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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이 갔네요 3 - 왕정의 미래
2회로 쓴 ‘여왕이 갔네요’를 한 번 더 늘립니다. 오늘 (9/19)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영결식이 열리고 여왕은 윈저성의 성 조지 채플의 지하납골당에 남편 필립공과 영면에 들어가기까지 장면을 보면서 떠오르는 게 많네요. 백만에 이르는 조문객들의 슬픔과 애틋한 모습 저 뒤로 왕정이란 시대착오적인 정치제도가 과연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인가라는 의문이 솟구칩니다. 찰스와 카밀라 간의 ‘특별한 사랑’은 영혼의 동반자(soul mate)를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일 겁니다. 그리나 찰스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카밀라를 다시 찾았으니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운구행열을 따라가 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들어 갈 때 입구 바닥에 넓적한 유리판이 보이지요? 무명용사의 무덤입니다. 1차 대전 중 서부전선에서 죽은 이름 모를 한 사병을 2년 후인 1920년 11월 11일 종전일에 사원 입구에 묻어 우리의 국립묘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외국 원수들이 여기에 조문을 하죠. 여왕의 운구 행열도 여기를 비껴가더군요. 묘지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비석 아래에
이름도, 계급도 알 수 없는
한 영국 용사가 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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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년의 대전쟁에서
하느님을 위해
국왕과 국가를 위해
사랑하는 자들의 고향과 대영제국을 위해
신성하고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세계의 자유를 위해
사람이 바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생명을 바친
수많은 자들을 기린다.
모든 전쟁은 자기들의 관점에서는 ‘정의로운 전쟁(just war)’임을 잘 보여 줍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전이니 1차 대전이란 표현은 없고 유럽역사에서 그때까지 겪어보지 못한 ‘대전쟁(the Great War)’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세계의 대도시 중 변화가 거의 없는 도시 중 하나가 런던일 겁니다. 1960년 런던에서 공부한 분이 10년 뒤에 런던에 와서 변한 것 하나도 없다고 하더군요. 물론 지금은 높은 빌딩이나 바비칸 센터와 같은 대형 극장이 여럿 생기고 London Eye라는 요상스러운 수례모양의 관람차도 생겼습니다만, 30년 넘게 런던 구경을 못해본 내가 운구행열을 따라가 보아도 거의 알겠더군요. Hyde Park Corner에 있는 Wellington Arch에서 행열이 잠간 멈춘 뒤 최종 목적지인 윈저 성으로 가군요. Hyde Park Corner는 파리의 개선문 광장같이 도로가 장방형으로 뻗쳐 있어 이곳을 잘 빠져 나오면 운전시험은 OK라는 곳이죠.
여왕의 마지막 행차를 보면 권력과 명예, 부를 모두 가졌다는 진부한 생각이 누구나 들 겁니다. 평생 사용하던 전용열차로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마지막 여행도 했으니까요. 윈저 성 부근 조그만 교회에서 쓴 Thomas Gray의 시 ‘엘레지(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 1742년 작)’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The boast of heraldry, the pomp of pow'r,
And all that beauty, all that wealth e'er gave,
Awaits alike th'inevitable hour:
the paths of glory lead but to the grave.
자랑할 만한 가문, 화려한 권세,
그 모든 아름다움과 그 모든 재산도,
피할 길 없는 시간은 똑같이 기다리고 있나니.
-영광의 길이 이르는 곳은 무덤일 뿐이라.
번역된 게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4구절이지만 단어 중간에 (’)가 여럿 있는 것은 시의 운을 맞추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뻔쩍거리는 옷을 입고 메달을 치렁치렁 달아 명예를 자랑하고 명마 위에서 전공(戰功)의 뻐기며 잘난 척 해도,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그래서 모두를 똑 같이 기다리는 것은 무덤뿐이겠죠. 여왕이라고 해서 다를 게 있겠나요?
버킹검 궁 앞 광장에 빅토리아 여왕 기념탑(Queen Victoria Memorial)이 있습니다.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여왕이죠. 생몰연대는 1819-1901, 재위기간은 1838-1901, 장수하고 장기간 왕좌를 지킨 뒤 1901년 서거합니다.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사망하면서 대영제국의 몰락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정확히 말해 영국이나 유럽 열강들의 국력은 1890년대 이미 미국에 추월당했지만 미국이 군사적 패권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이 2차 대전에서 the Big Three의 일원으로 나치독일을 패배시키는데 큰 기여하지요. 1956년 수에즈 운하 사건을 계기로 미국과 소련에 뒤지는 세력으로 평가됩니다.
