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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29)
===5권 시작====
[차륜혈삭소멸진(車輪血索消滅陣)]
그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언제나 감시를 받고 살았고 글조차 아는 이가 없었기에 가족의 안위를 위해 신가(神家)나 천가(天家)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랬던 그들에게 기회가 왔다.
철가의 각 가문이 있던 곳에 병기를 만들 철이 떨어진 것이었다. 수백 년 만에 허락된 최초의 여행. 그 여행에서 열한 곳 철가 수장들은 만남을 가졌다.
금속을 다루는 장인이었기에 각 철가에서는 이 세상 어떤 것보다 단단한 금속이 한 가지씩은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 조각도 있었고, 심해에서 얻은 것, 더러는 화산이 폭발해 생겨난 것들도 있었다. 그것들을 이용하여 그들은 희망을 만들기로 했다.
방법은 신가나 천가가 이미 가르쳐 주었다. 살인멸구를 위해 죽임을 당하기 전에 신가나 천가인들이 가르쳐 주었던 그 방법을 부인에게 전했다. 그리고 신가나 천가인들이 가르쳐 준 방법에 철가인들이 가졌던 유일한 것을 더하기로 했다.
한(恨) 분노(忿怒)였다.
아비가 죽으면 자식이 이어받고 또 그 자식의 자식이 이어받아 백 년의 세월 동안 열한 개의 무기를 만들었다. 남편으로부터 비술을 전수 받은 부인은 자식이 태어나면 가장 먼저 희망을 만드는 벙법을 가르쳤다.
그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 노(爐)를 달구었던 연류는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신가와 천가의 손에 죽어간 아버지의 시신을, 작은아버지의 시신을, 혹은 외삼촌의 시신을 태워서 노를 달궜다.
자신들의 한이 하늘에 닿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가족의 시신을 태웠다. 그리고 마침내 열한 개의 비도가 만들어졌다. 신가와 천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손바닥보다 더 작게 만들었고, 크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뇌룡사라는 줄을 연결했다.
아버지를 태웠던 재를, 삼촌의 뼛가루를 마시며 그들은 광풍가(狂風歌)를 목메어 불렀다. 기원을 들어달라고 한을 돌려달라고 피를 토하며 그들은 광풍가를 불렀다.
그러나 하늘은 침묵했다. 열한 개의 신기(神技)가 만들어졌음에도 그것들을 사용할 인재가 나오지 않았다. 비도가 피를 받아들이는 인재, 그 인재가 나타나질 않았다. 비도가 피를 받아들이는 인재, 그 인재가 태어나질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비도를 더 만들기로 했다. 그 비도를 천비비(天秘匕)라 부르기로 했다. 각 철가에서 십 년씩 제련해서 마물을 만들기로 한 것이다.
인신공양(人身供養).
그들이 마지막으로 하늘에 비는 방법이었다. 천비비를 만들 때 한이 되고, 천비비를 두드를 때 분노가 되기 위해 몸을 태웠던 사람들은 신가와 천가들의 손에 죽어간 자들의 부인이고 딸이었다.
그들은 산 채로 광풍가를 부르며 불 속으로 몸을 던졌다. 몸을 태워 철가인들의 한이 하늘에 닿기를 빌었다. 할머니가, 어머니가, 누나가 산 채로 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 자식과 손자는 망치질을 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망치질을 하면서 광풍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삶의 일부였다.
그렇게 백이심 년의 세월 속에 수천의 생명을 먹고 천비비가 만들어졌다. 철가인들의 노력에 하늘도 놀랐는지 마침내 인재가 태어났다. 철가의 수장이었던 혈가에서 태어난 아이의 피를 천비비가 흡수한 것이다.
천살(天殺)과 광혈(狂血)이 하나가 되어 태어난 존재.
그 앞을 막아설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인들은 그를 가리켜 악마라고도 했고 또는 파멸안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파멸안(破滅眼).
분노해야만, 미쳐야만 했던 자. 흑안의 상태에서 그는 악마가 되었다고 하였다. 검은색으로 변한 천비비는 인간의 피를 흡수하고 그는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지금의 백산처럼.
한 꺼풀 막이 덮인 듯, 검게 변한 눈으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저 심장이 뛰는 곳을 향해 움직일 뿐이다. 노랫가락인 듯 묵직한 저음의 소리가 혈광 안에서 흘러나온다.
“하늘에서 죽음의 비가 내리니,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멸하네.”
반쯤 구부린 채 가볍게 나아가는 오른발에서 빙천비(氷天匕)가 쏘아져 나가고, 끌러가듯 허공을 잡는 왼팔에서 생천비(生天匕)가 튀어 나간다. 뒤이어 엄청난 기운이 사방으로 터진다.
빙천비에서 흘러나온 극빙의 기운은 전면 십여 장을 얼음 구덩이로 만들었고, 생천비에서 흘러 나간 투명한 기운은 차가운 대지를 타고 흐른다.
철컹! 철컹!
백산을 향해 창처럼 다가들던 스물네 개의 철삭이 새하얗게 얼더니 생천비의 기운에 의해 조가조각 부서져 내렸다. 백산을 향해 철삭을 휘둘렀던 혈삭마령인 네 명의 흠칫 변했다. 지금껏 수많은 싸움을 거쳤지만 본인들의 철삭이 잘린 경우는 처음이었던 까닭이다.
몸을 빼야겠다는 생각도 잠시, 눈앞을 메우는 놀라운 광경에 그들은 얼어붙고 말았다. 나직한 중얼거림과 함께 오른발과 왼발이 회수되면서 왼발과 오른팔이 전면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화염지옥이 탄생하니, 죽은 자의 혼마저 파괴하네.”
“크아악! 아아악!”
화천비로 펼치는 화염폭(火焰暴)과 사천비로 펼치는 사혼파(死魂破)였다. 불길에 휩싸인 두 명의 혈삭마령인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부터 시작하여 가루로 변해갔다. 그리고 두 개의 목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하지만 네 명의 혈삭마령인을 도륙한 백산은 어떤 표정도 없었다. 방금 펼친 화염폭과 사혼파가 적을 죽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했다. 아니, 그는 알지 못했다.
