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풍무(130)
[딱 열여덟 살이면 족하오.]
소문, 그건 분명 소문이었다. 하지만 단순한 소문을 접한 강호 무림은 경악하다 봇해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열두 자루의 비도, 그리고 백안(白眼)이 나타났다고 했다.
세인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삼십 년 전에 사라진 전설, 시간이 거꾸로 흐르지 않는 이상 그가 다시 살아날 리는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소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남경왕부에서 이백여 명의 동창무인이 죽었고, 자금산에서는 삼백오십 명의 남천벌 무인과 동창무인 오백여 명이 죽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막부산 근처에서는 북황련 혈삭마령인 백여 명이 몰살을 당했다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소문, 아니 믿어지지 않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일부 발 빠른 사람들은 자금산과 막부산을 방문하여 소문의 진상을 확인했고 사실로 밝혀졌다. 단 한 사람의 손에서 동창을 비롯한 남천벌과 북황련 무인들이 도륙을 당하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광혈지옥비(狂血地獄匕)가 아니라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열 두 자루의 비도는 묵안혈마의 신물인 광혈지옥비가 분명하다!’
‘광혈지옥비를 얻으면 묵안혈마가 될 수 있다. 귀광두(龜狂頭)처럼 천하를 향해 큰소리를 칠 수 있단 말이다!’
무림인들은 흥분된 어조로 고함을 질렀다. 본인의 입으로 묵안혈마라고 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많은 무인들은 천붕회에서 귀광두를 보았고, 그는 이제 약관의 젊은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의 수중에 있는 열두자루의 비도는 광혈지옥비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천하제일무공으로 알려진 광혈지옥비가 아니면 단 며칠 만에 천여 명이 넘는 무인들을 없애지 못하기에.
‘얻어라! 광혈지옥비를 얻는 자, 천하제일인이 된다!’
소림의 천붕회 탈퇴로 잔뜩 가라앉았던 강호 무림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굳은 얼굴로 강호 무림을 바라보던 무인들은 행장을 꾸려 집을, 문파를, 은거지를 나섰다. 그리고 광혈지옥비가 출현했다는 남경을 쳐다보며 길을 재촉했다.
남경을 주시하는 자들 중, 북경에 있는 하후장설도 포함되었다. 하지만 하후장설은 여타 무림인들과는 달리 광혈지옥비에 대해 관심을 갖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앞에는 상전인 순우창천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하후야의 죽음에 대해 간단하게 위로의 말을 던진 후, 순우창천은 덤덤히 물었다.
“생각보다 강한 놈이긴 하지만 얼마가지 않을 겁니다.”
순우창천 앞이라 그런지 하후장설은 비교적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설사 그 비도가 광혈지옥비라 하더라도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오백 년 만에 태어났던 천살성(天殺星)은 이미 죽었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묵안혈마는 이미 죽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고요. 오히려 귀광두는 묵안혈마를 사칭하는 바람에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될 겁니다.”
사칭, 강호 무림이들과 마찬가지로 하후장설 또한 백산이 묵안혈마를 사칭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의 말처럼 죽었던 자가 살아날 수는 없는 일이므로.
“그런데 궁지에 몰렸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듣고 있던 순우창천이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무극계의 군사이지만 그는 용황사천가의 가주들에 버금갈 정도의 무공을 익히고 있다. 그런 그가 인정한 강자가 귀광두다.
“천붕회 때문입니다. 그들은 천붕십일천마의 후예라는 사실을 명예로 생각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천붕십일천마의 수장을 사칭하는 자가 나타났습니다.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동창제독의 명령이라 마지못해 나섰던 그들이 이제부터는 자발적으로 나설 거란 말이구먼. 명예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오히려 귀광두가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많은 자들을 죽이길 바라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 형제처럼 지냈던 천붕회 무인들을 도륙하면서 말입니다.”
하후장설의 얼굴에 스산한 기운이 번졌다. 평소처럼 말을 하고 있지만 귀광두에 대한 분노가 수그러든 건 아니었다. 이용가치가 없었더라면 무극계 고수들을 동원해서라도 없앴을 것이다. 하지만 귀광두가 가져다 줄 이익은 너무 많다.
우선은 강호 무림의 힘을 엿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고, 궁극적으로는 암중의 하늘로 존재하고 있는 천붕회를 낚는 미끼가 되고 있다. 소림의 멸망은 당연히 얻어지는 결과물일 뿐인 것이다.
“그런 다음 내 손으로 죽일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다행이구먼. 윗분들께서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자식의 죽음으로 경거망동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 듯했다. 군사의 지위에 걸맞게 그 어느 대보다 냉철한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이 하후장설이었다.
하후장설을 향해 빙긋 웃던 순우창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그들이 사라졌네!”
문을 향해 걷던 순우창천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사라지다니요, 무슨 말입니까?”
일순 놀란 얼굴로 하후장설은 물었다. 승천무극대혼진을 뚫고 있다고 했던 때가 불과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사라지다니.
“그게 글쎄 감쪽같이 없어졌다네.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것조차도 파악이 되질 않는다고 하더구먼. 노인네들 대부분은 그들이 죽었을 거라고 하던데....... 혹시 몰라 말해 주는 걸세.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알겠습니다. 그들이 나오기 전에 천붕회를 정리하겠습니다.”
“그만 가겠네, 나오지 말게.”
고개를 끄덕인 순우창천은 여인을 대동하고 문을 나섰다.
“다시 강호로 나와 봐야 문제 될 것은 없소이다. 천붕회와 한 배를 탄다면 그건 곧 자멸을 의미하기 때문이오.”
