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길 가다 한낮의 여름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곳은 정자나무 아래이다. 정자나무가 보통명사인 것을 최근에 알았다. 사전에 보면 정자나무란 ‘집 근처나 길가에 있는 큰 나무로, 가지가 많고 무성하여 그 그늘 밑에서 사람들이 모여 놀거나 한다.’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동구 나무라고 일컫기도 한다. 이런 정자나무에는 느티나무, 팽나무, 은행나무 등이 있다. 시골 마을 어귀의 정자나무는 농부들의 쉼터이고, 아이들의 놀이터일 뿐 아니라, 동네 공동체의 크고 작은 일이 논의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만일 이 땅에 그늘을 만드는 이런 나무가 없다면 세상은 얼마나 황폐할 것일까? 더욱이 중동의 사막과 광야에 더위를 피할 숲과 물이 없다면 이는 곧 죽은 땅일 것이다. 창세기에는 여호와께서 두 천사를 대동하고 마므레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장막으로 아브라함을 방문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들을 영접하여 물을 가져가 발을 씻게 하고 나무 아래에서 쉬시게 한 후, 요리를 준비하여 나무 아래 모여 대접하는 장면이 그러하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한 후 자유인의 몸으로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농경을 시작했을 때의 평화로운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다. 그때는,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왕상4:25)라는 말씀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이때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경제적으로 자립하여 자기 땅에서 일하며 수확하는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감람나무와 함께 약속된 땅의 풍요를 상징한다. 그리하여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산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상적인 환경을 누린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이 표현이 곳곳에서 자주 등장한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라’ (미가서 4장 4절)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하셨느니라.’(스가랴 3장 10절)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 도다.’ (요엘 2: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신명기는 8:7-8)
‘그들이 그 가운데에 평안히 살면서 집을 건축하며 포도원을 만들고 그들의 사방에서 멸시하던 모든 자를 내가 심판할 때에 그들이 평안히 살며 내가 그 하나님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에스겔 28:26)
그러나 여호와께서 원수들이나 백성을 심판하실 때에는,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의 상태가 달리 표현이 된다.
‘또 하늘의 모든 군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은 두루마리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잎이 마름 같으리라’ (이사야 34:4)
’포도나무가 시들었고 무화과나무가 말랐으며 석류나무와 대추나무와 사과나무와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이러므로 사람의 즐거움이 말랐도다‘(요엘 1:12)
’그들이 네 자녀들이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 떼와 소 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믿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예레미아 5:17) 그들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치시며 그들의 지경에 있는 나무를 찍으셨도다‘(시편 105:33)
이처럼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번영과 평화의 상징을 나타내는 것인 동시에 심판에 임하는 재앙의 전조를 알리는 표징이기도 했다.
한편 신약시대의 요한복음에는 나다나엘이란 젊은이를 빌립이 예수께로 인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미가서와 스가랴 약속의 말씀대로 기도하며 메시아 오심을 소망하며 살았다. 이러한 나다나엘의 모습을 지켜보신 예수님은 ’그가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으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시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왜 나다나엘은 성전이나 회당에서 기도하지 않고 무화과나무 아래서 메시아 오심을 소망했을까? 시편(137편)에는 바빌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인들이 바빌론 강가에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는 노래가 있다. 이 유수 기간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을 대신하여 ’시나고그(Synagogue)‘라는 회당이 종교의 중심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제물로 바쳐지는 동물의 희생 대신 기도가 의식의 중심이 되었고, 제사장이 아닌 랍비라는 교사가 의식을 집행하게 되었다.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듯이 아마 회당이 가까이에 없는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발 강가에 모여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이러한 예배전통이 1세기까지 계속되어, 회당이 없는 지역에서는 신실하고 경건한 유대인들이, 동네 무화과나무 아래에 모여 기도와 의식을 행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그 속에 간사함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오늘날의 참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까? 그 속에 간사함이 없는 나다나엘과 같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갱신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가 그러했으면 좋겠다. 그곳은 우리의 쉼터로서도 좋은 그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02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