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한강 작가,
무거운 노벨상 가볍게
받았으면…
----소설가 한강----
<뉴스 1>
노벨상 受賞 작품
'原書'로 읽게 해 준
한강의 기적
창창한 작가 나이,
더 깊고 넓은 작품 세계
기다리게 해
‘딸이 노벨상을 먼저 받게 되면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기자의 이런 실없는 소리에 아버지는
그냥 ‘허허허’ 웃고 말았다.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막 받고
난 뒤였다.
조선일보가 후원하는
‘임방울 판소리 축제’ 뒤풀이 자리였다.
임방울 재단 김중채 이사장은
‘한강 작가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라고
소개했다.
판소리 애호가 수준이 아니라
준(準)소리꾼 경지라고 했다.
아버지는 언제까지 ‘작가 한승원의 딸’일
것 같던 딸이 어느 날 자신을
‘작가 한강의 아버지’
로 만들어버린 사태 변화가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에 노벨상 수상
작품을 번역판이 아니라 원서(原書)로
읽게 됐다는 감회에 겹쳐 10여 년 전
이 장면이 떠올랐다.
소설가 한강은 나를 몇 번이나
무릎 꿇게 한 작가다.
‘소년이 온다’
는 중간 부근에서 더 나가지 못하고
덮었다.
장편이라지만 중편(中篇) 두께 길이다.
문장도 유리처럼 맑고 투명했다.
등장인물이 많지도 않다.
맑고 투명한 문장이라서 그 문장이
드리운 무거운 그림자에 더 숨이
막혔던 듯하다.
소설 무대가 나와 무연(無緣)한 곳이
아니라서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2차 시도도 실패했다.
그래서 ‘소년이 온다’의 끝은 아직도
나에겐 미제(未濟) 상태다.
‘채식주의자’도 중도하차(中途下車)했다.
벌어진 상처의 아가리를 뚫어져라
응시(凝視)하는 작가의 눈길이 당해내기
버거웠다.
다음엔 초기 단편을 묶은
‘여수의 사랑’과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부터 정규 코스를 밟아 도전해 볼 생각이다.
책꽂이 어딘가 꽂혀 있을 것이다.
소설이 쓰인 원어(原語)로 읽는 독자가
벅찰 정도라면 이 소설을 영어·불어로
옮긴 번역가의 수고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는
1968년 일본 작가로선 최초로 노벨상을
받았다.
공교롭게 메이지(明治)유신 백년이
되는 해라서 일본 전체가 들썩거렸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향이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설국(雪國)’의 작가다.
그해 12월 스톡홀름 수상식 연설에서
가와바타는 동행한 영어 번역가
사이덴스티커를 가리키며
‘내 소설 절반은 사이덴스티커가 쓴
거나 마찬가지’라고 감사를 표시했다.
가와바타는 지금도
‘일본 소설가 중 가장 아름다운 글을
썼던 작가’ 로 평가받는다.
번역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사이덴스티커의 말은 달랐다.
“뜻이 분명하고 조리 있는 문장은
흥미가 당기지 않아요.
‘작가님, 이 문장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물어야 할 곳이 많은 글에 끌립니다”.
한강의 번역가도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작가의 복(福)이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정리되지 않는다.
작가를 기다려야 한다.
어느 역사가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侵攻)은
무엇을 남겼는가’라고 스스로 묻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내놨다’고 답했다.
2차 세계대전은 독일에 하인리히 뵐과 귄터
그라스의 ‘휴가병열차’ ‘양철북’을 남겼고,
피로 범벅된 발칸의 역사 속에서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강의 다리’가
태어났다.
그런 뜻에서 6·25는 지금도 종결을 기다리는
전쟁이다.
‘5·18′ ’4·3′을 피해자가 섰던 자리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시선을 불편해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건 하늘을 더 높이 나는 새의 눈을
가진 또 다른 작가를 기다리면 되는
일이다.
걱정도 태산이랄지 모르지만 작가
나이가 걱정된다.
노벨상은 다른 상보다 무겁다.
기쁨이 지나면 중압감(重壓感)이
내리누른다.
일흔이나 여든에 받는 게 무난하다.
가와바타는 노벨상 이후 몇 편의
단편소설을 썼을 뿐이다.
펜의 무게를 더 느꼈던 듯하다고 했다.
한 해 걸러 작품을 내놓다
1957년 43살 한창 나이에 수상한
알베르 카뮈도 수상 이후 유작(遺作)
‘최후의 인간’이란 미완성 작품을
매만지다 세상을 떴다.