멀어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하후장설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인들은 그곳을 오지라 부르고, 무인들은 금역이라 부른다. 밤이 없고, 낮이 없고, 봄이 없고, 여름이 없고, 가을이 없어 그곳을 무존(無存)의 대지라 부른다.
또한 혹자는 무존의 대지에는 하나만 존재한다고 하여 일존(一存)의 대지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 하나가 바로 눈(雪)이다.
주변을 온통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새하얀 눈밖에 없다. 산을 보아도 눈이고 호수를 보아도 눈이다. 그 눈이 얼어 얼음이 되고, 그 얼음이 굳어 빙하가 되는 곳, 그곳은 북해였다.
대기마저 차갑게 얼어붙은 동토의 땅,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이곳에 검은 점 하나가 나타났다. 머리 지평선으로부터 나타난 점은 빠르게 확대되어 나갔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커다란 눈썰매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인적조차 없는 이곳에 눈썰매만 해도 생소한 일이거늘,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썰매를 끄는 짐승들이었다. 그것은 무려 일 장에 달하는 거대한 호랑이였다. 송곳니 두 개를 드러내며 살기를 흘리는 모습을 보면 인간의 손에 사육된 짐승은 아니었다. 더구나 호랑이는 곰마저 잡아먹고 산다는 사백력(斯白力, 시베리아)산이다.
그런 호랑이를 잡아 썰매를 끌게 하다니.
썰매에 타고 있는 자들의 정체가 궁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
썰매에는 전부 다섯 명이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의 행색이 특이했다. 다섯 명 모두 호랑이 가죽을 걸친 채였고, 가슴을 덮는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꽤나 나이를 먹은 사람들처럼 보였지만 그건 수염 한 가지일 뿐. 검게 그을린 그들의 얼굴은 사십 대를 갓 넘긴, 노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젊은이에 불과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섯 명 중 삼 인은 정상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장한 체격을 가진 인물은 오른쪽 무릎 아래가 거무튀튀한 철로 뒤덮여 있었고, 일행 중 가장 수려한 외모를 가진 이는 오른 팔꿈치 아래가 허했다.
그리고 눈이 있는지 없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눈을 가진 인물은 왼팔이 없었다.
중년의 얼굴과 칠십대 노인의 긴 수염, 그리고 세 명의 불구.
십 년 전, 독령곡을 떠났던 석두 일행이었다. 천붕십일천마라 불렸던 이들.
“섯다야!”
썰매가 다소 느려진 듯하자 소살우는 한편에 가부좌를 하고 있는 섯다를 불렀다. 하지만 허공에 한 치쯤 떠오른 상태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섯다가 대답을 할 리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섯다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소살우는 섯다의 뒤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고는 조금 큰 소리로 불렀다.
“모사야!”
목소리에 내공을 실었는지 이번에는 즉각 반응이 왔다.
“형님, 제발 정신 집중 좀 하게 놔두시오! 왜 뭔가 떠오를 만하면 산통을 깨는 거요? 내가 방법을 찾으면 형님들도 좋은 일 아뇨!”
허공에 떠 있던 모사가 털썩 엉덩이를 내리며 소리쳤다.
“난 이 얼굴에 만족해, 임마. 여기서 더 젊어지면 어쩔 거냐? 그리고 사십 대가 한계라고 했잖아, 새꺄.”
“그거야 아직 성취한 놈이 없어서 그런 거 아뇨. 삼십 년을 땡겼는데 오십 년을 땡기지 말란 법이 어디 있소? 그러니까 좀 기다려보란 말이오. 장가는 가야 할 것 아뇨.”
“장가?”
소살우를 비롯한 일휘와 석두는 뜨악한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반로환동을 겪은 후에도 지극정성으로 운기행공에 몰두하는 둘을 보고 내심 의아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독인(毒人)의 단계??? 벗어나 독성지체(毒聖之體)를 이뤄 더 이상 성취할 무공이 있을지 그것도 의문인 놈들이 아닌가. 그런데 죽자 살자 운기행공에 매딜리는 이유가 장가를 가고 싶기 때문이란다.
“너희들, 우리가 독령곡을 떠날 때가 몇 살이었는지 혹시 기억하냐? 아니, 이게 몇 개로 보이냐?”
황당한 얼굴로 두 사람을 쳐다보던 소살우는 손가락 두 개를 흔들었다. 얼마나 세월이 지났는지 모르지만 자신들이 중원을 때 나이가 칠십이었다. 그리고 반로환동을 겪은 시기 또한 상당히 오랜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그건 형님 입장에서 본 나이고, 우리 둘은 독인이 되면서 세월이 멈췄단 말이오. 강시가 나이 먹는 것 봤소? 그리고 섯다나 난 정신연령이 이제 스무 살밖에 안 됐다오.”
“그래서, 스무 살짜라 여자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미쳤소! 그런 노쳐녀를 데려다 어디에 쓰게. 적어도 나보다는 나이가 어려야 할 것 아뇨. 많이도 말고 딱 열여덟 먹은 처녀. 더 어리면 좋겠는데 그럼 도둑놈 소리를 들을 것 같아서.”
“저 새끼들 노망난 것 맞지, 형님. 중원으로 데려가지 말고 아예 파묻고 갑시다.”
작은 눈을 사정없이 치뜬 소살우는 게거품을 물고 일휘를 향해 말했다. 아직 총각이기에 장가를 가보겠다는 녀석들의 심정은 이해를 하고도 남는다. 자신 또한 소령의 어미에게 반해서 서른다섯이나 어린 소령 어미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때 얼마나 창피했던가. 그녀를 데리고 혼례를 온리면서도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녀석들은 자신보다 한술 더 떠 열여덟이란다.
