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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
2023년 7월 8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그놈이 그놈이다.
요즘 뉴스나 인터넷을 보면 보기 싫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은 거의 없습니다. 감동을 주는 소식이나 아름다운 얘기는 거의 없습니다. 잔인한 부모와 자식들의 이야기, 정치적인 싸움 이야기, 국민을 볼모로 삼아 떠드는 정치가들의 추악한 권력다툼 이야기, 비참한 삶을 살아온 할머니들을 이용하려는 정치가들과 북한 동포의 인권을 짓밟으며 평화를 위장하고 핵무기로 무장한 못된 놈들의 이야기, 그놈들의 눈치만 살피며 내 나라의 일을 외국에 의지하려고 하는 못난 놈들의 이야기, 먹지 못할 것을 먹이려고 하는 놈들이나 거짓으로 하느님을 팔아먹고 있는 사이비 교주 놈들, 국민의 세금으로 생색을 내면서 함부로 예산을 쓰려는 놈들, 세계의 패권을 잡으려는 대국의 지도자라는 놈들, 선량한 사람들을 악의 길로 인도하려는 악마의 하수인 등등 정말 그놈들이 그놈들입니다.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서 사는 수많은 동물과 곤충들의 멋진 삶을 관찰한 다큐멘터리(documentary)와 음악 방송이나 교육 방송 등뿐이 그래도 볼만한 TV 프로그램입니다.
다큐멘터리(documentary)란 허구가 아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현실의 허구적인 해석 대신 현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영화나 기록들을 말합니다. 다큐멘트(document)가 ‘서류나 문서나 파일’을 말하는 것이니까 다큐멘터리 영화들은 실제 사람과 공간뿐만 아니라 사건과 행동들에 관심을 가지고 어떤 문제의식을 중점으로 조명하여 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현실 속에서 진실을 찾아나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화에 현실을 넣으려는 행위는 현실을 어느 정도 바꾸어야만 하고, 현실로부터 선택한 것에 형태와 형식을 부여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는 감독이 기록한 현실을 어떻게 통제했는가의 관점에서 평가받을 것입니다. 어떤 다큐멘터리는 현실의 한 측면에 대해서 관객을 특정한 시각으로 설득시키기 위해 제작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시각적 관점에 또한 속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유튜브나 카페나 블로그나 SNS에서 너무나 많은 거짓 뉴스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정보의 홍수 속에서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전부 거짓말쟁이들로만 보입니다. 그 중에서도 정치가들이 가장 거짓말을 잘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왜 그렇게 뻔뻔스러운지 정말 소름이 끼칩니다. 유튜브를 보면 그들이 왜 거짓으로 일관하는지, 그리고 그 거짓말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 그리고 우파 좌파로 갈려서 서로 험악하게 험담을 하고, 욕을 해대고,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정말 ‘그놈이 그놈입니다.’ 또 종교가 완전히 타락해져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나 교회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이나 어떤 것은 그들에게 천벌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더 가슴이 아픕니다. 음식과 약품에 대해서도 너무 광고와 선전이 심하고 오류도 많고, 모든 것이 만병통치약처럼 말하면서 시청자를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답답합니다. 서로 비방하고 욕하는 글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우리는 진실의 먼 뒷전에서 지금 방황하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묵상에서 '놈'자를 쓰는 것은 대우해서 쓰는 말입니다. 이 말은 절대 욕이 아니라 지칭일 뿐입니다.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영화나 드라마가 점점 막장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말이나 모든 단어들이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글을 쓰고 대화를 나누어도 모두 거칠어져서 나도 점점 묵상을 나누기도 어렵습니다. 이제 나처럼 고리타분한 얘기를 나누면, 들어주려고 하는 사람도 없고, 읽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진심을 원하는 아주 적은 사람 때문에라도 묵상을 다시 올리고, 고쳐 올리고 하면서 매일 고민하기도 한답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지금 하는 일이 과연 주님께서 보시기에 합당한 일을 하는가?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너희 말대로 주 만군의 하느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정을 세워라.”(아모스 예언서 5, 14 -15)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예언서 5, 24)라는 말씀이 모든 사람들의 가슴을 가득 채우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나는 암세포가 많은 모양입니다. 검사할 때마다 암 소견이 발견된답니다. 다음 주간에도 암 검사를 할 예정입니다. 이번에는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걱정도 되지 않습니다. 정말 암으로 가득 찬 내 몸을 모두 던져 태워버리고 새로운 껍질을 입고 싶습니다. 오욕으로 더렵혀진 이 몸뚱아리를 모두 태워버리고 새 사람이 되어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처럼 내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어찌 새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나도 ‘그놈이 그놈입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놈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나를 모두 태워버리고, 깨끗하게 새 사람을 만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죽어도 지옥으로 떨어질 그 놈인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말씀대로 운명을 되돌려주셔야 다시 살 것입니다.
<야곱은 형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챘다(27,36 참조).>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27,1-5.15-29
1 이사악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큰아들 에사우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하고 말하였다. 에사우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 그가 말하였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4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겠다.”