동시에 네 곳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곳을 향해 춤을 추듯 사지를 번갈아 휘둘렀을 뿐이었다. 눈을 감았는지 검은 광채를 발하던 두 개의 보석이 사라지고, 백산의 신형은 덩실 한 바퀴 돌았다. 그리고 세 번째 중얼거림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핏빛 바람이 불어오니.”
조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왼손이 먼저 전방으로 튀어 나갔다.
“혈광풍(血狂風)!”
나직한 중얼거림은 단호한 목소리로 이어지고 왼손의 풍천비에서는 피를 머금은 듯 붉은 바람이 가공할 속도로 쏘아져 나갔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의 춤동작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붉은 폭풍이 혈삭마령인의 동체가 닿기 전, 무한극(無限極)이란 외침과 함께 들어 올려진 오른발에서 목천비가 튀어 나갔다.
“아아악! 크악!”
네 명의 입에서 동시에 흘러나온 비명 소리는 막부산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혈삭마령인의 철삭은 더 이상 가공할 무기가 아니었다. 여섯 개의 철삭이 전면을 철통같이 방어하고 있지만, 광혈지옥비는 그 사이를 종횡무진 휘젓고 다녔다.
마치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비도는 정확하게 철삭과 혈삭마령인을 노렸다. 핏빛 광채에 쏘이면 철삭들은 맥없이 잘린다. 푸른 빛에 노출되면 철삭들은 엿가락처럼 휘어진다. 그 사이로 죽음의 기운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힘에서도 미리고 길이에서도 밀린다. 열두 자루의 비도를 뚫고 들어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광혈지옥비(狂血地獄匕)였단 말이냐!”
혈삭마령인 열덟 명이 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반시응은 앓는 소리를 토했다. 여전히 머리는 광혈지옥비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아니, 광혈지옥비가 나타날 리가 없다고 외치고 있다.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광경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혈삭마령인을 장난감 다루듯 없애 버리는 자를 달리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정말 묵안혈마(墨眼血魔)란 말이더냐?”
의심스런 얼굴로 반시웅은 재차 소리쳤다. 흑요석처럼 빛나는 두 개의 눈동자는 그가 묵안혈마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잊혀진 전설일 뿐이다. 오십 년 전에 죽었던 자가 아닌가. 강호에서 활동하는 모든 무인들은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의 뼈를 뿌리는 장면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아니, 그 모든 것을 제쳐두더라도 상대는 이제 이십대, 설령 반노환동을 했다 하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팔십대 무인이 반노환동을 겪으면 사오십 대로 보이긴 해도 눈앞에 있는 자처럼 이십대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혈삭마령인을 무차별하게 도륙하는 무기와 검은 눈동자를 제외하면 그가 묵안혈마란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믿을 수 없다! 차륜혈삭소멸진(車輪血索消滅陣)을 구축하라!”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혈삭마령인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잠영루 살수의 가족이 살던 마을을 잔인하게 도륙했던 그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는지, 반시웅의 고함소리가 들리자마자 일제히 물러나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백산을 기준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길게 늘어선 그들은 하나의 글자를 만들어 냈다.
만(卍)자.
차륜혈삭소멸진(車輪血索消滅陣), 말 그대로 차륜전을 쓰기 위해 펼치는 진식이다. 하지만 혈삭마령인들이 펼치는 차륜진은 일반적인 방법과는 달랐다.
만(卍)자의 한가운데 적을 두고, 가장 선두의 네 명은 촉수처럼 철삭들을 움직이며 서 있다. 그 뒤쪽에 있는 자들은 두 개의 철삭을 다리 삼아 선두에 있는 자들의 머리 위쪽으로 자리한다. 그리고 뒤쪽으로 가면서 조금씩 높이가 높아져 모든 혈삭마령인들은 방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을 형성한다. 차륜혈삭소멸진의 시작은 그 때부터다.
진을 구축한 모든 이들은 전면 한 점을 향해 내공을 집중하고 그 내공이 모이는 지점은 곧 소별시켜야 할 적이 있는 곳이다.
춤을 추듯 부드럽게 움직이던 백산의 동작이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우뚝 멈췄다. 팔십여 명의 몸에서 쏟아진 내공이 온몸을 조여 온 것이었다.
“놈! 네놈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팔십 명의 혈삭마령인이 내뿜는 내공엔 견디지 못하리라. 설사 하늘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반시웅은 득의에 찬 미소를 머금었다. 혈삭마령인 팔십 명이 내뿜는 살기는 부드러운 듯했지만 이미 살기라 부를 수 없는 기운이다. 의형살인강(意形殺人?)을 넘어선 그것은 심검(心劍)의 기운에 해당했다.
“으음!”
백산은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처음 겪는 엄청난 기운, 전후좌우와 허공에서 밀려드는 기운은 조그마한 움직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사지를 결박당한 기분이 들었다.
“죽어라!”
백산이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을 틈타, 통렬한 고함소리와 함께 선두의 네 명이 철삭을 앞세우며 몸을 날렸다. 놀라운 일이었다. 중첩된 살기로 뒤덮인 곳은 자신들이라고 하여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살기가 모인 곳에 노출되면 자신들 또한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몸을 던지고 있다.
더구나 그들의 철삭은 온통 붉은 광채로 번들거린다. 생명의 원천이라 불리는 진원지기까지 뽑아낸 상태임이 분명했다. 스물네 개에 달하는 검붉은 혈삭은 백산이 만든 혈광을 뚫어버릴 듯 가공할 속도로 돌진해 왔다.
까앙! 과앙!
“크아악! 아악!
한 번의 공격을 끝으로 혈삭마령인 네 명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가루로 흩어졌다. 백산의 몸을 감싼 붉은 광채는 철벽이었다. 아니, 두 기운이 맹렬하게 충돌하고 있는 그곳이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혈삭마령인들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선두에 있던 네 명이 가루로 흩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그 뒤에 있던 자들인 몸을 던졌다. 진식 앞에 차륜이란 이름이 붙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그들은 상대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몸을 던진 것이 아니다. 공처럼 형성된 붉은 막에 조그마한 틈을 만들어 주는 게 뛰어드는 자들의 목적이다.