하지만 소살우는 동의를 구하는 상대를 잘못 택했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섯다와 모사의 말을 들은 일휘는 호기심 가득한 눈초리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던 거였다.
“형님!”
“나도 장가 한 번 못 가본 총각이다, 새꺄. 설마 형님을 총각귀신으로 만들려고 했냐?”
“니미럴! 단체로 노망이 났구먼. 나이가 몇인데 장가를 가오! 아니, 아랫도리가 소식이나 보내오? 너희들 말 좀 해봐라. 새벽에 그것 서? 안 서잖아, 임마. 스무 살이 아니라 그보다 더 어린 처녀에게 장기를 들면 뭐하냐. 남편이란 직업은 말이다 무공보다 밤일을 잘 해야 하는 거다, 이 하수들아.”
불끈 틀어쥔 오른 주먹을 번쩍 들어 올리며 소살우는 소리쳤다. 반노환동을 겪은 얼굴이 젊어진 게 분명했지만 다른 기능은 아직 확인이 불가능하다. 아니, 반노환동을 겪기 전과 달라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건 형님이 뭘 몰라서 그런 거요. 서서 오줌 싸는 새끼들, 즉 수컷은 말이오, 여자만 보면 반응을 하게 되어 있소. 그건 나이하고는 전혀 상관없단 말이오. 그동안 여자를 보지 못해서 기능이 잠시 죽어 있지만 중원에 나가면 바로 작동할 거요. 이건 전직 한량이었던 이 섯다가 장담하오. 일휘 형님은 걱정 마시오. 내가 이십대까지 젋어지는 방법을 찾아서 가르쳐 줄 테니까.”
“휴우!”
열변을 토하는 섯다의 귓전에 깊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네 사람의 언쟁을 가만히 지켜보던 석두였다.
“쯧쯧! 석두 형님은 걱정 말라니까 그러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년, 아니 행복한 여자가 어떤 여잔지 아시오? 젊은 놈 끼고 사는 여자요. 늙은 남편보다는 새파랗게 젋은 남편이 훨씬 낫단 말이오.”
“얼굴만 젊으면 뭐 하냐, 새꺄. 그게 작동을 안 하는데. 한마디로 너희들이나 우리는 빛 좋은 개살구야, 임마.”
“조용 좀 해, 새끼들아! 나이를 똥구녁으로 쳐먹었냐? 미령보다 승을 어떻게 볼 거냐고. 나보다 더 늙은 아들을 어떻게 보냔 말이다, 이 개자식들아.”
섯다와 소살우를 향해 석두는 냅다 고함을 내질렀다. 반노환동을 하면서 줄곧 고심했던 일이다. 남궁미령은 어떻게 해 본다지만 이제 오십 줄에 접어든 승을 어떻게 봐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니미럴, 별 거지 같은 걸로 다 고민하네. 아들을 형님이라 부르는 새끼도 있는데 그까짓 걸로 뭘 걱정하오? 내가 네 녀석 애비다, 그럼 될 일을.”
“씨팔! 어째 우린 되는 일이 하나도 없냐. 남들은 반노환동했다면 춤을 추고 지랄을 할 텐데.”
소살우를 빤히 쳐다보던 석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녀석에 비하면 자신은 그나마 행복한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젊어진 얼굴 가지고 이렇게 속을 끓이고 있는데 녀석은 오죽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맞소, 형님 말대로 우린 문제가 있는 거요. 칠십 넘은 노인네들이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것도 문제고, 말끝마다 니미럴, 씨팔을 달고 사는 것도 문제란 말이오. 저 새끼들 말대로 정신연령이 낮은 모양이오. 저 고양이 새끼는 왜 이리 헐떡이는 거야!”
엉금엉금 걷고 있는 호랑이를 본 소살우가 오른손으로 썰매 바닥을 슬쩍 쳤다. 그러자 그의 신형이 가공할 속도로 나아가더니 호랑이 전면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소살우는 호랑이를 때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작은 눈으로 가만히 쳐다보다가 딱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지금 난 따뜻한 국물이 먹고 싶다, 고양이 새끼야. 한 번만 더 게으름 피우면 목에서 바로 피를 뽑아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알아들었는지 그것까지는 알 길이 없지만, 나직한 비명을 지르며 호랑이는 무서운 속도로 다려 나가기 시작했다.
“모사, 밥!”
썰매로 돌아온 소살우는 대뜸 모사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끄응! 나이를 먹더니 점점 게을러져요. 아예 씹어서 입에 넣어 달라고 하쇼.”
뒤편에 나뒹굴고 있는 호랑이 시체를 향해 손을 뻗어내며 모사는 투덜거렸다. 먹고 싶으면 대충 살을 잘라 먹으면 될 것이 아닌가.
“정상인 네가 해야지, 팔 병신인 내가 고기 자르는 일을 해야겄냐? 그렇다고 다리병신인 일휘 형님을 시킬 수도 없는 일이잖아. 석두 형님도 마찬가지고.”
“니미럴! 병신이란 말을 하질 말든지. 귀찮은 일 할 때마다 병신 타령이야. 옜소!”
모사는 호랑이 고기를 듬성듬성 잘라내 각자 앞으로 내밀었다.
“화주나 한 잔 했으면 좋겠다.”
고기를 한 입 베어 문 소살우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중원을 떠나 온 이후 가장 먹고 싶었던 건 다름 아닌 술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 중원에 도착하면 질펀하게 마셔봅시다. 우리가 입고 있는 호랑이 가죽만 팔아도 술값은 거뜬하게 나올 거요. 그나저나 세월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사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손에 들린 고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중원을 떠나 금역에 도착하면서부터 세월을 잊었다. 석두가 진(陣)이라 했던 그곳은 밤과 낮의 구분이 없었다. 끊임없이 밤이 이어졌고, 끊임없이 낮이 이어졌다.
