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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꽃인 국화는 땅 위에서 빛을 뿌리는 태양으로 여겨졌다. 또한 동양에서 국화는 이른바 은일의 꽃이다. 특히 국화는 인내와 지조를 지키는 군자의 상징형으로 의인화 되어 왔다. 국화의 덕목은 오연한 성품과 어여쁜 빛깔과 가장 늦게까지 남는 향기를 친다. 국화는 눈에 보이는 맛에 만 머물지 않는다. 국화는 다양하게 음식물로 섭취하기도 한다. 국화차와 국화주, 그런가하면 잎도 먹는다. 도연명은 「음주」에서 국화와 더불어 사는 은일한 삶을 노래했는데 그에 의하면 "꽃이 동그란 것은 천심이고, 색이 노란 것은 지심이고, 늦은 계절에도 꽃피는 것은 군자의 덕이고, 서리를 이기는 것은 지조의 표상이며, 술잔에 동동 떠 있는 것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고답의 표본"이란다. 국화에 대한 이런 관념과 성현들의 행적이나 시적 세계가 이후 문인들로 하여금 국화를 즐겨 그림의 소재로 다루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옛 문인화가들이 국화를 사랑한 것은 국화 자체가 아니라 국화의 이름으로 상징되는 인격이었다. 따라서 국화를 그린 것은 인격 도야와 자기 수양을 위해서였다.
반면 최화정은 국화란 꽃 자체가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서 그렸다. 그러나 그 저간에는 국화가 상징하는 여러 의미도 분명 잠재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주변에서 국화를 찾았다. 실제 국화와 국화이미지가 그것이다. 그려진 국화와 이미 그려진 국화를 다시 그리고 있는, 그림 속의 국화그림이다. 서리를 이기는 높은 기상을 가진 의인화된 국화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청초한 느낌이 나는 국화이미지이다. 작가가 그린 국화는 사군자의 하나인 그런 국화는 아니지만 새삼 은일과 고답을 상기시켜 주는 구성 아래 위치해있다. 차분하게 자기 앞에 존재하는 국화와 그 줄기를 따라 가 그렸다. 몇 겹으로 올라와 붙은 물감의 층들은 두툼한 깊이를 동반하고 희고 노란 꽃들은 탐스럽게 벌어져있다. 마치 화석이나 표본처럼 화면에 자리한 국화는 여러 상황에 처한 국화의 풍경을 암시한다. 그런 모습에서 국화의 의인화가 발생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사회의 메타포가 아니라 현재의 실존적인 느낌을 동반한다. 작가는 순간 그 국화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런 존재를 조심스레 꿈꿔본다. 국화가 아름다운 이유는 거기에 자신의 이상적인 모습이, 어떤 자태가 홀연히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즐겨 국화를 그렸다. 그러다가 점차 주변에서 국화이미지를 찾기도 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국화이미지를 발견하고 그것에 주목한 것이다. 나로서는 바로 그러한 이미지 채집과 그리기가 흥미로웠다. 이미 주어진, 레디메이드로서의 국화라는 도상에 기생해나가는 작업이자 그 의미를 다시 질문하는 작업이기에 그렇다. 국화이미지에 기생하는 작업은 박제화 된 전통을 새삼 생각하게 해주는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화정이 그리고 있는 근작의 국화는 그 국화라는 존재 자체에 주목시키면서 이를 색다른 채색화로 구현하고 있다. 국화의 초상이자 정물이고 사군자의 변형된 형식이다. 화면은 일반적인 채색화가 보여주는 방식과는 조금 달리 두텁고 촉각적이면서도 불투명성이 강하게 조율되어 있다. 소박하고 차분하게 자기 앞에 놓인 식물성의 존재를 헤아려보고자 했다. 그 사이로 옛 선비들이 왜 국화를 그리며 그 의미를 칭송했는지도 헤아려 보고자 했던 것 같다. 동일한 국화이면서도 조금씩 다른 종이고 색채나 형상도 조금은 다르게 표현되었다. 국화가 짓고 있는 다채로운 표정이 조금씩 흔들리며 다가온다. 따뜻하고 소박한 국화이미지 만으로도 흥미로운 여러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작가가 그린 국화다. 국화그림이다. ■ 박영택
첫댓글 와우..접해보지 못했던 방법의 작품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