빅토리아 여왕의 가계도를 보면 화려하기 짝이 없습니다. 독일 귀족 앨버트 공(Prince Albert of Saxe-Coburg Gotha)은 작센 지역 귀족으로 사촌인 빅토리아와 결혼하여 4남 5녀를 둡니다. 이들의 가계가 유럽전역을 뒤덮습니다. 장녀에서 독일황제 빌헤름 2세, 그리스 왕비, 그리스 국왕, 루마니아 왕비 등이 나오고, 장남은 영국왕 에드워드 7세, 이번에 서거한 여왕 및, 놀웨이 국왕 등등.... 러시아 황제, 황후, 스웨덴 국왕, 스페인 왕비, 덴마크 여왕.... 그러고 보니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혼인이 없군요. 마치 한국 재벌들이 혼맥이 얽히고설킨 것 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요?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 전 세계에 왕정이 아닌 국가가 얼마나 될까요? 강대국 중 프랑스와 미국뿐이었습니다. 중남미 국가들은 미국의 영향으로 공화정을 채택한 국가들이 몇몇 이었겠지요. 지금도 유럽에선 왕족이나 귀족들은 특권은 모두 박탈당했으나 여전히 공작, 공주, 백작 등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일반인들도 이같은 호칭을 별다른 부담 없이 받아들이지요. 인간의 의식이 현실의 변화와 완전히 발마추어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일 겁니다. 미국과는 다르죠. 미국은 공작, 후작,혹은 박사 등도 모두 Mr 아니면 Ms로 부르는데....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했을 때 온 유럽의 왕가들이 런던에 총집결했습니다. 토마스 그레이가 풍자한 대로 온갖 품 잡으면서 빅토리아의 추모를 빙자하여 ‘왕정이여 영원하라’고 외쳤던 겁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마지막 잔치로 스쳐가는 한 순간(a fleeting moment)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14년이 지나지 않아 유럽은 1차 대전이란 미증유의 대 재난에 휘말리면서 왕정은 추풍낙엽같이 몰락했지요.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는 황제의 일가가 모두 볼세비크에 의해 총살당해 명맥이 끊겠고, 유럽을 호령하던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 황제는 퇴위, 독일의 호엔촐레른 황제도 퇴위하여 왕정이 유지되는 이웃 국가에 몸을 위탁합니다. 대륙에서 빅토리아의 일가는 권력의 정상에서 이렇게 하나씩 종적을 감추게 되는 겁니다. 이번 장례식에 나머지 왕실의 인물들은 평상 조문복장을 해서인지 보이지 않고 일본의 나루히토 천황만 보이더군요. 외국 조문객들은 바이든이나 윤석열대통령 조차 BBC가 아니라 한국 TV에서 보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여왕의 서거 후 영국왕실은 유지될까요? 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여왕을 애도하는 분위기가 왕정/왕실 지지로 이어질까요? 영국인들은 냉정하고 이기적입니다. 1945년 5월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은 국민적 영웅으로 환대받았지요. 종전 직후 치러진 선거에서 그가 나타나면 온 국민이 환호하여 누구나 처칠의 보수당이 승리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처칠도 1945년 7월 포츠담 회담에서 선거 결과를 보기 위해 ‘잠시’ 런던으로 돌아갔다 오겠다고 했는데 이게 마지막이었지요. 영국민들은 처칠의 보수당이 아니라 애틀리의 노동당을 택했던 겁니다.
왜 그랬을까요? 처칠은 프랑스가 항복하고 미국의 참전하기 전인 전쟁 초기 강력한 리더십으로 영국 단독으로 전성기의 나치독일에 맞서 말 그대로 고군분투 했습니다. 정말 그의 연설대로 프랑스가 항복한 마당에 독일군이 처들어오면 해협에서 싸우고 해안 모래사장에서 싸우고 또 본토에서 그리고 대서양에서 싸울 것이고 아니면 캐나다에서 싸울 것이라고 울부짖었습니다. TV가 없던 시절 그의 연설은 지금 들어도 피가 용솟음치게 만드는 기분입니다. ‘우리는 국민들에게 줄 것이 없다. 단지 피와 땀과 눈물(blood, tears and sweat)를 요구한다.’ 독일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시대가 필요한 것은 피와 철’이라는 연설을 약간 패러디한 것 같지요.
