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2021.11.18.(목)수능영어 39번 지문
Cinema is valuable not for its ability to make visible the hidden outlines of our reality, but for its ability to reveal what reality itself veils ― the dimension of fantasy.
( ① ) This is why, to a person, the first great theorists of film decried the introduction of sound and other technical innovations (such as color) that pushed film in the direction of realism.
( ② ) Since cinema was an entirely fantasmatic art, these innovations were completely unnecessary.
( ③ ) And what’s worse, they could do nothing but turn filmmakers and audiences away from the fantasmatic dimension of cinema, potentially transforming film into a mere delivery device for representations of reality.
(3.1) As long as the irrealism of the silent black and white film predominated, one could not take filmic fantasies for representations of reality.
( ④ ) But sound and color threatened to create just such an illusion, thereby destroying the very essence of film art.
( ⑤ ) As Rudolf Arnheim puts it, “The creative power of the artist can only come into play where reality and the medium of representation do not coincide.”
*decry 공공연히 비난하다 **fantasmatic 환상의
첫번째 의구심
3.1 에 위치한 비현실주의(irrealism) 가 영화의 코어 즉 환상을 비유/함의 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두번째 의구심
무성영화시대의 영화들은 환상을 보여준다는 건가요?
( 지은이의 시점 과 루돌프 아르하밍의 시점에서 ,,,)
먼저, 초기 비평가(소리색에 부정태도 취함)와, 후발 비평가(소리색의 긍정태도취함) 가 있다고 한다면, 또한 지은이는 후발 비평가입장에 있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진다고 가정합니다.
3.1 은 지은이의 시점인듯하고, 초기 무성영화를 비판하는 말로 영화를 환상적으로 감상할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4번은 초기 비평가들의 시점으로 소리가, 영화가 추구하는 환상을 말아먹을것이며, 결국 영화의 본질을 말아먹게 된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4번의 such an illusion 에서 illusion 은 3.1 에서 irrealism 파에서 만들어 내는 환상과는 달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3.1과 4번이 역접내지 최소한 "anyway"로 해석되야 하기때문입니다.
3.1의 irrealism 과 4번의 illusion 이 비록 단어는 다르지만, 표면상 같은 '환상'을 지칭한다 하더라도 속뜻은 전혀 내지, 혹은 적어도 다른 의미의 환상을 의미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즉 서로 양쪽이 <상대편의 환상이 진정한 환상이 아니다>라고 하며, 실제론, 부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3.1과 4번이 누구의 시점인지 결정함에 따라 이 글에서 나오는 여러 <환상>에 준하는 단어들이, 진정 '환상' 이란 영화 본질로서, 영화가 찐으로 추구하는 바로 그 의미를 가질수 있는 자격이 있고/없고가 결정될것 같습니다.
4번의 but 가 완전 역접과는 사뭇 다르고,, 더구나 such an illusion 으로 삽입문제를 맞출수 있다는 의견들이 많은데. 글쎄요...음.. 만약 그 환상이 그 환상이 아닌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또한, 오히려 순환오류에 빠질수 있게 시점들이 다르게 글을 구성해 놓았다면, such an illusion으로 찾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히려, 복잡하게 생각안하고 풀게 되고 모로 가도 서울로 가면 된다는 식으로 답이 나올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찐으로 해석하면 할 수 록 글이 참 난해하다라는 생각과, 글 자체가 저자와의 대화를 통해서 궁금증을 풀고 확답을 듣고 싶은 구절들이 참 많은 지문 같습니다.
추가적으로 5번의 루돌프 아른하임은 어느 입장에 가까울까요?
초기 비평가 아니면 지은이나 후기 비평가의 입장?
현실/사실주의와 매체가 달라야 창의력(환상) 이 제 역활 한다라고 했으니,
초기 비평가 입장이 되야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무성영화는 아예 소리가 없으니, 아예 현실과 달라도 너무 다르니 말이죠...
그런데 해석들은 오히려 초기 비평가와 대척점에 있는듯 한 뉘앙스이 해석이 많은듯 한데..흠..
루돌프 아른하임씨 누구편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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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3.1 은 지은이의 시점인듯하고, 초기 무성영화를 비판하는 말로 영화를 환상적으로 감상할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라는 부분에서 근본적으로 take A for B를 오역하신 걸로 보입니다.
take의 근본 의미는 take 뒤에 목적어가 오는 타동사에서 "(목적어를) 가져가다/데리고 가다."이며, take 뒤에 명사 역할을 하는 것이 오지 않은 경우 자동사로서 go의 의미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ziXgNoxmxg ). A for B는 for가 교환의 의미로 쓰이므로 A를 B로 바꾸는 것이란 뜻이죠. 그래서 take A for B는 'A를 B로 착각하다, A를 B로 생각하다'의 뜻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3.1)은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3.1) As long as the irrealism of the silent black and white film predominated, one could not take filmic fantasies for representations of reality.
