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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 교수가 쓰는 ‘시대정신과 지식인’ ④]
성리학 체계 세우고 후학 양성 주력한 교육자 이황 사상과 정책 아우른 현실참여 지식인의 표상 이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이황과 이이. 두 사람 모두 성리학의 대가였지만 살아간 길은 달랐다. 반면 사림파의 집권에 힘입은 이이는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의 시 ‘절정’이다. 이번 글은 이 시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고 싶다. 식민지 시대를 대표하는 저항시인 중 한 사람인 이육사는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바로 이 시에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육사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서릿발 칼날진 위에 서서 결코 굴복할 수 없는 정신의 고고한 세계를 그는 ‘강철로 된 무지개’로 표현했다.
내가 주목하려는 것은 바로 이 고고한 세계의 연원으로서의 선비정신이다. 이육사는 퇴계 이황의 14대 손이다. 근대식 교육을 받았지만 동시에 전통적 한학을 수학했다. ‘절정’에 담긴 정신의 세계는 근대인의 세계라기보다는 지조와 절개를 중시하는 전통인의 세계, 다름 아닌 선비정신에 잇닿아 있다.
서구사회와 비교해 한국 지식인의 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으로는 선비정신을 꼽을 수 있다. 국어사전을 보면, 선비란 학문을 닦는 사람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이다. 하지만 선비란 말에 담긴 의미는 이보다 훨씬 포괄적이다. 다시 사전을 보면, 선비란 학식이 있고 행동과 예절이 바르며 의리와 원칙을 지키고 관직과 재물을 탐내지 않는 고결한 인품을 지닌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대의라는 가치를 지향하고 탈물질주의적 생활을 추구하는 게 선비정신의 중핵을 이룬다는 점이다.
선비정신의 기원과 발전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중국의 유교를 분석하면서 우리나라의 선비 집단과 유사한 문사계급(Literati)을 주목한 바 있다. 문사계급은 유교사상으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은 귀족적 지식인계층이다. 그가 주목한 것은 문사계급이 갖고 있던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유교의 군자 이념이다. 군자불기에 담긴 뜻은 고귀한 인간이란 자기목적이지 도구처럼 하나의 특수화된 사용수단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유교의 군자 이념은 자기완성의 윤리적 이상이라는 점에서 서구사회의 몰가치적 직업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대립하고, 결과적으로 직업에 필요한 전문적 권한의 함양을 방해하는 동시에 저지한다는 게 베버의 견해다. 이러한 주장은 바로 중국에는 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베버 논리의 핵심을 이뤘다. 현재의 관점에서 한 세기 전에 제시된 베버의 이러한 주장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듯하다. 한편에서 문사계급의 군자 이념은 근대 자본주의에 요구되는 직업 정신과 상충했지만, 다른 한편에서 군자 이념에 내재된 교육에 대한 강조는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의 산업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뿐만 아니라 문사계급의 유교사상과 정확히 짝하는 선비정신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특히 지식사회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이러한 선비정신의 기원은 멀리 통일신라시대 최치원과 같은 유학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선비정신의 출발은 고려 말로 소급된다. 당시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유학자 그룹이 등장했으며, 이들에 의해 선비정신이 자연스럽게 부각됐다. 특히 고려에 대한 지조와 절개를 지킨 정몽주와 길재의 학문을 이으려는 조선시대 사림파는 선비정신을 유독 강조했다.
이런 점에서 선비정신이라 하면 흔히 사림파 지식인을 떠올리게 된다. 평소에는 자기 수양과 학문 연구에 전념하지만, 때가 되면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어 군주를 섬기고 백성을 돌보려고 했던 이들이 다름 아닌 선비다.
선비정신을 구현한 관리를 지칭하는 데 쓰인 말이 바로 청백리(淸白吏)다. 청백리는 청렴·근검·도덕·경효·인의 등의 덕목과 관리 수행능력을 두루 갖춘 이상적 관료상이었다. 의정부에서 뽑은 이 청백리는 조선시대에 217명이 배출됐는데, 황희·맹사성·이원익·이항복·김장생 등은 대표적인 청백리로 알려져 있다.
