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168)에 한나라 현도태수 경림(耿臨)이 침략해 와서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에 복속되기를 빌었다.
四年 漢玄郡太13)守耿臨來侵 殺我軍數百人 王自降乞屬玄
8년(172) 겨울 11월에 한나라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로 쳐들어 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은지를 물으니, 모두 의논하여 말하였다.
“한나라 군대가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가볍게 여길 것이니, 만약 나아가 싸우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를 비겁하다고 여겨서 자주 올 것입니다. 또 우리 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아, 이것은 소위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만 사람이 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비록 수가 많으나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군대를 내어서 막기를 청합니다.”
[명림]답부가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은데 지금 강병을 거느리고 멀리 와서 싸우려고 하므로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습니다. 또 군사가 많은 자는 의당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의당 지켜야 하는 것이 병가의 상식입니다. 지금 한나라 사람들이 군량을 천 리나 옮겼기 때문에 오래 견딜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며 들을 비워서 대비하면, 그들은 반드시 만 한 달을 넘기지 못하고 굶주리고 곤핍해져서 돌아갈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날랜 군사로 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은 그렇다고 생각해서 성을 닫고 굳게 지켰다. 한나라 사람들이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사졸들이 굶주리므로 이끌고 돌아갔다. [명림]답부는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뒤쫓아 가서 좌원(坐原)에서 싸웠는데, 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식읍으로 주었다.
6년(184) 한나라 요동태수가 군대를 일으켜 우리를 쳤다. 왕은 왕자 계수(須)를 보내 막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왕은 친히 날랜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나라 군대와 좌원에서 싸워서 이겨 벤 머리가 산처럼 쌓였다.
六年 漢遼東太5)守興師伐我 王遣王子須拒之 不克 王親帥精騎往 與漢軍戰於坐原 敗之 斬首山積
한나라를 대파한 명림답부의 청야전술은 대군을 상대할 때만 효과적입니다. 먹을 입이 많으니 적을 굶주리게 하는 거죠.
잔익하고 비겁하다고 할 수 있지만 무모하게 대군을 상대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입니다.
당시 후한의 중앙정부는 환관들이 장악했지만 현도태수 경림은 좌원전투가 일어나기 4년 전에 이미 고구려를 침공해 이긴 적이 있습니다.
신대왕이 그에게 항복하려 했을 정도라면 분명 뛰어난 장수임에 틀림없어요.
그러한 경림이 한나라의 대군을 이끌고 왔으니 성 밖으로 나가 싸우기보다 성을 굳게 지키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청야전술의 단점은 자국의 영토를 황폐화시켜야 한다는 점..백성들을 설득시켜 성안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쉽지 않구요.
청야전술을 남용해서 자국이 전쟁터가 되면 곤란하므로 기회가 생기면 선수를 쳐서 타국의 영토를 점령해 전선지대를 옮기는 것이 좋습니다.
고구려가 농성전을 아주 잘한다는 건 그만큼 성의 구조를 잘 알고 충분히 활용했다는 것인데..
적의 성을 공격할 때도 고구려인이라면 어떻게 해야 점령할 수 있는지 잘 알지 않을까요.
위나라의 학소(진창성에서 3천의 적은 병력으로 20일 동안 제갈량의 맹공격을 막아낸 장수)가 고구려의 수성전을 보았다면 아마 혀를 내둘렀을 것 같군요.
수나라와 당나라의 대군도 막아냈으니 성벽을 사이에 두고 싸우는 전투만큼은 고구려가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구려는 소수의 기병으로 다수의 보병을 압도하는 기마전술도 잘 구사합니다.
고구려는 농경문화와 유목문화가 결합되어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전투에 능한 나라입니다.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도 반농반목을 하는 민족입니다.
좌원전투는 전통적으로 인해전술을 즐겨 쓰는 지나족과 소수정예를 선호하는 동이족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양과 질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고구려 국상 명림답부에 이어 12년 후 고국천왕이 친히 기병대를 이끌고 또다시 좌원에서 한군을 대파합니다.
삼국사기에서 고국천왕이 명림답부처럼 청야전술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 보면..
고국천왕이 상대한 한나라 군대는 12년 전에 비해 병력이 적어서 농성전을 할 필요가 없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172년과 184년에 고구려가 좌원에서 한나라에게 두 번이나 이겼으니 한나라가 고구려의 군사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된 건 분명합니다.
꼬리말 쓰기
구려 참..고국천왕의 좌원전투가 일어난 184년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군요. 결국 한나라는 나라 안팎에서 타격을 입고 국력이 쇠퇴하니 군웅할거 시대가 도래할 수밖에.. [2005/02/06]
구려 고려의 명장 강감찬도 청야전술을 써서 퇴각하는 요나라를 추격해 구주(龜州)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중원 국가들은 항상 고구려 영토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산성들의 복잡하고 견고한 방어망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참패를 당했음. 반면 한니발은 로마의 지구전에 말려들어 이탈리아 반도 안에 갇혔으나 자국의 지원 없이 15년이나 버티어 냈죠. 산성을 쌓은 고구려와 도로를 건설한 로마는 서로 다르지만..