실낱같은 틈을 만들어 준다면 주변에 충만한 심검의 기운은 빨리듯 그곳으로 쏟아져 들어갈 터이고, 심검에 노출된 상대는 폭죽처럼 터지고 만다.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몸을 날리는 이유였다.
카앙! 캉캉캉! 캉캉!
붉은 혈광에서 두 번째 소리가 울려 퍼지고, 또다시 혈삭마령인 네 명이 가루로 흩어졌다. 하지만 이번 네 명의 죽음은 처음 네 명과 달랐다. 백산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혈광이 물결처럼 일렁였던 것이다.
백산 또한 완전하게 막아내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놀랍군, 심검마저 터득했을 줄이야.......”
반시웅은 경악한 눈으로 혈광을 주시했다. 차륜혈삭소멸진 속에서 견디고 있다는 말은 곧 심검을 터득했다는 의미다. 심검을 익히지 못한 자라면 주변에 깔린 살기만으로도 죽사를 면하기 힘들다. 그러한 현상은 공격을 마치고 죽어 가는 부하들을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그런데 귀광두는 견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심검이라 하여 전부 같은 건 아니다. 심검의 세기는 정신력으로 결정된다. 적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 자가 이긴단 말이다.’
“무너지고 있다. 계속 밀어붙여라!”
내심 중얼거린 밴시웅은 광포하게 고함을 질렀다. 귀광두가 나타나면 혼자 힘으로 없애겠다고 하였던 호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만큼 초조했다.
무너지고 있다는 반시웅의 외침이 신호탄이었을까. 혈삭마령인들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동료들의 죽음을 확인하고 공격을 감했던 자들이 이번엔 동시에 붉은 혈광을 향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으음!”
두 번째 신음이 백산의 입술을 비집고 흘렀다. 흑안의 눈으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다만 전후좌우 네 방향에서 끊임없이 달려드는 적의 기척만 감지될 뿐, 어떤 행동도 취할 수가 없다.
문득 입가가 축축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
물방울처럼 머리로 떨어지는 피를 발견한 주하연은 나직아 울먹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백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자신이 이럴진대, 그는 오죽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 삼 갑자나 되는 내공이 있으면서.’
백산의 보호를 받느라 빙천수라마공을 극성으로 익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던 주하연은 서서히 빙천수라마공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백산이 방어를 하고 있지만 사방에서 밀려드는 압력은 내기를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엄청났다. 단전으로부터 내공을 끌어올리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카앙! 캉캉!
또다시 몇 번의 충격파가 밀려들자 주하연은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백산보다는 그녀가 먼저 충격을 받은 것이다. 몸 내부에서 싸늘한 고통이 밀려들었지만 주하연은 내기의 운용을 멈추지 않았다.
곧이어 그녀의 머리칼이 백색으로 변하고, 몸에서 가공할 기운이 쏟아져 나왔다.
“오빠, 돌아요!”
빙천수라마공의 모든 힘을 왼쪽으로 집중하며 주하연은 소리쳤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사방에서 밀려들던 심검 기운의 균형이 무너진 것이었다.
일순 백산 주변을 둥글게 감싸고 있던 비도들이 왼편 지면을 향해 사정없이 박혀 들고, 그를 끌어당겼다. 아니, 끌어당긴 것처럼 보였을 뿐, 실제로는 백산의 의지로 행해진 일이었다.
끌어당기는 그 힘이 백산의 손목과 발목에 채워져 있는 천목환을 당겼는지 그의 팔꿈치와 무릎은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었다. 동맥 깊숙이 박혀 있던 뇌룡사들이 반쯤 뽑히며 피가 흘러나왔던 탓이었다.
하지만 주하연이 빙천수라마공을 펼쳐 만든 조그마한 틈은 백산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지면에 박힌 비도를 당기며 그 힘을 이용해 팽이처럼 몸을 돌렸다.
휘이익!
그것은 팽팽한 균형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한 자 정도 떠오른 백산의 신형이 무서운 속도로 돌자, 그에게 집중되어 있던 심검의 기운이 파편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강해진 바람은 광풍으로 변했고, 조금씩 그 범위를 넓혀가며 지면의 모든 것들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뿌리째 뽑힌 아름드리 소나무가, 커다란 바위가 백산을 따라 가공할 속도로 휘돌았다.
“아악! 커어억!”
백산을 향해 달려들던 혈삭마령인들의 몸이 갈가리 찢겼고, 그들의 육편(肉片)마저도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들었다.
“멈추지 마라! 놈에게 모든 내력을 쏟아 부으란 말이다!”
경악한 얼굴로 반시웅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다. 한두 명의 내공도 아니고 팔십여 명의 내공이 집중된 상태가 아니었던가. 비록 먼저 죽어간 자들 때문에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지만, 그 정도만 해도 인간은 견디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놈은 그 모든 기운을 회전력을 통해 날려 버리고 있다. 한 점에 살기를 집중하지 못하면 차륜혈삭소멸진은 이미 깨졌다고 봐야 한다. 그러한 현상은 부하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다.
살기를 집중하지 못하자 진은 급격히 무너졌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그들을 향해 회오리치는 붉은 바람이 엄청난 기세를 머금고 달려들고 있다.
“크악! 커억!”
백산의 몸과 함께 회전하는 각천비와 수천비는 지름이 사 장에 달하는 커다란 원을 그리며 혈삭마령인들을 도륙했다. 빙천비는 얼리고, 화천비는 태우고, 독천비는 녹이고, 풍천비는 찢어발겼다.
한 명의 혈삭마령인은 전부 열한 자루의 비도를 몸으로 받아야 했고, 마지막 한 자루의 비도에 피[血]를 빼앗겨야 했다. 그리고 조가조각 잘린 몸뚱이들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들어갔다.
“아아악!”
어느 순간 붉은 회오리바람은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빨라졌다. 급기야 백산이 무상신법마저 동원한 것이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없다고!”
망연한 눈으로 반시웅은 고함을 내질렀다.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광경. 회오리바람이 스치는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풀도, 나무도, 바위도, 그리고 도망치던 부하마저도 어육으로 변했다.
야수 또는 북천지옥대라 불렸던 혈삭마령인은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에 불과했다. 살아남기 위한 조그마한 노력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정말 묵안혈마였단 말이냐. 진정........”