그러나 그는 태생적으로 귀족이며 제국주의자였습니다. 말보로 공작의 차남의 아들로 지하벙커에서 아침에 늦잠을 자고 시가를 물고 고급요리를 즐기며 두드리기가 난다면서 실크가 아니면 내복을 입지 않고 등등.... 그러나 이것은 국민들이 모르고 또 전쟁수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이죠. 문제는 전쟁 중 그가 보인 전후 구상입니다. 그가 2차 대전에 뛰어든 이유는 첫째, 대영제국과 식민지를 유지하며, 둘째, 영국외교정책의 전통에 따라 유럽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민지 유지를 두고 미국과 쉴 새 없이 싸웠지요. 혹자는 영국 식민지가 해방되면 가난한 이들은 미국의 품으로 들어갈 것이 아니냐고 처칠을 옹호하지만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지요. 루즈벨트와 오래 이야기를 한 다음 런던에 와서는 ‘나는 대영제국을 해체하기 위해 수상이 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여 미국은 물론 중국, 인도, 버마 등을 분노케 합니다. 장개석은 처칠이 개조되지 않은 제국주의자라는 혹평을 남기죠. 대영제국은 종전 후 곧 식민지가 하나 둘 씩 독립하면서 영연방(British Commonwealth)라는 껍데기만 남습니다. 유럽의 세력균형은 소련을 막기 위해 미국을 끌임으로써 유럽이 양 강대국 중간에서 볼모(pawn) 신세가 됩니다. 처칠의 구상은 참담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 덧붙인다면, 영국인들은 전후복구를 위해 처칠의 보수정책이 나라를 부흥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총리에서 물러난 처칠에게 최고의 찬사를 아까지 않지요. 트러만 ‘대통령’이 ‘야인’ 처칠을 대학으로 안내한 것이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만든 것입니다.
한 개인의 업적에 대한 찬양과 그들의 장래에 대한 냉철한 통찰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지금 영국인들은 한 마음으로 여왕을 보냈습니다. 이제 이들은 현실로 돌아갈 겁니다. 왕실이 필요할까요?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넓은 관점에서 봅시다. 우리가 여왕 장례식에서 본 왕실 근위병 복장과 이들의 의전 등을 이제는 모두 박물관으로 보내버려야 할까요? 복장 하나하나가, 이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전통 속에서 형성되어 역사적 의미를 갖는 것인데, 이제 필요 없다고 버릴까요? 앤 공주가 해군복장을 하고 성추문 앤드류 왕자나 왕실에서 나간 해리 왕자는 평상복으로 나왔지요. 상복이 검은 것은 빅토리아 여왕시대 검은색 염료가 비쌌기 때문이랍니다. 장례식이라도 가장 비싼 것으로 치장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겠지요. 중국에서 한(漢) 시대 관복이 직위에 따라 정착되지 않았을 때는 가장 비싼 염료 남색(코발트색) 관복이 최고였답니다. 전통은 현실 속에서 변하며 같이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은가요? 그러기에는 돈이 너무 많이 드는가요? 우리가 경복궁, 대한문 앞에서 하는 근위병 열병식은 영국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게 아닌가요?
또 국가수반과 정부수반의 역할을 분리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면 한국이나 미국같이 한사람이 모두 장악해야 할까요? 내각 책임제에서 국가수반인 대통령의 역할이 어느 정도 효율성을 가질까요? 여왕이나 왕실이 국민 여론에 못 이겨 세금을 내고 억지로 자선사업에 몰두하는 모습이 국민들에게 모범이 될까요? 아니면 위선으로 비칠까요?
하이드 파크 잔디밭에 작품을 여럿 전시한 조각가 헨리 무어(Henry Moore)는 자기는 의식(ritual, rite)의 중요성 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우리가 느끼지는 못하지만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전통은 맹목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수정되면서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코 가벼이 볼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왕의 영결식을 보면서 70년을 봉사한 여왕을 보내는 영국인들의 애틋한 마음과 왕정의 장래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질지 궁금합니다.(2022.9.20.)
첫댓글 구교수님, 영국이야기 관심있게 읽었습니다.thank u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건강하시죠? 대학입학간 게 곧 60년이 됩니다. 종종 연락이나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