에 있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미국이 어떠한 자본의 집결지라 할지라도 그들의 맘에 내키지 않는다면 곧바로 탄도미사일 한방으로 28분이라는 짧은 시간을 이용하여 그곳의 자본들은 고분고분 헤어나오게 할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전세계를 향한 <신속타격체계>로서 항모의 시대를 대신하게 될것이다. 그렇지만 항모 역시 다른것으로는 대체할수없는 역할이 따로 있다. 예를 들면 해상통로의 안전보장이라든가,인도주의 사명을 위한 제일 좋은 플렛폼이 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 자본의 흐름을 통제하는 무기로는 이미 전세계를 향한 <신속타격체계>와는 비할수 없게 되었다.
④ 해공전의 구축.
미국인들은 지금 군사적 수단으로 중국의 굴기에 제어를 걸려고 하는 전략을 구상중이다. 그래서 생긴 개념이 바로 <해공전의 구축>이라는것인데 그러나 그것도 미국의 곤경을 풀기에는 역부족이었다.<해공전의 구축>이란,2010년 미군의 공군,및 해군 수뇌부가 연합하여 제출한 중국에 대한 작전의 일환으로 실제로 미군 스스로의 쇠퇴를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의 미군은 공습만으로, 혹은 해군만으로도 중국군을 타격할수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공군이나, 해군 하나만으로는 이미 중국에 대한 우세가 될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온 개념이 바로 <해공전의 구축>이라는것인데 반드시 공군력과 해군력의 결합만이 중국군에 대한 우세를 유지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공전의 구축>전략은 2010년 세워져서 4년이 지난후 갑자기 이름을 바꾸어 <전지구 공해 개입 및 기동연합>이라고 이름을 바꾼것이다.
이 <전지구 공해 개입 및 기동연합>전략의 판단에 의하면 미국은 앞으로 10년이내에 미중간에는 전쟁이 일어날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지금껏 중국의 군사력에 대한 발전을 연구한 결과 미국의 현유의 능력으로는 중국군이 이미 개발하고 발전시킨 일부 미군에 대한 우세를 카바할수 없다는것이다. 예를 들면 항모를 파괴할수 있는 능력과 우주군사체계에 대한 타격을 막을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은 다시 10년 계획을 세우고 더욱 선진적인 군사체계를 구축하여야만 중국의 이러한 위협에서 벗어나 통제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것이다. 비록 10년 이후 전쟁은 일어나지 않더라도 중국으로서는 그로서의 군사력강화를 통한 또 다른 도약을 꿈꾸고 있을것이란것은 자명한 일이 아닐수 없다.
5). 일대일로 - 중국인들의 태극권
우선 여기서 미국사람들의 운동취미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아마도 제일 좋아하는 운동은 당연 농구일테고 두번째는 권투일것이다. 그런데 이 권투운동이란것은 전형적인 미국인들의 힘의 과시에 대한 풍격을 반영한다. 곧게 뻗어 공격하고 직통으로 힘을 발휘하며 한주먹에 힘을 실어 상대를 쓰러뜨리려 하는데 목적이 아주 명확하고 단순하다.
그런데 중국의 태극권은 유중유강(柔中有刚) 뜻인즉 유순함속에 강함을 내포하고 있다라는 것인데 결과적으로 유로 강을 제압한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싶다. 특징적인것은 상대의 힘을 피하고 정면부딪힘은 피하면서 상대를 굴복시키는 자연순응의 원리가 배어있다. 즉 예봉은 피하면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측면이 강하다. 중국인들은 이런 태극권을 좋아하는데 이런 태극권이야말로 권투에 비해 훨씬 고명한 예술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대일로"는 바로 이런 사상에 기반한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역대로 강대국의 로정은 바로 이런 굴기에서 전개 그리고 글로벌화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그것은 글로벌화란 역사전반을 관통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모종의 주체가 그가 처한 시공속에서 단계적인 글로벌화를 실현하는 역사의 로정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로마제국은 로마제국의 글로벌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대진제국은 대진제국의 글로벌화 역사를 가지고 있다.
매번의 글로벌화는 굴기하는 어떤 제국에 의하여 추진되고 흥망한다. 매하나의 제국은 모두가 그에 의한 글로벌화 과정에서 상승기와 흥성기가 있는데 이 글로벌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역량의 제한을 받게 된다. 이것은 그의 능력이 가지고 있는 최대한계의 범위와 교퉁수단이 미치는 제일 먼곳의 정점이자 글로벌화의 종점이기도 하다. 때문에 고대로마의 글로벌화나 대진제국의 글로벌화는 오늘날에 와서 볼때 제국의 구역 확장화 과정이란것을 알수 있다.
진정한 현대사의 글로벌화란 대영제국으로 부터 시작하였다고 할수 있다. 대영제국의 글로벌화는 무역의 글로벌화였다. 그후 미국은 대영제국의 망토를 이어받은후 무역의 글로벌화를 지속하고 발전시켰다. 그러나 진정으로 미국 특색의 글로벌화는 바로 달러의 글로벌화이며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글로벌화인것이다. 여기서 중국의 "일대일로"구상은 바로 중국자신들의 추구하는 새로운 글로벌화의 시작이며 초강대국으로 가는 길에서의 그들만의 특색을 추구하는 글로벌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대일로"구상은 중국 고금에 있어서 가장 현명하고 뛰어난 글로벌화 전략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미국의 이른바 태평앙 연안 <동아시아로의 구심점 회귀> 전략에 대한 환충적인 방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환충이란 맞선 방향에서의 힘의 무력화일진대 어떻게 힘을 등지면서 환충이라고 할수 있겠는가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일대일로"전략은 바로 미국의 동아시아에로의 구심점 회귀 이동전략에 따른 중국의 태극권식의 힘의 환충전략일것이란 생각이다. 나는 등으로 너를 맞이하겠다. 너가 동쪽에서 나를 압박해오지 않는가? 그럼 나는 서쪽으로 출구를 찾을것이다. 상대를 피하는것이라고도 할수 없고 상대를 무서워한다고도 할수 없으며 아주 교묘하게 미국이 동쪽으로 부터 해오는 압박의 힘을 해소해버리려는 중국의 이른바 태극권식 전략인것이다.
중국의 "일대일로"전략은 두 동선의 병행전략이 아닐것이다. 그속에는 주차적인것과 부차적인것이 있을것이다. 해상에 해당되는 "일로"(一路)란 중국 해상의 통로를 말하는것으로 이것은 중국의 단점일수 있으며 내가 말하는 부차적일 가능성이 크다. "일대"(一带)는 육로를 말하는데 내가 볼때 이것이 중국의 주차적인 방향일것이다. 중국은 육군이 강하다. 중국의 육군은 중국본토에서의 전쟁만을 놓고 말할때 세계의 어떠한 군대와도 싸워서 이길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 약점이라면 원정능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중국인들을 상대로 골라서 중국을 압박하려하는데 이는 어쩌면 큰 실수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상대와 방향을 모두 잘못 알고 있다. 그들의 진정한 적수는 오로지 그들 자신뿐이다. 어쩌면 미국은 스스로를 묻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들은 지금 진정한 <대변혁시대>가 도래되고 있음을 모르고 있는듯 하다. 이 <대변혁시대>의 도래가 바로 미국 스스로를 금융제국이란 최정점에서 굴러떨어지게 하는 계기로 작용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미국은 이미 가상경제라는 허구속에서 자본주의 보너스를 독점하고 걸탐스레 빨아먹어 이미 바닥이 들어날때가 되었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한 방면으로 미국은 자신들이 스스로 자랑스럽게 생각해온 과학기술 성과물인 인터넷, 빅테이터, 클라우드 컴퓨팅,등 최첨단 기술들이 바로 스스로를 금융제국의 정점에서 매몰시키게 할수도 있다는점을 지각하고 있지 못하기때문이다.
