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미학(美學)을 위해
지난겨울부터 어둡고 침울한 터널에 갇혀있었다. 큰 병원을 오가며 시간을 보냈다. 고질병처럼 여겨왔던 피부 부위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다행히 주위 분들의 기도에 힘입어, 몇 달 동안 병원 신세를 진 덕분에, 이제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 낯선 경험에서 어떤 교훈을 얻게 되었을까? 첫째 환자 편에서 돌아보면, 너무 안이하게 대응한 대가를 때늦게 치렀다. 근원적인 치료를 받기보다, 종합병원을 찾는 것이 너무 복잡하고 시간이 소요된다는 게으른 이유로, 편하게 동네 의사의 처방에 따라 임시방편으로 모면한 것이 문제였다. 둘째 동네 의사의 무책임한 의료행위였다. 아예, 환부를 제대로 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부작용이 강한 약 처방으로 증상을 악화를 시켰다. 상태가 심각해지자, 소견서를 써주며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그곳 큰 병원 담당 의사의 일성은, “연고 바르지 마세요. 그 대신 로션(body lotion)을 바르도록 하세요. 여기 왔으니, 이제 됐어요”라는 확신에 찬 일갈이었다. 그 후 십여 차례의 조직검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자, “죽게 될 병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안심시켰다.
이처럼 게으른 환자와 무관심한 의사 커플의 행위가 빚어지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례가 육신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레 자신의 영적 상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교회는 다녔지만, 그저 습관적으로 안이한 종교 행위만을 일삼지 않았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과연 그분의 말씀에 따라, 온전히 자신을 그분에게 맡기며,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크리스천이었는지? 이러한 확신이 서지 않을 때는 미몽(迷夢)에서 깨어날 수 있는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경우를 보며 깨닫게 되었다. 스스로 변화를 감당할 수 없으면, 마치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환자처럼 외부의 충격적인 힘에 의해서라도 자신의 영적 위기의식을 절감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비록 그 변화에 고통이 따르더라도. 육신을 치료할 종합병원과 같은 영혼의 피난처를 찾아야 한다.
이 같은 영적인 위기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피난처는 어디일까? 이런 사람들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무엇일까? 단순히, 길흉화복을 다스리는 위로의 말씀일까? 아니면 자신의 처지에 공감을 보내는 세련된 언어일까? 이처럼 위로와 공감의 언어에 안주한다면 우리의 믿음의 수준은 안이한 환자와 책임의식 없는 의사의 사이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머무를 것이다.
이제 이 같은 상황을 우리 공동체에 대입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 공동체는 갱신공동체이고 공동체의 정체성은 개혁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개혁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히브리서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 하셨다. 여기에 더하여, “때가 오래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을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구별하는 자들이니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갱신공동체의 햇수가 10년이 넘어가자 남은 성도님들의 평균 연령이 한해 한해 높아가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이뿐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개혁의 피로감이 누적되어 단단한 음식보다 부드럽고 연한 것에 쉽게 익숙해질 수 있다.
언젠가는 석양의 그림자같이 이 땅을 지나, 우리 나그네의 길 끝에서 기다리시는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러하기 전에, 더는 감성에 호소하는 위로의 말씀이나 생활 주변에 일어나는 가벼운 이야기에 관심을 두기보다 남은 생애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사모하기를 힘쓰는 공동체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다. 힘이 들지라도 단단한 음식을 오래 씹으면 제맛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나라에서는 고령자 한 사람의 가치를 도서관 하나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그만큼 그분들의 폭넓은 인생 경험과 경륜을 높이 사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 도서관에는 말씀의 배경이 되는 인류 역사와 문화를 비롯하여 모든 시대 상황의 기록이 축적되어 있으므로 누구나 바른 말씀을 이해하는 길잡이가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 공동체에서도 연로하신 성도님들 각자가 자기 이름을 내건 도서관 역할을 담당했으면 좋겠다. 혹 축적된 자료가 그리 많이 없으신 분들은 후배들에게 책을 볼 수 있는 쾌적한 공간이 되셔도 바람직하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그러한 도서관을 관리해주시며 도우시는 신실하신 사역자분들이 곁에 계신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다가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여 우리 공동체가 올바른 말씀의 토대 위에서 한국교회의 갱신과 개혁의 역사를 한 페이지라도 남길 수가 있을 것이다.
그 도서관들은 스스로 자기를 알릴 필요가 없다.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은은한 향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 도서관들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해군 원수, 체스터 니미츠(Chester William Nimitz, 1885-1966)가 노년에 드린 기도 내용 첫 부분에 공감할 것이므로 더욱 아름답게 빛을 발할 것이다.
“제가 늙어가며 말이 길지 않게 해주시고, 할 수 없이 어느 자리에 참석했을 때 꼭 한마디를 해야겠다는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해주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