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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나그네, 거류민, 그리고 시민권자의 삶
손님으로 살기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고대 그리스 누군가에 의해 델포이 신전 입구에 새겨졌다고 한다. 이 한마디의 진리를 묻기 위한 명령문이 서양철학을 알리는 촌철살인의 표현이라고 한다. 또한, ‘자기 자신을 알고 그러한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은 모든 개인이 일평생을 궁구하고 이루어가야 할 궁극적인 과제일 것이다.
이 물음에 앞서 우리는 왜 이 땅에 던져져서 살아가는 존재인지, 즉 개인의 존재 목적에 관한 물음도 중요할 것이다. 이런 문제에 해답을 찾았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그 방법론을 탐구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문제와 관련하여, 노자는 도덕경에서 ‘도(道)를 깨달아 잘 실천하는 옛 구도자는(古之善爲士者) 마치 손님처럼 조용하고 진중하다’[儼兮其若容(客)]라고 했다. 왜 하필 손님과 같다고 했을까? 노자는 세계를 ’없음‘(無)과 ’있음‘(有)으로 대표되는 두 계열의 대립으로 보았다. 그 대립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근거를 반대편과의 관계에서 설명한다. 즉 ’없음‘(無) 이라는 것은 ’있음‘(有) 이 존재함으로써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며, ’있음(有)이라는 개념은 ’없음‘(無) 이 전제 되기 때문에 의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노자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이러한 형식으로 엮어졌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있음‘(有) 이라는 개념은, 세계 안에서 주인의 위치를 점하지 못하고, ’없음‘(無) 을 의식하는 손님으로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없음‘(無) 이라는 개념도 ’있음‘(有) 을 의식하는 손님이다. 이 세계에 있는 어떤 것도 자신만이 배타적인 본질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라곤 없으며, 모두가 자신의 대립 면을 의식하는 손님일 뿐이다. 인간도 그러하여 이 세계에 손님으로 와 있다는 것이 노자의 생각이다. 손님이란 어느 곳의, 누구의 손님이 되었든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신중하고 진중하다. 즉 묵직하고 진지하게 처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자의 생각은 성서적일 수 있다. 이 땅의 주인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주인의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하라는 위탁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편에서는, ’하늘이 주의 것이요. 땅은 주의 것이라. 세계와 그중에 충만한 것을 주께서 건설하셨나이다‘(시 89:11)라고 노래했고,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서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24:1)라고 주께서 만물의 소유자이심을 고백했다.
이처럼 땅의 소유권이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귀속된다면 그 땅의 거주자는 어떤 조건으로 체류하게 될까? 물론 소정의 임차료를 지불(支拂)해야 할 것이다. 그 임차료는 어떤 형태의 채무일까? 신학자들은 이를 사법적 정의와 형제간 사랑의 실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만일 거주자가 임차료를 체납했을 때는 그 땅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땅으로부터 토해냄을 당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출애급 이후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건도 임차인 교체사건이라고도 하며, 이같이 구약의 역사를 신학자들은 땅의 역사라고도 한다.
한편 조직이나 공동체에서 ’주인의식을 가지라‘라는 말이 있다. 이는 그 구성원인 개인에게, 소극적인 노예근성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조직이나 공동체의 운영에 참여하여 자기 것처럼 최선을 다하라는 권면의 표현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각기 자기가 주인이라고 투쟁하며 군림하고 과다한 지분을 요구하여, 이 땅을 천박하고 사납고 거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개인에서 사회, 국가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래서 이들 간에는 경쟁이 따르고, 경쟁은 승자와 패자로 구분시키어 주인과 노예의 관계만 존재하게 된다. 이런 곳에는 손님이 있을 자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주인으로 살아야 하나, 아니면 손님으로 살아야 할까?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되는 물음이 된다. 그리스도인이란 라틴어 ’크리스티아누스‘(Christianus)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그리스도에게 속한‘이란 뜻이다. 이 호칭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 주어진 이름이다.
’그리스도에게 속한‘사람이란 어떤 속성의 사람들일까? 베드로는 십자가에 친히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면서, 예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질적인 일면으로 진술하고 있다(벧전 4:12-16). 다윗도 시편(119:71)에서 ’고난받는 것이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노래했고, 바울도 고린도 후서(12:10)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하여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수용하였다.
연이어 바울은 고린도 후서(2:14-15)에서 ’우리로 말미암아 각 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는 말로 그리스도인의 역할이 그리스도의 향기임을 알렸다. 이어서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6:10).‘라는 말로 그리스도인의 속성을 설명하였다.
한편 존 파이퍼(John Piper) 목사는, ‘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사랑을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라고 개인으로서의 그리스도인을 정의하였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려면 주인으로 사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땅에서도 손님처럼 살아가야 할 것이다. 향기의 역할을 하려면 자기 목소리를 크게 내어 요구하지 않고, 신중하고 진중하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모습(manner of life)은 손님의 태도와 몸가짐과 언어로 바뀌어야 본성과 어울릴 것이다.
