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장성(萬里長城)의 동쪽끝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이 호산장성(虎山長成)으로 변해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엊그제 새벽 평소 습관대로 인터냇창을 열었다. 다음을 메인화면에 "만리장성의 동쪽끝"이라는 재목과 멋지게 보이는 만리장성의 사진이 눈에 확 들어온다. 만리장성의 끝은 산해관의 노룡두(老龍頭)라고 알고 있는데 ... 창을 열어보자 얼핏 산해관의 노룡두(老龍頭)라고 느껴질만한 멋진 성곽이 황해바다로 여겨지는 망망대해를 향해 위엄있게 축성된 사진이 보인다.
응~~ 그런데 다음사진은 ...
중국식의 화려한 누각에 호산장성(虎山長成)현판이 보인다.'' 산해관에도 저런누각이 있었든가...?? 하며 아래를 보니까 벌서 수많은 사람들의 조회를 했고 엄청난 댓글이 달려 있었다.
다음 메인창에 뜰 정도니까 ..
"만리장성의 동쪽끝"이라고 소개된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 (이미 중국의 명나라시대의 만리장성축성법으로 복원한 모습, 아래에 있는 산해관의 노룡두와 너무 비슷하다.)
만리장성의 동쪽끝인 산해관의 노룡두(老龍頭) 감숙성(甘肅省)의 가욕관(嘉關)에서 출발한 만리장성은 발해만의 이 노룡두(老龍頭)에서 끝을 맺는다.
그런데 그 댓글내용이 거의 한결같다. 와!!! 쩐다.~~ 멋있다.~~~ 위대한건축물이다.라는등등 탄성 일변도이다.~~
나역시 "멋있는 장성이 끝이나다."라고 댓글을 달고 창을 덮고 나오면서 먼가 찜찜해서 "만리장성의 동쪽끝"이라는 검색어로 검색을 하자 이미 많은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하나씩골라 검색을 해보니 다음메인에서 보았던 내용과 거의 같은 내용들이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카페글에서 중국이 만리장성의 끝이라고 주장하는 호산장성(虎山長成)이 옛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임을 알게 되였다.
아차 싶어 메인창에 있던 "만리장성의 동쪽끝"이라는 글을 ?았지만 글은 이미 메인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아무런 생각없이 습관처럼 달아준 댓글을 지우고 이곳이 고구려의 박작산성임을 알려주려 했는데 그 글을 도저히 ?을수 없었다.
하는수 없이 만리장성의 동쪽끝이라 는 제목으로 되여있는 글들을 ?아 이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대부분 카페의 글이라 카페가입을 하지않으면 댓글을 달수도 없었다.
대부분 아무런 여과없이 고구려의 박작산성이 중국에서 왜곡하고 있는 "만리장성의 동쪽끝" (호산장성)이라 알고 감탄하고 있는 댓글들 뿐이였다. 아마 그 카페들에서 그글을 본 대다수의 카페회원들은 만리장성의 동쪽끝은 중국의 호산장성이며 그 호산장성이 고구려의 박작산성을 중국식으로 복원한것을 모르고 지나치거나 아니면 "만리장성의 동쪽끝"이라는 글에 소개되여 있는 멋진성(이미 중국명나라식으로 복원한 고구려의 박작성)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만리장성의 동쪽끝인 산해관의 노룡두(老龍頭)와 너무 비슷해서 산해관의 노룡두(老龍頭)이거나 산해관의 다른 망루쯤이 아니겠나 하고 지나치는듯 싶다.
중국이 주도면밀하게 추진해오고 있는 동북공정에 대해서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열심히 협력해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고구려의 박작성 (고구려의 박작성에 걸려 있는 호산장성이라고 쒸여진 현판}
잘 알지못하는 박작성에 대하여 여기저기 검색해서 간추려봅니다. 아쉬운 것은 어디에서도 옛 박작산성의 자료를 ?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말하는 호산 장성이란 무엇인가. 중국이 말하는 호산장성은 고구려가 당나라로부터 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압록강 방어용 전략 거점으로 쌓았던 ‘박작성’이다. 단동시내에서 압록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30km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0년대 중반에 중국에서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뒤 지금은 만리장성의 동단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성이기도 하다.