목을 관통한 기다란 줄을 거머쥐며 반시웅은 고함을 질렀다. 어느새 혈삭마령인은 한 명의 생존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제대로 된 시체를 남긴 부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회오리바람에 말려든 시체 중 어떤 것들은 가루로 흩어졌고, 어떤 것들은 주먹만 한 조각으로 찢겨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말했잖아, 묵안혈마라고. 광혈지옥비의 주이이라고 말이다.
낮게 중얼거린 백산은 슬쩍 뇌룡사의 방향을 바꿨다. 엄지손가락 두 개를 제외한 여덟 개의 손가락이 잘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손가락 여덟 개가 지면에서 춤을 추듯 뛰고 있으나 반시웅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독천비가 뚫고 들어간 두 다리가 녹고 있으나 반시웅은 알아채지 못했다.
“크아악!”
주하연의 손에서 흘러나온 백광이 가슴을 관통하자 그제야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건 홍아의 몫이다, 놈!”
마지막 일장으로 반시웅의 가슴을 뚫어버린 주하연은 짓씹듯 소리쳤다.
“가요, 오빠!”
얼음 덩어리로 변한 반시웅을 망연한 눈으로 응시하던 주하연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우엑!”
하지만 백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반시웅의 마지막을 확인한 순간,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벌컥벌컥 피를 토했다. 심검의 기운에 타격을 받았던 몸이 견디질 못하고 급기야 피를 토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서둘러 끝내야겠다는 생각에 혈풍뇌전심법을 끌어올려 혈삭마령인을 도륙했던 것이 몸에 무리를 주었던 모양이었다.
“오빠! 우읍! 쿨럭!”
주하연 또한 다르지 않았다. 간신히 내리누르고 있던 피비린내가 백산의 모습을 보자 급기야 목을 타고 넘어오고 말았다. 고개를 돌린 백산은 땅바닥으로, 주하연은 백산의 가슴에 대고 벌컥벌컥 피를 토해 냈다.
“빌어먹을.......!
한참 동안 피를 토해내던 백산은 입술을 닦아내며 낮게 욕설을 뱉어냈다. 혈풍뇌전심법을 완전하게 성취할 수 없었던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과거의 몸이 아닌 탓이고, 과거의 환경이 아닌 때문이다.
상단전을 개방하고 영혼과 소령의 몸을 하나로 합쳤지만 과거 백산 시절과는 다른 몸임이 분명하다. 천살성의 힘을 완전하게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더하여 천살성을 완전히 깨우기 위해선 머릿속을 태울 듯한 분노로 들어차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조건도 되지 않는다. 물론 혈삭마령인들이 가공할 정도로 강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고전한 이유는 그 두 가지가 혈풍뇌전심법의 약점으로 작용한 게 컸다.
“괜찮아요?”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면서 주하연은 걱정스런 얼굴로 백산을 살폈다. 조금 전 혈삭마령인들과의 대결이 꿈만 같았다. 철삭 때문에 그들이 공력전이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게 잘못이었다. 공력전이보다 더한 힘을 발휘했던 자들이 바로 혈삭마령인이었던 것이다.
“그럼! 이 정도로 묵안혈마가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면 안 되지. 일다 숲으로 들어가자.”
주하연 입가의 피를 닦아주며 백산은 싱긋 웃었다. 곧이어 두 사람의 신형은 막부산 산중으로 모습을 감췄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를 메우듯,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이 떨어지던 빗방울은 이내 폭우로 변했고, 사방에 흩어진 검붉은 살점들은 빗물에 씻겨 내리며 고스란히 속살을 드러냈다.
독천비와 빙천수라마공에 동시에 격중되어 녹다가 얼어 버린 반시웅의 시체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왔다. 빗물에 의해 한기가 빠져나가자 허벅지께에 머물렀던 독 기운이 상부로 치밀어 오르며, 멀쩡하던 부분까지 녹이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고 어느 순간 머리까지 녹아 버린 반시웅은 다른 혈삭마령인들처럼 시체조차 남기지 못했다.
두 사람의 신형이 막부산으로 모습을 감춘 한 시진 후, 싸움 현장에 검을 옷을 걸친 여섯 명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방갓으로 얼굴을 가린 이들은 남궁세가를 떠나온 육대신마(六大神魔)였다.
“으음! 엄청난 자군.”
발에 차일 정도로 많은 살점을 보며 대형인 남궁상순(南宮相舜)은 신음을 뱉어냈다. 태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주변은 황폐했다.
“몇 명이나 될 것 같은가?”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둘째 남궁무장(南宮戊場)에게 물었다.
“대충 훑어도 오십 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독 기운에 녹아 버린 자들도 상당수 있는 것 같고요. 귀광두가 이런 강자일 줄은 몰랐습니다. 소림의 속가제자라고 하던데.......”
남궁무장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천붕회에 속했던 자, 그를 없애야만 하는 입장이 그지없이 불편했다.
“잊어라.그를 없애야 남궁세가가 산다는 사실만 생각해라.”
“알고 있습니다, 형님. 하지만........”
“형님, 귀광두도 내상을 당한 것 같습니다.”
침울한 얼굴로 말을 주고받은 두 사람 사이로 셋째인 남궁정주(南宮晶周)가 끼어들었다.
“여기 있는 피는 저곳에 있는 피와 다릅니다.”
남궁정주는 움푹 파인 바닥을 가리켰다. 무릎을 꿇었던 자국이 분명했다.
“여기서 무릎을 꿇고 피를 토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움푹 파인 곳에 고개를 숙이며 남궁정주는 말했다. 빗물에 씻기긴 했지만 상당량의 피가 고여 있는 곳을 남궁정주는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오십여 명이 넘는 무인들과 싸웠다.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일단은 표적을 찾아보자꾸나.”
남궁상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일이 수월하게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남궁정주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하지만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흔적을 더듬어 찾아가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던 탓이다. 맑은 날 같으면 별다른 문제가 없을 터이지만 지금은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 흔적이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귀광두는 내상을 치료하기 전까지는 막부산을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차분하게 생각해라!”
셋째의 모습을 본 남궁상순은 나직이 말했다.
“제 뒤르 ㄹ따라오십시오. 절대 앞서가서는 안 됩니다.”