그리고 잠을 자야 했다. 잠을 자지 않기 위해 했던 노력은 정말이지 눈물겨웠다. 심검의 경지를 성취한 자신들을 가둬 버린 엄청난 진.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들이 갇힌 곳은 불해삼진의 한 곳인 승천무극대혼진(昇天無極大混陣)이었다. 진을 뚫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면서 무공은 점점 발전했고, 잠을 자지 않기 위해 노력하면서 반노환동을 겪었다.
“중원에 돌아가면 그 자식들에게 고맙다고 해야겠소. 의도가 어쨌든 날 회춘시켜 준 놈들이니까. 그런데 호연작 그놈은.......”
슬쩍 미소를 머금던 모사는 말끝을 흐렸다.
독령곡을 떠날 때가 생각났던 탓이다. 백산의 처리를 두고 고심하고 있던 차에 개방 방주인 호연작이 세 사람을 데리고 찾아 왔었다.
놀랍게도 호연작이 데려온 자들은 금의위 영반인 천태진과 북황련 련주인 위지천악 남천벌 벌주 남효운이었다. 무림과 황실의 최고 실세들이 한꺼번에 독령곡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들의 부탁 또한 황당했다. 북방의 금역 안에는 중원을 몰살시킬 정도의 엄청난 힘이 존재하고 있다며 없애 달라고 했다. 내심 어이가 없었으나 어차피 당분간 독령곡을 떠나 있고자 했기에 잘됐다 싶은 생각도 있었다. 백산이 있던 지하를 폐쇄하고 유림하듯 독령곡을 떠났다.
하지만 자신들이 도착한 그곳은 오직 죽음만이 있는 곳이었다. 금역을 없애는 것은 고사하고, 빠져나오기도 버거웠다.
“나도 그 자식이 좀 이상하긴 했어.”
고개를 끄덕이며 섯다가 말했다. 금의위 영반의 부탁이 있었다고 하지만 천붕회 일원인 개방 방주가 적극적으로 나설 일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사라짐으로써 가장 손해를 봐야할 곳은 다름 아닌 천붕회 아니던가.
“신경 꺼라. 지금부터는 천붕십일천마의 독천쌍마가 아닌 모사 전영으로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잘됐지, 뭐.”
“맞다. 나도 장대근이다. 섯다 장대근. 응!”
가슴을 탕탕 치며 장대근임을 강조하던 섯다는 흠칫 놀란 얼굴로 전방을 주시했다.
“우리가 북방으로 갈 때는 저런 곳이 없었지 않았소?”
좌우로 철벽처럼 서 있는 거대한 얼음산을 가리키며 섯다는 말했다.
“빙한가........”
석두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두 개의 커다란 산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방으로 갈 때와 같은 길을 따라 간다는 보장은 없지만 눈앞의 얼음산은 참으로 생소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은 지평선 같아서 설령 산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얼음산이 있다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있다. 햇빛을 반사하는 빛은 멀리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껏 반사광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한낮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단 가 보자, 어차피 저곳을 지나야 할 것 같으니까.”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일행은 두 개의 얼음 산 사이로 썰매를 몰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모두의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얼음산의 높이는 백여 장에 달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양편의 얼음산이 완전히 닮은꼴이라는 데 있었다. 썰매가 지나가는 양편은 오십 장에 달하는 수직 절벽이었고, 그 위는 일반적인 산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구조물을 인위적으로 만들 사람이 있을지, 그 또한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크르릉!
“서!”
호랑이의 나직한 울음소리와 동시에 석두가 낮게 소리쳤다.
“헐! 이 외진 곳에 웬 사람 말소리? 저 자식들이 장가간다는 말보다 더 황당하네.”
내공을 끌어올려 천리지청술을 펼치던 소살우가 의아한 얼굴로 일행을 보며 말했다. 눈과 얼음밖에 없는 곳에서 말다툼 소리라니. 더욱 놀라운 사실은 소리가 들려온 곳이 다름 아닌 얼음산 속이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사람 구경하게 생겼네. 일단 들어가 봅시다.”
무료하던 차에 잘됐다 싶은 얼굴로 섯다가 앞으로 나섰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기대 어린 얼굴로 빙벽을 주시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출구로 보이는 곳은 없었다.
“우리가 언제 출구를 따지고 다녔소? 소리 나는 고셍 사람이 있을 테고, 사람이 있는 곳에 밥이 있다는 건 진리요.”
낮게 소리친 섯다가 소리가 들려왔던 전면 얼음벽을 향해 쌍장을 천천히 밀어냈다. 일순 그의 몸에서 기이한 광채가 솟아나왔다. 검은색을 띤 투명한 기운이 흘러나와 전면 빙벽을 파고들었다.
스스스!
섯다의 손에서 흘러나온 기이한 광채가 닿자마자 빙벽은 검게 물들이더니 녹아내렸다.
“니미럴!”
일 장 깊이까지 녹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얼음밖에 보이지 않자 나직한 욕설을 뱉어낸 섯다는 조금 전 만들었던 통로를 전진하며 헤엄치듯 양손을 저었다. 또다시 미약한 소리와 함께 얼음이 녹아 없어지고, 섯다 앞으로 기다란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섯다가 만든 통로를 따라 십여 장 가량 전신했을까, 일행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섯다가 쳐낸 기운에 의해 얼음벽이 사라지자 안쪽으로 향하는 기다란 길이 나타난 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통로를 따라 길게 이어진 얼음 기동이었다. 오 장 높이의 기둥들에는 갖가지 동물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이 확실했다.