6). 인터넷 + : 미국 화폐금융패권을 없애는 보검이 된다.
작년의 알리바바(11/11)싱글데이 하루 동안 토우보우(淘宝)텐모우(天猫)등 온라인 전자상거래액은 무려 1400억위안(225억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며칠후의 미국 추수절 사흘동안의 온라인, 총매출액은 20억달러 밖에 안되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중국은 왕이(网易), 경동닷컴 등 다른 온라인 전자거래상은 제외한 매출액이다. 그것들까지 다 합치면 얼마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새로운 변혁의 시대가 소리없이 다가오고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미국은 이런 변화에 대하여 별로 주목하고 있지 않는듯 하다.
알리바바의 전자상거래는 전부가 즈푸보우(支付宝)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그럼, 즈푸보우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바로 화페는 이미 교역에서 곧 퇴출하게 된다는것을 의미한다. 가석하게도 미국의 패권은 바로 달러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것인데 미래의 세계는 화페를 결재수단에서 배척하게 될것이란 점이다. 패권을 유지하던 달러라는 화페가 더는 결재수단으로 작용하지 않을때 과연 어떤일이 벌어지겠는가? 과연 화페위에 건립된 금융제국이란 존재할수 있을가?. 이것이 바로 미국인들이 앞으로 고민해야할 문제라는것이다.
미래의 자본은 어떤수단으로 유통될가? 바로 미국이 주창해온 그 빅데이터, 이동통신,인터넷, 사물인터넷 등 기술이 될것이며 화폐는 더는 자본흐름의 매개체가 될수 없으며 이런 데이터의 흐름이 대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의 전자상거래, 물류계통,사교채널, 등 IT산업은 고도로 독립되있고 날이 갈수록 발전하여 중국이 주창하는 인터넷 + 는 멀지않아 미국의 금융패권을 작살내는 하나의 보검이 될것이라고 본다.
그외 중국의 생산력을 기초로하는 제조업은 미국이 이처럼 빈껍데기 가상경제의 길을 걷고 있을때 바로 이런 인터넷 + 의 산업정신에 힘입어 한층 업그레이드 될것이고 선진화로 나갈것은 분명한 일이다.
7). 메드인 차이나 2025.
의문할바 없이 중국은 이미 미국에 앞서가고 있다고 본다. 3D프린터 기술도 미래의 한 방향을 대표한다. 그것은 인류사회의 지금껏 생산방식에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올것이다. 이러한 생산방식의 변화, 교역방식의 변화는 필연코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다싶이 진정으로 사회의 질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요소는 바로 이 두가지 기본요소인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진2세시기의 진승,오광의 폭동으로부터 시작해서 신해혁명에 이르기까지 2천여년동안 무수히 많은 봉기, 폭동, 전쟁,혁명 등이 일어났으나 과연 무엇이 개변되었던가? 계속하여 정권의 바뀜과 저급적인 수평선상에서의 끊임없는 순환만 반복되어왔을 뿐이다. 이런 복식운동을 방불케하는 권력의 이양과정은 결코 농경사회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개변시키지는 못하였다.
생산방식의 질적인 변화와 교역방식의 질적인 변화가 없이 끊임없는 정권의 바뀜만 반복적으로 이루어져 왔고 서방세계도 마찬가지였다. 나뿔레옹의 프랑스대혁명의 폭풍은 한때는 유럽대륙을 휩쓸며 휘황찬란한 업적을 이루긴 하였지만 워털루 참패 한번으로 나뿔레옹은 내려와야 했고 유럽 각 나라의 제왕들은 하나하나 복귀했으며 또다시 봉건사회로 회귀하고 만것이다.
인류사회는 그렇게 내려 오다가 영국의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공업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 비로소 생산수단이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고 대량의 잉여산품이 나타나게 되었으며 이런 잉여산품은 잉여가치와 잉여자본을 산생하였고 드디어 자본가가 출현함으로써 자본주의사회로의 진입을 하게 된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미 자본은 더는 화폐에 의존하지 않게 됨으로써 화페의 소실은 사실상 시간상 문제로 남아있고, 생산방식도 3D프린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가 이미 새로은 사회의 문턱을 밟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이 시기의 미중관계는 이미 선진과 낙후의 논쟁을 떠나 동일한 스타트라인에 있다고 봐야 할것이다. 모두가 인터넷, 빅데이터,그리고 클라우드 컴퓨팅이라는 스타트라인에 서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들 경쟁의 승패는 오로지 누가 먼저 그 문턱을 넘는것이 될것이며 누가 누구를 압박하는 경쟁일 수 없다. 미국사람들은 이 점에 있어서 중국인들에 비해 암둔하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패권지위만을 지키려고 애를 박박 쓰고 있을뿐, 상대와 지혜를 나누고 함께 자신들도 아직 알수없는 신비한 미지세계로의 문턱을 넘을 궁리를 하지 않는다.
내가 볼때 세계상의 서열5위권안의 경제대국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자국의 산업을 기반으로 점차적으로 미국의 화폐금융패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으며 중국의 인터넷 + ,일본의 로봇 프로그램, 독일의 공업 4.0 등은 마치 태극 건괘중의 군용무수(群龙无首) 길(吉) 점괘를 방불케 한다. 중국인들은 지금<패권을 반대하며, 상생하되 같을것을 강요하지 않는다>라는 구호를 내세워 세계의 질서를 개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들은 다원화, 합작만이 세계의 추세라고 말하며 이 호호탕탕 역사의 흐름속에서<순행하는자는 번영할것이며 역행하는자는 망할것이다> 라고 말한다.지금 이 두 대국 미국과 중국은 시대의 파도에 떠밀려 역사의 아레나에 마주 선것이다. 그러나 미국이든, 중국이든 그 진정한 적수는 바로 그들 자신이라는것이다.
8). 미중갈등,그리고 그사이에 끼인 한반도
※ 선택은 왕왕 운명을 좌우지 한다.선택을 잘 하려면 역사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미래에 대한 흐름을 잘 타야만 가능하다.오늘날 한민족의 선택은 운명의 갈림길에 들어서 있다.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백전불태>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자기를 알고 상대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는 뜻이다. 앞에서 나는 미중사이의 모순에 대하여 본질을 파헤치려고 노력했다.지금부터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
①일제강점기,그리고 항일운동
유구한 역사에서 우리 민족이 가장 크고 아픈 상처를 입은 한반도역사의 특수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한반도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반도를 강점한 일본제국주의의 반도에 대한 식민지정책의 기본적 특징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일본제국주의는 반도를 식민지로 강점한 다음 서구열강의 식민지정책과도 다른 그들의 독특한 식민지정책을 반도에 실시하였다.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정책의 특징은 ① 한민족 말살정책과 ② 식민지 수탈정책의 융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는 한반도를 강점하여 사회·경제적 수탈의 극대화와 함께 한민족을 지구 위에서 소멸시키려 한 것이었다. 이 점이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간접지배이든 직접지배이든 간에 사회·경제적 수탈을 기본목적으로 하고, 피지배민족의 민족보존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였으며, 민족문화운동에 대해서는 그것이 직접적인 정치적 독립운동이 아닌 한 방관적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민족을 말살, 소멸시켜서 일본제국내의 공식·비공식적으로 차별받는 종속 천민신분층으로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한민족 말살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 각종의 간악한 제국주의 식민지정책 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에 대한 식민지정책은 가장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으며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이 전세계 약소민족의 모범이 될 만큼 완강하고 줄기차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의 한민족 말살정책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였으며, 사회·경제적 수탈정책도 많은 부분에서 그들이 원한 바 대로 되지는 않았다. 한민족은 그들의 식민지정책으로부터 자기민족을 보위하고 일제를 몰아내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려고 영웅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한민족의 독립운동과 연합국의 승전으로 마침내 일본제국주의는 한반도에서 쫓겨가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이 한반도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었다. 일본제국주의는 한말까지 꾸준히 전개되던 한반도의 자주 근대화를 저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강점기간 동안에 우리사회를 정체시키고 온갖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였으며, 결국은 일제강점의 소산으로 남북 분단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민족이 타의에 의하여 남북으로 분단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강점으로 말미암은 결과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일제의 공업화는 신속히 발전하였는바 일제는 한반도를 발판으로 그 야망의 손을 대륙에로 뻗치기 시작한다.1931년 9월18일 로구교(卢沟桥)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략의 서막을 연다.당시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는 수많은 애국항일 조선인들이 이미 대륙을 발판으로 곳곳에 침투되어 활동하고 있던터였다.