중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압록강 변에서 만리장성의 흔적을 찾다가 오히려 박작성과 함께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자 이를 서둘러 은폐하고, 그 자리에 명나라 때 건축한 것이라며 가짜 만리장성을 쌓아놓고 호랑이가 누운 형태라고 하여 ‘호산산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박작성은 단동시에서 북쪽으로 31km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은 이 성을 약500여년전 명성화 5년(1469)에 세워진 만리장성 동단 기점으로 왜곡하고 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있고, 산 형세가 마치 누워있은 호랑이 모습과 같다하여 호산장성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이 호산(虎山)에서 명나라 장성을 찾다가 고구려 산성을 하나 찾아냈는데 이 성이 바로 고구려 박작성이다. 보장왕 7년(648) 당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박작성은 산을 이용하여 요새를 세웠고,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함락시키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지금까지 압록강 입구에서 발견된 고구려 성은 애하첨고성과 이 호산산성 뿐인데 애하첨고성은 평지에 쌓은 성이기 때문에 유일한 산성인 호산산성이 박작성이 되는 것이다.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고구려의 박작성
천리장성의 마지막 보루 박작성“고구려 공격을 그만두라(罷遼東之役).” 고구려 천혜의 요충지 박작성(泊灼城)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고구려 침공에 실패한 당태종이 남긴 유언이다.
고구려는 당나라와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면서 동북으로는 부여성에서, 서남으로는 비사성에 이르기까지 천리에 이르는 장성을 16년에 걸쳐 완성했다. 지금의 단둥에 위치한 박작성은 이 천리장성의 ‘마지막 보루’라고도 불릴 정도로 천혜의 요새였다. 박작성은 현지에서‘호산장성(虎山長城)’이라고 불리는데, 중국이 천리장성을 인정하지 않고, 천리장성의 끝자락에 위치한 박작성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하면서 불려진 이름이다. 이미 많은 부분이 중국화 돼 버린 현실을 마주하니 울컥 슬픈 마음이 앞선다. 박작성의 계단에 올라서면 중국 만리장성으로 변질돼 버린 천리장성의 서글픈 모습이 보인다. 아쉽게도 지금은 중국이 복원한 명나라식 장성이 가로막아 그 모습을 찾아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박작성은 배를 대고[泊] 불을 밝힌[灼] 성이라는 뜻이니, 그 이름만으로도 고구려 군사들이 수군과 육군을 연합하여 주둔하면서 중국의 침략을 막은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이곳을 호산장성이라 부른다. 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하고, 백암성을 연주성(燕州城)이라 한다. 만주벌판을 동북평원이라 하고, 만주를 동북3성이라 한다. 물론 동해(東海)는 공식적으로 일본해(日本海)라 명명한다.
▲ 고구려 박작성 (중국은 이 성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고 주장한다.)
▲ 멀리서 본 박작성 (꼭대기에 점장대가 있다. 점장대 너머는 절벽이고, 유람선이 떠다니는 물길이 있다. 지금 유람선 물길인 이 도랑이 옛날 전쟁시에는 해자 역할을 했을 것이다..)
▲ 성에서 바라보는 북녘땅 (성 바로 아래로 보이는 도랑에는 유람선이 떠 다닌다. 도랑 너머는 북한이고,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다. 멀리 보이는 푸른 강이 압록강이다..)
▲ 성의 절벽 아래로 다니는 유람선 (박작성 3면은 절벽이다. 절벽 아래 물길(이 물이 압록강인 것은 아님)로 유람선이 다닌다. 유람선의 오른쪽은 북한..)
▲ 왼쪽은 중국, 오른쪽은 북한 (박작성 점장대에 올라 내려다보면 시옷을 반대로 써놓은 듯한 도랑이 보인다. 이 중 오른쪽의 넓은 도랑 말고 왼쪽의 아주 좁은 도랑이 바로 유람선이 다니는 도랑이다. 이 도랑의 왼쪽은 중국, 오른쪽은 북한이다. 여기야말로 '국경'이다..)