“밥이 있다!”
낮게 소리친 섯다는 무작정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발을 옮겼다.
“허! 여긴 도대체 뭐야!”
통로를 따라 일각 정도 달렸을까. 널따란 광장이 보이는 곳에 도착한 일행은 놀라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다. 어디 신세계에 들어와 있는 착각이 들었다. 얼음산 안이 분명할 텐데 안쪽은 춥지가 않았다. 아니, 따스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광장 안쪽으로는 수많은 건물들이 서 있었고, 그 건물들을 비추는 불빛은 다름 아닌 야명주였다. 야명주에서 흘러나온 빛들이 얼음들을 투과하면서 나온 칠 색 광채는 눈을 현혹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광장의 상황은 아름다움과는 전혀 거리가 멀었다. 건들이기만 해도 터져버릴 듯한 살기가 광장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놀랍군, 수신가(水神家)라니.”
광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거대한 기둥을 살피던 석두는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어른 대여섯 명을 합쳐 놓은 듯한 거대한 기둥 가운데 갑골문자로 수신가란 글이 쓰여 있었던 거였다.
“무슨 말이오? 오신가 중 한 곳인 그 수신가를 말하는 거요?”
흥미로운 눈으로 광장을 주시하고 있던 일행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기둥을 쳐다보았다.
오신가(五神家). 그들 중 천신가와 사신가에 의해 천붕십일천마라는 자신들이 탄생했다. 그들을 없앰으로써 신가의 잔재를 완전히 지웠다고 여겼었는데 이 북방 오지에서 그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자들을 발견한 것이다. 더구나 수신가의 독문무공이었던 빙천수리마공은 형수님이자 어머니였던 조천영의 독문무공이다.
하지만 일행은 반가운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백의를 걸친 여인들과 대치하고 있는 자들 때문이었다. 수천 년 동안 세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 수신가다. 그런데 그런 수신가를 알고 찾아온 자들이라 함은, 그들 또한 수신가와 비슷한 부류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저들은 대막 천화궁(天火宮) 놈들 같은데? 사막에 사는 녀석들이 이 추운 곳까지 오다니 미쳤구먼.”
갈색 무복을 걸친 자들을 가리키며 석두가 혀를 찼다. 안쪽을 가득 메운 이백여 명의 무인들의 무기는 중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반월도였다.
“천화궁은 또 뭐냐?”
곁에 있던 일휘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던 탓이었다.
“별것 아냐. 사막에서 모래를 처먹던 녀석들이 단체를 만들었는데, 지네들 말로는 변황 사패천(四覇天)이라 불렀어.”
아들인 승이 황실에 들어가면서, 명나라 주변 세력들에 대해 고심하는 것을 보고 알게 된 내용일 뿐이었다. 변방의 소국보다 더한 힘을 가지고 있던 곳을 변황 사패천이라 하였는데 대막 천화궁, 신강 악마사원, 서역 소뢰음사, 남해 지옥군도가 그들이었다. 각 세력은 소림사와 버금갈 정도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고 했었고, 명 황실의 골칫거리였다.
그들 중 대막 천화궁 무인들은 가슴에 태양을 상징하는 둥근 원을 수놓고 다녔는데, 지금 광장에 있는 자들이 그랬다.
“그것들 강하냐?”
“글쎄, 강하다는 건 상대적인 거니까. 저기 보이는 저 여자만 해도 상당한 경지에 오른 것 같은데. 천영 형수님보다 더 강하잖아.”
석두는 광장 맨 안쪽 백발 여인을 가리켰다. 나삼처럼 하늘거리는 옷을 걸친 여인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삼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도 느껴질 만큼 대단했다.
“저기 서 있는 자식도 마찬가진데요, 형님!”
소살우가 가리킨 자는 천화궁 무리 후미에 있는 자였다. 갈색 무복을 걸친 자 또한 백발 여인 못지않게 상당한 고수였다.
“하여간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보니까 좋기는 하네. 일단 앉읍시다. 구경이나 하다가 밥이나 한 끼 얻어먹고 가자고요.”
여전히 밥 타령을 그치지 않으며 섯다는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안쪽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빙모(氷母)! 그만 열화천붕도(熱火天崩刀)를 내놓아라!”
“흥! 금우비, 용황신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네가 열화천붕도를 원하다니, 금신가의 선조들이 하늘에서 통곡을 하겠구나.”
백발 여인은 갈색 무복을 걸친 인물을 향해 날카롭게 호통을 쳤다.
“염병할, 금신가는 또 왜 기어 나오는 거야. 뭐요?”
금신가란 말을 들은 소살우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석두를 향해 물었다. 과거 제천맹 부맹주였던 정천무룡 백무선이 금신가의 화룡파천비공을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 같아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인의 말을 듣자마자 일제히 석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화태세 금우비는 대막 천화궁의 부궁주다. 그가 금신가의 후손이란 말은 나도 처음이다. 그리고 열화천붕도는 십대마병 서열 사위에 올라 있는 무기고.”
석두는 곤혹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여인의 말을 빌리면 대막 천화궁은 과거 오신가의 한 곳이었던 금신가의 후손이 분명했다. 더구나 빙모라는 여인은 금우비를 향해 용황신가의 하수인이라 하였다. 용황신가, 승천무극대혼진 안에서 무수히 보았던 글귀다.
어둠과 추위만 존재하는 곳이었지만 그곳에도 인간의 흔적은 있었다. 죽기 직전의 유언으로 써 둔 글들로, 그것들은 하나같이 용황신가를 저주하는 글귀였다. 승천무극대혼진은 용황신가에서 감옥으로 사용하던 장소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용황신가라는 말을 이곳에서 듣게 된 것이다.
