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연재 | 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①]
정신의 진정한 해방 추구한 국내파 원효… 사회개혁과 계층통합 시도한 유학파 최치원 원효와 최치원
지식인은 자기 시대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2011년 올해는 여러 가지로 뜻 깊은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름 아닌 2012년 4월 국회의원 총선과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다양한 담론이 펼쳐지고 논쟁이 벌어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이건 선거는 그 사회의 방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를 보더라도 1987년 대선은 민주화 시대를 열었으며, 1997년 대선은 수평적 정권교체를 가져왔다.
시대정신과 지식인의 임무
지난 두 번에 걸친 대선도 이에 버금가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2002년에는 진보 세력이 단독으로 정권을 잡았다면, 2007년에는 보수 세력이 10년 만에 권력을 되찾아왔다. 이명박 정부 초기만 하더라도 보수의 시대가 계속될 것으로 보였지만, 2010년 6월에 치러진 지방선거는 보수와 진보의 새로운 균형을 가져왔다. 바야흐로 보수 대 진보의 새로운 경쟁시대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
정치적 경쟁은 언제나 담론적 경쟁과 결합된다. 그리고 이 담론 경쟁은 시대정신(Zeitgeist)에 대한 경쟁으로 구체화한다. 시대정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 시대의 문화적 소산에 공통되는 인간의 정신적 태도와 양식 또는 이념을 말한다. 시대정신은 한 사회의 발전에서 북극성의 구실을 담당한다. 어느 사회든지 시대정신을 어둠 속 망망대해에서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북극성처럼 미래 좌표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게 마련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을 주조하는 이들이 곧 지식인이다. 지식인은 지식 또는 진리 탐구가 직업인 이들이다. 과거를 성찰하고 현재를 독해하는,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전망하는 게 지식인의 본분이며, 이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시대정신 탐구라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분야의 지식인이 시대정신을 탐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인간과 사회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하는 인문·사회과학자에게 시대정신 탐구는 매우 중대한 과제다. 우리 현대사를 돌아봐도 적지 않은 지식인이 산업화와 민주화 같은 시대정신을 일궈왔다.
최근 시대정신의 의미와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가 선진화 담론이다. 법학자 박세일이 주조한 이 말은 보수적 시각에서 민주화 이후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현실정치 영역에서도 보수 세력의 재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이명박 정부가 내걸었던 ‘선진일류국가’는 선진화 담론의 대중적 버전이었다.
개인적으로 박세일의 연구에 공감하면서도 선진화 패러다임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대정신 탐구에 헌신해온 그의 학문적 열정에는 경의를 표한다. 우리 역사를 돌아볼 때 박세일은 ‘경세가로서의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경세가가 세상을 다스려나가는 사람이라면, 박세일은 시대정신 탐구와 정책대안 개발을 통해 세상사에 적극 개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식인이 담당해야 할 사회적 책무와 역할을 다하지 않을 때 그 사회는 가야 할 방향을 잃은 채 혼돈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 지식인의 역할을 과대평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식인의 일차적 과제가 진리 탐구에 있다면, 인문·사회과학자들에게서 그 탐구의 중대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자기 사회의 미래에 새로운 계몽의 빛을 비춰주는 것, 곧 시대정신의 모색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지식인의 존재구속성과 자유부동성
3년 전 나는 한 지면을 통해 정부수립 60주년을 기념해 우리 현대사를 대표해온 지식인들의 책과 담론을 살펴본 바 있다. 올해에는 시대정신 탐구라는 주제로 지식인의 모험을 우리 역사 전체로 확장해보고자 한다.
반만년에 달하는 우리 역사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지식인은 수없이 많다. 그들 가운데 내가 주목하고 싶은 지식인들은 시대적 과제에 적극 대응한, 다시 말해 시대정신의 심장을 겨눈 지식인들이다. 과연 이들은 어떤 삶과 사상, 그리고 저작을 통해 자기 시대에 맞서왔는가.