이황(李滉)과 이이(李珥)는 바로 이러한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지식인이다. 두 사람의 모습이 1000원권과 5000원권 지폐에 담긴 한 가지 사실을 보더라도 이황과 이이가 우리 역사와 사회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알 수 있다. 두 사람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대의를 추구한 근엄한 유학자인 동시에 어릴 적부터 역사책에서 빈번히 만나온 더없이 친숙한 지식인이다.
이 글에서 이황과 이이의 삶과 사상을 제대로 다루기는 어렵다. 두 사람이 조선 중기 이후 우리 유학사상의 양대 산맥을 이뤄온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종장(宗匠)이었던 만큼, 그동안 결코 적지 않은 연구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황과 이이는 전통사회에서 활동했던 학자이자 지식인의 모범이었다(누구는 영남학파의 또 하나의 거목으로 남명 조식을 지적할지 모르겠다. 조식 또한 주목받아야 할 지식인임에는 분명하지만, 그의 학통을 계승한 북인이 인조반정 이후 몰락하면서 영향력은 크게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유학자의 모범 이황
이황은 1501년(연산군 7년) 경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는 퇴계(退溪)다. 아버지는 식이며, 어머니는 박씨 부인이다. 12세에 작은아버지인 우에게서 ‘논어’를 배웠고, 학업을 연마해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3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부정자로 관리 생활을 시작한 그는 이후 출사를 거듭했지만, 50세 전후부터는 학문에 전념했다.
퇴계의 학문적 연구는 주로 고향에서 이뤄졌다. 그는 46세에 낙동강 상류에 위치한 토계(兎溪)를 퇴계(退溪)로 이름을 바꾸고 이를 자신의 호로 삼았다. 물러나겠다는 의미가 담긴 이 호에는 학문에 대한 그의 강력한 의지가 담긴 셈이다. 60세에 이황은 도산서당을 지어 여기서 독서와 저술에 전념했으며,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이황은 당대에 이미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학자로 칭송받았으며, 숱한 업적을 남긴 다음 1570년(선조 4년)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 기록을 살펴볼 때 이황은 매우 진지한 학자였으며, 대단히 인간적인 지식인이었다. 이황은 수기치인(修己治人)과 외유내강(外柔內剛) 지식인의 전형이었다. 자신을 닦은 후에야 남을 다스린, 자신에게는 아주 엄격했지만 타인에게는 더없이 너그러웠던 이가 다름 아닌 이황이었다.
시대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이황의 기여는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성취하고 이를 조선 왕조의 통치 이념으로 완성했다는 데 있다. 이황의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에 의해 적잖이 이뤄졌다. 무엇보다 이황은 우리 역사에서 주자 성리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심층적으로 해석한 최고의 학자로 꼽혀왔다.
정옥자 교수에 따르면,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는 우주론적 이기론(理氣論)에 있다. 이는 음양동정(陰陽動靜)하는 작용인 기(氣)와 그 작용의 원리인 이(理)에 의해 이 세계의 현상을 설명하려는 이론이다. 세계의 본질이 이에 있는가, 아니면 기에 있는가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이러한 철학적 사유는 현실 정치와 정책의 선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 유학의 역사에서 이황과 이이가 가장 주목받아온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두 사람은 성리학의 철학적 기초에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했으며, 이는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사상적 기반을 이뤘다.
이황의 견해는 이와 기가 동일한 비중으로 상호작용한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시각이다. 정옥자 교수에 따르면 이황 철학의 핵심은 이의 능동성을 인정하는 데 있는바, 이황 이후 영남학파에서 주리론(主理論)을 제시하고 구체적인 현실 문제의 해결보다는 이론적 원칙의 탐구에 주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이 이황이 고봉 기대승과 벌인 사단칠정 논쟁이다. 성리학에서 사단(四端)이란 맹자가 실천도덕의 기본으로 제시한 측은지심·수오지심·사양지심·시비지심을 말하며, 칠정(七情)이란 ‘예기’와 ‘중용’에 나오는 희·노·애·락·애·오·욕을 말한다.
