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을 읽으면서 이승만대통령과
또한 박정희 대통령을 회고하게 됩니다.
우리 위대한 대한민국을 위해 하늘에
감사 할뿐입니다. - khc
부다페스트 각서
(94년 12월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러시아에 넘기고 핵확산 금지조약에 가입하면 국제사회는 우크라이나의 현 국경에 대한 주권을 확인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이 있을시 안보리가 대처
한다는 각서 )
하나 믿다가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는 우크라이나를 보면서 한미상호 방위조약을 이끌어낸 이승만의 혜안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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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16개국 제재 약속' 대신 '한미상호방위 조약'을 관철한 이승만, 종이 쪼가리 '각서' 믿다가 패망하게 된 우크라이나
배진영 월간조선기자
(현재 편집장)
휴전협상이 막바지에 이른 1953년 5월 22일, 월터 스미스 미국 국무차관은 엘리스 브릭스 주한미국대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미국은 서태평양 지역에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한국에 가까운 지리적 근접성이 침략에 대한 억지력이 되고 있다.
▲휴전협정과 더불어 발표할 유엔의 제재강화성명(공산 측의 재침략이 있을 경우 참전 16개국이 공동으로 그에 맞서는 제재에 참여한다는 약속)이 미국이 한국의 장래 방어를 위해 계속적인 지원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이라면서 “현 상황에서는 대통령 (아이젠하워)이 대한민국과 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고려할 수 없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안전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고 밝혔다.
5월 26일 브릭스 대사와 함께 경무대를 찾은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방위조약 대신 만약 침략이 일어나면 참전16개국이 돌아올 것이라는 취지의 성명을 발표할 것”이라는 말로 이승만 대통령을 달래려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모든 것은 우리에게는 무의미하며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방위 조약뿐이며,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치가 변하면 모든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라며 클라크 사령관의 제안을 일축했다.
클라크 사령관이 “유엔군과 중공군의 동시 철수이후 방위조약 체결” 가능성을 시사(示唆)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대해서도 “동시 철수 이후가 아니라, 그 이전에 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초 강대국이자 대한민국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던 미국이 요구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적 선언’은 무의미하다면서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조약’을, 그것도 중공군 및 유엔군 철수 ‘이전’에 체결되어야 한다고 완강하게 요구한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은 ‘종전(終戰)선언’이라는 정치적 쇼를 위해 지난 5년간 안달해온 문재인의 작태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정치학을 공부했음을 떠올리게 된다.
다행히 5월29일~30일 열린 미국 국무부-군부 고위급 회동은 논의 끝에 “한국 정부가 휴전협정 체결과 시행에 동의하고, 한국군을 유엔군사령관의 지휘 하에 존치시킨다는 조건 아래 미국-필리핀 방위조약과 앤저스 (미국-호주·뉴질랜드)조약과 같은 수준의 양국 간 안보조약의 체결을 한국 측에 제안할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휴전협정 체결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이를 받아 들이기로 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6월6일자 서신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의사를 공식적으로 밝히면서, 휴전협정 체결에 협조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친서를 넙죽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6월17일자 회신(回信)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20세기 초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과 1945년 미소(美蘇)의 일방적인 38선 획정, 그리고 1950년 애치슨선언으로 북한의 남침을 촉발한 사실 등 미국의 전과(前過)들을 상기시키면서 다시 한 번 한미상호방위 조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이 한국에 베푸는 시혜(施惠)가 아니라 미국이 한국에 마땅히 갚아야 할 도덕적 채무(債務)라는 투였다.
이 친서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다음 날인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뒤통수를 호되게 갈겼다. 반공포로 석방을 감행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미국 측도 금방 간파했다.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은 후일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이승만이 휴전을 반대하면서 한국군을 유엔군사령관의 작전지휘권으로부터 철수시켜 대한민국 단독으로 북진통일 작전을 하겠다고 미국을 위협한 것이 결코 ‘허세’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위험한 포커 게임’을 하면서 반공포로 석방을 숨겨놓은 ‘에이스 카드’로 사용했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딱 3년이 되는 1953년 6월 25일 미국 대통령 특사(特使)인 로버트슨 미 국무부 동아시아차관보가 서울에 도착했다. 6월 26일부터 시작된 이승만-로버트슨 회담은 7월 11일까지 12차례나 계속됐다. 밀당이 한창 진행 중이던 7월 6일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로버트슨 차관보는 이렇게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 역사에 관해 철두철미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그는 대통령이 협상한 조약을 상원에서 반드시 비준(批准)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이 미국에서 대중적 지지를 잃어 그 이유 때문에 상원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동의할지에 약간의 의문을 갖고 있다. 이승만이 크게 우려하고 있는 바는 방위조약 없이는 한국이 다른 어떤 강대국의 먹잇감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 같은 그의 입장 때문에 현재 상황이 장래에 조약이 없을 시기를 맞아 생길 수 있는 상태 때보다 더 강하다고 그는 판단한다.”
이승만 대통령이 협상 상대자인 미국의 정치시스템에 능통해 있고, 약자(弱者)이면서도 한국이 갖고 있는 유리한 조건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시점이 언제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결국 8월 8일 아침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변영태 외무부 장관과 덜레스 국무장관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 21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994년 체결한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양해 각서’에 따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했다.
‘부다페스트 각서’는 구(舊)소련이 우크라이나에 남긴 약 1800개의 핵탄두를 러시아로 넘기는 대신, 미국과 영국, 러시아 3국이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과 정치적 독립을 약속한다는 내용의 각서다.
문제는 이 ‘부다페스트 각서’가 글자 그대로 ‘각서(memorandum)’이지, 정식 조약(treaty)이나 협정(agreement)이 아니어서 국제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데 있다.
우크라이나는 꼴랑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 국경선을 존중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력 사용을 자제한다”는, 그나마 “상황이 변하면 각서 내용을 다시 협의할 수 있다”는 문구까지 있어 이 각서에 서명한 강대국들이 얼마든지 빠져 나갈 수 있는 종이쪼가리에 자기들의 운명을 맡겼다가 지금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서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만약 침략이 일어나면 참전 16개국이 돌아올 것”이라는 미국의 공허한 약속만 믿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면, 핵으로 무장한 북한 앞에서 지금 대한민국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아울러 문재인 스스로도 “필요하면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고 공언했던 종전선언이란 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 문재인이 그렇게 목을 매었음에도 종전선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대국민성명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며 우리의 안보를 확보해줄 것이다.”
그 후의 역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말대로 전개됐다. 종이쪼가리 하나에 우리의 운명을 맡기지 않고, 고심참담한 투쟁 끝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누리는 번영과 안보를 확보해 준 노(老)대통령의 혜안에 마음에서부터 감사하게 되는 아침이다.
배진영 월간조선 기자
(현재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