이들의 항일열정은 그 어느 중국인들보다도 강했다.당시의 중국은 군벌이 난립하던 시기였는데 손중산의 국민당은 이 세력들을 통합하여 통일된 민주국가를 세우는것이 그 꿈이었다.당시의 <황포군관학교>는 손중산이 손수 세운 유명한 군사학원이다.
이 군사학원은 비록 6년여동안 짧은 시간 지속되었지만 대륙의 여러 원수들과 장군들을 비롯한 군사인재들 대부분이 이 학원의 출신일 정도로 유명하다.놀라운 사실은 이 학원의 조선인 인재들이다.200여명의 조선인들이 이 학원을 나왔는데 그중 20여명의 조선인들은 학생이 아니라 교관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손수 이학원의 건립과정에 참여했으며,당시의 교장 장개석, 정치부주임 주은래 등과도 친숙한 사이이다. 후에 이들 대부분은 항일에 적극적인 공산당쪽으로 많이 넘어오게 된다.
당시 공산당의 미약한 세력은 항일이란 뚜렷한 기치를 추켜들어야만 비록 군중들의 지지를 얻을수 있었고 또한 장개석국군의 토벌에 대한 명분을 제거할수 있었기에 이들에게 있어서 항일의 기치가 얼마나 중요하였는지를 잘 알수 있다. 그 당시 항일에서 제일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은 당연 조선인들이었다. 그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과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중국인들의 상상을 능가하였을 뿐만아니라 일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므로 중국지도자들에게 있어서는 더없는 <보배>가 아닐수 없었다.
중국의 항일역사에서 조선인들의 업적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언젠가 모우쩌뚱은 방문온 김일성에게 천안문성루의 깃발을 가리키며<중국의 오성붉은기에는 조선동지들의 선혈이 스며있다>라는 말을 하였다는 정설이 있다. 중국의 항일전쟁에서, 그리고 모우쩌뚱의 해방전쟁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역할은 절대로 무시 못한다.
1935년 5월,장개석의 토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모우쩌뚱 공농홍군의 운명을 결정하는 전투였던<대도하>전투를 지휘한 사람은 바로 김훈이라고 하는 조선인이였으며 그 선두부대 역시 조선인부대였다고 한다.그는 평안북도 출신으로 황포군관학교의 창설과정에 참여하였고 교관이기도 하였다.
초창기 북한정권의 제2인자였던 최용건도 바로 황포군관학교 교관출신이었으며 그외에도 동북항일련군 속에는 황포군관학교출신의 조선인 고급장교들이 수두룩하다.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련군은 이들 조선인항일조직들을 기반으로 발전하였으며 그들이 없었다면 만주에서의 항일혁명은 사실상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항일투쟁에서 제일 적극적인 사람들은 바로 조선인들 이었고 일본군을 상대로 두려움 없이 싸울수 있는 역량은 역시 조선인들을 골자로 하는 부대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국공산당은 건국이후에도 중국경내의 조선족들에 대한 정책만은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한다.
②광복, 그리고 그 이후의 한반도
1945년 8월 6일과 9일 미국은 두번에 걸쳐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데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치욕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종지부를 찍는 결정적 사건으로서 특히 동아시아 나라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아주 깊다.일제의 야망은 이로써 끝났고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 나라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이 사건은 또한 대륙에 있어서는 국공량당의 치열한 정권싸움의 시작을 예고함과 동시에 한반도에는 미쏘 두 제국의 철저한<정략적 계산>에 따른 한민족<비운의 분단역사>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투르먼과 스탈린은 사전협약에 따라 한반도의 안정을 책임진다는 이유로 이른바 그들의 <신탁통치>를 추진한다.
미국은 이승만을 내세워 남반부에서 정부수립을 추진하였고 쏘련은 김일성을 내세워 북반부에서 정부수립을 추진한다. 이 당시 민족통일을 주장하던 민족진영의 지도자 여운형의 암살사건,그리고 2년후에 이어진 김구의 암살사건 등은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큰 의문을 던져준다. 이유는 그들 모두가 한반도 통일을 주장한 인물들이라는 사실이기때문이다.
1948년 5월10일 이승만은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였으며 7월17일 헌법을 제정하고 선포함으로써 건국준비에 들어갔다.8월15일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의 신분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다. 이에 북한은 8월25일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헌법을 채택하였으며 김일성을 내각수상에 선출하고 9월9일 드디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립을 선포한다. 이로써 민족통일을 주장하던 애국세력들의 노력은 헛수고로 돌아가고 한반도는 사실상 분단의 역사를 시작한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은 일제는 한반도 분단역사의 원인제공자라는것과 (그것은 일제의 식민지통치로 말미암아 국제열강들에게 이런 말도 안되는 신탁통치라는 빌미를 제공하였기 때문)제국주의 열강들은 결코 저들의 이익이 우선이지 우리의 진정한 우방이 될수 없다는 사실이다.▶
③ 6.25 한국전쟁.
사실상 분단은 이미 피면할수 없는 전쟁의 화근을 묻어놓은거나 다름없다.우리가 지금껏 남침이니,북침이니를 두고 논쟁하는 자체는 제일 어리석은 짓이다.역사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6.25전쟁은 김일성이 발동한 <민족통일전쟁>이었다가 맞는것이다.비록 크나큰 재난과 고통을 안겨준 우리의 쓰라린 역사이긴 하지만 그 배경과 원인만은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역사적의미에서 볼때 통일운동은 그 수단이 비록 잔인할지라도 인류사회 발전의 원인으로 작용하여온 것 만은 부인할수 없는 진리이다.
진시황의 피비린 통일전쟁이 없었다면 중국대륙문명은 상상하기 힘들것이며 미국의 영국식민지로 부터의 독립전쟁과 그후의 영토확장전쟁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강대한 미국이 어찌 있었겠는가?통일과 발전의 원리는 오늘날의 글로벌화 과정에서도 잘 반영된다. 그렇다고 여기서 전쟁을 통한 통일을 주장하는것은 아니다. 인류사회의 발전은 평화통일이라는 가능성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독일은 평화통일될 수 있는데 우리라고 안된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1950년 1월,김일성은 스탈린으로 부터 자신의<세계형세분석과 군사방식으로의 조국통일 방안>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낸다.5월중순,김일성은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하고 모우쩌뚱에게 이를 통보한다. 이에 모우쩌뚱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이유는 아직 시기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모우쩌뚱은 대만해방을 놓고 고심하던 시기였다.다음날 스탈린은 모우쩌뚱에게 전보를 보내어 그더러 몇개 사단의 병력을 안동 일대에 배치하여 전쟁에 대비할것을 요구한다.그러자 모우쩌뚱은 스탈린에게 무기지원을 요청한다.스탈린은 문제없다는 회답을 곧바로 보내왔다.