이황에 따르면 사단이 ‘이’에서 나오는 마음이라면, 칠정은 ‘기’에서 나오는 마음이다. 그는 인간 마음의 작용을 이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과 기의 발동으로 생기는 것의 두 가지로 구분했다. 이에 대해 기대승은 이와 기는 관념적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구체적 마음의 작용에서는 구분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함으로써 이의를 제기했다.
성리학의 완전한 이해
내 능력으로 이들의 논쟁을 상세히 검토하기는 어렵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들이 당시 지식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논쟁다운 논쟁이 제대로 벌어지고 이에 지식사회가 호응함으로써 학문적 공론장이 활성화됐다고 볼 수 있다.
국면사적 시각에서 조선사회는 개국 이후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 안정기를 누린 다음 연산군 이후 침체기에 들어갔다. 이후의 과정은 일련의 사화(士禍)에서 볼 수 있듯이 격렬한 권력투쟁으로 점철됐다. 이러한 침체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비전이 제시돼야 했는데, 이 역사적 과제를 담당했던 이가 다름 아닌 정암 조광조였다. 하지만 패기만만했던 조광조의 정치적 기획은 훈구파에 의해 이내 좌절됐고, 권력투쟁은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에서 볼 수 있듯이 더욱 어지러운 양상을 보였다. 이황의 학문 연구가 진행되던 시대 상황은 바로 이러했다.
“옛 성현도 나를 보지 못하고 나도 또한 옛 성현을 뵙지 못했네 옛 성현을 뵙지 못해도 그분들이 가던 길이 앞에 놓여 있네 가던 길이 앞에 있는데 나 또한 아니 가고 어떻게 하겠는가.”
이황이 63세에 쓴 시가인 ‘도산십이곡’ 가운데 하나다. 그는 학문에 전념하면서도 종종 시를 썼다. 도산십이곡은 앞의 6곡인 언지(言志)와 뒤의 6곡인 언학(言學)으로 이뤄져 있는데, 언학의 하나인 이 작품에는 학문에 대한 이황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 지식인의 본령은 진리 탐구에 있으며, 이러한 진리 탐구에서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선행 사상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와 체계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이 혼돈스러울 때 지식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두 가지 방법이 가능하다. 하나는 적극적 참여를 통해 그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 상황에서 물러나 학문적 연구에 전념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인의 선택은 주체의 의지에 따라 이뤄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자신이 놓인 구조적 조건과의 상호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천성적으로 학문하기를 좋아하기도 했으나 이황이 놓인 시대적 상황은 정치보다는 학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조건이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 말기에 수입된 성리학은 적어도 이황 시대까지 온전하게 이해됐다고 보기 어렵다. 이황이 가졌던 문제의식은 일차적으로 성리학에 대한 심도 있는이해와 이를 기반으로 한 왕도정치의 구현에 있었다. 여기에는 사림파에 큰 영향을 드리운 조광조의 좌절로부터 얻은 교훈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올바른 통치를 위해 먼저 올바른 학문을 세우고 이 학문을 이어갈 후학을 양성하는 것이 이황에게 부여된 시대적 소명이었으며, 이황은 이를 탁월하게 수행했다.
일본 유학 발전에 영향 끼쳐
이황이 남긴 저작들은 ‘퇴계전서’에 집약돼 있다. 이 가운데 내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저작은 ‘성학십도(聖學十圖)’다. 이황은 68세가 되던 해 1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선조에게 군주에게 요구되는 학문의 핵심을 열 개의 도표로 정리한 책을 올렸는데, 이것이 바로 ‘성학십도’다. 이 책은 서론 격인 ‘진성학십도차’와 ‘태극도’ ‘서명도’ ‘소학도’ ‘대학도’ ‘백록동규도’ ‘심통성정도’ ‘인설도’ ‘심학도’ ‘경재잠도’ ‘숙흥야매잠도’ 등 10개의 도표로 구성돼 있다.