이번 기획에서 나는 우리 역사에서 시대정신을 탐구한 24명의 지식인과 그의 대표작을 골라보았다. 선택 기준은 두 가지다. 첫째, 그가 자기 시대를 얼마나 대표하는지에 주목하고자 한다. 어떤 지식인이건 시대적 구속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지식인의 ‘존재구속성’이라고 말하는데, 이 존재구속성은 지식인이 당대의 사회와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둘째, 그가 자기 시대가 주는 한계를 얼마나 극복하려 했는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생각이 깊은 지식인일수록 자기 사회의 문제들을 직시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 존재구속성에서 벗어나 자신이 속한 사회를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게 지식인의 ‘자유부동성’이라면, 이 자유부동성은 진정한 지식인이라면 가져야 할 태도라고 볼 수 있다.
본디 지식인이란 존재구속성과 자유부동성 사이에 놓인 존재일 것이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인간을 ‘구부러진 나무’라고 말한 바 있다. 현실이라는 대지에 뿌리를 박고 있지만 나무는 하늘이라는 이상을 향해 자라는 법이다. 시대가 주는 구속 내지 한계 안에 놓여 있으면서도 그 경계를 끊임없이 벗어나고 극복하고자 하는, 자기 역사와 사회를 해석하는 담론을 생산하고 가야 할 비전을 탐구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인일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미리 이야기해두고 싶은 것은 24명의 지식인을 다루는 데 특히 그의 대표작을 하나 골라 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책은 지식인과 사회를 연결하는 가장 중요한 소통의 수단이다. 둘째, 지식인이 쓴 책을 직접 읽음으로써 독자는 그의 사상을 생생히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대표작을 고르는 데 한문으로 씌어 있는 경우 한글로 옮긴 책을 선택했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서론이 다소 길어졌다. 한국 지식인의 모험에서 첫 번째로 주목하려는 지식인들은 원효(元曉)와 최치원(崔致遠)이다. 두 사람은 우리 고대사를 대표하는 사상가다. 원효는 한국 불교사상의 태두이며, 최치원은 한국 유학사상의 개척자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여러 기록에 남아 있는 두 사람의 삶과 사상을 통해 우리는 한국 고대사에서 지식인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엿볼 수 있다.
원효와 최치원, 같고 다른 길
원효는 의천, 지눌, 휴정, 그리고 경허로 이어지는 우리 불교사상의 거목 가운데 거목이다.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 그가 남긴 저작들은 중국과 일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숱한 일화는 역사의 한가운데를 당당히 걸어갔던 한 고대 지식인의 인간적인 삶을 생생히 보여준다.
최치원은 문학과 철학의 영역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신라 후기 최고의 학자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해 문명을 떨쳤을 뿐 아니라, 신라에 돌아와서 사회개혁을 모색했던 실천적 지식인이다. ‘사산비명(四山碑銘)’ 등 그가 남긴 저작들은 전환기를 살아간 지식인의 고뇌와 운명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두 사람은 여러 점에서 비교된다. 첫째, 원효가 승려라면 최치원은 유학자다. 둘째, 원효가 신라가 통일신라로 발전하는 시기에 활동했다면, 최치원은 통일신라가 고려로 넘어가는 시대를 살아갔다. 셋째, 원효가 이른바 국내파 지식인이었다면 최치원은 유학파 지식인, 그것도 조기유학생 출신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공통점도 존재한다.
첫째, 두 사람은 모두 6두품 출신이었다. 골품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출신 배경은 사회 활동의 기본 조건을 이뤘다.
둘째, 두 사람의 지적 활동은 신라에 국한되지 않고 동아시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원효의 저작은 중국과 일본에서 고평(高評)됐고, 최치원의 문장도 중국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셋째, 두 사람의 사상은 새로운 시대정신의 추구를 보여줬다. 사회통합을 위한 통불교가 원효 사상의 핵심이었다면 전환기의 사회개혁, 불교와 유학의 통합은 최치원의 사상적 실천적 활동의 핵심을 이뤘다.
우리 고대사를 대표한 지식인들인 만큼 원효와 최치원이 남긴 이야기들은 전국에 걸쳐 있다. 서책을 통해 전해오거나 민간에 전설로 전승돼온 두 사람의 이야기가 집약돼 있는 곳은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다. 경주는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다. 몇 년 전 펴낸 책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20대부터 마음이 지치고 우울할 때면 그냥 찾아가는 곳이었다.