2. 나그네로 살기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 바로가 야곱에게 네 나이가 얼마냐 묻자, 야곱은,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으로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하였다. 야곱의 이 진솔한 말은 험난한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과 미래를 보여주는 선견자의 음성으로 들린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데라와 아브라함은 메소포타미아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지금의 터키 땅 하란(Haran)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그곳에서 다시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거쳐 가나안의 낯선 땅에 정착하게 된다. 한때 기근이 들어 이집트로 피난을 떠나가기도 했으니, 아브라함은 멀고 긴 나그네의 여정을 보냈다.
그가 떠난 우르는 인류 최초의 문명발상지인 수메르의 도시국가 중 하나이다. 여행자는 네 명의 가족이었다. 아브라함, 아버지 데라, 아내 사라와 형제인 하란의 아들인 조카 롯이었다. 하란은 출발 전에 죽었다. 나머지 형제 나홀은 구약에 설명이 없으므로, 이 일행에 합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북쪽 하란의 도시로 이주하였다고 전한다. 그 도시는 나홀성(城)으로 알려졌는데, 후에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고향이 되었다. 리브가는 나홀이 하란의 딸 밀가 사이에서 난 브드엘의 딸이었다.
하란은 우르에서 700마일 되는 거리이며, 빌리크(Bilikh) 강가에 있는 지역으로, 유프라테스강과 합류하는 지역에서 북쪽으로 60마일 떨어져 있다. 하란이란 이름은 ‘도로’를 뜻하는데, 이 도시는 다마스커스, 이집트와 동쪽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주요 도로에 위치하였다.
왜 그들은 가나안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하란에서 멈추었을까? 그 대답 중의 하나는 하란에 그들의 친척이 있었고, 하란은 우르에서처럼 달의 신을 숭배했던 곳이라서 데라가 이곳을 익숙하게 여겨, 여행을 중단하라고 아들을 설득시켰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이유로는 데라가 여행 도중 병을 앓아 하란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느 이유이건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을 때까지 하란에 머물렀다.
하란은 밧단 아람(Padan Aram) 즉, ‘아람의 평원’이라는 의미에 걸맞게, 아람의 중심으로, 기록으로 보면 기원전 19세기부터 18세기까지 매우 번성했던 도시였음이 분명하다. 또한, 같은 빌리크 계곡 위쪽에는 하란에 못지않게 유명한 성서상의 도시,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고향 나홀이 있다.
아브라함이 75세 때 여호와께서 ‘너는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는 명령에 순종하여 가나안 땅으로 떠나게 된다. 그곳에서 가나안 땅까지 거리는 1,000Km가 넘는 길이다. 하란을 출발해서 빌리크 강을 따라 유프라테스강에 이르면, 그곳에서 수천 년 묵은 대상길을 이용하여 팔미라 오아시스와 성서에 나오는 다말을 거쳐 다마스커스까지 갈 수 있고,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뻗은 길을 따라가 보면 갈릴리 호수에 다다르게 된다. 이 길은 유프라테스강과 요단강, 메소포타미아 왕국과 지중해 연안의 페니키아 항구 도시들, 더 멀리 이집트의 나일강을 잇는 가장 오래된 장삿길이기도 하다. 아마 아브라함 일행은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또한, 야곱도 형인 에서를 속인 후 밧단 아람(Padan Aram) 외삼촌 집으로 도망갔다.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와 정착했다. 그 후 기근을 만나 이집트에서 나그네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죽었으니 자신의 말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
그들의 자손도 마찬가지였다. 출애굽의 40년 광야 생활, 바빌론 유수, 로마와의 전쟁 패배로 이베리아반도로 디아스포라(diaspora) 신세가 되었다. 또한, 근세에는 나치의 핍박으로 온 세계로 흩어져, 이스라엘의 역사는 실로 ‘나그네 길’의 연속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신약시대 즉 헤롯이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상당히 많은 디아스포라 들이 지중해 동부에 위치한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다소, 에베소 같은 지역에 살았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그리스도가 활동하던 시기에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지역에 살던 유대인보다 많아서, 아마 그 비율이 450만 명(디아스포라) 대 100만 명(팔레스타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베드로전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소아시아와 흑해 연안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하노니’(1:1)라고 인사한 후,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1:17)라며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권면하였다.
또한, 히브리서에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11:13),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며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11:9)라는 말씀으로 믿음을 좇아 나그네처럼 살아간 신앙의 선배들을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그네(stranger)란 누구인가? 웹스터 사전에는 1) 외부인, 신참자, 외국인, 2) 손님이나 방문자, 3)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친숙하지 않은 사람, 4) 익숙하지 않은 사람, 5) 관계자가 아닌 사람을 일컫는다.