이 가운데 7개는 앞선 학자들이 만든 것을 고른 것이지만, 소학도·백록동규도·숙흥야매잠도의 3개 도표는 이황이 직접 만든 것이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심통성정도인데, 여기서 이황은 사단칠정과 이기론을 다루고 있다. ‘성학십도’가 갖는 의의는 성리학에 대한 이황의 이해가 대단히 깊었다는 데 있다. 한국철학을 전공하지 않은 내게 그 평가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성학십도’를 통해 비로소 조선의 주자학은 중국의 주자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러나 학문에 전념했다고 해서 이황이 현실 문제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다.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올린 바로 그해에 이황은 ‘무진육조소’ 역시 상서했다. 이 소에서 이황은 성학을 돈독히 존숭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정치의 근본을 정립하고, 인군 스스로가 모범적으로 도술을 밝힘으로써 인심을 광정하게 할 것을 강조했다.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려는 이황의 학문적, 정치적 소망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이황의 학문은 그의 제자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등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이뤘다. 이들과 이들의 후예는 정치적으로 남인 세력을 형성했는바, 이러한 학통은 조선 후기까지 이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 이황의 문집은 일본에 소개되어 도쿠가와 시대 이후 일본의 유학 사상 발전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황의 삶과 사상에서 마지막으로 적고 싶은 것은 이이와의 만남이다. 기록에 따르면, 23세가 되던 해 이이는 도산을 찾았다. 그때 이황은 58세였다. 이이는 이황 곁에서 이틀 동안 머무르며 배움을 구했다. 두 사람이 나눈 문답은 매우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이황은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생가외(後生可畏)라고 하더니 선성(先聖)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는다”고 했다고 한 것이 이를 증거한다. 아직 이이가 학문적 두각을 나타내기 전이었지만, 대단히 이채로운 만남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이 또한 이황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황이 세상을 떠나자 이이는 자신의 ‘석담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 뒤로는 그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이황의 재주와 국량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조광조가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이황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드러냈다.
조선 경세가의 전형 이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정치가’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나는 이이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 그 이유는 바로 지식인 정치가라는 말에 담겨 있다. 지식 영역과 정치 영역 모두에서 이이는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정치 참여에서 이이의 태도는 이황보다 더 적극적이었으며, 진리 탐구에서도 이황에 필적할 만한 업적을 일궜기 때문이다. 사상과 정책을 동시에 아우른, 지식인 정치가라는 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경세가의 전형이 다름 아닌 이이였다.
이이는 1536년(중종 31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이다. 아버지는 원수이며,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다. 이이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던 천재 중 천재였다.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8세 때에는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가 시를 지었다. 13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23세에 유명한 ‘천도책’을 지어 장원 급제했다. 이이는 이후 아홉 차례 과거에서 모두 장원을 차지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이의 삶에서 주목할 이력은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이듬해 하산했다는 사실이다. 이후 그는 유학에 다시 전념했지만 한때 불가에 입문했다는 이 사실은 그의 사상에 불교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음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이 이력은 이이를 종장으로 하는 서인 세력에게 정치적 부담을 지속적으로 안겨주기도 했다. 이이가 출가를 한 것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이 준 충격 때문이었다. 유교사회이던 조선시대의 관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었겠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볼 때 이이의 출가는 그의 인간적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29세에 호조좌랑으로 관직에 나간 이후 이이는 출사를 거듭했다. 이황과 비교해 이이의 정치 참여는 앞서 말했듯이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다. 이는 정치 참여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시대적 조건의 변화 또한 중요했다. 이이가 정치에 참여한 시기는 을사사화 이후 사림파가 지식 영역은 물론 정치 영역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한 때였으며, 그만큼 이이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할 수 있었다.
시대정신이 함의하는 바가 자기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신과 해법의 탐구에 있다면, 이이는 자기 시대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요구되는 개혁을 치열하게 모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이는 자신이 살고 있던 16세기 후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진단하고 일대 경장(更張)이 필요한 시기로 판단했다. 창업과 수성을 지나 조선은 이제 새로운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이의 정치적 기획은 어느 한 분야에만 치중된 게 아니라 국방,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있었는데, 특히 그는 민생을 중시하고 폐법 개혁을 강조했다. 그가 남긴 ‘동호문답’ ‘만언봉사’ ‘성학집요’ 등은 바로 이런 일련의 종합적 개혁안, 다시 말해 시대정신을 제시한 것이었다.