경주의 재발견, 신라 시대와의 만남
경주는 물론 나의 개인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남들처럼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가본 게 유일한 여행이었다. 그러다 대학원에 다닐 때 이 놀라운 천년 고도를 다시 발견하게 됐다. 당시 병치레를 하고 있던 나는 우연히 ‘삼국유사’를 통독했는데, 거기에는 국사 시간에 더러 들었던 믿기 어려운 전설과 경이로운 이야기가 무한정 담겨 있었다.
돌아보건대, 당시 병으로 심약해진 내게 ‘정지된 시간’으로서의 설화들이 작지 않은 위안을 줬다. 월명대사가 피리를 불면 지나가던 달이 멈췄다는 이야기나, 대나무 잎을 귀에 꽃은 병사들이 나타나 적병을 물리쳤다는 미추왕릉 이야기나, 서천 물이 불어나 원성왕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말았다는 김주원의 이야기 따위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다 1983년 늦가을 학교신문사에서 원고료를 받게 되자 나는 2박3일의 일정으로 경주로 떠났다. 월명사가 있던 사천왕사지를 찾아가 향가 ‘제망매가’를 떠올려 보고, 대릉원 미추왕릉 옆에서 소형 오디오 플레이어로 현인의 ‘신라의 달밤’과 도미의 ‘신라의 북소리’를 청승맞게 들어보기도 하고, 버스터미널 옆 서천가에 서서 무열왕계와 내물왕계의 치열한 권력투쟁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후 경주를 드문드문 방문해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곳저곳을 찾아가보곤 했다. 1980년대 후반 독일에서 공부할 때도 남산의 풍광을 담은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그곳에 돌아가기를 꿈꾸면서 지내기도 했다.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1991년 한겨울에는 넷째 형님과 함께 토함산 너머 동해안에 있는 감은사지를 찾았다. 동탑과 서탑을 둘러보고 우리 형제는 대종천을 따라 이견대를 옆에 두고 대왕암까지 걸어갔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맞서서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잇닿아 있는 동해를 바라보면서 터덜터덜 대왕암으로 가는 길 위에서 나는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시절 경주에서 내가 발견한 두 명의 지식인이 다름 아닌 원효와 최치원이었다. 신라의 중기와 말기에 활동했던 이 두 지식인은 공부를 직업으로 선택한 내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은 우리 역사에서 처음 만나는 국내파와 유학파의 상징적인 인물들일 것이다. 엄격한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으로 태어난 원효와 최치원은 각각 불교와 유교를 선택해 지식인의 길을 걸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다가 돌연 깨달음을 얻어 유학을 포기하고 경주로 돌아와 포교 활동을 벌인 원효의 삶이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해 문명을 떨치고 조국 신라로 돌아와 개혁에 몰두했으나 결국 좌절한 최치원의 삶은 당대 지식인이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길이었다. 두 사람을 통해 우리 역사는 비로소 지식과 사회의 관계는 어떠하며, 지식인은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됐다고 나는 생각한다.
원효, 구속을 거부한 지식인
원효는 법명이다. 속성은 설씨이며, 아명은 서당 또는 신당이었다. 617년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인 압량에서 태어난 그는 648년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원효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 ‘송고승전’에서부터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해왔다.