한강 작가가 무거운 상을 가볍게 받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이젠 역사 현장으로부터 조금 거리를
둬야겠다’는 뜻을 비쳤는데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한강은 수상 소감으로
‘Thanks, thanks, thanks’ 하고 문학의
새 영토를 개척해 온 선배들에게 공을
돌렸다.
맞춤한 답변이다.
한강 덕분에 이제 선배 작가들도
노벨상 발표 때가 닥치면 전화통을
떠나지 못하던 옹색스러운 처지를
벗게 됐다.
1968년 가와바타 수상 다음 일본
수상자가 나올 때까지 26년이 걸렸고
2012년 모옌(莫言) 수상 이후 중국
수상자는 더 나오지 않았다.
상(賞)에 곁눈질 않고 쓴 작품이 상을
물고 돌아오는 법이니 더 좋은 작품을
기대해 볼 만하다.
강천석 고문
[출처 : 조선일보]
[100자평]
아나타
남성혐오 극단주의, 남로당식 현실 인식,
사실을 조작하는 역사 판타지...
대체 한강의 소설이 뭐라고 덜컥 노벨문학상을
안기는가?
스웨덴 한림원은 2016년에는 문학엔 관심도 없는
가수 밥 딜런에게 노벨문학상을 줬다.
노 문학상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졌으니,
한강이 상 받은 걸 갖고 민족주의 물개박수
부추기지 말라!
先進韓國
강천석 고문이 한강 작가에게 좋은 충고를
해주었다.
54세는 노벨문학상을 받기에 이른 나이다.
한강 자신도 그렇게 느낄 정도다.
그러니 마음의 부담이 커질 것이다.
그러니 너무 노벨상 수상을 의식하지 말고
앞으로도 꾸준히 창작하기 바란다.
평상심이 중요하다.
또 하나, 강 고문이 한강 작가의 작품을 읽다가
못 읽었다는 말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한강 작가의 소설을 좋게 평가한 사람들도 있지만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중 좋은 면을 보고 상을 주었다.
그러나 한강 작가의 수상에 대해 국내 문단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강 작가는 이런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좀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도록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좌파적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지 말고 다른 면도
보기 바란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있다고 해서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게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그 사실은 위대한 업적이다.
tian mie支那
같은 소설이 북한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나왔다 하더라도 번역되었을까?
번역되었다 해도, 수상 될 수 있었을까?
작가는 대한민국에 감사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싫으면 그 국민에게는 영광을 돌릴 순
없었을까?
뜬금없이 우크라이나 어짜고 하기 전에.
흰구름
원로급 논객이 쓴 글치고는 매우 유치하다.
제법 문학 소년의 치기어린 감성을 담은 표현들이
많은데 '벌어진 상처의 OOO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등의 언어 유회적 표현은 그 연륜에
쓴 글로는 접하기가 민망하다.
좀 더 기품있고 무게 있는 칼럼을 쓰기 바란다.
그리고 한강에 조언한다.
세계적인 명작은 좌파적인 이념에 치우친 작품이
거의 없다.
'백경' '전쟁과 평화' '레미제라블' '폭풍의 언덕’
'인간의 굴레' '이방인' '마의 산' '대지' '좁은 문’
'데미안' '설국'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등 이념을 다룬 소설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나 삶의 깊이와 의미를
천착하는 글을 쓰기 바란다.
그러나 노벨상 수상은 축하한다.
anak
객관성이 결여된 소설
조르바
조선일보 댓글란을 장악한 바보 극우 노인들은
여전하구나.
이 노인들과 함께 조선일보는 석양처럼
저물어 간다.
alexsong
헛소리!
이게 무슨 말이냐 당나귀냐?
QP7
소설은 픽션이다.
픽션이란 허구를 말한다.
소설작품을 보고도 왜 진실을 왜곡하냐는 초등생
만도 못한 질문을 한다.
아직도 소설과 역사적 사실 보도를 헷갈려 하는
자들이 많다.
하긴 늙어지면 현실과 허구를 착각하게 되기도
한다.
의사들은 이것을 전문용어로 dementia라 한다.
이조우니
멋진 비유 함의 제목에 감탄입니다...
제 기준으로 받아야 사람은 따로 있는 듯 한데...
암튼 이 친구가 님의 말씀을 들을 만한 재목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자신의 세계에만 몰두한 그런 이는 아니길 바라며...
높은 상 받았다고 자기주장이 마치 세상의 진리인 양
하는 것은 그 상을 모독하는 것 다름 아니란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첨언 하면 영미권 이외의 작가에 대한
문학성 평가는 번역가가 노고가 거의 엄청난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말씀 드리며...
이 친구는 번역한 이에게 최소한 자신이 받을
상금의 반 이상은 주어야 한다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