무성 흑백 영화의 비현실주의가 지배하는 동안은 영화적 환상을 현실에 대한 묘사로 착각할 수 없었다.
전반적으로 예술이란 것이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낮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즉 오히려 현실이 아님을 부각시키는 데서 예술적 효과를 낸다는 예술이론인데, 연극에서 연극 장치들이 연극 속의 상황이 현실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데 연극의 본질이 있다는 브레히트의 소외(alienation) 이론과도 연결되죠 - 개인적으로는 예술의 핵심을 호도하는 개 헛소리라고 봅니다만, 예술에 이런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Cinema is valuable not for its ability to make visible the hidden outlines of our reality, but for its ability to reveal what reality itself veils ― the dimension of fantasy. 영화는 현실 자체가 숨기는 환상을 드러내는 힘 때문에 가치 있다.
( ① ) This is why, to a person, the first great theorists of film decried the introduction of sound and other technical innovations (such as color) that pushed film in the direction of realism. 그래서 초창기의 위대한 영화 이론가들이 한 목소리로(to a person) 소리와 빛깔 등의 기술적 혁신을 도입하는 것이 영화를 현실주의 방향으로 밀어붙인다고 비난했다. <"위대한"이란 말에서 지은이가 누구 편인지가 나와있죠.>
( ② ) Since cinema was an entirely fantasmatic art, these innovations were completely unnecessary.
영화는 전적으로 환상의 예술이므로 이런 기술의 혁신들은 전혀 필요 없었다.
( ③ ) And what’s worse, they could do nothing but turn filmmakers and audiences away from the fantasmatic dimension of cinema, potentially transforming film into a mere delivery device for representations of reality.
기술적 혁신들은 영화제작자와 관객을 영화의 환상이란 차원에서 멀어지게 했다. 즉 영화가 현실로 재현할 수 없는 환상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현실의 재현하는 장치에 불과한 것이 되게끔, 잠재적으로 바꾸고 있었던 것이다.
(3.1) As long as the irrealism of the silent black and white film predominated, one could not take filmic fantasies for representations of reality.
흑백 무성 영화가 칼러풀하고 소리 있는 현실과 대조되어 있을 때는, 흑백 무성 영화의 환상을 칼러풀하고 소리나는 현실의 재현으로 착각할 수가 없었다.
( ④ ) But sound and color threatened to create just such an illusion, thereby destroying the very essence of film art.
하지만 소리와 빛깔을 영화에 도입하여, 흑백 무성 영화 시대의 환상을 마음속에 만들어내는 것을 못 하게 위협해서, 영화 예술의 바로 그 핵심인 환상을 파괴했다.
<인간의 망상력[환상을 만들어 환상에 빠지는 힘]이 이렇게 약하지 않지요. Maya[미혹/환상]는 Buddhi[지성/현실을 보는 힘]만큼 강합니다. 명백한 현실 앞에서도 끝까지 발뺌하며 거짓말과 망상/환상을 만들어 사람들을 세뇌시키려고 노력하고 국민의 30% 이상을 세뇌시키는 데 성공하는 사람들을 대한민국에서 너무나 많이 봐왔고, 다른 나라에서도, 동서고금의 역사에서도, 숱하게 봐왔지요-.-;;.. 여기는 (환상에) 미혹된/미혹당하고 싶어 환장하는 중생들이 득시글 거리는 윤회의 세상입니다.>
( ⑤ ) As Rudolf Arnheim puts it, “The creative power of the artist can only come into play where reality and the medium of representation do not coincide.”
Rudolf Arnheim이 말하듯이, "예술가의 창조력은, 현실과 재현 매체가 일치하지 않아서, 예술이 현실을 재현하지 못하고 청중을 환상 속에 빠뜨리는 곳에서만 작동한다".
<눈 앞에 현실이 있어도 눈뜬 장님인양 자신의 환상/망상을 견지하는 장한 중생들이 다수인 윤회의 세상에서 이런 헛소리를 하고 싶을까?>
*decry 공공연히 비난하다 **fantasmatic 환상의
이 글 자체는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아닌 환상을 만들어내는 힘이 예술의 본질이다"라고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으로 지극히 일관되어 있습니다.
질문자가 생각하는 그런 혼란과 모순은 질문자의 생각 속에서만 있습니다.
Go, go, go, said the bird: human kind
가라, 가라, 가라, 새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란
Cannot bear very much reality.
그렇게 많이 현실을 견뎌낼 순 없는 것이니.
Time past and time future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What might have been and what has been
있을 수 있었던 것과 있어왔던 것은
Point to one end, which is always present.
한 끝을 가리키고, 그 끝은 언제나 지금 여기 있다.
line 42~46 of "Burnt Norton," T.S. Eliot, Four Quartets
출처 https://cafe.naver.com/maljjang2/1269785