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요령부득의 작품을 현학적인 인문학 이론으로 변호해 온 현대미술은 무책임해 보일 뿐. 한 큐레이터의 나침반이 사라진 미술과, 여전히 대중에게 부정직한 평단을 향한 공격적 토로.
오래된 피아노와 그 피아노 다리 위로 덕지덕지 발라진 비곗덩어리…. 현대미술사에 있어 그 이름도 유명한 요셉 보이스(Joseph Beuys)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당시 난 그 ‘작품’이란 것 앞에서 한참을 멍히 서 있었다. 대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내 직업은 소위 남들이 말하는 ‘큐레이터’다. 화랑의 전시 기획에서부터 홍보에 이르기까지 전시에 관련된 모든 일을 하는 대한민국의 노동집약적인 직장인으로, 미술사와 미학, 예술학으로 통칭되는 미술 이론을 전공했으며, 일에 치여 잠시 휴학중인 대학원에서도 같은 공부를 하고 있다. 5년을 공부하고 이럭저럭 화랑에서 일한 지도 2년 반이 흘렀으니 아마도 일반인보다는 미술에 대해서 조금 더 전문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깊은 곳에서 여전히 날 괴롭히고 있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나는 그림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림을 모른다는 것은 그림에서 한 번도 감동을 받은 적이 없다는 의미이며, 그렇게 본다면 난 그림에 대해선 별 할말이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이런 아이러니는 나의 특수한 상황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애초에 난 미술 쪽 혹은 그 비슷한 일을 하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어찌어찌하여 난 홍대로 진학하게 되었고, 일단 진학하게 되자 대학 4년 내도록 전시회를 봐야 한다는 압박감에 눌려야만 했다. 그렇게 엄청난 의무감으로 인사동을 배회했지만 내 영혼을 흔들어 놓을 그림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난 온 인생을 미술에 건 동기들 틈에서 일종의 죄책감 같은 감정을 느끼며 그림에 정말 ‘관심’을 가져보기로 맘먹었었고, 그 미술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감동 속에 기꺼이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다만 필요했던 건 무지한 나를 밝혀줄 작은 반딧불 같은 작품‘한 점’이었다. 하지만 그런 과정 속에서 오히려 난 길을 잃고 헤매고 다녔다. 아무리 읽어봐도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글 자체만으로도 오리무중인 카탈로그의 서문과 - 그럴수록 온갖 뜻 모를 미학적 미사여구들로 가득 찬 - 전공자인 나로서도 난해하기 그지없는 비평문들에 말이다. 그리고 기획의도와는 전혀 맞아 떨어지지 않는 작품들로 채워진 기획전에도. 누군가‘미술은 아는 만큼만 보인다’라고 말해 현대미술에 당황해 하는 대중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듯이, 그 긴 대열에는 나 역시 고개 숙인 채 당당히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이 이쯤 되고 나면 삐질거리며 식은땀이 나기 시작한다.“어쩌면 난… 미술치가 아닐까?”이러한 불안감은 소위 전위적이며, 실험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일명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작품들과 요즘의 미디어 작품들 앞에선 경악으로 바뀌고 만다. So What! 대체 이것이 뭐란 말인가? 과연 미술은 무엇인가?
애초에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던 작품으로 돌아가보자. 2차대전 중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로 종군하다 폭격으로 추락한 요셉 보이스를 발견한 크리미아의 타타르인들은 동물의 지방과 펠트천으로 그의 몸을 감싸주어 생명을 구했다. 피아노와 비계기름으로 구성된 보이스의 그 작품은 바로 자신의 체험과 삶에 연관된 오브제들로서 동물의 지방, 펠트천, 꿀 등은 요셉 보이스의 예술세계를 이끌어간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게 되며, 바로‘세상의 병리에 대한 치유’라는 개념을 대변하게 된다. 이렇듯 현실적인 삶과 연관된 모든 사고과정과 행위과정을 예술로 인식하고, 개념 예술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그는 자신으로 인해 확장된 예술개념으로 다음 세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의미 영역이 넓어진 예술적 지지대의 혜택을 누리는 후대의 작가들은 어떠한가. 누가누가 더 기발한가를 겨루는 듯한 요즘의 작품들을 보면서 정신은 잃어버린 채 다만 앙상한 현상만이 남았음을 목격하게 된다.
큐레이터로서의 일과에는 매일 책상에 어마어마하게 쌓이는 전시 카탈로그들을 해치우는 일도 포함된다. 나는 그 괴물들을 일일이 손으로 뜯어, 정리한 다음 꼼꼼히 읽어 내려간다. 하지만 현학적인 전시자료들을 읽을 때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대해서도 실토해야겠다. 나는 큐레이터로서 전시의 타이틀과 서문은 그 작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고 믿는다. 요즘처럼 작품들 간의 테크닉과 아이디어의 실험성이 비등비등하여 소위 ‘기준’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때는 단연코‘등불’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작가가 작품에 대해 긁적거려 놓은 작은 낙서에서부터, 심지어 무슨 유행처럼 대부분‘무제’라고 붙여놓은 제목에서도 난 그 작품에 대한 단서를 찾아내고자 한다. 현대미술에서‘사조’라는 것이 사라지고, 과거에 그림을 평가하던 많은 미의 형식적 기준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주요한 작품성으로 인정되는 것은‘개념’그 자체다. 그렇기에 더더욱 무제라고만 명기된 채 온갖 해괴한 짓거리들을 해놓은 작품들을 보면(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있음을 인정하는 바이다), ‘당신이 알아서 보시오’라는 무책임함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어쩌면 뭘 하고 있는지에 대해 작가 스스로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한다면, 너무나 지나친 독설이 될까?