대동사회에의 꿈
정치사회학적 관점에서 이이는 조선시대 지식인 정치참여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심경호 교수가 펴낸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를 보면 이이가 친구인 구봉 송익필에게 보낸 간찰이 나온다. 현실참여의 의지를 밝힌 이 편지는 이이가 가졌던 생각의 일단을 잘 보여준다. 그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서한에서 말씀하시길, 유학자의 사업은 정녕 이래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찌 감히 마음에 깊이 새기기 않겠습니까? 다만 사업의 도리는 천차만별이라고 하겠습니다. (…) 지금은 억만 백성이 물 새는 배에 타고 있으므로 그것을 구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차마 벼슬을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이가 이 편지를 쓴 것은 46세에 대사간 직을 수행할 때였다. 이 편지에서 이이는 지식인의 정치참여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눴다. 어떤 이는 하늘이 낸 백성으로 자처해 반드시 유가의 이상적인 문화와 도리가 크게 행해지는 것으로 보고서야 세상에 나와 벼슬길에 들었고, 또 어떤 이는 세상의 도리를 서서히 구원하되 군주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부터 차근차근 깨우쳐 나갔으며,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하·은·주 세 왕조의 이상정치를 거론하며 그것대로 실행하라고 청하다가, 그 말이 수용되지 않으면 곧바로 떠났다는 것이다.
이이가 선택한 것은 두 번째 길이었다. 출사하여 한편으로 개혁의 정책적 청사진을 잇달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서히 균열의 기미를 보인 동서 분당(分黨)을 막으려는 정치적 노력을 기울였다. 자기 사회를 실천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이이는 조광조와 유사한 노선을 걸었다. 하지만 이이는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한 방법론을 선호했다. 비록 좌절되기는 했지만 통합을 중시하면서도 혁신을 추진한 이이의 정치적 실천은 현재의 시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이는 열정적인 정치가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다. 정옥자 교수에 따르면, 이이의 이기론(理氣論)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이다. 이 이론은 음양동정하는 작용인 기가 발하면 그 작용원리인 이는 거기에 탈 뿐이라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다. 이이는 이와 기가 떨어질 수 없다고 보고 기의 능동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식론은 이후 주기론(主氣論)으로 체계화됐으며, 이황을 따르는 영남학파와 비교해 이이를 따르는 기호학파가 현실 정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이이가 남긴 저작들은 ‘율곡전서’에 집약돼 있다. 그 가운데 내가 특히 주목하고 싶은 저작은 ‘성학집요(聖學輯要)’다. 40세에 펴낸 이 책은 군주의 학문에 요점이 되고 도학의 정수가 될 만한 내용을 유교 경전에서 뽑아 엮은 것이다. 주자의 성리학을 심층적으로 이해한 이가 이황이라면, 이러한 연구에 기반을 두고 조선 특유의 성리학을 주체적으로 확립한 이는 이이라는 평가가 있다. 또한 이이는 유학의 양대 주요 저서인 ‘소학(小學)’과 ‘대학(大學)’에 대응하여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성학집요’를 펴냄으로써 유학의 토착화를 이뤄냈다는 평가 역시 받고 있다.
민생개혁과 사회통합
사회학 연구자인 내가 ‘성학집요’를 주목하는 이유는 이이가 제시한 대동사회(大同社會)에 있다. ‘성학집요’의 ‘위정공효’(爲政功效) 부분을 보면, 이이는 ‘예기’(禮記)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늙은이는 종신할 곳이 있고, 젊은이는 쓰일 곳이 있으며, 어린이는 자랄 곳이 있고,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이 없는 사람, 병든 자와 불구자도 모두 부양될 곳이 있다. (…) 이것을 일러 대동이라고 한다.”
이이의 대동사회론에 담긴 의미는 경장의 시대에 요구되는 최선의 가치를 민생개혁과 사회통합에서 찾았다는 데 있다. 대동사회론이 이이의 독창적 사유는 아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이는 이 말을 ‘예기’에서 빌려온다. 대동사회론은 중국 역대 제왕의 이상적 정치 모델이었으며, 근대 중국의 쑨원(孫文), 마오쩌둥(毛澤東), 장제스(蔣介石) 모두 대동사회를 강조한 바 있다.