그들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정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오로지 자기들의 이익에 복무할 수 있는 새로운 명칭을 정하고, 유적도 자기네 식으로 복원한다. 물론 저들이 고구려 성이었던 박작성을 호산장성이라 바꿔 부를 뿐만 아니라 만리장성의 끝자락이라고까지 견강부회를 하는 것은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일환이다.
만리장성은 여기서 서쪽으로 2500km 정도 떨어진 산해관(山海關)에서 시작된다는 역사적 정설도 무시한 채 마구 사실을 왜곡하면서 그들은 이곳에 '萬里長城 東端起點 虎山(만리장성 동단기점 호산)'이라는 표지까지 세워두었다. 옛날의 중국땅을 그처럼 확대함으로써 만주 벌판에서 이어져 온 고대의 역사를 송두리째 자기네 고사(古史)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 이것이 바로 박작성을 호산장성이라 바꾸어 말하는 그들의 진심이다. 출처 : 박작성에서 북녘땅은 정말 '지척'인데...... - 오마이뉴스
산해관
산해관~발해만에 빠져있는 만리장성끝자락을 내려다볼 수있는 마지막 망루..
고구려가 천하를 호령하던 그 당시, 어찌 감히 수나라나 당나라 군사들이 이 성벽을 기어올라 승리를 노릴 수 있었으랴. 삼족오(三足烏) 깃발을 휘날리며 우리 민족 고구려가 위용을 뽐내었던 이 곳이 이제는 남의 땅이 되었고, 게다가 성벽 아래 펼쳐져 있는 압록강 일대의 북한 지역도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로서는 임의로 범접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으니, 우리의 조상인 광개토대왕과 무수한 고구려 장졸들이 어찌 그런 지경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으랴. 후손들이 농사를 지으며 식구들끼리 모여앉아 오순도순 먹고살 수 있도록 해주려고, 그 때문에 이 가파른 절벽 위에 험난한 박작성을 쌓았건만 모든 것이 다 압록강 물결 위로 떠가는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단 말인가 출처 : 박작성에서 북녘땅은 정말 '지척'인데...... -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18508&CMPT_CD=P0001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고구려의 박작성
고구려 천리장성이 표시된 지도.
만리장성은 '고무줄 장성' 인가? <황원갑칼럼>중화제국주의 부활과 역사 패권주의 부활 경계..우리 역사교육 강화해야
중국의 역사왜곡과 탈취기도가 집요하다. 고구려· 발해사 왜곡도 모자라 이제는 고조선· 부여사까지 중국사에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동북아 고대문명 전체를 중국사의 일부로 둔갑시키려는 것이다. 중국 국가문물국과 국가측량국은 지난 2009년 4월에 '만리장성'의 길이가 종전의 6300km보다 훨씬 더 긴 8851.8km라고 발표했다. 그동안 만리장성은 동쪽의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시(秦皇島市)의 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으로 간쑤성(甘肅省) 가욕관(嘉關)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산해관(山海關)
그런데 최근 중국은 이런 통설을 뒤집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 아니라, 압록강 하구인 랴오닝성(遼寧省) 단둥시(丹東市) 북쪽 호산(虎山)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허위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은 이미 지난 2004년에 단둥시 호산에 거대한 규모의 호산장성을 만들어 놓고 이를 ‘만리장성 동단기점’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호산산성은 고구려의 대 중국 방어거점의 하나인 박작성(泊灼城)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중국은 호산산성을 만리장성의 기점으로 만들기 위해 산성을 증축하고, 역사박물관을 신축하면서 기존의 고구려시대 박작성 유적을 대거 훼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중국 어용학자들의 역사왜곡과 날조에 따라 제멋대로 늘어나는 만리장성은 고무줄 장성인가. 중국이 만리장성을 압록강 하구까지 연장하려는 저의는 결국 고조선· 부여·고 구려· 발해의 영토였던 요서· 요동· 만주가 모두 중국의 영토였고, 이 땅에 세워졌던 나라는 모두가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란 궤변에 다름 아니다.
중국은 이와 더불어 랴오닝성 주도로 ‘랴오허(遼河) 문명설’을, 지린성(吉林省) 주도로 ‘창바이산(長白山)문명론’을 내세워 ‘중국 문명은 황허(黃河)문명뿐 아니라, 요하 유역의 동북문명이 합쳐진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요하와 발해만 유역, 만주는 고조선 문명의 발상지요, 한국사의 요람이었다.