5 레베카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래서 에사우가 사냥하러 들로 나가자,
15 레베카는 자기가 집에 가지고 있던 큰아들 에사우의 옷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꺼내어,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그리고 그 새끼 염소의 가죽을 그의 손과 매끈한 목둘레에 입힌 다음,
17 자기가 만든 별미와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 주었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가 “나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묻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르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20 그래서 이사악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어떻게 이처럼 빨리 찾을 수가 있었더냐?” 하고 묻자,
그가 “아버지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일이 잘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이사악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인지 아닌지 내가 만져 보아야겠다.”
22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에게 가까이 가자, 이사악이 그를 만져 보고 말하였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
23 그는 야곱의 손에 그의 형 에사우의 손처럼 털이 많았기 때문에 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축복해 주기로 하였다.
24 이사악이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냐?” 하고 다져 묻자, 그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러자 이사악이 말하였다. “그것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너에게 축복해 주겠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그것을 가져다 드리니 그가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리니 그가 마셨다.
26 그런 다음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입 맞춰 다오.”
27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주님께서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 같구나.
28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축일7월 8일 성 아퀼라 (Aquila)
신분 : 사도들의 제자, 순교자
활동 연도 : +1세기
같은 이름 : 아귈라, 아뀔라, 아킬라
축일7월 8일 성녀 프리스킬라 (Priscilla)
신분 : 사도들의 제자, 순교자
활동 연도 : +1세기
같은 이름 : 브리스킬라, 쁘리스까, 프리쉴라, 프리스까, 프리스낄라, 프리스카, 프리실라
폰토스(Pontus, Pontos) 출신의 유다인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했던 성 아퀼라(Aquila)와 로마의 귀족 출신인 성녀 프리스킬라는 부부 사이이다. 성녀 프리스킬라는 성 아퀼라와 우연히 만나 그의 인품과 신앙에 이끌려 결혼을 했다. 그런 부부에게 위기가 닥쳐왔는데,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가 정치적 이유로 모든 유다인의 거주 금지령을 내려 로마를 떠나야만 했다(사도 18,2). 그들은 당시 지중해 연안의 유명한 항구 도시이자 국제도시인 코린토스(Corinthos, 코린토)로 갔다. 그곳에서는 민족이나 인종에 따른 차별 없이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던 중 코린토스에서 복음을 선포하던 사도 성 바오로(Paulus, 6월 29일)를 만나 친분을 맺게 되었다. 마침 성 바오로와 생업이 같아 함께 지내며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들 부부는 당시 아테네에서의 선교 활동에 별다른 성과 없이 코린토스로 돌아온 성 바오로를 그들의 집에 모시고 살면서 헌신적으로 도와주었다. 당시 성 바오로는 많은 유다인들에게 공격받는 처지라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은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재물을 봉헌해 사도의 활동을 돕고, 그들의 집을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Domus Ecclesiae)로 사용했다.
날이 갈수록 유다인들의 위협이 증가하자 사도 성 바오로는 코린토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고, 성 아퀼라와 성녀 프리스킬라도 그를 따라나섰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를 따라 에페수스(Ephesus, 에페소)로 가서 그곳에 머물렀다. 사도 성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여러분에게 다시 오겠습니다.”(사도 18,21)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에페소를 떠나 예루살렘을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 에페수스에서도 이들 부부의 집은 가정 교회이자 교리교육의 중심이 되었다.
한 번은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에 정통한 아폴로(Apollos)라는 유다인이 에페소에 도착했다. 그는 이미 주님의 길을 배워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성 요한(Joannes, 6월 24일)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설교하자 성녀 프리스킬라와 성 아퀼라는 그의 말을 듣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하느님을 길을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사도 18,24-26). 성경이 전해주는 대로 성녀 프리스킬라는 남편인 성 아퀼라와 함께 학식이 높았던 사람까지 가르치는 교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들 부부는 에페수스의 가정 교회 안에서도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이 종교적으로 무엇인가 가르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성녀 프리스킬라가 초대교회의 선교 활동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에 성 아퀼라와 성녀 프리스킬라는 로마로 돌아갔다. 사도 성 바오로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들의 공덕을 다음과 같이 칭송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나의 협력자들인 프리스카와 아퀼라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내 목숨을 구하여 주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의 모든 교회가 그들에게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집에 모이는 교회에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로마 16,3-5) 이를 통해 성녀 프리스킬라와 성 아퀼라 부부가 로마의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중요한 봉사를 수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전히 그들의 집이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가정 교회로 사용되고 있음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로마 순교록은 7월 8일 목록에서 그들이 소아시아 지방에서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로마에서 장렬하게 순교했다고 한다. 가톨릭교회에서 성 아퀼라와 성녀 프리스킬라의 축일을 7월 8일에, 동방 정교회에서는 2월 13일에 함께 기념하고 있다. 다른 정교회에서는 성 아퀼라 홀로 소아시아 지역의 주교로서 7월 14일에 기념한다. 성녀 프리스킬라는 사도행전(18,2.18.26)에서 그렇게 불리지만 사도 성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서는 프리스카(Prisca)로 불리고 있다(로마 16,3; 1코린 16,19; 2티모 4,19).
오늘 축일을 맞은 아퀼라 (Aquila) 형제들과 프리스킬라 (Priscilla) 자매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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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꾸르실료 DE COLORES 원문보기 글쓴이: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