내가 이이의 대동사회론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 현재성에 있다. 앞서 인용한 구절은 현재 우리 사회의 최대 현안인 민생 개혁을 돌아보게 할 뿐만 아니라 최근 논쟁 중인 복지국가론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의 본령이 다름 아닌 국민 다수의 물질적, 정신적 삶의 향상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이치다.
개인적으로 나는 역사의 본질이 반복과 변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반복하되 변화가 이뤄지는 나선형의 발전이 역사의 실체를 구성한다. 이 점에서 나는 역사의 반복성을 강조하는 순환론적 역사관이나 역사의 비약을 강조하는 단절론적 역사관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대동사회론에 담긴 의의는 이러한 역사의 순환과 단절을 넘어선 정치의 본질에 대한 보편적 메시지에 있다. 국가와 권력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은 무엇보다 국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이 대동사회론에 담겨 있으며, 바로 여기에 이이 사상의 현재적 의미가 있다.
개혁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이루지 못한 채 이이가 이승을 떠난 후 붕당정치가 더욱 강화됐다. 이 와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며, 이로부터 병자호란에 이르는 일련의 시기는 조선 왕조가 직면한 첫 번째 구조적 위기였다. 돌아보면 이이의 시대인식은 더없이 날카로웠고, 비록 좌절됐더라도 그의 대안 제시 역시 근본적이면서도 현실적이었다. 그는 정도전 이후 조선 시대 최고의 지식인 정치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이의 학문은 기호학파로 계승됐다. 사계 김장생, 신독재 김집,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등으로 대표되는 기호학파는 서인 세력의 중추를 이뤘으며, 인조반정 이후 조선 후기까지 정치를 주도했다. 이이의 영향이 물론 서인 세력에게만 제한된 것은 아니었다. 학문의 현실성을 강조한 그의 실학 정신은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등의 실학파에게도 결코 작지 않은 통찰을 제공했다.
다시 선비정신으로 돌아가면, 이황과 이이는 조선시대 선비정신의 표본이었다. 이황이 무게중심을 학문에 두고 이이가 학문과 정치를 병행했지만, 두 사람 모두 자아의 윤리적 완성을 치열하게 모색한 동시에 시대적 대의를 일관되게 추구했다. 이황과 이이가 활동했던 시기가 500년 전이었음에도 두 사람은 우리 학문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했던 지식인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의 현실 참여
이황과 이이의 삶과 사상을 돌아보면서 새삼 내가 주목한 것은 지식인의 정치참여 문제다. 우리 역사에서 지식인의 정치참여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조선사회에서 정치가와 지식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었다. 출사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지식인의 정치참여는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부 지식인이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관료적 지식인’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조선 중기 당쟁이 격화된 이후였으며, 이들은 사림에 기반을 두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재야적 지식인’의 한국적 전형을 이뤘다.
관료적 지식인과 재야적 지식인의 이러한 대립 구도는 광복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도 그대로 유지됐다. 특히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권력에 직접 저항하지 않더라도 타협하지 않는 것은 지식인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 조건으로 암암리에 강조됐다. 물론 당시에도 관료의 길을 선택한 지식인이 없지 않았지만, 권력에 진입하는 순간 지식인으로서의 이들에 대한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는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으려는 선비정신이 지식인 집단이나 대중에게 모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식인의 정치참여를 둘러싼 온당한 토론은 민주화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온당하다는 것은 김영삼 정권 이후 등장한 정부들이 민주정부라는 점에서 지식인의 정치참여가 도덕적 판단의 문제를 넘어선다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그 유형을 나눠보면 지식인 집단은 크게 ‘보편적 지식인’과 ‘특수적 지식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진리 탐구와 권력 비판에 주력하는 보편적 지식인은 정치참여가 자신의 학문적 활동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권력 비판은 무엇보다 권력의 외부에서 그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때에만 자유롭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일부 보편적 지식인이 정권을 합리화하는 담론 생산의 주체가 된 것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지식인의 초라한 초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하지만 특수적 지식인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들의 정치참여는 자신들의 연구가 정책과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점에서 정책 개발과 추진에 작지 않게 기여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특수적 지식인들의 제언과 참여가 과연 정책에 얼마나 적용되고 현실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참여 자체를 부정하거나 불온시하는 것은 지식인의 사회적 의무를 방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정책을 개발하고 추진하는 데 지식사회와 정치사회 간의 생산적 상호협력 및 견제 체계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식인의 정치참여를 일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그리 온당한 일이 아니다. 