고조선에 이어 부여· 고구려· 발해가 차례로 일어난 우리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중국이 황당무계한 역사왜곡과 날조를 자행하는 근본 원인은 중국사의 뿌리가 한국사보다도 짧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 중국사의 시원(始原)은 황허문명설이 주류로 자리잡아 왔었다. 그러나 지난 80년대부터 요하· 발해만 유역에서 기원전 7000~1500년의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 대거 발굴되었는데, 빗살무늬토기· 비파형청동검 등 한국 고대사의 대표적 특징인 유물· 유적이 대거 출토되었다.
만리장성이 표시된 지도 Sgabhai Pass라고 동단에 써있다 산해관이 동쪽 끝으로 되어있다..
특히 중국측이 위기를 느낀 것은 기원전 1700~1100년대의 은허(殷墟) 유적 유물보다 훨씬 오래 전의 갑골문(甲骨文)이 바로이 지역에서 출토된 사실이다. 이는 고조선의 발해만· 요하문명이 중국의 황허문명보다 앞섰다는 움직일 수 없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설’만 해도 그렇다. 고구려가 과연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던 지방정권이었을까. 고구려는 BC 37년 건국부터 668년 망국까지 28왕 705년을 유지했다. 그동안 중국에는 후한부터 당까지 무려 33개 나라가 명멸했는데, 200년 이상 지탱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가장 오래 간 나라가 196년을 유지한 후한이요, 그 다음이 103년인 동진이다. 심지어는‘황제’가 1명 뿐인 동위나,겨우 7년 만에 망한 후량 같은 하루살이 제국도 수두룩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했다는 삼국시대도 위· 오· 촉 3국의 임금이 모두 11명에 60년밖에 가지 못했다.
또 신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도 20대 290년을 이어갔을 뿐이다. 당나라에 앞서 중국을 재통일하고 4차에 걸쳐서 고구려를 정복하려다가 패한 수나라는 겨우 3대 38년만에 망했다. 고구려가 ‘속국’으로 있던 705년 동안 중국에선 33개 나라의 흥망이 무상했으니,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본국’이 어찌 있단 말인가.
사실(史實)이 이러함에도 중국은 입만 열면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궤변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국이 이처럼 역사왜곡· 날조와 탈취에 집착하는 데에는 더큰 이유가 있는 듯하다. 중국사를 돌이켜볼 때 중국 민족의 주류인 한족(漢族)의 역사는 별 볼일 없었기 때문이다.
한족이 세운 나라는 진과 한, 그리고 동진이후 송과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국이 자기 땅에 있던 나라의 역사가 모두 중국사라고 강변하는데 우리라고 해서 중국사의 뿌리는 고조선사라고 당당히 주장하지 못할 것도 없다.
고조선의 발해만· 요하문명이야 말로 황허문명보다 1000년이나 앞선 고대문명이 아닌가. 중국의 역사왜곡과 날조의 밑바닥에는 중화제국주의 부활과 역사 패권주의가 자리잡고 있으므로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되겠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가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계속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길밖에는 없다. 출처 /[월간 '대한언론'] 황 원 갑/(사)대한언론인회 회우· 소설가· 역사 연구가 /http://www.dailiantv.co.kr/news/articleView.html?idxno=39974
만리장성은 "고무줄"장성인가..?? (중국이 주장하고 있는 만리장성 어느설에 따르면 만리장성의 동쪽끝은 박작성(호산장성)이 아닌 고구려의 평양성까지라 우긴다.~~ 이것이 소위 중국의 동북공정이다.)
중국 교과서에서도 인정해던 만리장성의 지도 (만리장성의 끝은 산해관이라 표시되여 있다.)
<中 잇단 만리장성 늘리기..속셈은?>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09/09/27/0200000000AKR20090927038200097.HTML?did=1179m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고구려의 박작성
백전불패 조선해군제독 이순신이전에 고구려 해군제독 연수영(연개소문 여동생)이 있었다, 황원갑(黃源甲)의 「한국사 여걸 열전」바움 (2008년 9월 출간)내용을 토대로 연수영에 대하여 정리하기로 한다.