윗글 중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군요.출처가 어딘지 모르나, 고구려의 군사력과,특히 경제력의 취약을 언급한 것은 무슨 근거로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막말로 반농반목 호구기록도 지극히 단편적이고 그리고 조선시대처럼 사료가 남아있어 조세의 규모도 모르지 않습니까.학설이라지만, 강단이나 재야나
추측과 상상을 단정화하는 걸 경계 해야겠지요.구이넷 게시판만 하더라도 논객.이 쓴 글이 아닌 다른 일반인들이 쓴 글을 보면 기가 막히지요.귀여니소설급 이더군요.-_-.미꾸라지가 도랑물 흐린다더니..좌원전투에 대해 글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극심한 사료부족이라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는군요.
강단학계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들은 겁니다. 고구려는 경제강국이 아닌데 청야전술로 인해 국가재정이 파탄났다고, 문화국가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스파르타처럼 넓은 영토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군사국가라고 하더군요. 고구려 산성들이 중국의 만리장성에 비하면 아주 적절한 방어체계였다는 건 인정했습니다.
선비족의 전연이 중원에 진출하기 전에 후방단속(?)을 위해 고구려를 침공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음..전연의 기병 1만여 명이 고구려 땅 깊이 파고들다가 퇴로가 막혀 전멸당했으나, 어느 학자는 실제로 전멸이 아니라 일부 부대가 살아남아 신라의 김씨 왕조를 세웠다고 주장함(저도 이 설에 공감함)
첫댓글 유목민 상대로 이짓했다간 자폭일겁니다.
중원 국가들은 항상 고구려 영토로 깊숙이 들어갔다가 산성들의 복잡하고 견고한 방어망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참패를 당했음. 반면 한니발은 로마의 지구전에 말려들어 이탈리아 반도 안에 갇혔으나 자국의 지원 없이 15년이나 버티어 냈죠. 산성을 쌓은 고구려와 도로를 건설한 로마는 서로 다르지만..
윗글 중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군요.출처가 어딘지 모르나, 고구려의 군사력과,특히 경제력의 취약을 언급한 것은 무슨 근거로 그랬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요.막말로 반농반목 호구기록도 지극히 단편적이고 그리고 조선시대처럼 사료가 남아있어 조세의 규모도 모르지 않습니까.학설이라지만, 강단이나 재야나
추측과 상상을 단정화하는 걸 경계 해야겠지요.구이넷 게시판만 하더라도 논객.이 쓴 글이 아닌 다른 일반인들이 쓴 글을 보면 기가 막히지요.귀여니소설급 이더군요.-_-.미꾸라지가 도랑물 흐린다더니..좌원전투에 대해 글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극심한 사료부족이라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는군요.
'귀여니' ... <- 이사람 소설 이란거 사람들한테 먼내용인지 얼핏듯지만... 늘같은 시나리오입니다. ㅡㅡ; 평범한 여자가.. 아주특별한남자 만나는 전형적인 신데렐라 스토리... 솔직히 역겹습니다. 옜날에 저희 학원선생이 제목보자마자 징그럽다고 던지시더군요..;; 그것도여자분이;;
강단학계의 이론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들은 겁니다. 고구려는 경제강국이 아닌데 청야전술로 인해 국가재정이 파탄났다고, 문화국가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스파르타처럼 넓은 영토에 비해 인구가 부족한 군사국가라고 하더군요. 고구려 산성들이 중국의 만리장성에 비하면 아주 적절한 방어체계였다는 건 인정했습니다.
선비족의 전연이 중원에 진출하기 전에 후방단속(?)을 위해 고구려를 침공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음..전연의 기병 1만여 명이 고구려 땅 깊이 파고들다가 퇴로가 막혀 전멸당했으나, 어느 학자는 실제로 전멸이 아니라 일부 부대가 살아남아 신라의 김씨 왕조를 세웠다고 주장함(저도 이 설에 공감함)
장수왕은 그리고 선왕때 부터 고분고분한 신라를 정벌할 이유를 느낄 필요가 없었고... 또한 백제는 원수의 나라이지만 멸망시키기에는 인구.경제로 봐서 우위로 칩니다.
고구려가 대륙국가로서 남수북벌(南守北伐)정책을 중시한 건 납득이 가지만..만일 정반대로 남벌북수(南伐北守)를 추진했다면 어땠을까요..백제가 고구려와 맞먹는 강국이라 어렵지만 신라를 멸하고 내실을 다진다면 고구려의 국력 상승에 큰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릅니다.
고구려인들은 자신이 "천하의 중심이다" 라는 이론으로 나라를 발전시켰고, 게다가 나라또한 큰 대국이니, 신라, 백제를 속국으로 삼은 것입니다....그런데....고구려가 경제강국이 아니라는 것은 무리인듯 합니다.
신라와 백제는, 말 그대로 고구려의 속국이었습니다. 백제 신라 모두 영락제 재위시절에 항복을 한 적이 있지요. 게다가 백제는 장수왕에 의해 멸망하고, 문주태자가 웅진백제를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