얼마후 6월25일 전쟁이 일어났지만 모우쩌뚱은 이를 사전에 통보받지 못하였다.1950년 6월25일 미국은 긴급히 안보리회의를 소집하고 제82호 결의안을 채택한다.성명에서 <조선은 대한민국에 대하여 무력공격을 하고 있다. 이것은 국제평화를 해치는 행위이다. 즉각 북위38도선 이북으로 군대를 철수하라>고 명시한다.
그런데 사실상 이때 소련은 이 결의안을 부결시킬수 있었으며 유엔군의 개입을 막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소련은 중국의 안보리가입을 유엔이 저지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 결의안에 불참하고 기권해 버린다. 후에 드러난 사실로 추측해볼때 6.25전쟁은 완전히 스탈린의 모략에 의하여 치루어졌다는 결론을 도출할수 있다.
스탈린은 6.25전쟁을 유발시킴으로써 미쏘의 유럽에 대한 철의 장막구축 싸움에서 미국의 주의력을 한반도전쟁의 수렁에 묶어놓을수 있었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2차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공업,및 과학기술의 복구와 건설을 다그침으로써 미국과의 격차를 해소하는 기회로 삼으려 한것이며 아울러 중국의 불가피한 개입을 유도하여 미중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중국으로하여금 자신들의 품에 안기도록 만드는 탁월한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그외에도 소련은 2차세계대전에서 남은 수많은 쓰래기 무기들을 중국에 팔아 이득을 챙기기도 하였다. 전쟁초반, 국군은 맥없이 무너진다.전쟁이 발발해서 사흘만인 6월28일 서울이 함락되었다.황급해난 이승만은 도망가면서 한강대교를 폭파해버리는데 이는 미처 도강을 못한 수많은 국군을 고스란히 북한군에 넘겨주는 꼴로 국군의 방위력을 급속도로 와해하는데 일조하게 만들었다.
한달여만에 전선은 남으로 밀려 낙동강일대까지 불붙었다. 이 사이 북한군은 이미 한반도 90%지역을 점령했다. 7월7일 미국의 주도하에 유엔은 84호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한반도전쟁에 참전할 16개국으로 조성된 유엔연합군을 결성한다. 이와 같은 북한군의 막강한 전투력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가? 1949년 김일성은 모우쩌뚱에게 당시 중공군에 소속되어있던 조선인부대들을 북한에 귀국시켜줄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들 규모는 5만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중국에서 이미 수많은 전투를 겪은 정예병들로서 그 전투력은 막강하였다. 당시 모우쩌뚱은 이들에게 그들의 의사를 물었다고 한다. 이들 대분분은 조선땅이 고향인지라 모두들 고향에 돌아가기를 원하였다.이에 모우쩌뚱은 두말없이 전부 무장한 상태로 로비를 내주어 북한으로 귀국시켰다고 한다. 6.25한국전쟁은 바로 이 부대가 주축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전투에 능란했고 그야말로 일당백의 위용을 과시하였다는 정설이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진두 지휘하에 1개 군단병력이 투입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써 UN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했다.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고 경인지역을 장악한 UN군에 의하여 보급로와 후퇴로를 차단당한 북한군은 남북으로부터의 협공으로 모든 장비를 버리고 투항하거나 산악지대로 도피함으로써 북한군 주력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으며, UN군은 급속도로 북진을 계속했다.10월 20일 평양을 탈환하고 10월 26일 일부 부대가 압록강변에 도달했다. 황급한 김일성은 모우쩌뚱에게 긴급파병을 요청한다.
당시 중국은 대만 해방을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중공의 정치국상무회의에서 북한파병문제를 놓고 의견차이가 심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원수급 지도자들은 참전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중국은 대만해방이 우선이어야 한다.둘째, 갓해방을 맞이한 국내에는 아직까지 수많은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는데 거대한 미국과 유엔군을 상대로 전쟁한다는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주장이었다. 그 당시 기고만장한 미군의 폭격기가 압록강을 넘어 중국경내에 폭탄을 투하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모우쩌뚱은 반드시 신속한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스탈린에게서 얻은 약속이란 유상무기지원이 전부였다. 연합군이 38선을 넘어서 북진할때부터 중국은 북진을 멈추지 않으면 중국군이 개입할것이라고 연속 미국에 경고했다.하지만 이미 승기를 잡은 미국은 이를 무시했고 중국의 개입을 안중에 두지도 않았다. 11월초 미리 압록강부근에 대기하고 있던 중공군이 드디어 명령에 따라 압록강을 넘어 북한에 진입한다. 전세는 삽시에 뒤집어졌다.
두달도 안되어 국군과 연합군은 패배를 거듭하며 서울까지 내어주고 만다. 1951년 1월 8일 중공군은 공격을 멈춘다. 그때 연합군은 이미 평택,안성,제천까지 밀려 있었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은 유엔에서 쌍방이 정전담판할것을 촉구한다. 6월25일 미국과 중국은 동시에 성명을 발표하여 이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이전까지 쌍방은 38선을 경계로 수차례 밀고 밀리고 하는 싸움을 벌여오다가 드디어 7월10일 처음으로 담판상에 마주 앉게 된다.그러나 쌍방의 의견차로 담판은 결렬된다. 전쟁은 또다시 계속 이어졌고 이 시기로부터 기본상38선을 기준으로 밀고 밀리는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다가 1953년 7월27일.드디어 미국,중국,그리고 북한 3자협상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된다.
장장3년을 걸친 이 전쟁에서 쌍방은 이루다 헤아릴수없는 피해를 입었으며 사망및부상입은 백성만25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총투입된 병력은 쌍방이 각각 백만명이 넘었으며 사망인원수도 각각40만명을 넘는다고 한다.원자탄을 제외한 최신식무기는 전부다 투입되었으며 비공개로 투입된 러시아의 공군만 7만2천인차,그 규모와 치열함은 2차세계대전 전체규모를 능가한다고 한다.
이전쟁에서 비인도적 만행도 수없이 자행되었는바 이가운데는 우리가 잘 모르는<로근리 평민학살사건>과<신천군 대학살>그리고 <강화도 학살사건>등이 전해지고 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이미 역사로 된 이 전쟁을 우리는 반드시 정확히 평가해야만 한다. 그것은 역사를 통한 국제사회의 관계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만이 스스로의 발전방향과 길을 모색해 나갈수 있기때문이다.
이 전쟁의 수혜자는 소련과 일본이다.소련은 2차세계대전에서 남은 무기들을 중국에 팔아 이득을 챙겼을뿐만 아니라 미국을 이 진흙탕싸움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들의 역량을 소진시키게 하고 자신들과의 격차를 해소하는데 이용하였다. 일본은 이시기 군수물자로 떼돈을 벌어 그 이후의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기반을 다지게 된것이다.
중국은 그후 <대약진운동>까지 벌이면서 1965녁까지 소련의 빚을 갚아야만 했다. 그로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기도 하였다. 섣부른 통일전쟁은 이처럼 혹독한 재난을 불러온다. 어쩌면 열강들의 세계지배구조에서 한반도는 그 나약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것이다. 이용과 역이용 - 국제사회의 얼기설기 얽어진 이익구조에서 과연 어떤 돌파구를 찾아내고 또한 어떻게 이용하는가는 한 나라 지도자의 덕목이자 지혜인것이다.