▲ KBS불멸의 이순신(이순신 역:김명민)과 SBS연개소문(연수영 역:황인영)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도
수나라의 멸망을 가져온 수나라.고구려와의 전쟁(당나라 침략로도 크게 다르지 않다)-수.당이 북방초원세력을 제압하고 지나대륙을 통일한 고구려 말기 상황은 고구려는 요하를 경계로 지나세력과 맞서고 있었고,백제도 동성왕이 무녕왕세력에게 시해당한 이후 지나대륙의 친동성왕계 세력이 고구려와 돌궐로 투항해 버린 바람에 지나대륙의 담로지역을 모두 상실하고 한반도서남해와 일본열도를 영역으로, 신라는 경상도와 강원도지역을 영역으로 삼고 있었다.
지나세력의 침략에 맞서는 고구려의 방어선은 1차 난하지역이고 2차가 요하지역이고 3차가 압록강이고 4차가 천청강이였다. 고구려말기 상황은 난하지역을 상실하고 요하지역을 방어선으로 삼고 있었다.
일부 역사매니아들이 태조왕 때 쌓은 10개성의 성이름을 가지고 수.당과 전쟁을 하북성에서 했다는 논리를 펴는데 당시 상황은 태조왕때의 상황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그리고 고구려 장안성은 북한 평양성에 위치하고 있었다. 요양이나 국내성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방어선은 난하지역으로 설정될 수 있으나 고구려말기는 북한 평양성이 고구려 수도성이니만큼 군사방어선이 고구려가 천리장성을 쌓았던 요하지역이 되며, 당나라 해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고구려의 해군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고.수전쟁을 통하여 피폐해지고 에너지가 소비된 고구려는 북방초원세력을 모두 제압하고 지나대륙을 통일한 당나라가 고구려를 집어 삼키려는 상황에서 당나라와 친하게 지내면서 국력을 길러 당나라침략에 대비하자는 대당노선을 견지한 고구려 영류태왕이 갈수록 당나라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 주면서 당나라의 도교까지 수용하여 당나라 도사들이 고구려 각지에서 도교를 가르칠 정도로 친당사대주의 노선으로 쳐 박혀 들어가는 고구려를 바로 잡고자 연개소문이 혁명을 일으킨 것은 642년 9월이었다.
이세민은 638년부터 642년가지 토번·서돌궐·고창국 등을 복속시킨 뒤 고구려를 향해 칼날을 겨누기 시작했다. 그래도 눈치를 못 챈 영류태앙은 태자 환권(桓權)을 사신으로 보내고, 대신들의 자제도 당나라의 국학에 입학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더욱 고무된 이세민은 641년에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보내 고구려의 지리를 비롯한 정세를 낱낱이 염탐해오도록 시켰다.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며 이런 사정을 훤히 궤뚫고 있던 연개소문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류태왕을 끼고 도는 주화파 대신들이 사사건건 강경책을 주장하고 나서는 연개소문을 제거하려고 들었다. 그래서 결국 연개소문이 선수를 쳐서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가 혁명을 일으킨 직접적 원인은 무능한 제왕 영류태왕(榮留太王)과 태대형(太大兄) 고웅백(高雄栢)·조의두대형(鳥衣頭大兄) 도병리(都丙利)·대사자(大使者) 고승(高勝) 등 측근 대신들이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다. 이런 음모를 미리 알아낸 연개소문이 대신 180여명을 수도 장안성 남쪽 교외에 열병식을 거행한다고 초청하여 모조리 숙청해버렸던 것이다. 자신이 당하기 전에 선수를 친 것이었다. 그리고 군사를 거느리고 왕궁으로 쳐들어가 영류태왕을 죽이고, 그의 아우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 고장(高臧)을 새 태왕으로 내세웠다. 그가 바로 보장태왕(寶藏太王)이었다.
