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눈이 없었다. 흔히 대성리 바깥 미술전(이하 대성리전)이라 불리는 바깥미술회의 북한강전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에 스치듯 지나가는 흑백사진 같은 풍경 속에는 으레 눈이 있었다. 그 곁에 기차 소리가 있고,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서러워지는 북한강이 있었다.
▲ 리을무용단의 퍼포먼스
겨울 강은 유난히 추웠고, 그 찬바람으로라도 식히지 않고는 배기기 어려운 열정을 지닌 이들이 경춘선 철마에 몸을 싣고 이곳으로 모여들곤 했다.
1981년 따스하고 아늑한 음악이 흐르는 화실에만 머물던 미술을 이 황량한 강변으로 끌고 나온 이들이 있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이 되고, 견디기 힘들던 시대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는 시구를 암송하던 이들은 스스로 이 황량한 강변의 바람을 찾아 모여 들었고, 서로의 언 가슴을 비비며 북한강가에 섰다.
▲ 강 건너의 카페촌을 소재로 한 문병탁의 '후벼 파기'
87년부터 96년까지 송내, 남한강, 신촌으로 옮겨가기도 했지만 바깥미술회의 겨울전은 정체 모를 그리움을 어쩌지 못하고 97년부터 다시 북한강 화랑포 강변으로 돌아왔다.
세월도 흐르고, 북한강변의 풍광도 많이 바뀌었다. 쓸쓸히 눈발에 덮여가던 겨울강 건너로는 카페며, 모텔이며 번화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 쓰레기 속에서 나오는 토우들(전동화의 '무제')
'적응과 저항 사이...'라는 주제로 열린 <2004 바깥- 북한강전>은 이러한 변화에 대한 작가들의 고민과 모색의 흔적이 역력했다. 인위적인 장치와 의도를 절제하며, 현장의 시공간 속에서 미학적 가치와 주제를 드러내려는 바깥미술의 정체성은 이제 '무위(無爲)'의 의미를 넘나들고 있다.
화려한 색채와 시각적 배려는 최소화되어, 작품 표지판이 없다면 찾아내기 힘들 만큼 강변의 풍경 속으로 잠겨버린 이번 전시작품들을 찾아 나서는 길은 즐거움과 함께 작가들이 지녔을 고심과 모색의 고통을 짐작하며 안타까움마저 느끼게 한다.
액막이와 화복을 기원하던 세시풍속 '제웅 만들기'와 모두골의 열림굿으로 시작된 개막식은 이어서 리을무용단의 강변에서의 퍼포먼스로 이어지고, 작가 김광우의 '비움, 채움'이라는 행위예술 시연으로 시작되었다.
▲ 최용대의 'from nature'
무성하던 여름풀들은 덤불로 낮게 엎드려 있고, 바람이 지날 때마다 강변의 억새들은 수군거렸다. 그리고 여기저기 떠밀려온 쓰레기들이 주인을 잃은 채 버려져 있는데, 작가들은 그러한 황량한 덤불과 쓰레기를 이어나가는 작업에 몰입한 듯하였다.
▲ 최운영의 '어디선가 날아든 콩깍지'
예술이란 무엇일까. 자연의 모방이라는 원론적 미학을 넘어, 새로운 자연의 창조라는 인위적 논의를 포함하더라도 결국 그 중심에는 인간이 있으며, 작가의 의도와 관점을 비켜날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의 틈새에서 이제 도가의 '무위(無爲)'의 미학에 사로잡힐 작가들이 선택할 수밖에 없을 '적응과 저항 사이'에서 때로 좌절하기도 하고, 때론 분노하면서 표현해내는 이 겨울의 비극적인 미학은 어디로, 언제까지 이어져 갈 것인가.
▲ 양상근의 '현대인의 모습' 일부
쉼없이 흐르는 북한강도 수다한 댐에 길을 잃고 갇혔다가 옹색한 수문을 지나 이곳에 흐르고 있지만, 결국은 어디로인가 흘러가고 있는 강물을 바라보며, 작가들은 강이 얹고 와서 이곳에 분노처럼 뱉어 놓은 쓰레기들을 어떠한 심경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
두 나무 밑에 한쪽은 강가의 자갈돌을, 한쪽에는 강물에 떠내려온 쓰레기들을 쌓아둔 배수관의 '문명과 자연'이라는 첫 번째 작품에서 나는 지금의 대성리전이 어디에 와 있으며, 무엇을 바라보고, 고심하는가를 헤아려 보았다.