④ 20세기 후반의 국제정세와 남북정치 및 경제.
전쟁이 끝나고 남북은 복구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북한은 신속한 발전을 이룩하였지만 남한에서는 의념갈등으로 잦은 시위와 투쟁이 이어졌으며 이는 남한의 발전을 저애하는 적극적인 요소로 작용한다.70년대 초반까지 한국의 경제발전은 북한보다 현저히 처져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일성은 깨달은 바가 많은듯 신속히 내부의 친소파와 친중파들을 제거하고 일인독재지배를 형성한다.그때로부터 김일성은 아무도 믿을놈없다는 생각을 굳힌듯 중,소 사이에서 줄타기외교를 펼치는데 가히 말해서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할수 있다.
그 사이 한국은 이념갈등과 이승만의 정권연장으로 치닫은 끊임없는 싸움으로 경제는 파탄나고 사회는 극도로 불안정하다가 박정희의 군부독재정권이 들어선후 비로소 북한식 통치체제로 전환하였고 비교적 안정된 환경을 마련 함으로써 경제건설에 박차를 가할수 있게 된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죽은뒤 전두환의 군부정권시절 (80년대 초반)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미국의 거대자본이 아시아시장으로 유입되면서 한국은 전례없던 경제호황기를 맞이하는데 그 시기 한국경제는 무려 연평균 두자릿수를 기록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해두고 싶은것은 미국을 제외한 수많은 나라의 경제성장은 결코 어느나라의 지도자가 이끈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우리는 절대 이점만은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 무렵 중국은 덩샤오핑의 등장으로 일대 변혁이 일어나는데 으른바 그의 <개혁개방>이다. 여기서 꼭 말해두고 싶은것은 덩샤오핑이란 인물이다.일찍부터 덩은 중공의 핵심인물이었으며 그는 모우쩌둥과의 정책노선에서 보다 실용주의 인물이었다.그런 노선갈등은 그로하여 세번 타도되고 세번 복귀하는 세상에서 전례없던 기적을 만든 인물로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그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국제정세의 변화에 정확한 판단을 한다.그 이전까지 세계는 3대진영의 논리에서 작동되고 있었는바 그 3대진영이란 미국을 수반으로 하는 나토조직, 소련을 수반으로 하는 바르샤바조직, 그리고 중국을 수반으로하는 제3세계나라들이다. 그동안 중국은 자신들의 어려운 형편에도 <꼬마동생>들까지 먹여 살리느라 엄청 힘들었다.
덩은 실권을 잡은후,미국부터 방문하는데 사실상 그때 중국은 소련과 냉전모드에 들어간지 20년이 되어 갈때였다.덩의 이런 외교에는 그만의 철학이 담겨있다.그는 오래전부터 타도되어 농촌에 여러번 내려가 있다보니 중국의 실정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것은 그의 옛노선의 정확성도 진일보 입증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덩은 그동안의 여러나라들에 대한 무상원조를 모조리 끊어 버리고 문호를 개방한다.그것은 국제정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서만이 가능한 그의 결단이기도 하였다. 그 이전의 모우쩌뚱은 항상 전쟁에 대비하여야만 하였다.그래서 없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무상원조까지 해가면서 자신들의 <꼬봉>들을 먹어살려야만 했던것이다.
예전의 중국은 모우쩌둥의 계급투쟁노선으로 말미암아 지식인들은 타도되고 무식한 붉은사상의 무산계급들이 앞장서서 충성경쟁에만 올인하던 터였다. 개혁개방을 이끄려면 지식인들이 필요한데 덩은 반드시 모우쩌둥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부정을 통하여야만 이를 바로 잡을수 있었다.여기서 그의 용기와 지혜는 정말로 찬탄하지 않을수 없다.
당시의 중국에서 모우쩌둥은 그야말로 신화였고 그 신화를 깨려면 웬만한 용기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덩은 모우쩌둥의 철학으로 모우에 대한 재평가 작업을 시작하였다. 실사구시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던것이다. 모우에 대한 전면부정이 아니라 공과를 구분하는것, 공로와 업적은 인정하고 계승하되 과오도 과감히 인정하고 시정하여야 한다는것이다. 그는 결코 소련의 흐루쇼브와 같은 착오를 범하지는 않았다.
폐쇠되고 낙후하던 중국을 오늘날 세계상의 강대국으로 만든데는 덩의 공로를 절대로 무시하지 못한다.그는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란 별칭에 제법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세계 근대사에서 덩과같은 인물도 그리 흔치는 않다.그가 정계에 복귀하여 은퇴까지 12년간의 사이에 중국은 그야말로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폐쇄된 문호를 개방하여 세계와의 교류에 합류하고 일련의 낡은 관례를 타파하였으며 평화적인 방법으로 홍콩, 마카오를 회수하고 공산당의 종신관료제를 솔선수범으로 타파하고 퇴임제도를 제정하였으며 미래의 백년지계를 구상하고 이를 엄격히 관철집행하도록 만들어 놓은것이다.
그 시기 국제정세는 급변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소련이 붕괴되고 미국의 일강체제가 형성되었으며 국제사회의 글로벌화는 급속도로 확장되어 한중수교도 이루어지고 세계는 새로운 글로벌시대로 접어들었다.한국은 지역적 우세에 힘입어 발빠르게 움직여 대륙시장을 공략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는 쌍방에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북한은 그렇지 못하였다.김일성은 대체로 모우쩌뚱의 철학을 모방하고 계승발전시킨 그런 인물이다.스탈린이 죽은후 소련은 흐루쇼브가 집권하면서 스탈린의 독재에 전면적인 부정을 하였고 지어는 광장에 안치되었던 묘지를 들추어 시체를 화장해버리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김일성이 본것은 독재자의 결말이란 그렇듯 처참하다는 것 이었다.중국도 덩쇼우핑이 집권하자 소련처럼 하진 않았으나 중국사회에서 신처럼 여기던 모우쩌뚱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아마도 이런것들은 김일성부자의 세습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것이라는 생각이다. 세상에 믿을놈이란 그나마 자식이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결코 자신들을 용납못할 것 이란것을 그들은 주변의 세계에서 깊이 깨우치게 되었을것이다.
김일성의 통치술은 모우쩌뚱을 모방한 것이긴 하나 그후의 과정에서 그는 그것을 승화발전시켜 경지에 이르게 하였다.아마도 세상에서 김일성을 능가하는 통치술은 없을듯하다. 그 당시의 북한인들에게 있어서 김일성은 그야말로 예수요,하나님이였다.
그것도 마음속으로 우러러 나오는 그런 실제적인 감정인것이다. 믿지 못하겠지만 이것은 진실이다. 김일성은 실제로 북한의 곳곳을 한곳도 빠짐없이 누비었다고 한다.가는곳마다 백성들을 보살피는 퍼포먼스를 취하였고 백성들은 그것을 더없는 은혜와 영광으로 받아들였던것이다.
박정희집권시절, 우리도 신문에서 그런 사진들을 많이 보아오지않았던가?.중절모자를 쓰고 맨발로 백성들과 함게 모내기하는 장면이나 논두렁에 백성들과 둘러 앉아 막걸리 한잔하는 우리의 <경애하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통치술도 시대에 따라 발전하기 마련이다.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겐 그런 통치술은 이미 통하지 않을것이다. 하지만 늙은 세대들에겐 아직도 유효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한것은 시대가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⑤보수와 진보, 통합과 협치
용어의 위력이란 무서운것이다. 만일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번역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이렇게 번창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이승만으로 부터 박정희,전두환,노태우정권까지는 기본상 좌,우로 표현하던 단어가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부터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업그레이드 되는데 이는 좌빨 - 즉 빨갱이 프레임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하였던것같다. 아마도 인간의 의식을 전환하는데 시간과 절차가 필요했던것이었을가?