그렇게 하여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연수영도 오라버니가 주도한 이 혁명에 자신의 가병(家兵)을 이끌고 참전했을 것이다. 연개소문 일가가 단순히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기 좋아해서 혁명을 일으킨 것은 결코 아니었다. 혁명의 간접적 원인은 영류태왕과 그의 측근 대신들이 당나라에 대해 굴욕적 저자세 외교정책을 펼쳐 연개소문을 비롯한 무장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연수영의 유적은 지나국 요녕성 개주시 청석관 유적, 요녕성 대련시 대흑산성(비사성으로 비정) 유적, 요녕성 장해현 장해군도 고려성산산성 유적, 요녕성 봉황산성(오골성 또는 봉황성으로 비정), 강소성 검남도 유적, 산동성 동래시(등주성으로 비정) 유적 등이다.
하얀색으로 칠한 발해만 유전지대공간이 고구려 해군제독 연수영이 활약했던 해전공간이라 할 것입니다
당시 평양도(平壤道)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서 고구려 침공에 종군했던 장량(張亮) 휘하 당나라 해군이 장산군도(長山群島) 일대에서 고구려 해군에 의해 저지되지 않았더라면 태종 이세민의 고구려 정벌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 해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해군을 격퇴시켜 여당전쟁에서 실질적인 전공(戰功)을 세웠던 고구려의 장수(將帥)는 과연 누구였을까? 한국과 지나국의 그 어떤 사서(史書)에도 등장하지 나오지 않지만 고구려 말기의 해군기지가 있던 발해만의 옛 비사성(卑沙城)과 석성(石城) 등지에서 여당전쟁 당시 고구려의 수군 대장에 대한 존재를 증명해주는 비석이 발굴되었다.
비록 금석문(金石文)의 편린(片鱗)에 불과하지만 고구려 말기에 연수영(淵秀英)이란 여성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연수영과 관련한 비사성·석성·청석관(靑石關) 등지에서 비문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1940년대에 이 지역 요령성 개주의 현장을 지낸 신광서라고 하며, 우리 나라의 학자로는 지난 1997년에 김금중 한민족통일교육연구소장이 비석문 일부를 발굴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비석의 명문(銘文) 대부분이 지나인들에 의해 변조(變造) 또는 훼손되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천 4백여년 전 고구려 해군의 최고 지휘관이었던 연수영은 다름 아닌 고구려의 국상(國相)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었다.
연수영이란 존재를 우리 나라의 학계가 주목한 것은 2003년에 중국 정부가 청석관 유적지를 유네스코에 등록한 것이 계기였다. 그 동안 국내에선 연수영 관련 비문 발굴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다가 청석관 유적지의 유네스코 등록을 계기로 비로소 공론화한 것이다. 현지 전설이나 비문에 고구려군과 당군 사이의 해상전투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심지어는 연수영의 사당까지 모셔놓은 곳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학계는 아직도 연수영이 우리 나라와 지나국의 그 어떤 사서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역사적 실재인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또한 연수영 관련 유적은 현재 지나국의 해군기지가 되었고, 비문 등도 지나국정부에서 엄중하게 관리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접근할 수도 없는 실정이다.
한편, 지나국의 야사(野史)인『서곽잡록(西郭雜錄)』과『비망열기(備忘烈記)』라는 책에도 연수영의 전설이 실려 있다고 한다. 연수영의 이름이 연소정(淵素貞) 또는 비하매도하는 개수영(蓋秀英)으로 나오는 자료도 있다.
연수영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당대의 영걸 연개소문과 피를 나눈 누이동생이니만큼 체격이 당당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사나운 남자 장수들과 수만 군사를 호령한 당당한 여장군이었으니만큼 아무래도 가냘프게 생기지는 않았을 것이다.연수영이 고구려의 전략적 군사요충지인 석성의 도사(道使)로 부임한 것은 오라버니와 함께 혁명을 일으키고 보장태왕을 새 태왕으로 내세운 직후였다. 연수영이 중앙정계를 더나 일선 지방관으로 내려간 이유는 분명치 않다.