즉 외국에 머무는 일시 거류자(居留者)를 의미하고, 비슷한 말로는 남의 나라 땅에 잠시 사는 거류민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언제라도 돌아갈 나라와 고향이 있는 것이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을 이 땅의 나그네로 비유한다. 나그네로 머무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고 짧은 것이다. 그들은 돌아갈 본향이 있어, 이 땅에서의 삶을 궁극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치관이 비그리스도인과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디오그네투스에 보내는 서신’(Epistle to Diognetus)에서 그리스도인의 기품(The manners of Christian)을,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 살고 있지만, 나그네처럼 살고 있다. 시민으로서 그들은 타인들과 모든 것을 공유하며, 마치 외국인들 인양 모든 것을 참아 낸다. 그들에게 모든 외국의 땅이 조국이고, 조국의 땅이 외국의 땅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간다는 참 의미는 어떤 것일까? 모세는 신명기(30:19-20)에서 가나안으로 향하는 광야 길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으니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라고 거듭 권면하였다.
여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여정에서 생명을 선택할 것과 그 생명을 이루어나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고 의지하라고 당부했다. 따라서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 주인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마치 손님과 나그네같이, 주인의 뜻에 따라 살아갈 것을 의미할 것이다.
3. 시민으로의 삶과 그 의무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 권속이다.’(2;19)라는 놀라운 선언을 했다. 그 당시 로마 속주였던 소아시아지역 사람들과 유대인에게 ‘시민’이란 말은 낯선 용어였다. 시민이란 로마인들에게 해당하는 특권적이고 특혜적인 신분의 칭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에게 그 말은 친숙했다. 한때 사도 바울은 로마시민임을 근거로 자기를 죽이려고 모함한 유대인의 법정이 아니라, 로마 황제의 법정에 서도록 상소한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나온다. 이는 로마인들은 지역과는 무관하게 로마법에 따라 법적 사건을 판결받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로마시민권 제도는, 공화정 시절부터 정치의 중심이자 충성스러운 복속자(服屬者)들을 제국 안으로 끌어들이는 수단이었고 혜택이 많아, 이 특권을 얻으려고 라틴인들은 싸우기까지 했던 지위였다.
앞의 에베소 서신에서 ‘너희는’에 해당하는 수신자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에베소 현지에 거주하는 이방인 신자들을 가리킨다. 바울은 그들도 언약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유대인 성도와 동등한 권리와 특혜를 누리는 ‘시민’임을 일깨우고 있다.
그 당시 에베소를 비롯한 소아시아 교회의 현지 주민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부분 노예였기 때문에, 이런 엄청난 ‘시민’의 지위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다는 선언은 혁명적인 일이었다.
그뿐 아니라 바울은 마케도니아의 빌립보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20)라며, 그리스도인은 ‘시민’이며 그것도 하늘의 ‘시민권’자임을 천명하였다.
우리말 성경 빌립보서 3:20 절의 ‘시민권’에 해당하는 헬라어를 영어 성경인 흠정본(King James Version, KJV)에서 ‘생활 기품’ 또는 ‘생활양식’(manner of life)의 고어인 ‘Conversation’으로 번역하였다. 그 뜻은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을 얻은 백성들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는 하늘의 삶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오래전부터 로마의 속주였던 빌립보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로마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는 빌립보 교인들이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주 예수를 바라보고 기다려야 함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강조한 것으로 주석서는 해석하고 있다.
KJV For our ‘conversation’ is in heaven from whence also we look for the Savior, the Lord Jesus Christ.
이러한 맥락에서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와 같은 현대의 영어 성경은 그 헬라어 원문을 ’시민권‘(Citizenship)이란 단어로 번역하였고, 우리말 성경도 이를 따랐다.
NIV
(Their mind is on earthly thing) But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And we eagerly await from heaven, the Lord Jesus Christ.
더욱이 에베소서에서 먼저 ’시민‘이란 단어를 썼으므로, ’시민권‘이란 번역은 타당하고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KJV Now therefore ye are no more strangers and foreigners, but fellow-citizens with the saints, and of the household of God.
NIV Consequently, you are no longer foreigners and aliens, but fellow citizens with God’s people and members of God’s household.
모세는 신명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을 택하라고 권면을 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 선언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오셨기 때문일 것이다. 즉 바울은 예수가 만물을 새롭게 하실 분(계 21:5)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11:36)라고 했다.
그래서 오신 그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가까이 왔고(눅 10:9), 너희 안에 있다.’(눅 17:21)라고 하셨으며, 주기도문에서도 ‘하늘나라가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마 6:10)이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그분의 오심으로 이 땅이 초월적인 영원한 세계와 결합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분은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살아간다면 이것은 하늘의 시민권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시민권자가 그 특혜 곧 권리를 누리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 즉 시민으로서의 납세의무를 이 땅에서 몸으로 살아내어야 한다. 그리하면 손님과 나그네와 거류자의 신분에서 자유롭고 존엄한 시민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아가 새롭게 바뀌게 될 것이고, 새롭게 된 자아는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게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것이다.
첫댓글 아멘!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하나님 뜻대로 살면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나아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나날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저도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도록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