의식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마치 세균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나쁜것으로만 간주하는것처럼 그 영향이 어마어마한 것 만은 부인할수 없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세균은 무해하다는것과 세균이 없는 토양에는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아무리 진실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할때에는 계속하여 외곡된 상태로 거짓면모만 드러나게 되어있어 역사의 발전을 저애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인류사회의 발전은 어찌보면 진실을 까밝히는 과정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이란 사회는 지금 이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것이며 이것 역시 발전을 저애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한 세력이 다른 한 세력에게 들씌우는 프레임속에서 해탈하여 나오기 위한 다른 한 세력의 몸부림과도 같은 것이며 이에 동반하는것은 대중들의 갈등과 모순이다. 대한민국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이런 프레임들을 철저히 타파해야만 가능하다고 본다. 대중들에게 있어서 진정 필요한것은 진보,보수따위의 논쟁이 아니라 삶의 향상 그 차체일 뿐이다.
정치의 속성에 있어서 정(政)은 민중의 일이라는 뜻이며(여기에서 正광명정대 攴다듬다 즉 正 + 攴 = 政) 치(治)란 물의 이치로 수정하고 소통한다는 뜻이다. 이로써 알수 있는바 정치란 민중의 일을 광명정대한 방법으로 다듬고 물의 이치로 수정하고 소통하여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 정치인들의 행태는 각종 프레임을 만들어 대중들을 기만하고 이용하는 수단으로 삼아 저들의 통치와 안락을 추구하는 공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합과 협치 또한 저들 세력들간의 균형의 조합이요, 합작에 의한 다스림을 주장하는것에 불과하다. 진정한 통합을 바라는 이들은 대중들이며 결코 이들 정치인들이 아니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그들은 시대의 발전에 적응 못 하는것이며 썩어빠진 구시대적 사고방식으로 대중들을 지배하기에 급급하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라면 오직 자신들의 지위와 명예, 그리고 부의 축적이며 진정으로 국민들의 삶을 걱정하거나 국익을 대변하는것이 아니다. 이는 사드문제의 해결책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⑥ 사드는 대한민국을 도탄속에 빠뜨리는 위험요소이다.
미국의 한 군사전문가는 한국내 사드 배치에 중국이 분노하는 진짜 이유는 사드가 북한의 공격에는 적절한 방어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서도 중국의 군사전략에 대응한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계의 약점을 보완하는 측면이 크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눈길을 끌고 있다.
사드를 한국에 배치해야만 알래스카 소재 미 MD 용 주(Main) 레이더가 중국에서 발사된 대륙간탄도탄(ICBMs)을 포착하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을 위협하는 동북아 군사전략적 이득은 매우 크지만 북한 핵 대응수단으로서는 실효성이 낮다는 주장이다.
메사추세스공대(MIT) 과학기술안보정책 분야 명예교수인 포스톨씨는 “사드 레이더가 애당초 미국의 미사일방어(MD)에 정보를 제공할 목적으로 디자인 돼 있기 때문에, 사드 배치는 한국 방어전력에는 도움이 안 되면서 중국의 화만 돋울 뿐” 이라고 설명했다.
포스톨 교수에 따르면,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발사되더라도 지평선 위로 떠오르기 전에는 알래스카에 있는 미국의 국가 미사일방어(MD) 주 레이더망에 포착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 사드가 배치되면 중국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발사되자 마자 미국이 미사일의 비행경로 정보를 제공받을 수 있다. 중국은 이 때문에 한국이 미국의 대중 군사전력보강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는 것으로 받아들여 한국에 매우 격앙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드 자체가 진짜 핵탄두와 미끼용 가짜 탄두를 전혀 식별하지 못하는 한계도 뚜렷해 전반적으로 미국의 신뢰가 추락할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돼 파장이 클 전망이다. 포스톨 교수는 “현행 미국의 방어시스템에서는 진짜 핵탄두와 미끼용 가짜 탄두를 전혀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대로 작동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주장도 내놨다.
이와 함께 사드가 남한을 겨냥한 북한 미사일을 요격한다는 소기의 목적조차 이룰 수 없기 때문에 중국이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사드는 장거리, 중거리 미사일보다 사거리는 짧고 비행속도는 느린 준중거리, 단거리 요격용으로 개발됐다. 하지만 한미 양국은 사드가 마치 북한이 장거리, 중거리미사일도 막을 수 있는 것처럼 발표했다.
일본 헌법이 전쟁을 용인하는 쪽으로 개정될 전망인 가운데, 한국에 배치되는 사드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긴장도 극대화 시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포스톨 교수는 “중일 양국 영토 사이에 2개의 사드 레이더가 이미 설치돼 있는데, 한국에 추가되는 사드로 중국과 일본 간 긴장 역시 더욱 높아질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포스톨 교수는 “이와 같은 불필요하게 초래된 상황은 아주 먼 영역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가령 지구촌의 많은 나라들이 미국의 말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견해의 근거들이 계속 쌓이고 있는 것”이라며 “한국도 사드 배치로 국방 관련 의사결정을 넘어 중국에 관한 한 이로움이 전혀 없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고르 모르굴로프 러시아 외교부 차관은 8일 한국 정부에 “한국이 논란 소지가 큰 미국의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한 것은 지역내 긴장을 높이고 평화를 위협하는 결정”이라고 공식 전달했다. 이런 중,러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사드를 끌어들이는것은 바로 정치권의 미국에 의존한 정권임을 승인하는것으로써 이를 감히 저지못하는 정의당을 제외한 야권 또한 진정한 국민들을 위한 정권이 아님을 잘 알려준다. 이들도 결국은 허수아비 양아치들에 불과하다.
더욱 한심한것은 국민들의 이익을 대변하여야 할 언론이다. 이들은 고의적인 선동으로 한중관계를 악화시키고 중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게 함으로써 정치권에 협조하고 있다는것이다. 이들 언론인들 역시 기득권세력들로 그들이 바라는것은 국민들의 삶과 국익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들의 부귀영화에 대한 추구일 뿐이다. 대표적인 선동으로 <왜 중국은 주변의 러시아,인도등 나라들은 레이더를 설치해도 아무말 못하면서 한국에만 압박하느냐>와 <중국은 한국을 얕잡아본다. 그래서 더욱 사드를 설치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참으로 기막히다. 어떻게 이런 논리를 펼수가 있는것인지가 궁금하다. 우선 이런 논리를 펴려면 미군이 한반도에 없어야 한다.전작권마저 미국에게 맡겨버린 나라가 이런 논리는 과연 어떻게 나오는지? 사드는 대한민국이 통제하는 자신들의 방어무기가 아니라 미국이 통제하고 그들의 안보에 이용하는 전략적 무기라는 사실을 이들은 과연 모른단 말인가? 미군이 없는 대한민국이 가령 사드보다 더한 무기를 설치한다한들 그것은 한중사이의 전략적 군사균형의 일환으로 중국은 뭐라 할말이 없을것이다.
문제는 한중군사 균형의 문제가 아니라 미중군사균형의 문제라는것인데 이것을 고의적으로 외곡하여 한중사이의 갈등을 심화시키려는 의도는 도대체 누구에게 득인가? 이런 말종인간들이야 말로 나라를 팔아먹고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려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아니고 뭔가? 여기에 동조하는 인간들은 대개가 그런 종류의 인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뿐이다. 진정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국익을 위한다면 이런 어거지 주장은 하지 말아야 할것이 아닌가? 깨어나야 한다. 국민들이 깨어나서 반드시 막아야 하는것이다...