연수영이 도사로 있던 석성 소장루(梳壯樓)에서 발견된 비문 내용을 소개한다."소장루(梳壯樓)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자기 누이 개수영(蓋秀英:淵秀英)을 위해 지은 것이라고 전한다. 원래 있던 누각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것은 원래대로 고친 것이다. 개수영은 여자 장수라 다른 장령들과 내성에서 함께 살 수 없기 대문에 홀로 이 누각에서 산 것이다. 개수영은 문예·군략·무예가 뛰어났기 대문에 성을 지키는 으뜸 장수가 되었다. 개수영은 나라를 연 이래로 수군의 장수로는 다른 장수들을 능가해 가장 뛰어났다. 이곳 소장루는 날마다 군무(軍務)를 처리하는 중요한 곳이었다."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고구려의 박작성
한편 같은 석성 점장대(點將臺)의 비문에는 ‘태왕(太王) 1년(보장태왕 재위 1년) 계묘년(癸卯年) 9월 왕이 교서를 내려 연수영을 석성도사(石城道使)로 삼았다’는 명문과 함께 이런 내용도 있다. "3년 을사(乙巳) 봄 3월, 당(唐) 매괴왕(埋魁王) 이세민(李世民)이 수륙(水陸) 105만 병력으로 요동지역을 침범했다. 비사성(卑沙城)의 성주(城主) 우소(于炤)가…… 묘도(妙島)로 출병했다.
석성도사 연수영이 이르기를, 출병하여 가는 길이 역류가 일고 군선이 뒤집히니 출병은 옳지 않다. 또 묘도는 적지(敵地)이며 적세가 강하니 출병은 불가하다. 그러나 우소부(于炤夫)는 이에 따르지 않고 묘도로 병력을 보냈다. 결국 역풍이 불어 군선이 부서지고, 묘도에서 적을 만났다. 적장 장량(張亮)은 기다렸다가 사방에서 공격해왔고, 형세가 매우 위급해져 대다수 군사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연수영이 곧 수군을 이끌고 나아가 구원을……
"연수영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미상(未詳)이며, 활약상도 주로 642년에서 651년까지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이는 고구려가 당에 의해 멸망했고, 그 시기의 역사는 지나인의 손으로 쓰여 온전한 고구려의 역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아 있는 명문(銘文)의 편린(片鱗)을 통해서나마 연수영이 문무의 재능이 탁월하고, 지략이 출중했다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가 혁명 이후 중앙의 요직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할까? 자신의 지분(持分)을 포기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시 연개소문 남매간에 무슨 내분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설에 따르면 그녀는 평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바다는 하늘이 내린 요새이니 이 바다를 누비는 장수가 되고 싶다.”그래서 그녀는 해군 장수가 되었고, 당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연수영은 장산군도(長山群島) 지역에 여러 성곽을 개축하고, 전선을 건조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등 수군 양성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것이 643년 무렵. 이에 다라 고구려의 해군력은 이전보다 훨씬 증강하게 되었다.
제1차 여당전쟁은 고구려와 연개소문의 빛나는 승리로 막을 내렸다.그러면 이 전쟁에서 연수영(淵秀英)은 어떤 활약을 펼쳤던가? 지금까지 출토되어 밝혀진 금석문의 기록들을 토대로 살펴본다.642년에 석성도사로 부임한 연수영은 당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해군의 증강부터 착수했다. 그녀는 5천명의 군사를 수군으로 양성했으며, 70여척의 전함도 건조했다. 그녀는 비단 실권자 연개소문의 누이동생이라는 후광이 아니라 문무에서 탁월한 능력과 비상한 통솔력으로 부하 장졸들의 신망을 받았다.645년에 마침내 당군이 고구려에 쳐들어왔다.
당시 고당전쟁 상황도 (고구려.백제정벌을 위한 당나라 해군출발지는 산동지역 래주였다.백제정벌을 위한 당나라 해군의 출발지도 래주다)
전쟁이 일어나자 연수영은 그 해 6월에 당군의 해상기지인 창려로 진격하여 적선 1백여척을 불태우고, 곧이어 성산의 적군을 쳐서 무찌르니 죽은 당군이 2만에 이르렀다.
연수영은 이 전공으로 석성도사에서 해군 군주(軍主) 겸 모달(模達)로 승진했다. 그녀는 계속헤서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 대흠도와 광록도 등지에서 각각 적선 50여척을 불사르고 8천여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아군은 연수영의 빼어난 전략 덕분에 피해가 거의 없었다. 잇달아 노백과 가시포에서도 적선 80여척을 격침시키고 5천여명의 당나라 군사를 살상하는 전공을 세워 해군 원수(元帥)로 승진하고, 본진을 광록도 부근 대장산성도로 비정되는 노백성으로 옮겼다.