▲ 김언경의 '강변에 서서'
자연을 있는 그대로 놓아두며, 인간을 단순한 감상자의 입장에 놓아 둘 때, 예술은 과연 어디에 가 있을까. 설령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 할지라도 강물이 싣고와 내려놓은 쓰레기들의 이 자연스러운 실체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보이지 않는 곳에 말끔히 치우고 아름다운 꽃들로 겨울강들을 꾸며볼까.
깨어진 빙과냉장기의 유리창과, 찌그러진 음료수 페트병과, 진흙물이 든 옷가지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큰물에 떠밀려온 뿌리 뽑힌 나무의 등걸과 덤불을 머리에 얹고 있는 나무들을 자연의 실상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그런 왜곡되고, 오염된 자연들 뒤에 숨은 인간의 욕망의 부질없음을 겨울 강은 말없이 깨우치고 있지만, 또 그 위에 분홍빛 꽃을 달고, 진흙으로 빚은 닭과 물고기를 얹는 마음은 이제 대성리전에게 끝없이 물음을 던질 것이다. 적응과 저항 사이에서, 이제는 별로 찾는 이도 없고, 눈마저 내리지 않는 겨울 강가에서 작가들은 여전히 언 손을 비비며 그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가고 있다.
▲ 유재흥의 '잃어버린 꿈'
올해 대성리전의 주된 공간이었던 북한강 화랑포에는 철망이 쳐져 있다. 사유지의 경계를 확인하는 철망이다. 억새 덮인 좁은 강가의 길은 가평군에서 만들려는 자전거길이 곧게 닦이게 되었고, 어쩌면 더 이상 우리는 대성리전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대성리전의 참 맛은 쨍쨍거리며 어는 강과 볼을 에이는 찬바람 속에서 언 땅을 곡괭이질 하던 그런 추위가 제격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날로 푸근해져가는 이상고온의 겨울처럼, 우리는 이제 가슴을 시리게 하던 그 황량한 겨울 강가의 풍경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될 지도 모른다.
▲ 이호상의 '火'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은 작가들이 개막식에 참여하였다. 어느 덧 대성리전의 본부 격이 된 비원 식당에서는 그동안 대성리전을 이끌어 온 선배작가들과 후배 작가들의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몇 해째 술자리를 함께 하며 대성리전을 지켜본 필자로서도 감회가 깊거늘, 작가들의 심경이야 오죽할까.
교통사고를 당하여 네 달째 병원에 누워 있던 작가가 목발을 짚고도 전시회에 참여한 그 마음이 화려하고 정교하며, 야단스런 의도만 높여대는 요즈음의 세태에서 비록 찾는 이 적은 겨울 강가일망정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지나는 바람이 무심코 앉아 있음직한 '나무 의자' (임충재 작)에 가만히 앉아서 저무는 겨울강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임충재의 '나무-의자에 대한 생각'
이 글을 쓰는 지금, 뒤늦게 눈이 내린다.
아련해지는 기차 소리를 들으며 톱밥난로 가에서 밤새도록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알 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못 이겨 강가로 나서면, 눈발에 희미하게 지워져가던 겨울 강을 만나던 기억을 벌써 그리움으로 채워두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오랜만에 기차에 몸을 싣고 겨울 강가로 가 보자. 그리고 거기 '호밀밭의 파수꾼'처럼 서서.
볼 것이 없다면 아무 것도 보지 않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소중히 하자. 때로 우리는 겨울 강처럼 고요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대성리전을 위해, 그 동안 애쓴 작가들에게 시 한 편을 전한다.
...눈물도 없이 떠나는구나. 고뇌는 깊을수록 반짝이는 것. 우리가 더럽혀진 그 강변의 旅人宿 골방에서 보았던 아침을, 그 무표정한 희망들을, 나는 아무에게도 전하고 싶지 않다. 선로를 변경하고 달려나가는 열차에 올라, 너를 본다. 안녕이여, 여름 강이여. 다시는 내게 속삭이지 말아라. 네 깊고도 푸른 눈으로 나를 부르지 말아라. 안녕이여, 여름 강이여.
- 이시백 '여름강' 중 일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