전면으로 나선 남궁정주는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천천히 전진해나가기 시작했다. 남궁세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마(魔)라 이름 지어진 자들, 육대신마의 등장이었다.
남궁정주를 필두로 육대신마가 추격을 시작한 그 시각. 백산과 주하연은 울창한 수림을 헤치고 막부산 깊숙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 비 그치면 겨울이 오겠네요.”
쏟아지는 빗속, 필사적으로 가지를 붙들고 있는 나뭇잎을 보며 주하연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매달 한기에 떨어야 했기에 일 년 중 가장 싫어했던 계절은 겨울이었다. 십오 년의 세월을 그렇게 보냈고, 비로소 느긋한 마음으로 겨울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은 그마저도 허락지 않으려는 듯하니.
“기억나? 장년 겨울 사냥을 나갔을 때.”
“기억나지요. 오빠와 같이 있게 해 달라고. 죽어도 오빠 품에서 죽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그날이 생각나 주하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멧되지를 잡는다며 사람 똥을 휘저었던 날. 그날 첫눈을 보며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소원을 성취했다.
하지만 축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아니, 백산을 점점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수백 명의 무인들을 죽였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할지 알지 못한다.
“미안해요, 저 때문에.......”
문득 서글퍼져 백산의 가슴에 고개를 묻고 말았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다.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백산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설련 언니와 함께 은거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이곳으로 끌어온 사람도, 양손에 무수한 피를 묻히게 만든 사람도 자신이 되어 버렸다.
“날 봐!”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주하연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맞춘 채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소령의 몸에 빙의한 것부터 잘못된 거야. 내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더라면 널 만나지 못했을 테고, 남천벌이나 북황련, 그리고 동창과 악연을 맺지 않았겠지. 누구 잘못도 아닌 거야. 그저 인생의 한 과정이라 생각하면 돼. 한 번만 더 그런 소리 하면 네가 날 만난 걸 후회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 건 아니지?”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오빠 때문에 살고 있는데.”
“그래, 그럼 됐어. 물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폭포가 있나 보다. 오늘은 여기서 쉬자. 옷도 전부 젖은 것 같은데.”
백산은 묵직해진 등짐을 가리키며 말했다. 육포는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기름종이로 싸맸지만 주하연이 만들었던 옷은 보자기로 둘둘 말아 놓았을 뿐, 비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빗물을 한껏 머금은 옷들이 엉덩이를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알았어요.”
조금 밝어진 얼굴로 주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울창한 수림을 뚫고 전진하기를 일 다경여, 두 사람의 눈앞에 오장 높이의 폭포가 나타났다.
“저놈! 비 때문에 폭포가 되었구먼.”
내리꽂듯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며 백산은 싱긋 웃었다. 며칠 동안 퍼붓는 폭우 때문에 개울처럼 흐르든 물이 폭포로 변한 게 분명했다.
“맞아요.”
일반적으로 저 정도 수량을 가진 폭포가 떨어지면 그 아래쪽에는 크건 작건 못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폭포수가 떨어지는 아래쪽에는 편평한 바위밖에 없다. 백산의 말처럼 비가 만들어낸 일시적인 폭포인 것이다.
“자, 다 왔습니다, 공주님. 일단 내리시고요.”
폭포 앞에 다다른 백산은 마안철겸을 풀어 주하연을 바닥에 나려놓았다.
“에고! 다리에 감각이 없네.”
나직한 소리를 지르며 주하연은 풀썩 주저앉았다.
“엥! 혹시 씻겨 달라고 엄살 부리는 건 아니지?”
“헹! 꿈도 꾸지 말라구요.”
상큼 눈을 치뜬 주하연은 등짐을 풀고 있는 백산을 향해 혀를 쑥 내밀었다.
“그 속에 있는 것도 전부 씻어야겠어요. 그대로 두면 곰팡이 슬어서 버려야할지도 몰라요. 오빠, 뭐 해요?”
“알아서 오시지요, 공주님.”
주하연의 내민손도 본체만체 백산은 걸음을 옮겼다.
“오빠! 다리가 저려서 움직일 수가 없단 말예요.”
주하연이 무릎을 세워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한 발 떼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저리는 건 무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주하연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백산을 불렀다.
“이럴 땐 코에 침을 바르면 되답니다.”
백산을 손가락에 침을 묻혀 주하연의 콧잔등에 비벼 주고는 번쩍 안아 들었다.
“간지럽다구요! 아이 참, 제발 천천히 좀 가요, 천천히. 오빠, 제발 손가락으로 찌르지 말아요.”
다리가 심하게 저려 오자 주하연은 애원하듯 말했다. 더욱 견딜 수 없는 건 은근슬쩍 쿡쿡 찌르는 백산의 손가락이었다.
쏴아아!
“끼아악!”
느닷없이 후두둑 떨어지는 물줄기에 주하연은 낮게 비명을 내질렀다. 시리도록 차가운 물줄기는 가슴속에 가득 들어차 있던 근심을 한꺼번에 날려 버리는 듯했다. 기분이 상쾌해지며 절로 고함이 터졌다.
“오빠, 돌아요!”
“뭐라고?”
“돌아서란 말이에요.”
못 들은 척 귀를 가져다 대는 백산의 몸을 돌려세운 주하연은 등을 돌린 채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빠도 벗어요!”
“싫다 너나 씻어라! 난 이대로 서서 빨래나 할 거야!”
“오빠 옷에 묻은 피는 손으로 빨아야 한단 말이에요!”
“그래도 싫어. 내가 할 테니까 넌 네 옷이나 빨아!”
“아이 참! 내가 있는데 오빠가 왜 빨래를 해! 잔말 말고 옷 내놔요.”
홱 돌아선 주하연은 백산의 몸을 빙그르르 돌려세우며 못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일순 백산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눈앞을 가득 메운 뽀얀 나신. 전에도 수차례 봤지만 주하연의 몸은 아름다웠다.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싱그럽기 이를 데 없었다.
문득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기운이 확 솟구쳐 오르는 것 같아 백산은 재빨리 눈을 감았다.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 새 상의가 흘러내리고 주하연의 손길이 아래쪽에서 느껴지자 백산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화들짝 주하연의 몸을 밀쳐 냈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폭포수 아래, 주하연의 몸이 미끈거린다는 사실을 백산은 잊었다.