“니미럴! 난 장가만 가면 된다고. 더 이상 강호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나갑시다.”
버럭 고함을 지른 모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신가의 일에 연루되면 다시 강호에 발을 담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곳에.
하지만 귓전으로 들려오는 소살우의 말에 그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천영 형수님을 닮았다.”
“뭔 소리? 니미럴!”
소살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모사는 나직한 욕설을 뱉어냈다. 그랬다. 빙모라 불린 여인은 천영 형수님의 얼굴과 비슷한 윤곽을 가지고 있었다. 백발 때문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여인의 얼굴을 주시하는 순간 금우비의 호통이 광장을 갈랐다.
“끄응!”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광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일순 광장 양편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으로 들어선 다섯 명의 복장 때문이었다.
“완전히 경극단 동물이 된 기부이군.”
자신들을 향하는 삼백여 쌍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모사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좀 비켜 봐라, 자식들아!”
앞을 가로막은 천화궁 무인들을 향해 모사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저놈들은!”
물결처럼 좌우로 갈라서는 부하들의 모습에 금우비는 깜짝 놀랐다. 지금 부하들은 극도로 흥분된 상태다. 조그마한 자극만으로 폭도로 변할 지경에 있는 그들이 아닌가. 그런 그덜이 자신들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다. 새롭게 나타난 자들은 결코 평범한 자들이 아니라는 의미였다.
“나는 대막 천화궁 부궁주 금우비요. 어디서 오신 고인들이오?”
이내 표정을 다잡은 금우비는 정중하게 물었다. 행색으로 보건대 우연히 들렀을 뿐, 수신가와는 무관한 자들로 판단했던 탓이었다.
“섯다야! 고인이면 뒈진 놈을 칭하는 말 맞지?”
산책이라도 나온 듯 한가한 얼굴로 걷던 소살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형님, 저 새끼가 쓴 고인의 고는 높을 고(高)자르 ㄹ말한 거요. 형님이 말한 고(故)자는 오래되었다 할 때 고자요.”
“그게 그거잖아, 임마. 높은 곳이란 하늘을 말한 거고, 하늘에 있는 놈은 죽은 새끼란 말이잖아. 내말 맞지, 두꺼비.”
섯다를 향해 이죽거린 소실우의 시선이 금우비를 향했다.
“누구냐고 물었다, 놈.”
일순 얼굴이 붉어진 금우비는 낮게 소리쳤다. 대막 천화궁 부궁주라고 자신을 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놈들은 쳐다보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저 새끼라고 했다. 그리고 두꺼비라고 했다.
“섯다야, 두꺼비가 나보고 놈이래. 이놈 저놈 할 때 그 놈 말이다.”
“신경 쓸 필요 없소, 형님. 이자, 저자 할 때 자(者)와 같은 말이니까. 놈 자(者)거든.”
양편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은 섯다는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는 비옴라는 여인을 보며 말을 건넸다.
“성이 조(趙)씨 맞소? 가서 먹을 것 좀 가져오쇼. 과일도 좋고, 밥도 좋소. 물고기하고 호랑이 고기만 빼면 뭐든지 환영이니까.”
“학!”
섯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빙모는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분명했다. 아니, 강호 무림인들 중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 그런데 이상한 행색의 자들이 자신의 성을 알고 있었다.
“젠장! 맞네.”
성을 물었던 섯다를 필두로 다섯 명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욱 확실했다. 빙모의 얼굴은 과거 형수였던 조천영과 상당히 닮았다. 더구나 성까지 같으니 친척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상을 찌푸린 사람은 그들만이 아니었으니.
두 번에 걸쳐 신분을 물었으나 바보 취급만 당한 금우비 역시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놈들!”
조금 전 놈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경계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놈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그럴 필요가 없어 보였다. 다섯 명 중 세 명이 불구였던 탓이다. 둘은 외팔이였고, 한 명은 다리가 없다.
신체적 결함이 있는 자들이 강하면 얼마나 강할까 싶었다. 더구나 놈들은 수신가의 가주인 조우령(趙羽鈴)의 성까지 알고 있다. 적이 될 자들임에 분명했다.
“뭐하쇼. 배고파 죽겠구만. 가서 먹을 것 좀 가져오라니까.”
망연한 얼굴로 이편을 쳐다보는 조우령을 향해 섯다는 재차 말했다.
“네? 네!”
더듬거리는 고개를 끄덕인 조우령은 저도 모르게 부하들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염철, 버릇을 고쳐 줘라!”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금우비는 광포하게 고함을 질렀다.
“존명!”
금우비 곁에 있던 곱추가 우렁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막혈타 염철. 신체적인 결함 때문인지 그는 손속이 잔혹하여 대막에서는 염왕으로 통하는 자였다. 기다란 낫을 틀어쥔 염철은 바닥을 차며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목을 늘여라, 놈!”
“이런! 수산가는 밥값이 선불인 모양이오, 형님.”
빠르게 다가오는 염철을 발견한 섯다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안쪽을 향해 커다랗게 고함을 내질렀다.
“많이 가져와야 한다. 안에 있는 것 전부 퍼와!”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섯다는 오른손으로 바닥을 툭 쳤다. 일순 광장에 있던 중인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해야 했다. 슬쩍 바닥을 쳤을 뿐인데 기다란 수염 사내는 앉은 자세 그대로 염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그 속도 또한 엄청났다. 마치 공간을 단축하는 것처럼 그의 신형은 염철 전면에 나타났고, 중인들은 검게 변한 맨발을 봐야 했다.