모든 예술의 저변에는‘동기’라는 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감히 말하건대 진리다. 가장 고도의 이해와 지식적 감성이 필요한, 무엇보다 작가의‘개념’이야말로 핵심으로 평가받고 있는‘현대’미술에 접근하기 위해서는‘작가의 동기’또한 당연히 중요한 코드가 된다. 하지만 오늘날의 작가는 가장 기본적인 것에조차도 함구하고 있을 따름이다.‘현대미술’이라는 오아시스 없는 사막을 헤매는 대중을 인도하는 기본적인 나침반 하나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우린 그 난해함을 고백하는 것조차 죄스러워 해야만 하는 것인가?
어차피 작가는 작품 그 자체로 말하는 것이지, 작품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떠들 의무가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에 길 잃고 헤매는 대중들의 혼란은 나를 비롯한 큐레이터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게 지워진 임무가 작가와 대중 사이를 이어주는 거간꾼의 역할이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본다. 큐레이터들, 비평가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 틈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하는 우린 그 거간꾼으로서의 직무를 유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저 그런 작품들, 상업적 목적을 위해 혹은 개인적 친분 때문에 혹은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기 위해 그럴듯한 말로 포장하고, 그것을 유포하는 것으로 이러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지 않은가? 혹 아주 드물게나마 그것에 대해 물어오는 소수의 용감한 대중들에게 ‘에이… 사모님, 다 아시면서 뭘 그러세요’라고 말해 그들의 현학을 유도하거나, 혹은 퉁명스레 난해한 전문 용어들을 들먹거림으로써 알아서 주눅들게 하진 않았는가 말이다. 나중에는 심지어 작가들마저도 그렇게 날조되어 유포된‘허위’를 자신의 것으로 믿게 되는 희극과 같은 상황이 빚어지는 우리 미술 현실에서 과연 우린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언제부터인가 이런저런 비평문과 서문에는 수많은 철학적, 인문학적 이론들을 가지고 그림을 텍스트화한 해석들이 등장하고 있다. 물론 시도 자체는 평가받아야 할 일임에 틀림없지만, 문제는 그 내면에 흐르는 현학적인 무드는 논외로 치더라도, 그 시도 자체가 텍스트로 받아들여져 나를 포함한 사이비들에 의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어 떠돌아다닌다는 점이다. 정작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애초의 진리에서 한참 벗어나 가짜들이 판을 치는 바, 이런저런 전문용어가 그럴듯하게 들어간 전시의 서문은 실상 작품과는 별 상관없는, 혹은 오히려 오도하는 미문으로 가득 차 있게 마련이다. 그 엉터리 같은 시도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사상가로 정신분석학자 라캉과 언어학자 소쉬르 혹은 푸코와 같은 어마어마한 석학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감히 누가 그 명성에 딴지를 걸 수 있으리오? 대학 초년시절,‘미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해 순진한 나를 절망으로 밀어넣었던 그런 협박도 이젠 이러한 엉터리 같은 확대와 재생산의 순환적 시스템을 능히 이용하게 될 줄도 아는 나에겐 별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이쯤에서 못박아야겠다. 시대를 앞서가는 진정한 에술품들은 그 시대에는 이해되지 못했다는,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논지에는 해당되지 않는 고언을 들먹이는 것은 이제 그만두고, 각자의 무지에 대해 인정하고 그리고 아주 겸허하게 원래의 임무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것을 조심스레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쭈뼛쭈뼛 묻는다. “그림을 어떻게 보면 될까요?”그러면 난 대답한다. “내 방에 걸고 싶은가, 아닌가를 생각합니다.” 잠시 잠깐 황당스러워한 후에 비로소 빙그레 안도의 미소를 짓는 그들을 보며, 2년 전 지성계에 풍파를 일으킨 물리학자 앨런 소칼이 일갈한‘지적인 사기’를 치는 혐의에서 벗어났음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난 그 이전 현학적인 미학용어를 주워 담으며 방자한 맘으로‘달력 그림’이라고 비웃었던 그들의 취향에 기꺼이 박수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난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방 한쪽에다 걸어두고 한 잔의 커피와 함께 은근한 즐거움에 빠질 수 있기를 바란다. 여전히 난 그림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만약 하나의 그림이 천 마디 말을 건네온다면 비로소 난 제대로 그림을 보게 된 것일 터이다. 이제,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