뭉클!
주하연의 어깨를 밀쳐 내려던 손이 쭉 미끄러지며 그녀를 품에 안는 꼴이 되고 말았다.
“헉!”
백산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었다. 가슴팍을 압박하는 말캉한 젖가슴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주하연 또한 백산의 심정과 다르기 않았다. 백산의 알몸과 맞부딪치자 얼결에 그의 허리를 껴안으며 눈을 감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를 잡아 보려고, 수치심을 무릅쓰고 옷을 벗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그에게 다소곳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고, 정숙한 여인으로 인정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알몸으로 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오빠!”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주하연은 꿈꾸듯 백산을 불렀다. 문득 얼굴 근처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던 탓이었다.
“아!”
주하연은 백산의 어깨를 꽉 붙든 채 숨을 죽였다. 물이 쏟아져 들어올 거라는 생각도 잠시,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뜨거운 혀가 입 안을 헤집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져러서가아니다. 그의 입술과 혀에 취했을 뿐.
주저앉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백산의 목에 매달렸다.
며칠 전 비몽사몽에 했던 입맞춤이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처럼 그가 먼저 혀를 밀어 넣었다. 그저 목이 말라 갈증을 해소하고 싶어 그의 혀를 빨았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혀가 들어오자 오히려 갈증이 심해진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기운에 목이 마르고 숨이 가빠진다.
‘흐윽!’
백산이 엉덩이를 와락 움켜쥐자 주하연은 내심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질렀다. 물에 젖어 차가울 터인데도 그의 손은 불덩어리처럼 뜨거웠다. 그의 손길이 스치는 곳에서 불길이 이는 듯했다.
엉덩이를 쓰다듬던 손이 부드럽게 허리를 쓰다듬자 주하연은 백사의 어깻죽지를 아프게 틀어쥐었다.
‘하악!’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주하연은 내심 뜨거운 비음을 터뜨렸다. 허리를 타고 오르던 백산의 손이 가슴을 움켜쥐자 하얗게 머리가 비워져 버렸다.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하자 등덜미를 타고 뭔지 모를 느낌이 줄달음쳐 올랐다. 차라리 팔을 잘라 내는 아픔이었으면 더 나을 텐데, 한 걸음 다가서면 두 걸음 도망치는 신기루처럼 안타깝기만 하니.
주하연은 정신없이 혀를 빨아 당기며 백산의 허리춤을 잡아 바지를 끌어내렸다.
마치 본능처럼.
한껏 물먹은 하의는 허리띠를 풀자마자 절로 흘러내렸고, 주하연은 백산의 나이가 팔십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이라도 하듯, 불끈 솟은 상징을 와락 움켜쥐었다.
“학!”
“허억!”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흘러나왔다. 백산의 상징을 움켜쥐었던 주하연은 처음 겪는 생경한 느낌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고, 백산은 격렬한 쾌감에 신음을 내지른 것이었다.
“이런!”
입술이 떨어짐과 동시에 백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두 사람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백산의 양손은 주하연의 엉덩이 깊숙한 곳과 가슴에 가 있었고, 주하연의 양 손은 백산의 아래를 굳게 틀어쥐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포수를 고스란히 맞으며 두 사람은 마주보았다. 어색한 얼굴로.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두 사람 중 먼저 말을 꺼낸 쪽은 백산이었다.
“팔십 먹은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 확인했으니까 그만 놔줘!”
“오빠가 날 더 이상 어린애로 보지 않는다는 걸 확인했으니까 놔주는 거예요. 오빠도.......”
잔뜩 얼굴이 붉어진 주하연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엉덩이를 더듬던 그의 손이 가장 은밀한 곳에서 느껴졌다.
“쿡!”
“킥!”
“풋! 하하하!”
“호! 호호호!”
어색한 얼굴로 서로를 보던 두 사람은 이내 커다랗게 웃었다.
“빨래 빨리 해야겠어요. 하연이 추워지려고 해요.”
어색한 분위기가 사라지자 주하연은 벗겨 낸 백산의 옷과 한편에 모아 두었던 옷가지를 끌어 모아 빨기 시작했다.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옷을 비비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백산은 고개를 흔들다가 몸을 돌렸다. 엉덩이를 흔들며 빨래에 열중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기가 민망했던 탓이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아직 식지 않은 아래 때문에 다가갈 수도 없었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당혹스러울 때면 언제나 외웠던 천자문을 백산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집 우, 집 주, 넓은 홍, 거칠 황.......”
“넌 왜 천자문을 외는 건데?”
“하연이도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하니까. 지금 가슴이 팡 터질 것 같거든요.”
주하연은 낮게 웃었다. 혹시 하고 그를 따라 천자문을 읊어 보았지만 벌렁거리는 가슴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전 느낌이 되살아나며 온몸이 불덩어리처럼 달아오른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천자문을 외는 백산의 모습은 천진스럽기까지 했다.
“효과가 있는 것 같아?”
“그런가 봐요.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 날 일! 달 영! 찰 영! 기울 축!”
효과가 있다는 주하연의 말에 백산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별 진! 잘 숙! 벌일 열! 베풀 장!”
장단을 맞추듯 주하연이 고하을 질렀다.
“다 했어요, 가요!”
잠시 동안 백산을 따라 천자문을 외던 주하연이 돌아서며 말했다. 백산의 옷과 자신의 옷으로 앞을 가리자 대충 몸을 가릴 정도는 되었다.
“업혀!”
재빨리 몸을 돌려 등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주하연을 업은 백산은 몸을 씻으러 가기 전 보아두었던 동굴을 향해 몸을 날렸다.
“오빠는 나가서 나무와 육포를 가져와요. 저는 옷을 짜고 있을게요. 자요!”
동굴 안으로 들어온 주하연은 잠시 주변을 살피듯 둘러보다가 물기를 짜낸 상의를 건네며 말했다. 크지 않은 동굴이었지만 두 사람이 쉬어 가기는 부족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지면에서 반 장 높이에 있는 동굴은 비가 들이치지 않아 그만이었다.
“끄응!”
옷을 받아든 백산은 나직한 신음을 토했다. 바지가 아닌 상의였기 때문이었다. 지저사령계에서처럼 주하연은 자신의 상의를 던진 것이다.