허공으로 번쩍 치솟은 발이 검은 잔상을 허공에 남김과 동시에 커다란 폭음이 들려왔다.
콰앙!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와 함께 염철의 신형은 실 끊어진 연처럼 훨훨 날더니 광장 끝 얼음벽을 한 자나 파고들며 박혀 버렸다.
“모사야, 나 몸속에 사리가 생겼나 좀 봐주라.”
제자리로 돌아온 섯다는 제법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왜?”
“마지막 순간에 힘이 빠져서 그래.”
꿈틀거리고 있는 염철을 보며 섯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십 년 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한 번의 공격으로 적을 살려준 예가 없었던 자신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저도 모르게 힘을 빼고 말았던 것이다. 아직 염철이 살아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원래 늙으면 뒷심이 없어져. 정상적인 현상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왜 이리 조용하냐?”
느닷없이 찾아든 정적이 부담스러운 듯 모사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신가 무인들을 비롯하여 천화궁 무인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금우비의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막혈타 염철. 지금이야 용황신가 무인들 때문에 천화궁에서 평범한 무인으로 전락했지만 그들이 나타나기 전 그의 이름은 대막을 건너 중원까지 알려졌을 정도다. 지금도 그가 나타나면 대막인들은 도망치기 바쁜 실정이지 않은가.
그런 그가 단 일 초 만에, 그것도 별 무공처럼 보이지도 않는 발길질에 당하고 말았다. 단순한 발질이 무쇠로 만든 사풍겸(砂風鎌)을 절반으로 잘라 버렸고, 염철의 신형을 십여 장 떨어진 벽에 박아 버렸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마지막에 힘이 빠져 죽이지 못했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으음!”
잔뜩 얼굴이 굳어진 금우비는 낮게 신음을 뱉어냈다. 배꼽까지 내려온 수염과 유유자적한 행동을 보면 상당한 연륜이 묻어 나온다. 하지만 얼굴이나 말투는 사십대가 채 안 된 사람들의 그것과 같다. 어느 모습이 진짜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금우비는 고개를 부하들을 보았다. 예상대로 부하들은 경악한 얼굴로 광장 가운데 인물들을 쳐다보고 있다. 겉으로 드러낸 자들은 별로 없지만 내심 겁을 집어먹었음이 분명했다. 더 이상 그대로 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금우비는 내공을 잔뜩 실어 전면을 향해 외쳤다.
“너희들 다섯 명으로 지금 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놈들. 어차피 오늘 수신가는 사라지게 돼 있다!”
금우비의 외침이 효과가 있었던지, 천화궁 무인들의 모에서 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새롭게 나타난 자들의 무공이 강하긴 했지만 부 궁주의 말대로 다섯 명. 이배 ㄱ명이나 되는 천화궁 무인들이 패할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더구나 자신들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다.
“금우비, 왜 이렇게 늦는 거냐?”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조금 전 석두 일행이 들어왔던 통로로 다섯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순 실내에 있던 천화궁 무인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죄송합니다, 천군(天君). 괴이쩍은 녀석들이 나타나서.”
“나도 밖에서 들었다.”
불꽃 문양이 수놓아진 화려한 청의를 걸친 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나섰다.
“놀랍군, 강호에 그대들 같은 자가 있었다니.”
석두 일행의 강함을 알아보았는지 천군이라 불렸던 자는 침음성을 흘렸다. 신가 내에서가 아닌 외부에서 자신에 필적하는 강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던 탓이었다.
“난 장손훈이다. 대막에서는 열제(熱弟)라 불리고 있다. 이름을 알 수 있나?”
“밥이다!”
흥미로운 눈으로 장손훈을 쳐다보던 섯다가 느닷없이 고함을 지르며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이번에도 역시 손바닥으로 지면을 슬쩍 쳤을 뿐, 섯다는 별다른 동작을 취하지 않았다.
“형님들, 밥이오, 밥! 이게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음식이오. 맛을 아직 기억할지 모르겠소.”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아온 섯다는 감격스런 얼굴로 호들갑을 떨었다.
“난 막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 이 냄새라니.......”
섯다보다 모사는 한 술 더 떴다. 눈을 지그시 감고 코를 벌렁거리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그림을 보는 듯했다.
“와! 술! 술이다!”
이번에는 소살우였다. 새우가 보면 형님하고 달려들 정도로 작은 소살우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조그마한 술병이 무려 다섯 개나 놓여 있었던 것이다.
“형님, 설마 꿈은 아니겠지요?”
“꿈? 맞다. 제일 중요한 걸 확인을 안 해봤네.”
모사의 물음에 소살우는 잊었던 사실이 생각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없이 꼬집어보시오. 아니면 저기 있는 칼을 빌려서 한번 찔러 보든지.”
“물론 그럴 거야. 칼로 찌르면 피가 날 테니까....... 주먹을 쓰지, 뭐.”
일순 소살우의 오른손에서 붉은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올랐다. 꿈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강기를 끌어올린 것이었다. 번쩍거리는 모습이 곧이라도 피를 보고 말 듯 섬뜩하기까지 했다.
“시팔! 제발 꿈이 아니길 빈다.”
주먹을 빙빙 돌리던 소살우는 사정없이 뻗어냈다.
퍼억!
“크아악!”
처절한 비명 소리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중인들은 조금 전 염철처럼 허공을 날아가는 한 인물을 보았다. 가공할 속도로 날아가는 그는 기대 어린 얼굴로 소살우를 보고 있던 모사였다.
“섯다야, 아직 확인 안 됐다.”
보사가 날아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소살우는 음식에 손을 가져가는 섯다를 말렸다.
과앙!