원효의 불교사상에 대한 연구 또한 적잖이 이뤄져왔다. 불교학자 이기영과 이종익을 비롯한 한국철학자와 불교학자들을 중심으로 우리 역사가 시작된 이래 최초의 본격 사상가였던 원효의 철학은 다각도로 검토돼왔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의해’ 편에서 원효의 삶과 사상이 갖는 특징을 ‘구속을 받지 않다’(不羈·불기)라고 적고 있다. ‘불기’란 달리 말하면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 문제적 지식인의 삶을 돌아볼 때 일연은 그 핵심을 정확하게 포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원효의 삶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원효는 앞서 말했듯이 국내에서 연구에 전념했던 국내파 지식인이다. 그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도모했는데, 첫 번째는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신라로 돌아왔으며, 두 번째는 661년 지금 경기도 남양인 당항성에서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깨우침을 얻은 다음 역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원효에 대한 여러 유명한 일화 중 하나가 바로 이 이야기다. 무덤 속에서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물을 마셨는데, 다음날 아침 그 물이 해골에 담겨 있었음을 알고 나서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화엄경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중국 선종의 개척자인 6조 혜능의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남방으로 잠행하던 중 혜능은 광주 법성사에서 ‘바람이 움직인 것도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네 마음이 움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자신의 시대를 열었다. 638년에 태어난 혜능보다 20년 먼저 원효가 태어났으니 원효의 대오(大悟)는 대단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당항성에서 깨우침을 얻은 다음 경주로 돌아온 원효는 분황사를 거점으로 해동종, 원효종, 분황종으로 불린 통불교를 주창했다. 불교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나로서는 원효 불교사상의 핵심을 말하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가 여러 종파의 통합을 강조했고, 그것이 이른바 화쟁(和爭) 사상에 집약돼 있음은 분명하다.
이기영에 따르면 원효가 중시했던 것은 화엄사상과 여래장사상이다. 원효는 사제(四諦)와 연기의 인과설, 반야사상과 유식사상 그리고 법화 및 열반사상 또한 배격하지 않았으며, 이 모든 것을 회통하는 일심(一心)의 정화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화쟁을 제창했다.
화쟁은 모순과 대립을 넘어서는 통합을 지향한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바람으로 고요한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나 파도와 바다는 둘이 아니다. 우리의 일심에도 깨달음의 경지인 진여(眞如)와 무명(無明)이 동시에 있을 수 있으나 이 역시 둘이 아닌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다.
‘금강삼매경론’, 일심과 화쟁의 사상
‘금강삼매경론’은 ‘대승기신론소’와 함께 원효의 대표작이다. 이 책에 대해서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국왕이 인왕경 대회를 열어 고승을 찾는데, 원효의 고향에서는 그를 추천했지만 다른 승려들이 이를 시기해 참석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왕후가 병이 나서 이를 치료하기 위해 ‘금강삼매경’을 강론할 고승을 구했을 때, 그 순서가 뒤바뀐 금강삼매경을 맞힌 고승 대안이 원효를 추천했다.
여기서부터 이야기의 흥미로움은 배가된다. 고향에서 경주로 오면서 원효는 두 마리 소의 뿔 사이에 서판을 두고 금강삼매경의 소(疏) 5권을 지었다. 하지만 이 책이 누군가에 의해 도둑맞자 원효는 3일 동안 요약본 3권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현재적 관점에서 보면, 이 이야기 안에는 일종의 사상 갈등이 담겨 있는 듯하다. 한 축은 주류 귀족불교이며, 다른 한 축은 원효와 대안으로 대표되는 비주류 민중불교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고승들에 관한 여러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나온다. 거리의 철학자였던 대안, 말도 못하고 일어서지도 못했던 사복, 그리고 향가 ‘원왕생가’의 주인공 광덕과 엄장의 이야기들에는 당시 민중의 생생한 세계가 깃들어 있다. 주목할 것은 이들의 이야기에 어김없이 원효가 등장한다는 점이다. 원효와 그의 사상은 거리의 불교, 비주류의 철학을 대표했던 것이 분명하다.
귀족불교의 거점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을 강의할 때, 원효는 “옛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름에 있어서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구나”라고 호방하게 시를 읊었다. 의미를 부여하면 원효로 대표되는 민중불교가 시민권을 획득하는 지점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릇 어떤 사회, 어떤 시대라 하더라도 사상 갈등은 존재한다. 지식사회학적 시각에서 영원한 진리는 부재한다. 주류의 지배 헤게모니에 맞서는 비주류의 대항 헤게모니가 등장하고, 비주류가 지배 헤게모니를 획득했을 때 이에 맞서는 또 다른 비주류의 대항 헤게모니가 등장하는 법이다. 이 점에서 사상 갈등은 언제나 사회 갈등과 짝을 이루고 있다.