“편한 옷으로 준 거예요. 인상 쓰지 말고 빨리 다녀오기나 하세요. 육포에 물 들어가면 우린 굶어야 한다고요.”
재미있다는 듯 백산의 모습을 보던 주하연은 턱으로 밖을 가리켰다. 넘치기 시작한 물이 육포를 두었던 곳까지 흘러가고 있었던 거였다.
“얼레? 저것들이!”
깜짝 놀란 백산은 밖으로 달음질쳤다. 잠시 동안 밖을 헤매고 다니던 백산은 육포와 땔감을 한 아름 안고 돌아왔다.
“제가 진을 설치할 동안 오빤 운기행공 하세요. 그런 다음 화천비로 옷을 말려서 입어요.”
“알고....... 있었냐?”
백산은 어색한 얼굴로 주하연을 보며 물었다.
“비조차 튕겨내지 못했잖아요.”
주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삭마령인과 접전이 있었던 장소를 떠날 때를 제외하고는 백산은 거의 무공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발이 푹푹 빠지는 습지대를 지날 때도 그는 경공을 펼치지 못했다. 대기의 힘을 끌어다 쓴다는 공령을 성취한 그가 아니었던가.
그랬던 그가 내공을 끌어올리지 못했다면, 단순한 내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나보다는 네가 더 급하잖아.”
“아니에요. 전 아직 견딜만 해요. 그러니 오빠 먼저 하세요. 병은 키우면 안 된다는 거 알죠? 의원 말을 들으세요.”
싱긋 미소를 지은 주하연은 백산이 가져온 나뭇가지를 챙겨들고 몸을 돌렸다.
“알았다. 빨리 끝내도록 하마.”
측은한 얼굴로 주하연을 보던 백산은 그 자리에 가부좌를 했다. 제 몸도 가누기 힘들 터인데 극구 마다하는 주하연이 고맙고 대견했다.
광혈지옥비로 인하여 얻어진 공령의 단점은 바로 이럴 때 드러난다. 깨달음을 통해 공령의 단계에 올라선 무인은 내상을 당했다 하더라도 몸 스스로가 치료하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광혈지옥비로 얻어진 공령은 치유 기능이 없다. 다만 토천비와 싱천비가 치료를 돕는 역할을 할 뿐이다.
지그시 눈을 감고 혈풍뇌전심법을 끌어올리자 열두 자루의 광혈지옥비가 동굴 바닥으로 파고들고 생천비를 통해 생기(生氣)가 유입되기 시작했다. 일순 따스한 기운이 올라와 온몸 구석구석을 탐색하듯 부드럽게 쓸고 다녔다. 그리고 토천비를 통해 대기의 기운이 유입되어 생천비가 지나간 자리를 되짚고 다녔다.
때로는 생기(生氣)가 앞서 나갔고, 때로는 대지의 기운인 지기(地氣)가 길을 트며, 몸 내부에 생긴 상처를 조금씩 치유해 나갔다. 어느 정도 치료가 진행되었을까. 백산의 몸에서 흘러나온 반투명한 기운이 동굴을 가득 채웠다.
“아!”
진을 전부 설치하고 몸을 돌리던 주하연은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동굴 안에 따스한 봄날처럼 변하고, 머리가 명경지수처럼 맑아졌다. 이내 그 기운이 생기임을 알아차린 주하연은 백산 바로 앞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그리고는 운기행공을 시작했다. 내상 치료에 전념하는 두 사람은 시간을 잊고 장소를 잊었다. 생기와 지기는 백산의 몸을 치료했고, 백산의 몸에서 흘러나온 따스한 기운은 주하연의 내상을 치료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운기행공에 몰두하던 주하연이 먼저 눈을 떴다.그녀의 눈앞에는 붉은 혈광에 휩싸인 백산이 허공에 머물러 있었다.
“이제 본격적인 운기행공에 들었군요.”
백산의 모습을 보며 주하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슬쩍 미소를 짓던 주하연은 그 자리에 편안히 엎드렸다. 팔에 턱을 괸 채 백산의 모습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혈광에 가려 희미하게 보였지만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아니, 고개를 돌리면 바로 보고 싶은 사람이 백산이다. 자꾸만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허벅지를 꼬집어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랬다. 슬쩍 손을 내려 그의 손길이 스쳤던 곳을 사정없이 꼬집어보았다. 맨 먼저 엉덩이를 꼬집고, 허리를 꼬집고, 가슴을 꼬집고, 그리고....... 따끔 통증이 밀려오자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뭐 하는 짓이냐?”
“헥! 놀랐잖아요.”
깜짝 놀란 주하연은 배시시 웃었다. 한층 생기발랄한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하연이 즐거움이니까 알려고 하지 마세요.”
“몸을 꼬집는 게 즐겁다......? 그런 사람을 변태 성욕자라고 부른다는 말은 의서에 없데? 그거 병이다, 너.”
짐짓 의심스런 눈으로 주하연을 쳐다보다가 백산은 짓궂게 웃었다.
“자꾸만 놀리지 말고 옷이나 말려 줘요.”
얼굴이 붉어진 주하연은 백산 앞으로 옷을 던지며 소리쳤다.
“삼매진화는 너도 할 줄 알잖아. 네가 하면 될 걸.......”
“태워 버릴까 봐 그러지. 어느 정도 내공을 가해야 될지도 알 수 없고.”
주하연은 쭈뼛쭈뼛 말했다. 삼매진화. 내공을 일으켜 물체를 태우는 것을 말한다. 물론 삼 갑자에 달하는 내공이 있으니 물체를 태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해야 할 일은 옷을 말리는 작업이다. 강한 내공을 일으켜 물체를 태우는 것보다 훨씬 정교한 일이다 보니 함부로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구나, 삼매진화로 옷을 말려 입는 일은 경험이 없으면 할 수 없으니까.”
고개를 끄덕인 백산은 주하연이 던진 옷가지를 쥐고 화천비의 기운을 가만히 끌어올렸다. 화천비의 기운이 동굴 안을 따뜻이 데우자 쥐고 있던 옷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한참 옷을 말리는데 집중하던 백산은 슬쩍 미소를 머금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요?”