이상은 서길수 서경대학교 교수가 해석한 석성 소장루 현판 내용이다.이 무렵의 지나국 측 사서에 당나라 해군의 전황이 거의 백지상태인 것은 연수영에게 당한 해전의 참패가 너무나 치욕스러웠기 때문에 이를 은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나국의 사가들이 자기들의 치욕은 감추고 주변국의 빛나는 역사는 모두 깔아뭉개는 것을 역사서술의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명확한 고고학 사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나라는 해군이 없었다는 국내 일부 역사매니아들의 주장도 당나라를 이롭게 하는 주장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당시 북한 평양성을 수도성으로 삼고 있었던 고구려에게 있어 장산군도를 중심으로 하는 해군의 존재는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고구려의 박작성
중국식으로 복원한 고구려의 박작성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고구려의 박작성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중국이 자국의 국경 안에서 일어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를 줄인 말로, '동북 변경지역의 역사와 현상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 과제'를 뜻한다. 이 연구를 통해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즉, 중국은 한족(漢族)을 중심으로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성립된 국가이며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므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 역시 중국의 역사라는 주장이다. 동북공정에서 한국 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및 발해 모두 다루고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고구려이다. 즉 고구려를 고대중국의 지방민족정권으로 주장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1983년 중국 사회과학원 산하에 변강역사지리연구중심이 설립된 이후 1998년 중국 지린성 퉁화사범대학 고구려연구소가 '고구려 학술토론회'를 개최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2001년 6월 동북공정에 대한 연구를 계획하면서 2002년 2월 18일 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동북공정이 시작되었다. 5년 동안 총연구비 약 1,500만 위안(약 23억원)을 투입했으며, 중국 최고의 학술기관인 사회과학원과 지린성[吉林省]·랴오닝성[遼寧省]·헤이룽장성[黑龍江省] 등이 연합해 추진했다.
동북공정은 2004년 6월 동북공정 사무처가 인터넷에 연구내용을 공개하면서 한국-중국간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이후 중국은 이 문제를 정치쟁점화하지 않고 학술적인 연구에 맡기며 한국의 관심을 고려한다는 구두합의로 갈등을 봉합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불씨는 계속 남아 있다.
동북공정은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기 시작하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2001년 한국 국회에서 재중동포의 법적지위에 관한 특별법이 상정되었고 같은 해 북한이 고구려의 고분군을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신청하자 이에 대한 대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온 작업으로 보고 있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남북통일 후 국경 및 영토 문제에 대비한 대책으로 여겨진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역사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2004년 3월 고구려사연구재단을 발족하였다. 출처: 브리태니커
참고/http://cafe.daum.net/onerod/GzxE/63?docid=1CMfW|GzxE|63|20080617105027&srchid=IIMS0VGl00
한겨레 그림판 9월 6일
김상돈 작
국민일보 만평 2006년 9월 7일자 |
출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원문보기 글쓴이: 호남인
첫댓글 예전에 동북공정에 관한 스크랩한 글인데 제대로 기사에서 자세하게 분석한 글이 없어서 올립니다. 아마 몇개월 단위로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는 사진이 포털메인에서 돌고 SNS상에서도 그냥 마구 돌았던 적 있는데 역사를 화석처럼 배우니 이런일이 발생한다고 봅니다.
MB정부는 머하는지...그놈의 교회는 잘다니면서 우리의 역사는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인가..완전히 빼았기고 말아야 정신을 차릴넘들....고위급 지도자가 이모냥이니 밑에 것들도 이모냥이지...역사왜곡을 당해도 바보처럼 멍하니 앉아 있지를 않나..일본한테 또 다시 나라를 빼았길려고 한-일 군사협정을 하질 않나...역시 친일을 제거 하지 못한것이 한으로 남는구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없는 역사도 만들어서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는 있었던 역사도 부정하면서 역사를 살리려고도 안하니 정말 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