다른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원효의 삶과 사상이 갖는 상징성을 주목하려는 것이다. 삼국통일로 나아가는 신라에 부여된 새로운 과제는 사회통합이었으며, 원효의 불교사상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제기됐다고 볼 수 있다. 사회가 분열돼 있다면, 이 분열은 치유할 수 있는 통합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요구하는바, 원효의 사상은 바로 이러한 요구에 적극 응답하고 있다.
이런 사회학적 해석이 물론 원효 사상이 갖는 독창성을 훼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반적으로 사상은 그 자체의 철학적 의미와 그것이 놓인 시공간 속에서의 사회적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불교에 대한 새로운 철학적 해석으로도 원효의 사상은 우리 고대사에서 최고의 연구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그의 ‘금강삼매경론’은 중국으로 수출돼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불교학자 은정희에 따르면 ‘금강삼매경론’에는 원효 사상의 핵심인 일심과 이 일심을 천명하는 화쟁의 논리방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수많은 대승불교의 경과 논(論)을 다양하게 참조해 금강삼매경을 해석함으로써 원효는 중도와 화쟁의 논리를 도출하고 또 정립하고 있다. 원효의 화쟁 사상은 이후 고려 시대 의천을 포함해 우리 불교사상은 물론 사회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왔다.
요석공주와의 사랑으로 파계를 자초한 원효는 자신을 소성거사라 불렀다. 남루한 옷을 입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하나의 마음’과 ‘중생의 평등’을 노래했다. 걸인으로부터 큰 표주박을 하나 얻어 그것을 두드리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힘없는 민중에게 ‘모든 것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임을 설파했다.
하나의 동일성과 둘의 차별성을 모두 아우르는 원효의 사상은 현대적 어법으로 말하면 동일성의 모더니즘과 차이의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합하려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동일성을 인정하면서도 차이를 승인하려는 진정한 의미에서 통일 원리가 다름 아닌 화쟁의 철학이다. 바로 이 화쟁 사상이 군사적 정치적 수준을 넘어선 문화적 의식적 통일에서 하나의 중대한 시대정신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최치원, 조기유학생의 선구자
최치원은 원효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857년에 태어난 그는 앞서 말했듯이 조기유학생이었다. 원효가 국내파 지식인의 거목이었다면, 최치원은 의상과 함께 유학파 지식인의 대표 주자였다.
‘삼국사기’ 열전은 최치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서울 사량부 사람이다… 12세에 상선을 따라 당(唐)에 들어가서 공부하려 하였는데, 아버지가 이르기를 ‘10년에 급제를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하라’하였다.”
이후 최치원의 삶은 전형적인 유학생의 코스를 따랐다. 874년에는 과거에 급제했고, 이후 당나라 관리가 됐다. 879년 황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종사관으로 ‘토황소격문’을 지어 문장가로서 이름을 대륙에 크게 떨치기도 했다.
대개의 유학생이 그러하듯이 최치원 역시 885년 고국 신라에 돌아와 관리의 길을 걸었다. 894년 그는 시무책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 국정쇄신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신라는 이미 국가의 기운이 다한 나라였다. 골품제를 유지하던 신라는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노쇠했다.
정치적으로 좌절한 최치원은 외직을 자청해 지방 태수로 나갔다. 아찬까지는 승진했지만, 골품제의 한계로 거기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결국 관료의 길을 포기하고 은둔의 길로 들어섰다.
최치원이 남긴 이야기들은 원효만큼 풍부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가 이 땅의 유학과 한문학의 개척자였던 만큼 몇몇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삼국사기’를 보면, 그는 고려 왕건이 일어났을 때 “계림은 누런 잎이요 곡령은 푸른 솔이라”라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여기서 계림은 경주이고, 곡령은 송악이다. 누런 잎의 계림과 푸른 솔의 곡령은 신라의 쇠망과 고려의 흥기를 예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사학자 이병도는 이 말이 최치원의 문인들이 나중에 만들어낸 것이라고 보고 있다.
