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졸려 죽는 아이를 본 적 있나? 목에 감긴 비단끈이 조여지는데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 있는지도 모른 채죽어가는 아이를...순진한 갈색 눈이 어떻게 돌아가고,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는 꺽꺽거리는 신음소리가 어떻게 숨 넘어가는 소리로 변하는지, 허공을 향한 발이 어떻게 발버둥치는지 본 적 있어? 그런거 당해본 적 있나?"
그때야 알았다. 술탄은 어렸을 때 눈 앞에서 죽어가던 형제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끔찍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평생 자신에게서 떠나지 않는 그 광경이, 심장을 독넝쿨로 감은 것처럼 숨쉬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살모사의 눈부심, 쥴퓨 리반엘리-
메흐메드 3세가 죽었을 때에 그의 뒤를 계승할 후보는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22살인 그의 동생 무스타파와 아직 13살인 아흐메드였죠. 장남이었던 마흐무드는 메흐메드 3세가 죽기 얼마 전에 그의 인기를 두려워 한 술탄의 명령에 따라 처형되었습니다.
메흐메드 3세의 동생(그러니까, 무라드 3세의 아들)이 메흐메드 3세가 즉위할 때까지 살아있었단 사실로도 한 술탄이 즉위하면 다른 남자 계승자를 싸그리 죽이는 전통이 바뀌어 가는 것을 감지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그러나 마흐무드가 처형된 것에서 보듯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죠.
동생보다는 술탄의 아들이 계승권에서 우위에 있었기에 아흐메드가 아흐메드 1세로 술탄의 자리에 오릅니다. 문제는 아흐메드가 30살도 되기 전인 1617년 사망했다는 것이죠. 그의 아들들이 있긴 했지만 오스만이 당시 13살, 무라드가 5살, 이브라힘이 2살이었기에 어느 하나 권좌에 오를 나이는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계승자는 딱 하나, 메흐메드 3세의 동생 무스타파였죠.
문제는, 무스타파가 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이에 따라 궁정 대신들은 논의에 돌입합니다. 아직 소년인 오스만을 왕위에 세울 것인지, 아니면 정신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무스타파를 왕위에 올릴 것인지. 이에 황궁 대신인 무스타파 아가(가끔 오스만 사람들은 중동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을 고문하기 위해 이렇게 이름을 돌려 짓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는 무스타파 왕자가 오랜 시간 사람을 접하지 않았기에 그렇게 된 것이지, 술탄의 자리에 올라 바깥 생활을 하다 보면 다시 정상이 될 것이다...라고 주장하여 결국 그가 무스타파 1세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정신병이 그렇게 쉽게 낫나요?
연대기 작가 페체비는 무스타파 1세의 행동에 대해 "새나 바다의 물고기, 거리의 거지들에게 금과 은을 마구 뿌렸으며, 재상이 방문하러 오면 그들의 터번을 벗기고 머리를 드러내게 했다"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약간 문제가 있긴 있던 모양입니다. 그를 술탄으로 세운 무스타파 아가는 다음해인 1618년 결국 군대를 불러 들이고 궁정 문을 잠근 뒤 그를 쫓아내고 아흐메드의 장남 오스만을 권좌에 올립니다.
무스타파는 죽지 않았어요. 다시 그가 있던 궁정 내실(카페스)에 연금되었습니다. 이제 오스만 왕가는 남자 후계자를 되는대로 죽일 만큼 그 수가 충분하지도 않았지요.
<오스만 2세. 1618~1622>
오스만 2세는 자신과 이름이 같은 창건자(오스만 1세)를 의식해서인지 쇠락해 가고 있던 제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하고 이 와중에 예니체리들의 지지까지 잃어버렸습니다.
이 시기 예니체리는 오스만 군대의 꽃이라기보다는 수도에 머무르면서 자기네들 잇속이나 챙기던 무리들이었죠. 그리고 이제, 술탄의 노예들인 예니체리들이 오스만 역사상 최초로 술탄을 갈아치워버립니다.
1622년 그들은 황궁으로 몰려가 연금되어 있던 무스타파를 구출해 냅니다. 당시 연대기 작가 투기(Tughi)의 말에 따르면 그가 연금된 방의 문이 하렘 안에서 잠겨져 있었기에 예니체리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부수고 밧줄을 내려 회의장의 커텐을 뜯어 만든 끈으로 무스타파를 묶어 끌어 올렸다고 합니다. 17세기 오스만의 군주들은 이런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스만 2세는 예니체리 병영으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갔으나 그 곳에서 체포, 나중에 처형되었습니다.