조금 전 염철이 박힐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거대한 폭음을 남기며 얼음벽으로 파고든 모사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니미씨팔! 형님이라고 그동안 봐줬더니, 한번 해보자 이거지. 야! 소살우, 너 이리 와봐!”
“꿈이 아니다! 먹자!”
긴장한 얼굴로 모사를 지켜보던 일행은 일제히 음식에 손을 댔다.
“카아! 시팔, 이 술 죽인다. 입 안에 쩍쩍 달라붙네, 그냥.”
누가 빼앗아 먹을세라 네 명은 정신없이 손을 놀렸다. 분비해 온 젓가락을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죽일 놈들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열심히 손을 놀리고 있는 자들을 쳐다보던 장손훈은 살기를 풀었다. 살기로 사람을 죽이는 의형살인강(意形殺人?)이었다. 그와 동시에 부하들에게 눈빛으로 명령을 내렸다. 의형살인강이 놈들을 덮치는 순간 공격을 감행하라는 지시였다.
삼 장 가량 떨어져 있던 천화궁 무인들이 조금씩 다가오는 순간 얼음벽에 박혔던 모사는 온갖 욕설을 뱉어내며 일행 곁으로 다가갔다.
“소살우, 너 나와!”
“어? 모사 너 어디 갔다 왔냐? 똥 아니, 측간에 갈 것 같으면 말을 하지. 그럼 음식을 따로 빼놓았을 텐데.......”
“이런 씨팔, 벌써 다 처먹었네. 지금부터 음식에 손대는 것들은 녹여 버릴 테니까, 알아서들 하쇼.”
소살우를 향해 인상을 쓰던 것도 잠시, 모사는 바닥을 향해 사정없이 손을 휘둘렀다. 일순 그 앞으로 모든 그릇들이 우르르 모여들고 모사의 양 손은 검게 변했다.
“저 새끼 또 방귀 뀐다!”
화들짝 놀란 네 사람은 술병을 하나씩 챙겨 들고는 조우령이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 또한 섯다와 마찬가지로 슬쩍 바닥을 치는 동작만으로 몸을 이동한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
장손훈의 의형살인강이 모사의 등에 작렬해 들었고, 모사는 엉덩이가 들썩일 정도로 추역을 받았다.
뿌웅!
“미친 놈! 이 와중에.......”
모사를 향해 다가들던 천화궁 무인들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정신없이 음식을 처먹는 것도 부족해 방귀라니. 죽으려면 뭔 짓을 못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챙! 챙챙챙!
일장 거리를 남겨둔 지점에서 천화궁 무인들은 일제히 반월도를 뽑아 들었다.
“잘 가거라...... 컥!”
낮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리려는 순간, 천화궁 무인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목을 틀어쥐었다. 코끝으로 스치는 향을 들이마신 순간 숨이 턱 막혔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광경은 다음이었다.
목을 틀어쥐었던 자들이 칠공으로 피를 토해 내기 시작하더니 일제히 바닥으로 몸을 뉘였다. 울컥울컥 피를 토해 내던 이들은 이내 축 늘어졌다.
“독(毒)? 호흡을 멈춰라!”
질겁한 장손훈은 재빨리 숨을 멈추며 고함을 질렀다. 방금 쓰러진 부하들의 얼굴에 검은 반점이 급속하게 번져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 저런 일이.......”
경악한 얼굴로 장손훈은 여전히 음식 먹는 데 열중하고 있는 자를 쳐다보았다. 신진대사의 하나인 방귀가 치명적인 독이 된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아니, 상대가 독인이라면 이해가 간다. 독인은 뱉어내는 호흡조차 독이기에.
하지만 놈은 멀쩡하다. 조금 전도 양손이 검게 변한 것 외에는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방귀에 치명적인 독이 포함되어 있다니. 기절할 노릇이었다.
“쩝! 쩝! 정말 맛있네. 어이, 빙모! 음식 좀 더 가져오면 안 되나?”
여기저기 너부러진 시체를 보지 못한 듯, 얼마 남지 않는 접시들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던 모사는 조우령을 향해 소리쳤다.
“죽일 놈! 감히 이 장손훈을 우롱한단 말이더냐! 쳐라!”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까. 모사를 향해 재차 의형살인강을 쏟아내며 장손훈은 고함을 내질렀다. 일순 그의 곁에 있던 네 명의 무인들이 빛살처럼 몸을 날렸고, 호흡을 멈추고 있던 천화궁도들도 수신가 무인들을 향해 득달같이 몸을 날렸다.
“놈! 독을 풀지 말았어야 했다. 그 때문에 저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덤빌 것이다. 서둘러 끝내야 살아남기 때문에.”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 장손훈은 이를 갈았다. 독이 오히려 득이 된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독은 치명적인 공격이긴 하지만 당하는 상대 또한 사력을 다하게 된다. 서둘러 처리하지 않으면 자신들 또한 죽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천화궁 무인들은 동귀어진을 불사하고 공격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주작천가의 장자인 날 우롱한 대가는 목숨으로 대신해야 한다. 놈들!”
용황사천가 중 주작천가의 장자이제 열제라 불린 자신이 지금처럼 무시당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독을 사용하고 가공할 무공을 지녔지만, 별호조차 밝히지 못하는 변변찮은 자들이 아닌가.
그런 자들에게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장손훈은 치를 떨었다.
“이까짓 독기는 운기 한 번이면 전부 없앨 수 있단 말이다.”
일순 장손훈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치고 그 신형은 화염에 휩싸였다. 그리고 가공할 열기를 뿌리는 붉은 덩어리가 모사의 등을 향해 빛살처럼 날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독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독 입니다
즐감하고 깁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