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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오고 있다. 처서 부근에서 서풍의 낌새를 노리던 그들이 이제 침노할 몸짓을 마쳤다. 그러자 늦여름에 이끌리어 마지막 열기를 내뿜던 불덩이가 겁에 질린 듯 체온을 추스르며, 제 몸을 시나브로 식하고 있다. 드센 빛과 열기와 소리도 우주의 운항에 어쩌지 못해 제 열정을 낮추어 숨을 고르며 그들의 입성을 받아들인다. 아직은 제때가 아니어서 그들은 조심스레 이른 아침과 저녁 무렵 삽상한 하늬바람을 몰고 오며 눈치를 살핀다. 모두가 산듯한 그들을 반긴다. 비록 그 머무름이 짧을지라도.
비가 내린다. 가는 비다. 나뭇잎에 매달려 있는 빗방울이 조금 차갑게 보인다. 모세의 노래가 생각났다.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신 32:3) 분명 그의 교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의 불볕더위를 식히는 고마운 비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 정착 후 농경 생활을 할 그들에게 채소 위에 내리는 단비는 분명 은혜로운 축복일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은 과연 이슬처럼 몰래 맺히고, 그의 목소리는 연한 풀 위를 적시는 가는 비 같았을까?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로는 분노에 찬 격정의 목소리도 내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이 노래가 그의 마지막 권면이었으므로, 매우 시적인 언어로 부드럽게 이스라엘 백성을 훈계한 것으로 보인다.
올여름이, 광야의 불볕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무척 더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뿐 아니라 비도 많이 내렸다. 흔히 기후변화가 그 원인이라고 하지만, 만물은 변하는 것이기에 날씨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 더위에도 풀과 나무와 꽃들은 여전하다. 모두 한여름 더위를 이긴 듯 생명 찬 모습이 더욱 푸르다. 그들에겐 전쟁도 역병도 없다. 그저 생명의 질서만 회복하면 족하다. 그게 그들에게 주어진 유전자 몫이다.
우리에게는 어떠할까? 생명의 질서만 회복하면 족할까? 우리는 그보다는 더한 갈증을 느끼기에 말씀의 원천을 찾는다. 다행히 방학 기간에 새로운 지평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요한계시록 강해 말씀을 들은 것이다. 믿음의 날수에 따라 말씀이 깨달아졌으면 좋을 텐데 그러하지 못한 것이 믿는 자들의 한계이고 역설이다. 그래서 새로운 말씀 풀이를 들을 때마다 좌절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 2:7)라는 말씀과 같이 예수께서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비워 하나님의 신적 의지를 수용하셨듯이,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겸손인 ‘비움’(케노시스, Kenosis)을 심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우리의 알량한 지식을 비어버리는 일이다. 흔히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라 하지만 오히려 우리에게는 비우는 시간이 어울릴 것이다.
이제 ‘비움’이 가득한 우리는 다시 원천으로 돌아갈 때이다. 처음 시작된 그곳을 우리 속에서 다시 회복할 시간이다. 종교개혁 때 그러했듯이 말씀이 시작된 원천으로 회귀할 필요가 있다. 아드 폰테스(Ad Fon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