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지켜라. 열차 시간이 아닌, 우주의 시간을 지켜라.
4월이 오기 전에 이미 산과 들녘엔 온갖 화사한 꽃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혹, 지난겨울 이렇게 한꺼번에 꽃피어, 세상을 놀라게 할 모의를 한 것인가? 아닐 것이다. 지난겨울 끝자락부터 봄을 기다리며 산동네에서 매화, 산수유, 목련, 벚꽃의 동정을 하루하루 살펴보았으므로 그러할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은인자중하며 털옷으로 봉오리를 품은 채 꽃피우기를 기다려왔다. 며칠 전만 해도 벚나무는 죽은듯한 마른 가지에 수많은 여린 봉오리를 조금씩 봄볕에 내밀며 대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일시에 경악하게 할 정도로 활짝 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마 그러할 때가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풀과 꽃과 나무의 이런 생동과 약동의 리듬을 보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의 첫 번째 책의 구절이 생각났다. “새싹은 짧은 봄날이 마치 영원히 지속이라도 되는 양 서두르거나 허둥대지 않고 천천히 돋아난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서도 이와 같은 이야기를 썼다. “지혜를 인생의 안내자로 삼는 일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작은 일에는 지혜로우나 큰일에는 어리석은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드물지 않다. 어떤 특정한 일을 그런대로 잘 처리하긴 하나, 나의 인생 전체는 형편없다. 어떤 책을 읽어보면 여가를 폭넓게 즐기는 생활이 무척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그런 책에 나오는 묘사만큼이나 인생의 여가란 아름답다. 집안일도 서두르면 낭비가 생기듯이, 인생에서도 성급함은 낭비를 낳는다. 시간을 지켜라. 열차 시간이 아닌, 우주의 시간을 지켜라. 우리가 설사 일흔을 산다 해도, 자신의 삶이 우주의 삶에 일치하는 경건한 여가의 순간을 누리지 못하고 급하고 거칠게만 산다면, 그런 인생에 도대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사소하고 작은 순간적인 일에는 성급하게 목숨을 거는 듯하지만, 정작 궁극적 목적과 같은 중요한 일에는 그리 관심을 보이지 않는 우리에게 열차 시간보다 우주의 운행시간을 지키라는 그의 아포리즘은 우둔한 우리의 성정을 내려치는 망치와 같다.
이처럼 자신의 삶을 우주의 삶에 일치시키는 사람들은 모든 계절을 아주 천천히, 경건하고 주의 깊게 느끼며 사는 자들이다. 채근담의 어리석은 자들과 같이 그들은 세월이 짧다고, 천지가 좁다고, 한가로운 자연이 덧없다고 하지 않는다. 그중 피에르 상소(Pierre Sansot)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란 책에서 느림의 미학을 아름답게 서술했다. “나는 굽이굽이 돌아가며 천천히 흐르는 루아르강(江)의 한가로움에 말할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거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풍요로움을 자랑하는 끝물의 과일 위에서 있는 대로 시간을 끌다가 마침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는 9월의 햇살을 몹시 사랑한다, 또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굴에 고귀하고 선한 삶의 흔적을 조금씩 그려가는 사람들을 보며 감동에 젖는다. 시골의 작은 마을 카페, 하루의 노동을 끝낸 사내들이 가득 채운 포도주잔을 높이 치켜든 채 그 붉고 투명한 액체를 가만히 응시한다. 지그시 바라보다가 드디어 조심스럽게 입으로 가져가 마시는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수백 년이 넘는 아름드리나무들, 그들은 수 세기를 이어 내려오면서 천천히 자신들의 운명을 완성해 간다. 아주 천천히 영원에 가까운 느림이다.” 노년의 삶을 이같이 유유자적하게, 느리게 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로운 일 것이다.
한편 시간에 대한 개념은 개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을 수 있다. 또한, 개인의 능력에 따라 사물을 판단하고 처리하기에는 서둘러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의 말처럼, 시간은 급류이고 무엇이든 휩쓸어 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청년의 때에는 시간을 아껴 쓰고 선용할 필요가 있다. 되돌아보면 젊은 시절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헛되이 써버린 것이 가장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할 때마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오래전의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은 꿈에 자신을 기소한 검사와 대면하여 무죄를 항변한다. 그러나 검사는 그에게 단호하게 “인생을 낭비한 죄’라는 엄중한 선고에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이같이 노인에게도 세월이 지난 나이 말고는 내세울 일이 없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다. 세네카는 ”우리가 사는 것은 인생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나머지는 삶이 아니라 그저 시간일 따름이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어쩌다 우리는 인생의 일부만 살다가 가는 것일까? 파스칼은 「팡세」에서 그러하지 아니할 답을 제시한다. 즉, 인생은 순간에 불과하고, 죽음의 상태는 그것이 어떤 성질의 것이라도 영원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인생의 이 궁극의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나날을 보내며, 반성도 없고 불안도 없이 자기의 취미나 쾌락에 끌려가고, 영원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면 영원을 극복할 수 있는 것처럼, 오직 한순간에만 행복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올바른 의식과 판단으로 한 발자국도 전진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제 다시 소로의 일기로 시간의 생각을 정리할 때이다. ” 인생에는 많은 시간을 써야 얻을 수 있는 어떤 순간들이 있다. 이때의 시간이란 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아니라, 대부분이 준비와 초대에 걸리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톱질에 온 정력을 쏟지 않는 사람을 게으름뱅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는 평생 천국의 문을 두드려왔고, 지금 그의 눈앞에선 천국의 문이 열리려고 한다. 천국의 문을 여는 일보다 더 숭고한 인생의 목적은 없다. 이 목적을 이루려면 고되고 힘든 훈련을 견뎌내야 한다. 단 한 가지 현상이라도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서는 일생에서 얼마나 많은, 얼마나 끝없는 여가가 필요한가. 나에게 주어진 역사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곳 주변에서 야영하며 그곳을 떠나지 말고 온몸과 온 마음을 바쳐야 한다. 나에게는 이 약속의 땅이 나의 전 세계이자 삼라만상을 상징한다. 나의 시야가 조금이라도 치우쳐 있다면 내가 겪는 일들이 영영 값싼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각다귀가 윙윙거리는 소리가 천상의 음악으로 들리고, 천상의 음악이 각다귀가 윙윙거리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 한 이 두 소리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다. 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과학사에 도움이 되는 소식이 아니라, 나를 북돋우고 만족시키는 위대한 이야기 그 자체여야 한다.“
어느 날 그렇게 화사하게 설국을 이루었던 꽃잎들이 미풍에 흩날리어 떨어지기 시작한다. 땅은 그들이 수놓는 또 하나의 꽃밭이 된다. 그들은 창조주의 우주 운항 시간표에 따라 묵묵히 질서를 지킨다. 순간을 영원같이, 영원을 순간같이,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한다. 그래서 아름답다.
2023.4.1
첫댓글 🙂🌸 빠삐용이 독방에 같혀서 바퀴벌레 잡아먹고 비몽사몽중애 꾼 꿈인지 환상중에 해맬때 ‘인생을 허비한 죄’라고 말을 타고 온(?)법관이 외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였는데 언급되네요.
현자들이 딱하게 생각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 일에 분주한 것이 아니라 남의 잠에 맞추어 자기 잠을 조절하고, 남의 걸음에 보조를 맞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짧은 것인지를 알아보라고, 얼마나 적은 부분이 자신의 것인지 생각해보라고 권면합니다.
언젠가 나그네의 길을 끝내고 그분을 만나게 될 때 혹 그러한 말씀을 듣게 될까 봐 두렵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