백산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흐뭇하게 쳐다보던 주하연은 상체를 세우며 물었다.
“다른 게 아니고, 엉덩이는 갈수록 커지는데 속옷은 왜 작아져야 하는 건지 그걸 알고 싶.......”
속이 훤히 비치는 손바닥만한 천을 들어 올리던 백산은 재빨리 입을 닫고 몸을 돌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주하연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던 것이었다.
“그런 법이 어딨어! 이거 살 때 얼마나 창피했는데.”
백산이 떠나고 그의 옷을 짓기 시작하면서 준비한 속옷이었다. 옷장 깊숙이 숨겨 두었던 그것을 입어보지 못하고 죽는가 했었다. 그러다가 백산이 남경왕부를 찾아왔고, 그곳을 떠날 때 곱게 챙겨 왔다.
“고개 돌리면 죽을 줄 알아!”
백산의 등에 대고 눈을 흘긴 주하연은 잽싸게 옷을 입었다. 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삼매진화를 시도해 볼걸, 하며 내심 후회했다.
주하연이 옷을 걸칠 동안 화천비의 기운을 이용하여 동굴을 훈훈하게 데운 다음 백산 또한 옷을 입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웠다.
“오빠, 여기서 나가면 안휘성에 먼저 가 보자.”
백산의 가슴속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으며 주하연은 말했다.
“안휘성은 왜? 거긴 날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남궁세가가 있는 곳인데.”
“신개 할아버지를 만나봐야 할 것 같아서.”
“파면신개?”
파면신개 악만금. 그는 전 부인인 소운의 의숙이다. 보고 싶기도 했지만, 잊어야 할 사람이기도 했다.
“응! 아무래도 할아버지를 만나봐야 강호 돌아가는 사정을 알 것 같아. 묵안혈마의 출현을 알렸으니까........ 오빠는 갈 필요 없어요. 나만 가서 살짝 만나고 올게요.”
백산의 표정이 굳어지자 주하연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아버지 다음으로 하연일 사랑해 준 분이셨어요. 내가 살아 있다는 것도 알려야 할 것 같고.”
“그래, 가자!”
주하연을 끌어당기며 백산은 말했다. 파면신개의 심정을 알 만했다. 그도 하연에게서 소운의 그림자를 발견해 냈으니까.
군주 신분이었던 하연에게 강호 대소사를 가르쳐 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에게 있어 하연은 군주가 아니라 오십 년 전 잃었던 소운이었다. 마치 자신처럼.
“저기, 오빠.”
“왜?”
“넣어도 돼, 여기에.”
주하연은 눈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뭔 소리래?”
무슨 말인지 왜 모를까. 다만 주하연의 입에서 왜 그런 소리가 나왔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사람은 가슴을 만져야 잠이 온다고.......”
“그것도 책에 나와 있던?”
“응.”
“하연아!”
“네?”
“만 권의 책을 읽었으면 충분하니까 앞으론 책 그만 읽어라.”
“이상하네? 여자가 이런 말을 하면 남자는 침 줄줄 흘리며 손을 쑥 밀어 넣을 거라 했는데.”
“도대체 무슨 책을 본 거야? 혹시 춘서(春書) 아냐?”
“맞아요, 그 책. 왜 내가 그랬잖아요, 하연의 장래 꿈은 현모양처였다고. 꿈을 이루기 위한 과정으로 공부 좀 했지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고.”
백산은 신음을 내뱉고 말았다. 말로만 들었을 뿐 한 번도 보지 못한 책이 춘서다. 첫 입맞춤에서 혀를 내밀었던 주하연의 행동을 보면 대충 짐작할 만했다. 그리고 폭포수 아래에서도. 남자 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가 이상하게 적극적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다 춘서 때문이었다.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심각한 얼굴로 주하연은 물었다. 부부 사이는 비밀은 물론이고 허물이 있으면 안 된다고 나와 있었다. 남들에게 밝히지 못하는 비밀스런 말도 부부는 나눠야 한다고 되어 있었고, 끊임없이 상대를 만져 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하라고 했다.
“아니다, 맞다. 부부는 티끌만한 비밀도 있어서도 안 되다.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네 말처럼. 하지만.......”
백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백산의 손을 잡아끈 주하연이 제 가슴속으로 불쑥 밀어 넣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고는 협박하듯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손 빼면 알아서 해요! 꿈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잠이 온단 말이에요.”
손을 빼지 못하도록 제 가슴 위에 얹어진 백산의 손을 꽉 틀어쥐며 주하연은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녀의 코에서 나직한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쩝! 이상한 버릇이 생겼어.”
손을 빼려고 힘을 주던 백산은 낮게 혀를 찼다. 잠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하연은 손을 놓지 않고 있다. 혼자 있는 게 겁이 나고 불안해서일 것이다.
“그래, 자자. 나도 남잔데 싫을 리가 있겠냐. 다만 미안해서, 창피해서 그런 거지.”
주하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백산도 이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시 후 동굴 안에서는 두 사람의 고른 숨소리만 흘렀다.
두 사람이 깊은 잠 소에 빠젼든 그 시각.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계곡 전면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예리한 눈으로 탐색하듯 주변을 살피는 이는 육대신마의 셋째인 목령마검(木靈魔劍) 남궁정주였다.
“분명 그들은 막부산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근처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겁니다.”
남궁정주는 확신하듯 말했다.
“그래? 그럼 이곳을 탐문하면 뭔가 잡히겠구나.”
남궁상순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평소보다 몇 배 이상의 시간이 걸리긴 하겠지만 결국은 찾아내게 될 터이고, 그때가 귀광두와 주하연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아울러 천붕회에서 맹활약을 보였던 그를 잡음으로서 남궁세가는 두 가지를 입증하게 된다.
천붕회는 역적의 무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과, 남궁세가는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강한 세력이란 사실을. 그 중심에는 육대신마가 있다. 남궁세가의 힘을 증명하는 현장에.
그의 별호를 열화신검(熱火神劍)이라 했던가.
전면을 노려보는 남궁상순의 눈에서 가공할 열기가 흘러나와 일순 그 주변으로 뿌연 수증기가 생겨났다. 단지 눈빛만으로 대기를 태워버리는 자. 남궁상순의 무공을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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