나 역시 과연 최치원이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이 말에는 당대의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돼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식인이 자신이 태어날 시대를 고를 수는 없다. 시대가 주는 구속 안에서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 하며, 그 선택에 따라 지식인의 운명이 바뀐다. 그 시대가 전환기이면 지식인의 고뇌가 깊어질 수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우리 역사에서 나말여초의 ‘3최’(최치원·최승우·최언위), 여말선초의 정몽주와 정도전, 그리고 조선말의 위정척사파와 개화파는 이런 지식인들의 엇갈린 운명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3최 모두 당나라에 유학한 지식인들이었지만, 최치원이 신라를 버릴 수 없었다면, 최승우는 후백제를, 최언위는 고려를 선택했다.
최치원의 저작은 상당했던 것으로 전하지만, 남아 있는 책이 그리 많지는 않다. 중국에 있을 때 쓴 시문을 모은 ‘계원필경’, 여기저기 실려 있는 시문과 금석문이 현재 접할 수 있는 그의 저작이다.
최치원이 남긴 저작 가운데 크게 주목을 받은 것이 ‘사산비명’이다. 이 저작은 최치원이 당대에 활동했던 고승들의 공덕과 사찰의 건립에 대해 쓴 비문들을 모은 것이다.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국사대공탑비(국보 47호), 성주 만수산의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8호),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적조탑비(보물 138호)에 쓰인 금석문과 현재 내용만 전하는 대숭복사비문이 바로 그것이다. 당대에 쓰인 자료가 매우 희소한 만큼 ‘사산비명’이 전하는 기록은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사산비명’, 유학과 불교의 통합
사회학 연구자로서 흥미로운 것은 ‘사산비명’에는 신라의 불교사뿐 아니라 그 시대의 역사와 정치, 문학과 사상 또한 담겨 있다는 점이다. 진감국사대공탑비를 보면, 최치원은 중국 동진의 고승인 혜원의 말을 빌려 “여래가 주공·공자와 비록 출발하여 도달하는 방법은 달리하나, 귀착하는 곳은 한 가지 길이다”라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화랑도에 관한 ‘난랑비서’(鸞郞碑序)를 보면, 그는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는데 이를 풍류(風流)라 한다”고 말하고, 여기에는 공자의 주지(主旨), 노자의 종지(宗旨), 석가의 교화(敎化)가 담겨 있다고 지적한다. 그가 전통사상에도 주목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남아 있는 텍스트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최치원의 사상을 정확히 규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사상은 유교를 기반으로 하되, 불교와 전통 사상을 통합하려는 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공적 영역에서의 유교와 사적 영역에서의 불교 및 전통 사상을 생산적으로 결합하고자 했던 것이 최치원이 추구했던 시대정신이지 않았을까.
최치원의 삶은 시대와 지식인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어떤 사회체제라 하더라도 그것은 역사적 체제로서 탄생, 성장, 쇠퇴, 그리고 멸망을 경험하게 된다. 원효와 최치원은 각각 통일신라의 탄생 시기와 멸망 시기를 살아갔던 지식인들이다. 탄생의 시기는 새로운 기대를 품게 하지만, 멸망의 시기는 아무래도 비관적 정조를 갖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최치원의 자는 고운(孤雲)이다. 저물어가는 신라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지만 결국 외로운 구름이 되어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기나긴 삶을 마쳤다. 가야산 해인사 입구에 있는 홍류동에는 그가 남긴 시가 남아 있다고 한다.
“물이 미친 듯 휩쓸어가니 지척간인들 말소리가 듣기 어렵구나. 그러나 사람의 시비소리는 귀에 이르니 끝닿는 데까지 흐르고야 마는 그 물에서 배워야 하겠네.”
이 시에는 시대와의 긴장을 견뎌내고 그것을 초극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고뇌가 서려 있다. 최치원의 삶을 돌아보면 지식인은 자기 사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치원이 서쪽에서 대당을 섬길 때부터 동으로 고국에 돌아와서까지 모두 난세를 만나, 행세하기가 자못 곤란하고 걸핏하면 비난을 받으니, 스스로 불우함을 한탄했다”고 한다.
과연 지식인은 세상이 밝으면 나아가 실천하고, 세상이 어두우면 물러나 은둔해야 하는가. 지식인은 존재구속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또 자유부동성을 어떻게 발휘해야 하는가. 과연 지식인은 자기 시대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최치원의 삶은 그의 마지막 생애를 보면 결국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를 좀 더 길게 보면, 결국 그의 시대정신은 고려 시대의 사상적 기초를 이뤘다. 골품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적 요구이며, 변화된 시대에는 사회개혁과 통합을 위한 새로운 철학적 이념적 기반을 요청하고 있었다.