다시 문제가 있는 자가 술탄이 되었으니 예니체리들이 통제가 될 리 없죠. 이들은 자기네 맘대로 재상을 바꾸고 처형하고 수도를 분탕질하며 돌아다녔고, 사람들은 세상과 왕조가 끝장났다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신임 재상 케만케쉬 알리 파샤는 지금 술탄으로는 안되겠다고 여기고 울레마들은 술탄의 지능을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두 가지 질문을 보냅니다. "당신은 누구의 아들인가?" 와 "오늘은 몇일인가?" 라는 어이없는 질문이 그것이었죠.
술탄과 그의 모후는 대답을 거부, 목숨을 유지하는 대가로 다시 한번 왕위에서 물러나 궁정으로 숨어듭니다. 일단 목숨은 건지고 봐야 하는 것이지요.
결국 다시 아흐메드 1세의 아들들에게 공이 돌아왔습니다. 아흐메드 1세의 차남 무라드는 이제 12살이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무라드 4세로 술탄의 자리에 올랐고, 약 17년간 통치하다 1640년 사망합니다. 이 와중에도 그는 다른 동생인 술레이만과 바예지드, 카심을 처형했습니다. 무라드 4세가 죽은 후 유일하게 남은 왕위계승자는 그의 동생(아흐메드 1세의 아들) 이브라힘이었죠.
<무라드 4세(1623~1640) 그의 치세 대부분을 페르시아와의 전쟁에 보냈다>
<광인 이브라힘(1640~1648) 무스타파 1세처럼 진짜 정신에 문제가 있던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그냥 평가가 굉장히 안좋았다>
위의 소설 인용 부분은 바로 술탄 이브라힘의 폐위를 다룬 터키 소설 '살모사의 눈부심'에서 인용한 부분입니다. 다만 다른 동생들이 처형당할 때 그는 성인이었습니다만, 중요한 건 자기 형제들이 형의 손에 무참히 죽어가는 모습에서 이브라힘의 광기의 원인이라는 저자의 의도겠지요. 실제로 당시 연대기 작가 카팁 첼레비 역시 그가 "대부분의 삶을 감옥(물론 진짜 감옥은 아니었지만) 속에서 보냈고 그의 형제들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 이가 그의 성격에 있어 결함을 만들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스만 후기의 카페스 제도는 형이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비극은 어느 정도 완화를 시켰습니다만(무라드 4세의 사례에서 보듯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후대의 술탄의 자리를 맡아야 하는 사람이 감옥 속에 갖혀서 자신의 형제들의 죽음을 경험하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려면서 자란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유능하고 똑똑한 술탄을 만들어 내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왕자들이 매달릴 곳은 자기 어머니이다 뿐이니, 후기 오스만 역사에서 술탄의 어머니들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술탄들이 어린 나이에 즉위한다는 점도 있지만 카페스 제도가 끼친 영향이기도 하였죠.
이런 경우는 이브라힘이 폐위당하고 그의 아들 메흐메드가 즉위할 때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브라힘이 1648년 처형당하고 메흐메드 4세가 즉위할 때 메흐메드의 나이는 고작 7살. 혼자서 뭔가 해볼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죠. 따라서 실권은 그의 어머니 투르한 술탄에게 한동안 주어졌습니다.
<메흐메드 4세(1648~1687) 그의 오랜 치세로 인해 오스만 왕가의 계승은 다시 안정화된다>
이처럼 오스만 후기에 들어선 쇠퇴는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 상승 및 이에 따른 생활고(특히 고정된 월급을 받는 군인들의 불만이 컸습니다) 16세기 후반 급격한 인구 증가로 인한 혼란, 유럽 세력의 발전 등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1595년부터 시작된 왕자들의 카페스 감금 제도가 새로 즉위하는 술탄의 능력을 심각하게 저하시킨 점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무엇보다도 300년 뒤의 우리는 집에 앉아 '오스만 왕자들은 감옥에 유폐되어있다가 왕위에 올랐다' 라고 쉽게 언급을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형제가 목이 졸려 죽어나가고 언제든지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수 있다는 죽음의 공포는 과연 후대 오스만의 군주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 지, 모를 일이지요.
출처 : The Ottoman Empire, 1300-1600-The Structure of Power, Colin Imber
이미지 출처 : http://www.osmanischesreich.com/Geschichte/Sultane_1/sultane_1.html
첫댓글 이 시리즈 정말 잼나게 보고 있어요 ^^
이번으로 끝이랍니다 ㅎㅎㅎ
피붙이들 썰어대는게 오스만 만의 종특은 아니라지만 여긴 좀 심하네요.
오스만 4세는 젊어서 경험이 부족해서 그랬지, 계속 자랐다면 제법 괜찮은 술탄이 될 법한 재목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역사란 역시 마음대로 안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