과거와 달리 지식사회도 이제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고도로 분화돼 있으며,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 또한 다양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오늘날 아카데미즘과 앙가주망의 고전적인 상호독립성은 그 의의를 완전히 상실한 게 아니지만 그것은 역사적, 현실적 상황이라는 시대적 컨텍스트 속에서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더욱이 지식인의 유형에 따라 현실 참여가 긍정적으로 비칠 때도 있다. 최근 상황을 돌아봐도 개혁을 표방한 정부일수록 참신한 아이디어와 정책 대안을 제시한 지식인 그룹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러한 지식인의 현실 참여 문제에서도 이황과 이이는 시대를 초월한 함의를 안겨준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 곧 지식인이다. 그러면 진리란 무엇인가. 굳이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적어도 인문·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자기 사회와 무관한 지식과 진리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진리를 탐구한다는 말에는 이미 현실 참여의 의미가 담겨 있으며, 그 참여의 방식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의 차이만이 존재할 뿐이다. 시대가 어지러워 물러나 학문에 전념한 이황의 선택과 시대가 요구해 경세를 치열하게 모색했던 이이의 선택은, 그 차이를 떠나 현재에도 여전히 그 울림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화석정에서 생각하는 우국충정
아직 봄을 느끼기에는 이른 2월 말, 개강을 앞두고 나는 임진강변에 있는 화석정을 찾았다. 경기도 양주 태생인 내게 이웃 파주는 익숙한 고장이다. 특히 화석정은 신촌에서 자유로를 타고 바람을 쐬러 갈 만한 곳들 가운데 하나다. 왼편으로는 한강과 임진강이 펼쳐져 있고, 오른편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낮은 구릉과 높지 않은 산이 이어져 있다.
화석정은 이이의 5대 조부인 이명신이 지었으며, 성종 9년(1478) 증조부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이이가 자주 들러 시를 짓고 사색하던, 이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유적 가운데 하나다. 이 화석정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는 이렇다. 이이는 화석정을 고치면서 관솔을 쓰고 기둥과 바닥을 기름걸레로 닦게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바로 그해 서울을 버리고 떠나는 선조의 몽진(蒙塵) 행렬이 임진강에 도착했지만, 비바람에 등불을 밝힐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놓아 주위를 밝혀 선조 일행이 임진강을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이이는 앞날을 예견하고 관솔에 기름을 먹여뒀다는 것이다.
이이가 품었던 우국충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다. ‘석담일기’를 보면 이이는 경연에서 선조의 질문에 대해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살릴 새 정책이 있으면 강구하시고 실행하셔서 이같이 바로잡을 방책을 부지런히 구하시어 날마다 하는 일이 있으시면, 인심을 점점 고칠 수 있고 세도를 점점 돌이킬 수 있으며 하늘의 노여움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한다. 이이는 인심의 도, 세상의 도, 그리고 하늘의 도를 중시했다.
이이가 여기 화석정을 자주 찾았을 때 난간에 기대면 남쪽으로 저 멀리 삼각산(북한산)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이는 삼각산을 바라보며 나라의 앞날을 걱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개를 남쪽으로 돌려 북한산을 찾아보니, 저 멀리 희뿌연 대기 속에 북한산의 자태가 보이는 듯도 했다. 북한산을 바라보고 임진강을 내려다보며 이이가 품었던 우국충정을 새삼 생각해보는 사이, 저 북한산이 있는 서울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어느새 가까워 오고 있었다.
이황은 누구인가 주요 저작으로 ‘자성록’ ‘성학십도’ 등이 있음.
주요 저작으로는 ‘격몽요결’ ‘성학집요’ 등이 있음.
김호기 ● 1960년 경기도 양주 출생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 독일 빌레펠트대 사회학 박사 ● 미국 UCLA 사회학과 방문학자 ● 한국정치사회학회 부회장 ● 미국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Korea Democracy Project 공동편집인 ● 저서: ‘한국 시민사회의 성찰’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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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