설총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
오랜만에 원효와 최치원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지난 11월 어느 날 경주에 갔다. 박물관에 들러 원효가 한때 머물렀던 고선사지 삼층석탑을 돌아보고, 최치원이 시무책을 올린 상서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종일 머릿속에는 원효와 최치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원효가 열반에 들자 설총은 아버지 원효의 유해로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고 예배를 올렸다. 그러던 어느 날 절을 하자 그 소상이 돌아보았다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놀라운 것은 ‘삼국유사’가 쓰인 고려 후기까지 이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 남아 있었다고 일연이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전부터 이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해본 나는 소상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단언해왔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아들 설총이 보기에 아버지 원효가 남긴 유산은 바로 그것이었으리라.
다른 지식인들이 세상의 밝은 앞만 바라보았다면 아버지 원효는 앞이 아니라 그 옆 또는 뒤에 가리어진 세계를 바라보고, 그 속에 직접 뛰어든 존재였음을 아들 설총은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자신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효가 시냇물에 빠졌다고 전하는 월정교를 찾았다. 남천에 있는 이 다리는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인 탓에 다소 어수선했다. 물에 젖은 원효는 건너편 요석궁에서 옷을 말리고 요석공주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아들 설총이 태어났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든 것임을 깨달았던 원효가 새삼 사랑을 갈구한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웃고 우는 저 낮은 곳, 사랑과 미움의 일상사를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서였을까. 사랑만큼 우리 삶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시냇물에 스스로 빠지듯 원효는 사랑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 ‘삼국유사’를 보면 일연은 원효에 대한 기록을 다음과 같은 찬시로 끝맺고 있다.
“각승을 지어 ‘삼매경’의 뜻을 처음으로 열어 보이고, 표주박을 희롱하며 거리마다 교화를 베풀었네. 달 밝은 요석궁에 봄잠이 깊더니, 문 닫힌 분황사엔 돌아보는 모습만 남았네.”
초겨울 분황사의 저녁 풍경
요석궁의 봄잠과 분황사의 소상을 생각하건대 원효는 정신의 진정한 해방을 추구했던 지식인이다. 차이를 승인하면서도 동일성을 모색했기에 그는 ‘모든 중생은 다 같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포효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효의 사상은 시대의 구속을 넘어선 보편적 자유와 평등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자 당당한 선언이며, 시대적 구속을 뛰어넘은 진정한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다.
저녁 무렵에 찾은 분황사는 쓸쓸했다. 초겨울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오르고, 녹음된 불경 소리가 구석의 기념품 가게에서 제법 크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분황사를 상징하는 모전석탑과 돌우물 주위를 배회하면서 잠시 고개를 숙여 원효와 설총이 살던 그때를 떠올려보았다.
어디선가 은은한 소리가 귀에 스친다. 담 너머에는 황룡사 9층 석탑이 우뚝 서 있다. 바람이 부니 층층이 달린 풍경 소리가 경주 도성 안에 가득히 울려 퍼진다. 아버지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아들을 부른다. 금당 돌계단에 서서 아버지가 삶의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가져야 할 의미를 아들에게 나지막이 이야기하니, 떨어진 낙엽을 쓸다만 아들은 저 낮은 세계로 나아갔던 아버지의 삶, 지식인의 길에 대해 조심스레 묻고 있다.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선도산 쪽으로 해가 더욱 기울었다. 분황사도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시간이었다. 서둘러 정문을 나서는데 문득 돌아서서 바라보면 바로 저기서 두 사람이 나누는, 따듯한 미소로 세계의 비밀을 전하는 아버지의 답변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존재의 이유를 묻는 아들의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을 것 같았다. 아직 한겨울이 오지 않은 탓인지 경주의 저녁 바람에는 제법 온기가 남아 있었다
원효는 누구인가
|
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
첫댓글 김호기 교수의 "시대정신과 지식인" 시리즈 12회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