9).대한민국의 미래 그리고 전망.
※한 나라가 진정으로 번영부강하려면 통일은 필수적이다. 세상에 한 민족이 두쪽으로 나뉘어 번영부강한 사례는 역대로 없다. 한반도의 분단은 원인제공자 일본과 미,소(지금은 러시아) 두 강대국이 조성한것이며 지금 이 분단상태를 고착화시키려는 주된 세력은 오직 미국뿐이다. 왜 이렇게 말할수 있는가? 아래 그 이유를 사실과 논리로 입증하려 한다.※
① 미국은 결코 통일된 한반도를 원치 않는다.
80년대 들어서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으로 말미암아 한중교류는 급물살을 타게 된다.91년말 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세계는 미국의 일강체제로 전환하며 세계글로벌화도 급물살을 타게 되는데 92년에는 한중수교가 어렵게 이루어진다. 이 시기 미국은 이미 세계의 패권을 독차지하였다. 이러한 정세에서 한중수교는 미국에게 별다른 우려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 남북간의 교류와 협력은 미국을 바짝 긴장케 한다. 뿐만아니라 이시기 한중관계도 한층 더 가까워지는데 이는 미국의 우려를 불러온다. 북핵문제가 불거지자 중국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6자회담을 제안하고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중국의 입장은 분명하였다.우선 미국이 북한의 정전체제를 평화협정으로 바꿀것과 양국의 수교를 통한 한반도의 안정을 고착시킬것에 대한 입장을 수용하라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북핵폐기의 전제로 삼자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미국의 선핵폐기 후평화협정체결은 구실이다. 칼든놈이 몽둥이든자에게 몽둥이버리면 협상하겠다는 식이다.
사실상 이시기 미국의 우려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이었으며, 북핵폐기가 아니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우려한것은 중국의 굴기였으며 통일된 한반도와 중국과의 역학적 관계였다. 한반도의 통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동아시아 경제권의 일환으로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중국으로 놓고 말할때 상당히 큰 것이다.
중국은 자신들과 잇닿은 한반도가 앞으로의 경제통일 일환으로 결코 자신들과의 이익공동체에서 이탈하지는 않을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선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상반된 처지에 놓이게 된다. 통일한반도를 중국의 경제권에 얽매이게 내버려 둘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맘때 그들은 발전하는 중국이야말로 앞으로 자기들의 최대적수임을 잘 알고 있었다. 어렵게 만든 방어권을 고스란히 중국에 내줄수는 없었다. 갖은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한반도의 통일만은 막아야 한것이다. 제일 좋은 수단은 위기의 조작이다.
② 천안함 사건, 그리고 연평도 포격사건
2010년 3월26일 서해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대한민국 해군 초계함인 'PCC-772 천안'(1200톤급)이 침몰했다. 26일 밤 9시22분께 키리졸브-독수리 한미 합동군사연습이 한창인 백령도에서 남서쪽으로 1.8㎞ 지점을 순찰하던 천안함의 선미에서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는것인데 해군장병 40명이 사망했고 6명이 실종됐다.
천안함 실종자 수색 과정과 함수와 함미 수색 인양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사건이 잇따랐다. 3월30일에는 UDT 대원인 한주호 해군준위가 수색 작업 중 실신하여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순직했다. 4월2일에는 저인망어선 '금양98호'가 천안함 실종자 수색을 마치고 복귀하던 중 서해 대청도 서쪽 55km 해상에서 침몰해 탑승 선원 9명 중 2명이 숨지고 7명이 실종됐다.
수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이명박정권은 급급히 북한의 소행으로 몰고갔다. 합조단이란것도 미국이 주도한 엉터리였고,러시아의 조사단은 폭침이 아닌 암초에 의한 침몰이라고 발표한다. 인양작업에도 절단면을 감싸는 등,그리고 멀쩡한 형광등, 숱한 사람들을 웃긴<조가비 들어간 1번어뢰>, ...여하튼 정부는 백서발행하고 엉터리 도서까지 만들어 선전하는 무모한 짓거리를 감행하여 국민들로 부터 공분을 불러 일으킨다.
대부분 국민들이 불신하며 조롱하자 이명박정권은 서해NLL 부근에 가서 군사합동연습을 벌인다. 포탄은 수십발씩 NLL을 넘어 북측에 떨어졌고 북한은 이에 수십차례 경고문을 보내오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분명한 도발을 유도하는 책략이었다. 드디어 참을수 없던 북한이 경고한대로 연평도 포격을 해온다. 기대한 효과를 거둔것이다.
천안함 조작으로는 도저히 국민들에게 놀림만 받던 정부는 바로 이 <연평도 포격>을 엮어서 천안함의 북한소행을 밀어부치려 한것이다. 그것은 "천안함의 북한소행을 안 믿자나? 보았지, 연평도 포격을...,이래도 안믿을거냐?" 이런 논리였던것이다.이것은 미국의 광대노릇한 이명박정권의 실상이었다.
그럼 미국은 무엇때문에 이렇게 하여야만 했을가?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통일이 무서웠던것이다. 통일된 한반도는 곧 미국의 품에서 떨어져 나간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절대로 한반도를 중국에게 얽매이게 할수는 없었다. 중국은 경제로 얽어매놓을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하지만 미국은 통제수단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③대한민국 정치인들은 CIA와 멀리하라.
이번의 최순실 게이트로 수많은 사람들은 최순실이 박근혜를 통제하였다고 착각한다. 과연 실상이 그러할가? 그것은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여직껏 미국을 너무 좋게만 보아왔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은 아무렇게나 욕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나 미국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만 보이면 밥보자기 싸들고 덤벼든다.
왜 그럴가? 이것이 바로 교육의 중요성이다. 이승만 정권으로 부터 시작하여 지금껏 우리가 배워온 교육에는 어느 한번도 미국에 대한 찬양을 빼놓은적이 없다. 뿐만아니라 미국에 대한 부정은 금기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실상을 알 수 없을 뿐더러 가령 안다고 해도 감히 말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식민지 나라의 비운이다.
이명박 정권이 저들의 통치를 위해 민간인 사찰을 감행했다면 CIA는 미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통제를 위하여 대한민국 정치인들을 시시각각 감시하고 있지 않을것이라고 누가 감히 장담하랴?. 물론 여기에 걸려들지 않는 정치인도 있겠지만 그들은 어쩌면 이용가치가 없거나 아니면 극 소수의 신인 정치인들에 불과할 것이다. 나만의 과분한 의심일가?
오늘날 정보화 시대에서 지식과 정보는 손쉽게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접촉할수 있다. 고졸인 나도 이런 문장까지 쓸수 있는 정도라면 그 대단한 정치인들, 그리고 학계의 교수,박사 , 언론계의 고급인사들이 사드배치의 정당성을 공공연히 주장하는것을 보면서 과연 저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을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바라고 공공연히 방송에 나와서 그런 말도 안되는 억지 주장을 펼칠가? 혹시 CIA에 한코 꿰인것은 아닐가 하는 의심을 정말로 떨쳐버릴수가 없다. 대통령하겠다는 사람들 까지도 <정략적 모호성>을 내세워 감히 반대 못한다. 박근혜가 갑자기 사드를 끌어들인것에 대하여서도 나는 그 의문을 떨쳐버릴수가 없다. 시진핑하고의 우정을 그렇게 과시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④ 미국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길만이 대한민국을 구하는 길이다.
나는 북한의 모든것이 싫지만 딱 한가지만은 부럽다. 그것은 친일파가 없다는것과 누구의 통제도 안 받는다는것이다. 북한은 중국의 수많은 원조를 받으면서도 결코 중국에게 얽매이지는 않는다. 이상하게도 중국은 또한 그러는 북한을 버리지 못한다. 원인을 알아보고자 인터넷을 누비며 자료를 뒤지고 또 뒤졌다. 그러다가 뜻밖에도 생각지 못한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중국의<항미원조>는 수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쩍하면 중국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일성도 그랬고 김정일도 그랬다. 뿐만아니라 김일성은 북한의 친중파,친소파들을 모조리 제거하였다. 나는 우연히 김일성이 모우쩌뚱에게 중국의 동북3성을 북한에 돌려달라고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모우쩌뚱은 김일성에게 나의 한쪽팔을 떼어가라고 했다는것이다. 이 사실은 북한은 고구려의 역사를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것과 중국과 북한 사이에는 아직도 해결못한 영토분쟁이 존재한다는것을 의미 한다.
그렇다. 장쩌민 집권시기 중국은<동북공정>을 대대적으로 벌인다.고구려유적들을 기네스에 등재하고 노무현의<중국동포2중국적>제안에 화를 낸다.그들에게는 시인하지 않을수 없는 역사가 발목을 잡고 있는것이다. 이것은 중국이 북한의 무상원조 요구에 응하지 않을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였다.하지만 세계는 힘의 원리에 의하여 작동하는것이며 역사는 역사로 남게 될것이다.일본의 쿠릴열도 반환요구에 푸틴은 <재간있으면 도로 빼앗아가라>가 그 대답 이었다.
⑤ 한반도 통일은 요원한것만은 아니다.
2000년 6월,김대중의 방북은 세상의 한겨례들에게 통일의 희망을 부풀게 하였다. 허나 노무현정권이 들어서서 불거진<대북송금수사>는 찬물을 끼얹는듯 하다가 정권이 끝날무렵에야 부랴부랴<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는데 이는 노무현정권의 치적 올리기에 이용한 결과라는 비판을 피할수 없다.애초부터 험난을 겪으면서 어렵게 만든 남북교류의 창을 참여정부는 확대발전시키는데 공력을 들이려고 하지 않았을뿐더러 결과적으로 치적을 쌓는데 이용하였을 뿐이라는 시각이다.
김대중의 위대함은 멀리 내다보고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였다는 점이다.그리고 지금의 국제정세하에서 오직 경제교류를 통한 단계적 노력만이 평화통일의 궁극적인 길이라는 점을 간파한것이다.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념두에 두고 자신이 몸소 실천하였다는 점이다. 물론 대가가 없는 통일이란 있을수 없다. 불법송금도 결과적으로 통일을 위한 대가라는 점 만은 부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 시점에서<남북통일 지원법>을 만들기는 불가능한것만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어이없게 <선제타격론>운운하며 통일을 운운하는 자들은 제정신이 있는자들인지 의심스럽다. 한심한것은 이런 주장을 펼치는 자들 대부분이 <6.25한국전쟁>의 수난을 겪었을 나이인 자들이란 점이다. 이들은 대체 일본에서 건너온것이 아닌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전쟁의 참화를 겪어본 사람들이라면 어찌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할수 있단 말인가?...
통일은 시급하다. 그러나 전쟁을 통한 통일은 절대로 해선 안된다.할수도 없거니와 해서도 안된다.미국이 아무리 강대하다 할지라도 결코 중러를 제압할만한 정도는 아니며 아무리 현대적인 고급전쟁이라 할지라도 그 피해가 막대할것은 자명한 일이다. 우리의 전쟁은 오직 경제침투<전쟁>이어야 한다.남북교류로 경제,문화를 침투시켜 북한사람들의 의식을 개변하는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스스로 변하여야 하는것이다.
나는 통일을 지향하는 평범한 사람이다. 혹여 나의 이 문장을 읽고 나를 빨갱이로 몰아가려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별로 두렵지도 않다. 왜냐하면 이미 시대는 바뀌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나같이 고졸학력인 평범한 사람이 인터넷을 통한 자료수집과 자체의 분석만으로도 이런 문장을 쓸수 있을 정도로 지금 사회는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구시대적인 빨갱이 논리는 더는 통하지 않을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도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 누굴 가르치려 드는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아직도 국민들을 개,돼지로 보는 인간들은 더는 정치판에서 발붙이기 힘들게 될것이다. 정치인,그대들에게 권고하고 싶은 한마디 - 자중하시라...
10). 이재명에게서 대한민국의 희망을 본다.
사실 나는 이 사람을 알게 된지 그리 오래지 않다. 아직도 그를 직접 만나거나 가까이에서 직접 보지는 못했다. 이 사람에게 희망을 본다고 함은 단지 두가지 이유에서다. 한가지는 바로 이 사람의 용기이다. 대한민국사회에서 권력에 맞서 싸우고 재벌에 맞서 싸우는 용기는 아마도 이 사람이 최고인것 같다. 나는 오십넘게 살아오면서 이런 용기있는 사람은 처음 본다. 그의 용기는 결코 무식함에서 나오는 그런 용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무기란 오로지 SNS 인것 같다. 처음 나는 이 사람도 그냥 다른 정치인들처럼 여론이나 이용하고 이름이나 날리려는 그런 정치인정도로만 생각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생각이 얼마나 단순하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풍문>도 많았다. 그래서 이 사람의<전과4범>경력도 열심히 뒤져 보았다. 처음은 좀 막굴러먹은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그의 지나온 삶을 알게 되었을때 마음이 아프고 무언가 형용키 어려운 감정에 사로 잡혔다.
그의 삶은 우여곡절도 많았다.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들은 한편의 소설과도 같았다. 그렇게 아프게 살아온 그였기에 불의와 싸울수 있었고 점차적으로 그런 싸움의 승리를 즐거움으로 굳혀온것 같다. 오마이뉴스 장윤선과의 대담에서 그는 매번의 불의한 자들과의 싸움에서 이룩하는 승리는 마치 몸속의 이를 잡아 죽이는것처럼 시원하다고 말한다. 그의 익살스런 표정에서 나는 싸움군 시라소니의 전설을 다시 보는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불의를 보면 못참는 성격인것 같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그런 싸움의 승리가 낙으로 배인듯 하였다.
이 사람의 두번째 장점은 민첩성이다. 나는 역대로 이 사람처럼 사고가 민첩한 사람은 처음 본다. 그는 원고없이 몇시간을 강연한다. 뿐만아니라 즉문즉답 형식으로 일반인들이 알아듣기 쉽게 민주주의에 대해 가르치고 이 사회의 폐단들을 까발리며 투쟁을 호소한다. 이점은 노무현이 아니라 김대중도 탄복할것 같다. 이는 무엇을 설명하는가? 꾸밈이 없는 이런 말들은 그야말로 소박하고 대중들의 정곡을 찌르는 말로서 누구나 감탄하지 않을수 없게 만드는것이다. 마치 시라소니의 날렵한 주먹질과 발길질이 빈틈없고 정곡을 향해 찌르듯이...이재명은 정치혁명무대의 시라소니와도 같은 존재이다.
나는 이사람이 장차 대한민국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면 어쩌면 동북아 정치판도가 다시 짜이게 될지도 모르며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어깨펴고 다니게 될지도 모를일이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것이다. 물론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지켜보아 주기 바란다. 민심을 읽는자, 소통하는자 만이 얻을수 있는 신심과 용기를 나는 그에게서 읽었다. 열심히 지켜보자 !!!...믿음이 보인다. 그리고 희망이 보인다. 나의 희망, 그리고 대한민국의 희망,우리민족의 희망이 보인다...
< 2017년 3월 12일 - noza 가 보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